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9-06

[한겨레21 기사돌려보기]“경제민주화는 야권 연대의 플랫폼”

HOME > 뉴스 > 경제 > 경제일반
"경제민주화는 야권 연대의 플랫폼" [2011.09.01. 제876호]
곽정수
[vs] 민주당 경제민주화특위 유종일 위원장…2012년 선거 핵심 의제는 재벌 위주의 경제구조 개선과 보편적 복지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국민에게 다시 희망을 주고 선택을 받으려면 '보편적 복지'와 '경제민주화'의 양 날개로 날아야 한다."

지난 7월 민주당의 경제민주화특별위원회(이하 특위) 위원장으로 선임된 유종일(53)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8월23일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경제민주화의 요체는 바로 재벌 개혁"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또 "김대중 정부에서 '용두사미'로 끝나고, 노무현 정부가 '하이재킹'(공중납치)하고, 이명박 정부가 실종시킨 재벌 개혁을 이번에는 꼭 이루어야 한다"며 "이제는 재벌 개혁의 기운이 무르익었다"고 강조했다.

개혁 대신 미봉을 선택한 참여정부

» 유종일 위원장. 한겨레21 김경호
내년 선거에서 보편적 복지와 경제민주화는 민주당의 핵심 어젠다로 꼽힌다. 유 교수는 민주당 핵심 공약의 양대 축의 하나인 경제민주화 정책의 설계책임자인 셈이다. 그는 "국민으로서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간 기대를 했는데 양극화가 심화됐고, 다시 이명박 정부로 바꿨는데 더욱 악화되자, 이놈도 못 믿고 저놈도 못 믿는 형국"이라며 "민주당이 올바른 비전과 정책을 진정성 있게 추진해 믿음을 줘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특위는 연말까지 경제민주화 정책과 대안을 담은 보고서를 발간할 계획이다. 특위에는 유 위원장과 함께 김진방 인하대 교수, 신광영 중앙대 교수, 이동걸 전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 홍종학 경원대 교수 등 개혁 성향 학자들이 참여하고 있다.

재벌 개혁을 주창해온 대표적 진보경제학자인 유 교수는 2002년 대선 때 노무현 후보의 '경제교사'로 불리며 경제정책과 공약을 책임졌다. 2006년부터 3년간 문화방송 라디오 <손에 잡히는 경제>를 진행하고, <한겨레> 등의 칼럼니스트로 활약해 국민에게 낯익은 편이다. 내년 총선에서 서울이나 고향인 전북 출마설이 나오는 것에 대해 "자리를 생각한 적은 없지만, 직접 (현실정치에) 뛰어들어가 대한민국의 미래 비전을 실현하는 데 기여하고 싶은 생각도 있다"고 여지를 뒀다.

2002년 대선 때 노무현 후보의 경제정책과 공약을 책임진 지 10년 만에 다시 민주당의 '재벌 개혁 설계자'로 복귀했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은데.
=노 후보가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에서 승리한 날 밤(11월25일) 서울 여의도에서 선거캠프 내 주요 인사들 30여 명이 자축연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무엇 때문에 노무현을 위해 헌신하는지 돌아가며 한마디씩 했는데, 나는 "재벌 개혁을 위해서"라고 말했다. 김대중 정부의 재벌 개혁은 처음에는 국제통화기금(IMF) 구조조정과 맞물려 어느 정도 성과를 냈으나, 2000년 후반기부터 경제회복과 일자리 창출을 재벌에 의존하다가 실패했다. 재벌 개혁 없이는 한국 경제가 발전하는 데 한계가 있다.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양극화가 심화되고, 국민의 혁신적 에너지를 분출할 수 있는 신나는 경제를 만들기도 어렵다. 노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재벌 개혁을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노무현 정부에 참여할 수 없었다. 참여했더라도 재벌 개혁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재벌 개혁에 성공한 첫 대통령이 되겠다"며 강한 의지를 천명했는데….
=김대중 정부의 재벌 개혁이 용두사미로 끝났다면, 노무현 정부는 재벌 개혁을 아예 하지도 않았다. 재벌 개혁의 어젠다가 하이재킹을 당했다고나 할까? 개혁의 어젠다가 있고 로드맵도 만들었는데, 추진하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할 때 모 재벌의 싱크탱크가 정권 운용의 밑그림까지 그려주었을 정도니 말 다한 것이지….

적하효과 실종된 재벌체제 개선해야

참여정부의 재벌 개혁이 한계를 보인 원인은.
=정책을 집행하는 사람이 중요하다. 노무현 정권 출범 초기 SK 분식회계 사태, 카드 사태가 터져 개혁을 할지 말지의 시금석이 됐다. 결국 발등에 떨어진 위기관리를 위해 관료들에게 의존하며 개혁 대신 미봉을 선택했다. 당시 청와대에 가서 대통령에게 개혁과 분배가 시급하다고 간곡히 말했다. 하지만 결과는 2003년 8월 광복절 경축사에서 '국민소득 2만달러 달성'이라는 구태의연한 성장 목표 제시였다. 또 하나 참여정부 경제정책에 대한 재벌, 특히 삼성의 영향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경제정책이 삼성의 영향으로 대선 공약과는 달리 개혁과 분배보다 안정과 성장 쪽으로 방향이 틀어졌다. 노 대통령은 후보 시절 유세를 다니며 삼성경제연구소가 발간한 정책자료집을 지인들에게 읽어보라고 권하고, 정부 출범 직전에도 이 연구소로부터 '국정과제와 국가운영에 대한 어젠더'란 제목의 방대한 보고서를 받았다. 노 대통령이 주창한 동북아 경제 중심 국가론이나 국민소득 2만달러 달성은 이 연구소가 먼저 던진 화두였다.

» 유종일 위원장. 한겨레21 김경호

참여정부 초대 기획예산처 장관(지금은 기획재정부로 통합) 기용설이 있었는데, 결과는 철저한 배제였다. 이것도 재벌 개혁 실패와 관련 있는가.=대선 기간 중 에피소드가 있다. 노 후보가 여러 사람들과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나에게 고맙다며 집권하면 국가예산을 내 마음대로 짤 수 있게 하겠다는 얘기를 했다. 이게 발단이 된 것이다.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 다음날인 2002년 12월20일 오찬 겸 선대위 해단식을 가졌을 때도, 노 당선자는 나에게 정치는 내가 할 테니 당신은 정책을 맡으라고 당부했다. 그런데 그 직후부터 당선자와의 사이에 장벽이 쳐지고, 나를 격리시키는 세력이 있었다.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재벌 개혁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국민이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를 지지한 이유는 개혁도 좋지만 먹고살기 어려우니 무조건 바꿔보자는 것이었다. 노무현을 지지한 저소득층·중소기업·자영업자까지 이명박 지지로 돌아섰다. 민주당 일부에서는 이를 계급 배반 투표라고 비난하는데, 그런 인식으로는 재집권을 할 수 없다. 야당은 반성부터 해야 한다. 국민에게 희망을 주고 선택을 받으려면 복지 확대만으로는 안 된다. 사회 양극화 심화를 낳는 구조를 근본적으로 고쳐야 한다. 그 요체는 재벌 개혁, 경제민주화다. 재벌들은 계열사 확충, 골목상권과 서비스시장 장악, 일감 몰아주기 등을 통해 엄청난 이득을 얻고 있지만, 중소기업은 어려움이 지속되고 있다. (재벌이 잘되면 중소기업과 서민들에게도 떡고물이 떨어진다는) 적하효과도 실종됐다.

국민이 재벌을 대하는 시각은 이중적이다. 재벌의 탐욕 때문에 양극화가 심화돼 당장은 개혁에 공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형편이 나아지면 개혁 의지가 시들어버린다.
=재벌 개혁은 재벌을 죽이거나 해체하자는 게 아니다. 재벌체제의 잘못된 부분을 개선하자는 것이다.

MB 정부 친재벌 정책 실패 시인한 셈

요즘 들어 한나라당도 복지 확대와 재벌 개혁을 얘기하고 있는데.
=한나라당 수도권 의원들의 위기의식이 반영된 것이다. 말로는 국민이 원하는 것이 다 나와 있다. 국민 모두가 자유롭고 풍요롭게 살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이를 누가 더 실력 있게 잘할 것이냐가 관건이다. 지나간 역사만 보면 민주당이나 한나라당 모두 국민에게 믿음을 주기에 부족하다. 그래서 민주당이 경제민주화 특위를 만들고 비상한 각오로 임하는 것이다. 내가 그동안 민주당의 정책과 기득권에 안주하는 자세를 비판했음에도, 내년 선거에서 가장 핵심적인 과제를 맡긴 걸 보면 의지가 읽히지 않는가?

재벌의 일감 몰아주기에 대한 과세, 4대 보험 사각지대 해소,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 강화 등이 모두 정부·여당에서 낸 아이디어다.
=민주당이 더 분발해야 한다. 특위도 열심히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하지만 한나라당이 복지국가와 재벌 개혁을 얘기하는 것은 선거를 앞두고 표를 얻기 위한 것이다. 선거가 끝나면 바로 과거로 회귀할 것이다. 재벌 중심 성장지상주의의 종식은 정권 교체가 이뤄지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이번에 재벌 개혁 기회를 다시 놓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파출소를 피하려다 경찰서 만난다는 말이 있는데, 경찰서를 피하려다 안기부 만나는 꼴이 될 것이다. 양치기 소년처럼 불행한 결과를 낳을 것이다. 국민이 정치를 통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지난해 지방선거와 올해 재·보궐 선거에서 나타났는데, 이번 기회를 놓치면 냉소주의가 만연할 것이다,

최근 영국 폭동의 배경으로 사회 양극화 심화 현상이 꼽힌다. 우리도 안심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오는데.
=남의 나라 일이 아니다. 최근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해체 주장이 제기됐지만, 사회 지도층인 재계 지도자들이 책임감보다는 더 많은 이익을 챙기는 데 급급하다. 이러다간 사회가 갈가리 찢어질 수 있다. 궁극적으로 경제성장도 안 될 것이다.

친재벌 정책을 천명한 이명박 정부가 2009년 이후 친서민, 공정사회, 동반성장, 새로운 시장경제와 공생발전을 내세우고 있다. 재벌 개혁 관점에서 어떻게 평가하는가.
=이명박 정부는 친기업이라는 미명 아래 친재벌 정책을 고수했다. 재벌을 지원해 투자가 늘고 성장률이 높아지면 고용도 늘고 서민경제가 좋아진다는 재벌에 의존한 성장 전략이었다. 그 결과는 전혀 반대였다. 정치적으로 감당이 안 되니까 '상생' '공정사회' '공생발전'을 제시하고 나섰다. '내가 잘못했구나' 시인한 셈이다.

내년 선거와 재벌 개혁을 연계하는 민주당의 전략은.
=경제민주화와 보편적 복지의 양날개를 펴는 것이다. 재벌 개혁을 통한 경제민주화는 민주당의 정체성과 대국민 메시지 측면에서 중요하다. 야권 연대나 통합에도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선거를 앞두고 여야 대선 후보를 1대1 구도로 만들고 보자는 선거공학적 접근은 바람직하지 않다. 먼저 야권이 힘을 합치기 위한 '합의의 플랫폼'을 만들어야 한다.

민주당이 집권하더라도 재벌에 다시 손을 내밀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복안은 무엇인가.
=그럴 위험성이 있다는 데 100% 동의한다. 최근 손학규 민주당 대표에게 고언을 했다. 첫째, 국민이 민주당을 신뢰하게 만들려면, 좋은 정책의 개발과 함께 능력 있는 사람들을 대거 영입해야 한다. 둘째, 2012년 총선에서 그런 사람들이 당선되도록 해야 한다. 현재의 인물들로는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없다. 야권 단일화만 외칠 것이 아니라 국민의 믿음을 얻도록 노력해야 한다.

재벌의 과도한 영향력 제동 걸어야

재벌 개혁 과제 중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경제력 집중을 개선해야 한다. 그동안은 재벌의 지배구조 개선만 강조했다. 경제력 집중 문제는 재벌이 성장하는 데 뒷다리를 잡으면 안 된다는 이유로 도외시됐다. 공정거래위원회에서도 이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 경제력 집중으로 인해 양극화가 심화되고, 재벌이 사회 전반에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민주주의·법치주의까지 위협하고 있다. 이제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대안을 마련할 때가 됐다.

9월 정기국회에서 재벌 개혁 관련 입법 전략은.
=일감 몰아주기에 대한 과세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 중소기업 적합업종 선정도 지금처럼 민간 합의에만 맡겨놓을 일이 아니다. 불공정 하도급거래 개선과 관련해 현재 기술 탈취로 국한된 징벌적 손해배상제 적용 대상을 더 확대하고, 중소기업 단체에 납품단가 조정 협상권을 부여해야 한다.

재벌의 과도한 영향력에 대한 규제 대책도 마련되나.
=그렇다. 예를 들어 재벌은 최대 광고주로서 언론에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는 담론시장 장악과 정치적 영향력으로 이어진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강구 중이다.

할 일이 참으로 많다. 현재 민주당의 준비 정도는.
=30% 정도 될까? 그래서 모두 휴가까지 반납한 채 열심히 하고 있다.

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


ⓒ 한겨레21 (http://h21.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