"어제 참여연대 후원의 밤 행사에서 시민사회의 반가운 분들을 만났는데, 마치 저는 유리벽 너머 세계에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어요. 제 자신에 대해 스스로 적응이 안되는 것 같기도 하고요."
8일 만난 박원순 변호사(희망제작소 상임이사)는 정치의 한 가운데로 뛰어든 자신의 모습이 여전히 어색하다고 표현했다. 산에서 내려온 뒤 자신을 둘러싸고 벌어진 변화가 예상보다 크다는 표현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왜 서울시장 선거에 나서게 됐는지, 서울시장이 되어서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그는 거침이 없었다. 희망제작소를 통해 오랜 시간 지방자치에 대한 연구와 활동을 해왔다는 자신감도 묻어났다. 인터뷰는 이날 오전 10시부터 1시간30분 동안 서울 태평로의 한 카페에서 진행됐다.
출마선언 안팎 "수염은 정말 시간이 없어 못깎았다"
-7일 안철수 서울대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불출마 선언 기자회견을 할 때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얼굴이어서 깜짝 놀랐다. 왜 면도를 안하셨나?
"당일 새벽에 서울 온 뒤 집에를 못들어갔다. 나도 깎고 가야한다고 생각했는데, 오자마자 사람들을 계속 만나느라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당시엔 보통 선거에 나서는 사람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이미지 메이킹' 그런 걸 생각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게 하고 등장했더니, 그야말로 전국에서 제발 '수염 깎으라'고 어마어마하게 요청이 왔다.(웃음) 물론 트위터 등에서는 '동네 치킨집 아저씨 같다'고 좋다는 사람도 일부 있었다."
-여러 매체의 여론조사 결과 3자 대결, 양자 대결 모두 압승하는 것으로 나왔다. 이런 여론조사 결과에 대해 어떻게 보시는가?
"산에서 내려온 지 며칠 안돼 이런 극적인 변화가 어떤 의미인지 충분히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다. 어쨌든 기본적으로는 안철수 교수의 결정이 효과가 컸다고 생각한다. 서로 출마 고민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일이 터졌고, 평소 서로 신뢰했던 사람들끼리 구태여 같이 나가서 경쟁하는 모습이 좋지 않다고 결정한 걸 높이 평가한 것 같다. 하지만 아직 선거 시작도 안됐는데 그 사이 얼마든지 큰 변화 있을 수 있어 방심하거나 자만하진 않는다. 한나라당 같은 거대 정당에서 이런 상황 묵과할리 없고 저쪽도 전략이 있을 것으로 본다. 다만 어떤 정당인도 아닌 안 교수와 저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큰 것을 보면 결국 우리 국민과 시민들이 새로운 정치와 새로운 시대에 대한 갈망이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왜 실천할 수 있는 공직으로 가지 않나" 의견 많이 들어
-그동안 시민운동 하시던 분이 왜 서울시장을 하려고 마음을 굳혔나?
"사실은 제가 이런 결심을 하게 된 게 참 꿈같기도 하다. 그동안 선거 때마다 출마에 대한 많은 요구와 압력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공직선거에 나서라는 요구였다. 그동안 응하지 않았던 이유는 제가 시민사회를 지키고 발전시켜 정부와 시민사회간에 균형된 협력관계, 또는 감시 시스템을 갖추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렇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들어 그런 균형이나 감시 시스템이 완전히 깨졌다. 정치가 퇴행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정부와 시민사회 사이의 거버넌스 시스템이 깨져버린 것이다.
특히 최근 5년 동안 희망제작소 일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지역 활성화와 주민자치를 통해 우리 사회를 바닥부터 바꿔볼까 고민했는데 현 정부 아래에서 그런 활동이 잘 안됐고, 방해도 받았다.
이명박 정부와 오세훈 서울시장의 소통부재와 독단 때문에 거버넌스의 목소리가 차단되고 굉장히 정치편향적이 됐다. 무상급식 문제만해도 얼마든지 야당과 시민사회와 논의해가며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는데, 이게 쓸데 없이 정치쟁점화 되면서 어마어마한 경비가 낭비되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결국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특별한 리더십이 아니라, 의회나 시민들의 목소리를 정직한 자세로 경청하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큰 틀의 구상도 있었겠지만, 개인적으로 좀 더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계기는 없었나?
=제가 강연을 많이 하는데, 강연에서 사회변화에 대한 아이디어를 이야기를 하면 '왜 그걸 실천할 수 있는 공직으로 가지 않느냐'는 질문을 수천번도 더 받았다. 또 '당신만 편하게 지내고 정치 파탄과 사람들의 절망에 대해 왜 몸을 던지지 않냐'는 문제제기도 많았다. 당장은 그런 질문을 외면했지만, 이번에 백두대간 종주를 하며 혼자 많은 생각을 했다. 제 인생의 변화가 불가피하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여러 사람들이 산으로 찾아와 이야기 했고, 마침 제 심경의 변화도 있던 시기와 겹쳐서 이런 결과가 나온 것 같다.
"삶속 아이디어들이 시정에 전달되는 채널 구축할 것"
-산 중간중간 블로그에 올린 글을 보면 '직업을 바꿀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제가 그동안 인권변호사, 참여연대 사무처장, 아름다운 재단, 아름다운 가게, 희망제작소 등 직업을 많이 바꿨다. 지금 일하는 희망제작소는 5년이 됐는데, 이 정부에서 힘들었지만 거의 재정적으로 자립됐고, 지차체와 협력관계도 상당히 구축됐다. 저는 몇 년만에 한 번씩 외국에 가는데, 그 이유 중에 하나는 제가 관여했던 조직이 저 없이도 돌아가는가에 대한 테스트의 성격도 있다. 최근 희망제작소 떠나겠다는 결심을 굳혔고, 주변에도 이야기했다. 그 다음엔 뭘할까 고민했는데, 저는 시민경제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경제라는 게 반드시 대기업이 아니라 협동조합이나 소기업 등 활성화하는 시민경제 모델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블로그에 정치를 해볼까 하는 이야기는 쓸 수 없었다.
-지난 지방선거 때도 서울시장 출마 제의 받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때 나갔으면 어땠을까?
"지금보다 훨씬 쉽게 됐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때도 압력이 굉장했다. 휴가지까지 사람들이 찾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땐 결심을 못했다."
-서울시민들한테, '시장이 되면 이런 일을 하겠다'는 큰 틀의 윤곽이 잡혀있는가?
"구체적 공약이나 시정 개혁 방향 등은 이미 희망제작소를 통해 해왔던 일들이 있다. 시장학교와 자치단체장들이 참여하는 목민관 클럽을 꾸려 학습한 것들도 있다. 하지만 저는 공약이나 구호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공약은 구호에 그친 적이 많았다. 공약들을 나열하기 보다는 시민들이 각자의 삶 속에서 갖고 있는 아이디어들이 있는데, 이런 생각들이 시정에 잘 전달될 수 있는 시스템과 채널을 구축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기본적으로 야권 통합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
-이명박 정부와 오세훈 시장의 서울시를 평가한다면?
"우리 사회가 20세기 시스템에서 21세기 시스템으로 전환돼야 하는데, 두 분은 토건경제와 하드웨어 중심의 20세기에 머물렀다. 토건에 지나치게 집중하고 외형적이고 전시적인 부분에 집중했다. 그러니까 부채문제가 심각해졌다. 고건 시장 때 8조원이던 부채가 이명박 시장 때 13조원, 오세훈 시장 때 25조5천억원으로 늘었다. 서울시 재정 구체적 들여다본 적은 없지만 재정 건정성이 깨진 것이다. 이런 현상은 전국이 마찬가지이다.
서울시는 대한민국 수도이자 작은 공화국인데, 서울시를 개혁하고 작은 변화를 만들면 다른 지역에 파급효과가 크다. 서울시의 여러 공기업과 시설공단의 방만함에 대해서도 많은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핵심은 패러다임의 변화다. 창조적 혁신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소프트웨워와 사람의 리더십이 중요하다. 청계천이나 한강르네상스, 디자인 서울 등 보여주기가 중요한 게 아니다.
-시민후보를 지향하는가 범야권 단일후보를 지향하는가?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충분히 상의할 것이고, 또 우리 생각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고 본다. 저는 기본적으로 야권통합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될 수만 있다면 범야권 단일후보 위상을 갖는 게 너무 중요하다. 하지만 동시에 저는 일반 정치인이었던 것도 아니고 정당인도 아니었다. 안 교수와 합의과정을 통해 많은 시민들이 기성 정치적 질서에 대한 혁신을 요구하고 있다는 게 확인됐다. 시민후보로서 그런 것들도 반영할 수 있는 염원을 담아내는 것도 놓치기 어렵다. 두 가지를 함께 가져가는 방안을 고민 중이다."
-기성 정당이 아닌 무소속으로 선거를 치르면 큰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는데?
"저는 기본적으로 우리 정당체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정당은 헌법적 지위를 갖는다. 하지만 안철수 신드롬 등을 통해 확인된 변화 욕구를 보면, 그런 정당질서에 위기가 왔음을 알 수 있다. 기존 여의도 정치의 식상함과 너무나 정쟁적인 모습과, 갈등 해소의 해소가 아니라 진원지인 것에 대한 절망이다. 저는 지금 진행되고 있는 야권 통합정당 논의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국민적 기대를 반영한 정당이 탄생하면 못 들어갈 이유가 없다.
설사 그런 정당이 못 만들어져도 저는 늘 차선이라는 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야권의 맏형격인 민주당이라든지, 또는 당세는 그렇지 못하더라도 상당한 중요성 갖고 있는 다른 야권정당이라도 얼마든지 함께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저는 정당에 대한 부정적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
"아들딸 자원봉사요원으로 보내주신다는 분들도…선거법에 걸려"
-선거비용은 어떻게 마련할 생각인가?
"굉장히 중요한 문제인데, 연구하고 있다. 제가 돈이 없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저는 선거비용은 가능한 줄이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다. 출마 소식 알려지면서 주변에서 뭔가 돕고 싶다거나, 심지어 너무 좋은 공간의 상당 평수를 사무실로 내놓겠다거나 자기 아들딸을 자원봉사요원으로 보내주시겠다고 한 분들도 계셨다. 하지만 선거법을 보니 그게 안되더라. 이런 선거법은 참 문제라고 본다. 선거가 자발적 참여와 축제 분위기로 돼야 한다.
어쩔 수 없이 돈을 써야 하는 상황인데, 허용 범위 안에서 모금과 후원회를 할 것이고, 또 하나는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가 경기도지사 선거를 치르면서 만든 펀드가 있는데, 이는 차원이 다른 것이더라. 나중에 갚는 것이긴 하지만 개인 한도를 정해서 펀드를 만들어 빌리면 제가 필요한 정도의 경비는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선거 과정 자체도 다른 정치인들과 다른 경로로, 시민들의 참여로 이뤄질 수 있는 방안이 뭘까 고민 중이다."
-다른 진보정당과 접촉이나 앞으로 만날 일정이 있나?
"평소 아는 분들이기도 하고, 이런 상황을 상의도 드릴 겸 어제 고 이소선 여사 노제 때 심상정, 노회찬 두 분은 만났다. 다른 분들도 연락이 되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와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는 당내 사정도 있고 그 분들에게 누가 될 우려가 있다. 그런 것들 때문에 그분들도 일부러 안만나시기는 것 같다."
-선거가 시작되면 철저한 검증이 시작될 텐데 자신이 있나?
"자신있는 사람이 어디있겠나. 하지만 서울시장 선거라면 당연히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 각오하고 있다. 다만 왜곡이라든지, 벌써 트위터 등엔 '안철수 효과'를 깎아내리려는 말들이 돌기도 하더라. 언론의 공정한 검증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안철수 교수와 주고받은 이메일 내용은…"
-산에서 안철수 교수와 주고받은 이메일은 어떤 내용이었나. 양보하라는 내용이라는 말도 떠돈다.
"사실 저도 어려운 결심을 했는데, 바로 그 다음날 안 교수 출마 검토 소식이 들리더라. 안 교수가 상당히 많은 준비를 했고, 함께한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았고. 그래서 적어도 상의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안교수와는 이메일을 오랫동안 주고받은 사이였고, 내가 주로 부탁하는 입장이었다.(웃음) 산을 타다가 며칠에 한 번씩 마을에 내려와 스마트폰으로 메일을 썼는데, 메일은 '난 정말 몰랐다. 그런 생각이 있으면 사전에 얼마든지 조율할 수 있었을텐데, 나는 의외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서로 경쟁하는 모습이 어떻게 비칠지 좀 걱정이 되고,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 우리가 이야기 나눠보는 게 좋지 않겠는가.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서로 신뢰와 존경의 관계는 무너지지 않도록 하자'는 내용이었다.
안 교수는 담백하고 간결한 사람인데, 제가 너댓줄을 (이메일로) 보냈더니 '동의한다. 어디서 뵐까'라고 답이 왔다. 그래서 장소 정하려고 몇 번 더 주고받고 했다. 그게 전부다."
-안 교수 만날 때 어떤 생각으로 나가셨나?
"사실, 안교수 만날 때 (안 교수가 양보할) 가능성은 반반 정도라고 생각했다. 만나는 자리에 나갔더니 박경철 원장이 배석을 했다. 그 분들 함께 오랫동안 고민해왔으니 개인적으로는 '아, 힘들 수도 있겠구나. 두 사람만의 진심을 털어놓고 이야기하는 분위기가 아닐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안 교수가 '정말 결심하셨습니까' 묻길래 내 생각을 쭉 설명드렸다. 그러고 몇 마디 더 오가다가 그냥 '제가 물러나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하더라. 아무런 군더더기 없이 이야기가 끝났다. 정말 깜짝 놀랐다. 안 교수가 양보를 통해 뭘 가져가려고 했으면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했을 텐데, 뭘 가져가려고 양보한 게 아니니 상당히 많은 것을 얻으신 것 같다. 저는 개인적으로 안 교수에게 부채감이 생기기도 하고 평생 갈 신뢰가 생기기도 했다."
-곽노현 교육감 문제는 어떻게 보시나?
"사건 내용은 잘 모르겠다. 다만 도주와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는 현직 교육감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한 것을 보니 검찰의 오버라고 생각된다."
석진환 기자 soufl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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