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7-30
영원한 아이콘 안철수, ‘오늘’에 열중하며 마이웨이를 가는 ‘쿨한 베짱이 ’- 헤럴드경제 정태일, 안훈- 2011-07-28 10:22
안철수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원장(49). 그는 지난 23년 간 매스컴을 오르내리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한 명이 됐다. 의사, CEO, 교수 등 남들은 일생에 한 번 이루기 힘든 직함을 반세기 동안 모두 달았다.
게다가 그를 가리키는 수식어도 한둘이 아니다. 청소년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영입하고 싶은 CEO, 가장 건전한 경영자, 차세대 경제부문 리더, 떠오르는 스타교수 등등.
이처럼 다양한 직함과 타이틀에서 보듯, 안 원장은 그 누구보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왔다. 그래서 일까. 늘 대중의 이목을 신경쓰고, 또 가끔은 무거운 타이틀을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 법 했다. 하지만 대답은 예상과는 정반대였다.
"매스컴에 대한 부담은 전혀 없어요. 남들에게 어떻게 보여질까 신경 쓰면서 꾸미고 살았다면 23년간 관계했던 매스컴을 견뎌내지 못했겠죠. 사람들이 굴곡 없는 삶이다 그러는데, 꾸미지 않고 진심으로 살았기 때문에 나름 일관되게 보이지 않았을까요."
선한 인상에 겸손한 말투였지만 눈빛에는 '분명함'이 담겨 있었다. 주변 시선보다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을 따른다는 점에서 '쿨함'도 느껴졌다. 그러다가도 다시 천진한 웃음을 지으며 안 원장이 한 마디 던졌다. "참, 눈치 볼 때가 있기는 있네요. 대형마트에 장보러 갈 때요. 1+1상품은 인터넷으로는 살 수 없으니까요. 하하하"
▶도전? 목표? 계획? 나와는 거리가 먼 말들= "제 인생에서 무언가를 이루려고 아등바등 노력했던 기억은 전혀 없어요. 다만 하루 주어진 24시간을 내가 하고 싶은 일, 열정 갖고 할 수 있는 일 열심히 하면서 살았던 기억만 있네요."
뜻밖이었다. 치밀하고 꼼꼼하게 인생을 설계해 온 모범생 이미지에서 예상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의사, CEO, 교수 모두 목표를 정하고 도전하지 않고는 이루기 힘든 직업인데 안 원장에겐 이 두 가지가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안 원장은 밖에서는 자신이 도전하는 사람으로 비춰지지만 그런 타입은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도전을 하지 않기 때문에 목표지향적인 타입도 아니다. 오히려 목표 자체를 정하지 않는다. "뭔가를 이루려고 계획하기 보다는 매순간 열심히 살다보니 기대하지 않았던 기회들이 성큼 다가왔다고 할까요. 현재를 열심히 즐기다 보니 미래가 오던 걸요."
하지만 안 원장의 인생이 처음부터 물 흘러가듯 순조롭지는 못했다. 착실히 의학도의 길을 걷다가 갑자기 창업의 길로 들어선 것도 자신이 더 하고 싶은 일을 하자는 선택이었지만 이 역시 목표한 바는 아니었다. 안 원장은 "미래 전망은 아예 보지도 않고 무작정 회사를 차렸다"고 말했다. 창업 당시 역시 컴퓨터 바이러스야 말로 가장 보람을 느끼고 재미 있게 열정 갖고 계속 할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비즈니스의 세계는 냉혹했다. 창업 초기인 1995~1999년은 안 원장 인생 가운데 가장 힘든 시기 중 하나였다. 그에게 가장 큰 일은 매달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는 것이었다. 매달 초가 되면 행여 월급을 못 줄까봐 불안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매출이 변변치 않은 달에는 돈을 구하러 은행을 돌며 어음깡을 하기도 했다.
"처음엔 어음깡이라는 게 기업에 따라 객관적 평가가 적용되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담당 직원 마음대로 고무줄 평가를 받더라고요. 누구한테 잘보이려는 건 정말 곤욕이었죠."
하지만 안 원장을 더욱 괴롭히는 건 본인 스스로 남들과 비교하는 것이었다. 사업한 지 3년이 지난 1998년 사무실은 남부터미널 부근에 있었는데, 안 원장은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후에도 매일 밤 계산기를 두드려야 했다. 그날 번 돈과 쓴 돈 등 10원짜리 하나하나 세면서 하루를 보냈다. 순간 울컥했다.
"여기서 내가 뭐하고 있는 지 서글퍼지더라고요. 동기동창들은 의사나 교수하면서 잘 살고 있는데... 나는 그때 배운 거 다 버리고 그러고 있었으니…"
▶바닥에서 정립한 마이웨이 철학 '절대 남들과 비교하지 않기'=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안 원장은 평생 자신을 바로 세워줄 버팀목 같은 철학을 만들었다. 바로 "절대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할수록 제 자신만 힘들어지더라고요. 남들이 다 위만 보고 갈 때 나라도 가끔 아래를 내려다보자고 생각했죠."
안 원장은 이를 산을 오르는 것에 비교했다. "정상만 바라보면 구름이 가리기도 해서 불안해 지는데, 뒤돌아보면 없는 가운데 이 만큼 왔구나 하고 안심이 되잖아요. 결국 원대한 목표가 사람을 지치게 하더라고요."
이런 생각에 안 원장은 목표를 크게 세우고 이를 실천하려 허덕이기 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 일주일, 한달이란 시간을 값지게 쓰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남부터미널 작은 사무실 안에 갇혀 장부 계산하느라 하루를 다 보내는 자신을 애타게 여기던 그 자신을 밖으로 꺼낼 수 있었다.
안 원장은 걷기를 통해 정신을 가다듬기도 했다. "너무 안 풀리면 정처 없이 걸어다녔어요. 서초동 소나무사거리에서 출발해 테헤란로 지나 삼성역까지 걸으면 2시간 반이 걸리죠. 모르고 지갑 두고 나간 날은 다시 걸어서 돌아와야 해서 왕복 5시간 가까이 걸었던 기억이 있네요."
흔히 걷는 것은 운동이 아니라 정신수양이는 말이 있다. 안 원장은 강남 도심 일대를 5시간 가까이 걸으면서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해준 마이웨이 철학을 정립했다.
안 원장의 마이웨이는 훗날 안철수연구소가 비즈니스모델을 구축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처음 백신을 개발하면 신제품 값을 받는 대신 새로운 버전에 대해 유지, 보수 비용을 받기로 했다. 백신 특성 상 신제품을 만드는 것보다 이를 안전하게 관리하는 비용이 더 많이 들기 때문이다. 업계에선 처음 도입된 계약방식을 거부했다. 연구소 영업담당 임원도 실적이 안 나오자 안 원장에게 포기하자고 청했다.
"당시 유혹도 매우 컸어요. 수익이 안 나왔으니. 그래도 조금만 더 버티기로 했죠. 마침내 법률까지 바뀔 정도로 지금은 그 계약방식이 상식이 됐죠. 눈앞의 돈만 좇다 단기 계약에 의존했으면 지금의 500억 매출은 꿈도 못 꿨을 겁니다."
안 원장의 이런 철학은 자녀 교육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현재 안 원장의 딸은 미국에서 수학과 화학을 복수전공하고 있다. 모두 자신이 원해서 시작한 길이다. 딸에게 진로에 대해 아버지로서 훈수를 둔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한다.
"본인 인생인데 본인이 원하는 것을 해야죠. 내가 하도 이래라 저래라 말이 없으니까 오히려 우리딸이 나한테 물어볼 정도 입니다."
또 마이웨이 철학은 23년간 매스컴에서 한결 같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잘 나가는 사람들 보면 외부평가가 진짜 자기 실력인 줄 아는 경우가 간혹 있어요. 그런데 나중에 자기 본 실력 알고 나면 많이 괴로워 하죠. 외부평가는 롤러코스터 같아요. 몇 번 올라가는가 싶더니 바로 고꾸라지기 일쑤죠. 그래서 저는 외부평가 연연하지 않고, 평가가 아무리 나빠도 내 본 실력만 믿고 살아 왔습니다."
▶워커홀릭? 나는 휴먼홀릭!= 안 원장은 아직 여름 휴가를 떠나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남들 다 1년 중 한 번 달콤한 휴식을 꿈꾸며 국내외 여행을 계획하지만 그는 그런 경험이 전혀 없다. 올해 역시 서울대로 둥지를 새로 틀었기 때문에 여름휴가 떠날 여유가 없다고 한다. 그는 이처럼 평생 일과 공부에 묻혀 살았다.
"연구소 차리고 나서는 정신 없이 일만 했어요. 교수되고 나서는 방학이 있었지만 초보 교수가 어디 놀러갈 수 있나요. 학회 등 공무 상으로 해외에 가본 적은 있지만 LA, 런던, 파리 등 사람들이 많이 가는 관광지는 아직 못가봤네요."
이쯤 되면 워커홀릭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짧은 순간 조차도 현실을 떠나 머리를 식히기 보다는 철저히 현실과 마주하며 살아 왔다.
하지만 안 원장이 진정으로 열중했던 것은 결국 일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의대생 시절 우연히 들어간 카톨릭학생회를 통해 진료봉사를 하면서 책에서만 읽었던 휴머니즘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로 한계를 느꼈던 시절이었지만, 안 원장은 사람들을 만나며 더불어 사는 세상에 대해 더 큰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이는 안 원장이 연구소를 차리고 회사가 자리를 잡은 다음에도 계속 이어졌다. "초기엔 힘들었지만 10년 정도 지나니까 안 연구소는 벤처기업 중에서도 매우 큰 기업이 됐죠. 하지만 안 연구소는 잘 먹고 잘 사는데 주변 벤처기업은 여전히 어려웠어요. 청년 일자리는 점점 줄고, 도전의식도 약해졌죠."
"사람들이 그런 문제의식 왜 갖고 사냐고 하지만, 혼자서만 잘 살수는 없으니까요. 우리집 아이라 행복하려면 옆집 아이가 행복해야 하니까요."
결국 안 원장은 CEO 혼자 힘만으로는 벅차다는 것을 느꼈고, 보다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학계의 길을 택했다. 2008년 미국 와튼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를 받은 뒤 KAIST 석좌교수를 거쳐 현재는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안 원장에게 교수라는 직업은 가르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는 교육이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그런 일을 한다는 데 대해 무한한 책임감을 느낀다.
"한국 사회에서 교수는 아직까지 정책 당국자들이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는 집단입니다. 여러 조언들을 해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개개인의 생각을 바꿀 수 있다는 겁니다. 20대를 대상으로 기업가정신을 가르치거나, 카이스트에서 6학기 동안 학생들 가르치면서 실제 사람들 생각이 바뀌는 것을 경험했어요. 사장 했었으면 못 느꼈을 것들이죠."
최근 흘러나오는 정치권 영입설에 대해서도 안 원장은 교수가 매우 중요한 위치라며 에둘러 부인했다. "정치라는 게 혼자서는 결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것인데 나와 같은 생각 갖고 있는 사람 만나는 거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교수는 작은 부분이지만 혼자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게 있더라고요."
그렇다고 같은 생각의 사람을 한 명도 만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안 원장이 신념과 가치관이 같다고 자신 있게 말한 사람은 바로 그의 부인, 김미경 교수(카이스트 기술경영전문대학원)다.
"카톨릭학생회 봉사활동 가서 만났는데 돈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저랑 같았어요. 또 아이는 자기가 하고 싶은 거 무조건 시키자는 교육관도 같았어요. 특히 돈 더 많이 벌고, 더 안정적인 거 따지기 보다는 좋아하는 일에 많은 시간 투자하는 직업관도 똑같았죠."
▶약속된 미래보다 더 중요한 건 '지금', 나의 최대 자산은 '사람'= 인터뷰를 통해 엿볼 수 있었던 안 원장의 라이프스타일은 '내일보다는 오늘을 위해 살자'였다. 안정된 미래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생기면 오로지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다. 즉 그는 일하는 데 있어서 미래를 위해 오늘을 투자하는 개미가 아니라 하루를 최대한 보람 있게 보내는 베짱이에 가까웠다.
안정을 추구하지 않는 그의 라이프스타일은 지난 삶의 행보에 그대로 뭍어 있다. 엘리트 코스인 의사를 훌쩍 그만두고 야심차게 차린 회사를 차렸지만 자기발로 CEO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의대를 들어갈 때, 창업할 때 모두 안 원장 스스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유학 후 카이스트 교수로 임명됐을 때 임용장에는 2008~2027년이라고 적혀 있었다. 만65세까지 정년을 보장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그는 다시 3년 만에 안정된 자리를 뒤로 하고 서울대로 옮겨 왔다. 서울대 역시 그에게 2027년까지 정년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했다.
하지만 안 원장은 2027년까지 서울대에서 교수를 할지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장기 계획이란 걸 세워 본 적이 없으니까요. 내 평생 한번도 안정, 보장이란 말이 나를 붙잡은 적은 없어요. 선택의 순간에서 모든 걸 고려했지만 이 둘은 항상 빠져 있었죠. 처음엔 의사만 할줄 알았는데 지나칠 정도로 열심히 살다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결국 안 원장은 목표를 정하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천하는 시간까지 아깝다고 생각했다. 오로지 그 시간마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데 투자하며 자신에게 다가올 미래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기다렸던 셈이다.
다만 그가 선택의 기로에 놓일 때마다 명확한 한 가지 기준은 있었다. "결정은 혼자 오래 고민해서 내리는 편입니다. 대신 기준은 늘 같았어요. 나에게 더 의미 있고, 내가 계속 열정 갖고 할 수 있고,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의 판단 기준에는 늘 사람이 제일 위에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소중해지는 것 역시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존경하는 인물을 꼽아달라니 기다렸다는 듯이 술술 나왔다.
"낳아주신 부모님은 물론 전기생리학 전공 시 존경했던 교수들은 모두 노벨의학상을 받았어요. 90년 중반 전설적인 프로그래머들에 열광했고, 회사를 차리고 나선 앤디 그로브(인텔 창업자)처럼 성공한 엔지니어 출신 CEO가 되고 싶었죠. 와튼스쿨 다닐 때 레오나드 M. 로디시 교수로 부터 배운 교수법 덕분에 카이스트에서 비교적 빨리 자리잡았어요."
안 원장은 직업이 바뀔 때마다 롤 모델도 매번 바뀐다고 했다. 덕분에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알찬 지식을 배웠다. 이는 지금도 다르지 않다. "요즘처럼 여러 분야의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는 게 중요할 때가 없어요. 20~30대는 혼자 실력으로도 일하지만 40대부터는 인간관계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죠. 나이 들어서 친구 사귀기 힘들다고 하는데 다 옛말 같습니다"
그는 낯을 가리는 성격으로 알려졌지만 친화력보다 더 큰 무기가 있다고 소개했다. "친화력은 처음에 쉽게 하는 데만 도움이 되지 진정한 관계 유지하는 것은 가치관 등 동질감을 형성하는 거 같아요. 안 연구소 16년 됐는데 지금도 장기근속자는 50명이 넘어요. 친구로 따지면 평생 친구인 거죠."
전남 F1 돈먹는 하마? 감사원, 7년간 4855억원 손실 예상… 수익 ‘뻥튀기’ 논란- 서울신문 최치봉 기자, 2011-07-30, 10면.
전체 운영손실액은 4855억원에 이를 것으로 나타났다. 이 정도면 전체 도 지방재정 악화까지도 우려된다. F1대회 입장료 1695억원과 일반대회 수익금 892억원 등 총매출액은 4245억원에 그친 반면 개최권료와 TV중계권료, 인건비 등 매출원가는 6268억원에 달해 2023억원의 적자 발생이 예상된다. 여기에 마케팅 등 일반관리비 2130억원과 금융비용 702억원도 추가 부담해야 할 판이다. 연도별로 적자규모를 풀어보면, 지난해 첫 대회 962억원을 비롯해 올해 723억원, 2012년 673억원, 2013년 585억원, 2014년 606억원, 2015년 635억원, 2016년 671억원 등이다.29일 감사원이 발표한 ‘지방자치단체 국제행사 유치 및 예산집행 실태’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전남도가 당초 예정대로 2016년까지 7년간 F1 대회를 치를 경우 재정부담액이 1조 1169억원에 이르게 된다. 이는 “2000억원만 부담하면 될 것”이라던 전남도의 입장과 6배 가까이 차이가 나는 것이다. 감사원은 도가 민간사업자의 재원조달 능력을 검증하지도 않은 채 경주장을 건설하는 등 무리하게 F1대회를 추진한 탓에 빚어진 것으로 분석했다. 당초 개최권료와 개최권료 납입보증, 부지확보 등으로 2063억원만 부담하면 될 것으로 예상됐던 것이 추가공사비와 지방채 이자, 시공사 주식매수부담금, PF대출금 이자 등의 각종 부대 비용을 떠안게 됐다는 게 감사원의 판단이다.
“전남도, F1 적자사업 흑자로 왜곡” 감사원 지적…道 “수지 구조 예측 실패” 감사 결과 수용 - 광주 매일신문 정성문 기자- 2011-07-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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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산사태 위험지구 48곳 -전남매일. 2011-07-29. 00:00
전남 산사태 위험지구 48곳 |
입력시간 : 2011. 07.29. 00:00 |
광주는 대상지 없지만 관리 필요
서울 우면산과 강원도 일대에서 폭우로 인한 산사태가 속출하면서 수십명이 사망한 가운데 광주ㆍ전남지역에서도 인명피해가 우려되는 산사태 위험지구가 상당수에 달한 것으로 조사됐다.
28일 광주시와 전남도에 따르면 광주시는 급경사법에 따라 최근 경사도가 34도 이상인 인공절개지와 자연구릉지 113곳에 대한 안전 진단을 한 결과, 59곳이 양호상태인 B등급, 54곳이 보통수준인 C등급인것으로 나타났다.
붕괴위험 지역으로 분류되는 D, E등급은 없었지만, 광주지역 대부분의 인공절개지와 자연구릉지 인근에는 아파트와 일반 주택 등이 밀집돼 있어 엄청난 양의 폭우로 산사태가 일어나면 인명피해가 우려된다.
전남도는 인공절개지와 자연구릉지 1천264곳에 대한 안전 진단을 한 결과, 매우 양호상태인 A등급 180곳, B등급 591곳, C등급 445곳으로 나타났고, 붕괴위험이 있는 D, E등급은 48곳으로 조사됐다.
D, E 등급을 시ㆍ군별로 보면 광양이 15곳으로 가장 많고, 고흥 7곳, 진도 6곳, 순천 4곳, 화순 3곳, 담양·나주·해남·보성 각 2곳, 여수·신안·완도·영광·강진 각 1곳으로 나타났다.
광주시의 한 관계자는 "광주지역에는 붕괴위험지역으로 판정된 절개지는 없지만, 예기치 않은 많은 비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아파트 옹벽 등의 관리가 철저히 이뤄지도록 일선 자치구에 지시했다"고 말했다.
전남도의 한 관계자는 "산사태가 예상되는 지역에 대한 예찰활동을 강화하고, 산사태 피해가 우려되면 인근 주민이 즉각 대피할 수 있도록 일선 시·군에 지침을 알렸다"고 말했다.
F1 계속땐 전남 재정 파탄- 전남매일 정근산 기자- 2011-07-29. 00:00
F1 계속땐 전남 재정 파탄 |
입력시간 : 2011. 07.29. 00:00 |
감사원 “2016년까지 향후 부담액 1조원”
도 흑자대회 왜곡 등 엉터리 사업성 검토
전남도의 최대 역점사업인 포뮬러 원(F1)국제자동차경주대회를 치르기 위한 재정부담액이 1조원을 넘어서는 등 F1대회가 심각한 재정파탄을 불러올 것이라는 감사원 조사결과가 나왔다. 특히 전남도가 사업 타당성을 산출하면서 지출은 숨기고 이익은 부풀려 적자사업을 흑자사업으로 왜곡시킨 것으로 드러나는 등 대회를 지속할 경우 결국 빚더미에 앉게 될 것이라는 진단이 나와 박준영 전남지사가 사활을 건 F1대회가 중대한 기로에 서게 됐다.
감사원이 28일 발표한 ‘지방자치단체 국제행사 유치 및 예산집행 실태’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전남도가 당초 예정대로 2016년까지 7년간 F1 대회를 치를 경우 재정부담액이 1조1,169억원에 이를 것으로 분석됐다.
이는 ‘2,000억원 정도만 부담하면 될 것’이라던 도의 입장과 6배 가까이 차이가 나는 것이다.
이는 도가 민간사업자의 재원조달 능력을 검증하지도 않은 채 F1 경주장 건설 및 대회 운영을 민자유치 사업으로 추진했고, 민자 유치가 실패하자 도의회 의결이나 사업타당성에 대한 재검토 없이 도의 재정부담으로 F1 대회를 추진하는 바람에 빚어진 것으로 감사원은 분석했다.
이로 인해 당초 개최권료와 개최권료 납입보증, 부지확보 등으로 2,063억원만 부담하면 될 것으로 예상됐던 것이 추가공사비와 지방채 이자, 시공사 주식매수부담금, PF대출금 이자, 운영손실 부담금, 조직위 운영비까지 죄다 떠안게 됐다는 게 감사원의 판단이다.
전체 운영손실액도 4,855억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됐다.
이는 F1 입장료 1,695억원과 일반대회 수익금 892억원 등 총매출액은 4,245억원에 이른 반면 개최권료와 TV중계권료, 인건비, 초청 비용 등 매출원가는 6,268억원에 달해 매출총이익이 2,023억원의 적자를 기록하고, F1운영비, 마케팅 등 일반관리비 2,130억원에다 금융비용 702억원을 더한 결과다.
연도 적자규모는 지난해 원년 대회 962억원을 비롯해 2차년도인 올해 723억원, 2012년 673억원, 2013년 585억원, 2014년 606억원, 2015년 635억원, 2016년 671억원 등이다.
이는 당초 전남도가 사업추진 전 타당성 조사 결과를 토대로 밝힌 ‘1,112억원 이익’과 비교해 6,000억원 가까이 차이가 나는 것이어서 적잖은 논란이 예상된다.
특히 조사 결과 전남도는 F1 타당성 조사 용역 계약을 맺고 이를 검토하면서 진입도로 확장 공사비 등을 누락시켜 건설비용을 2,294억원으로 산출했으나, 재검토 결과 경주장 건설비용은 당초의 2.2배인 5,073억원으로 추정됐다.
또 7년간 F1운영손익을 산출하면서 F1 운영사의 수익을 전남도 수익에 포함시키는 등 지출은 숨기고 이익은 부풀려 적자사업을 흑자사업으로 왜곡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감사원은 이같은 감사 결과를 토대로 행정안전부에 전남지사에 대한 주의를 촉구하고, 전남도에는 관련 공무원 징계와 고비용 구조 개선책 마련을 권고했다.
정근산 기자
풍납동, 우면산을 가르치다- 서울신문 조현석 기자- 2011-07-29, 1면
▲ 1984년 사흘간 334㎜ 1984년 9월 3일 서울에 사흘간 334.4㎜의 폭우가 쏟아져 송파구(당시 강동구) 풍납동 일대가 침수됐다. 사진은 수해로 건물이 물에 잠겨 있는 풍납동 모습. 서울신문 포토라이브러리 |
▲ 2011년 이틀간 468㎜ 2011년 7월 27일 풍납동 일대에는 이틀간 468.5㎜(강동구 기준)의 집중 호우가 쏟아졌지만 별다른 침수 피해는 없었다. 사진은 물폭탄에도 말끔한 28일 풍납동 주택가 모습. 류재림기자jawoolim@seoul.co.kr |
재해위험지구가 될 경우, 집값 하락 등 재산권의 불이익을 염려한 것이다. 해발 293m인 우면산은 전체 면적 418만 551.10㎡(248필지)의 84%인 365만 659㎡(208필지)가 개인 소유다. 국가와 시가 소유하고 있는 나머지 부분은 각각 38만 1832㎡(26필지)와 14만 8060.1㎡(14필지)로 16%에 불과하다. 대치동 등도 배수관 등이 낡았지만 재건축 추진 등에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한 민원이 끊이지 않아 교체가 쉽지 않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전략- 최광희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전략
바둑 용어 중에 ‘대마불사(大’馬不死)‘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덩치가 클수록 잘 죽지 않는다는 얘기인데, 영화 흥행에도 마찬가지로 통하는 말이다. 언뜻 제작비가 많이 들어가면 위험도도 커진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는 반대다. 100억 원 이상의 제작비가 들어간, 이른바 블록버스터의 경우에 40-50억 원 정도를 쓴 중급 규모의 영화보다 경향적으로 흥행 타율이 높다. 일단 제작비를 많이 썼다 하면 언론의 관심도도 높아지고, 그 많은 돈을 회수하기 위해선 홍보에도 엄청난 열을 올리게 된다. 자연스럽게 관객들의 기대치도 올라간다. ‘대마불사’ 효과가 일어나는 것이다.
일단 블록버스터라고 한다면, 최소 400~500만 명 이상의 관객 동원을 해야 본전을 뽑을 수 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영화적으로도, 그 많은 관객들을 동시에 만족시켜야 하는 흥행 전략을 구사할 수밖에 없다. 블록버스터에 걸맞는 내용이어야 한다는 얘기다.
전통적으로 한국 블록버스터의 단골 흥행 전략은, 역사적 비극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더 구체적으로는 ‘분단의 현실’을 담아내는 것이다. 분단만큼, 세대를 막론하고 대한민국 관객들에게 절실한 화두는 없기 때문이다. 일찍이 강제규 감독의 <쉬리>(1998)와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2000)가 분단 소재 영화의 위력을 입증한 뒤, 많은 블록버스터들이 그 전철을 밟았다. <태극기 휘날리며>(2003)는 장동건과 원빈, 두 꽃미남을 민족상잔의 주인공으로 삼아 최초로 1천만 관객을 동원했다. <실미도>(2003)와 <웰컴 투 동막골>(2005)도 마찬가지 맥락의 영화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분단 소재의 블록버스터들이 다 흥행에 성공한 것은 아니다. 곽경택 감독의 <태풍>(2005)은 장동건을 캐스팅해 놓고도 흥행 실패했다. 분단이 아닌, 이를테면 광주민주화운동과 같은 현대사의 아픔을 담은 작품 가운데 장선우 감독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2002)도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제작비를 투입해 놓고도 관객들의 외면을 받았다. 블록버스터 SF를 표방한 <예스터데이>(2002)도 마찬가지였다. 왜 그랬을까?
‘코미디‘라는 가장 중요한 요소를 빼먹었기 때문이다. 한국 관객들은 지나치게 진지한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따라서 성공한 한국 블록버스터들은 비극을 근간으로 한 상태에서 희극적인 요소를 양념처럼 얹는 흥행 전략을 구사한다는 공통점을 보여 왔다. 그만큼 ’웃음‘은, 특히나 한국의 대중 관객들을 공략하기 위한 필수 요건으로 간주돼 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웰컴 투 동막골>과 <해운대>(2009)다. 두 영화는 각자 전쟁 영화와 재난 영화라는 장르적 특성에서는 다르되, 캐릭터들이 충돌하면서 파열되는 웃음을 선사하는 전략을 구사한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중요한 것은 웃기는 데 그쳐서는 또 안된다는 것이다. 적절한 신파적인 요소를 가미해, 비극을 완성해야 한다. 종국엔 관객들을 울려야 한다는 얘기다.
‘가족’이라는 화두도 중요한 블록버스터 전략이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전쟁 영화이지만 기본적으로 형제간의 이별에 대한 영화다. <괴물>(2006)도 마찬가지다. 한강 괴수에게 잡혀간 자신의 딸을 구해내기 위한 얼치기 아빠(송강호)의 눈물 겨운 사투가 관객들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해운대>는 어떤가. “내가 네 아빠다!”라고 외치는 박중훈의 대사가 상징하듯,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인물들의 사연이 드라마의 아주 중요한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블록버스터에서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비주얼 전략이다. 무엇을 보여줄 것이냐다. 두말할 나위 없이 기존의 영화들에서 보지 못했던 신선한 무언가를 보여줘야 한다. <괴물>은 한강 괴수를, <디 워>는 용가리와 부라퀴를, <해운대>는 부산 앞바다를 강타한 쓰나미를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의 시선을 끌어들였다. 그렇다고 해서 굉장히 새로운 것들은 아니다. 사실 할리우드 영화들에서 익히 봐왔던 볼거리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것이 한국이라는 공간으로 옮겨 왔을 때 관객들에게 주는 정서적 효과는 또 다른 파장을 만들어낸다. 한국형 블록버스터들은, 그걸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2011.7 (쎄시)
[진중권의 아이콘] 혼합현실에 살다- 씨네21, 2011-07-29.
[진중권의 아이콘] 혼합현실에 살다
씨네21, 2011-07-29.
"트위터가 세상을 바꾼다." 독설 닷컴의 고재열 기자가 언젠가 자신의 트윗 계정에 내걸었던 모토다. 당시 이 모토가 몇 사람의 심기를 거슬렀던 모양이다. 인터넷에는 금방 '트위터로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반론이 올라왔다. 하지만 그 얼마 뒤 중동에는 이른바 'SNS 혁명'이 일어나 수십년 동안 장기집권했던 독재자들이 줄줄이 권좌에서 물러났다. 물론 그 혁명을 SNS가 일으켰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SNS가 기존의 통치에 균열을 내 중동의 민주화를 촉진하는 촉매 역할을 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최근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에서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민주노총 김진숙 지도위원을 응원하기 위해 시민과 노동자들이 이른바 '희망버스'를 타고 전국에서 몰려들었다. 6월10일의 1차 희망버스 행사는 비교적 작은 규모였지만 배우 김여진씨의 참여로 전국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의 상황은 현장에 있던 이들의 트윗을 통해 실시간으로 중계되었고, 그렇게 올라온 트윗을 시민들은 역시 실시간으로 리트윗하여 언론의 무관심 속에서 한진중공업 사태를 이슈의 초점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7월10일에 실시된 2차 '희망버스' 프로젝트는 규모 자체가 달랐다. 195대의 버스에 나눠 타고 부산에 도착한 1만여명의 시민들은 부산역에서 집회를 마치고 영도까지 행진을 한 뒤 조선소로 진입을 시도했다. 보수언론과 보수정치는 이 상황에 상당히 위협을 느낀 모양이다. 한나라당의 김형오 의원은 "정권의 위기가 부산에서 오고 있다"고 경고했고, 부산시와 영도구 의회는 3차 희망버스에 반대한다는 결의문을 발표했으며, 보수언론에서는 연일 희망버스로 인한 영도구 주민의 피해를 강조하는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다른 기업들과 달리 한진중공업은 조선업의 미래를 고작 필리핀의 싼 노동력에서 찾았다. 그러다보니 사실상 형해화한 영도조선소를 그저 '한국'의 기업이라는 브랜드 가치를 위해 껍데기로 유지하게 된 것이다. 영도 주민의 입장에서는 기업의 해외 이탈이 반가울 리 없다. 지역경제의 공동화를 낳기 때문이다. 반면, 대폭 축소된 규모로나마 조선소가 빨리 정상화되는 게 낫다는 바람도 있다. 한진중공업을 비난하면서도 희망버스에도 반대하는 김형오 의원의 애매한 태도는 지역구민의 이 엇갈리는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희망버스 기획의 미디어론적 특성
희망버스의 아이디어는 송경동 시인에게서 나왔다. 삶과 시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 그의 문학이라면 희망버스야말로 그가 쓴 여느 작품 못지않게 '시적인 사건'이다. 흥미로운 것은 희망버스 기획의 미디어론적 특성이다. 똑같은 85호 크레인에 올랐지만 김진숙 지도위원에게는 8년 전 김주익 지회장에게는 없었던 게 있었다. 바로 스마트폰이다. 김주익씨가 그곳에 고립되어 철저한 고독 속에서 결국 목을 매야 했다면 김진숙씨는 손에 든 스마트폰으로 바깥세상과 소통하며 대중의 지지를 끌어낼 수가 있었다.
게다가 그에게는 김여진이라는 '트친'이 있었다. 대중의 관심을 모으는 배우의 트위터를 통해 85호 크레인 위의 상황은 트위터리언들에게 거의 실시간으로 중계됐다. 미디어 이론가 귄터 안더스가 냉소적으로 지적한 것처럼 오늘날 원본만으로는 사건이 되지 못한다. 원본은 매체를 통해 복제가 될 때 비로소 사건이 된다. 그 때문에 김주익의 농성은 '사건'이 되지 못했다. 그가 목숨을 끊었을 때에야 고작 1단짜리 짤막한 기사 속에 존재할 수 있었다. 대중매체의 시대에 사건을 '사건'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은 복제(가령 리트윗)다.
언론의 침묵 속에서도 적어도 트위터에서는만은 김진숙의 크레인 투쟁이 뜨거운 이슈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SNS에서 이루어지는 소통은 어디까지나 가상현실에 속한다. 현실에 나오지 않는 이상 그것의 영향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SNS 속의 여론을 어떻게 현실의 물리력으로 바꾸어내느냐 하는 것이다. 희망버스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서로 떨어진 대중을 영도조선소 앞으로 결집시켜냈다. 그런 의미에서 희망버스는 온라인 SNS의 네트워크를 전통적인 오프라인의 투쟁방식으로 전화한 최초의 전범이라 할 수 있다.
미디어 이론에 '재매개'(remediation)라는 개념이 있다. 하나의 미디어가 다른 미디어의 전략을 차용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가령 뉴미디어는 처음에는 올드 미디어의 전략을 차용한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뉴미디어는 모방에서 벗어나 자기 고유의 전략을 갖게 된다. 그때쯤이면 거꾸로 올드 미디어가 외려 뉴미디어의 전략을 차용하는 역전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가령 사진이 처음에 등장했을 때, 그것은 회화의 전략을 차용했다. 하지만 사진이 자신의 전략을 갖게 되자 그때부터 회화가 외려 사진의 전략을 베끼기 시작했다.
오프라인의 전통적 노동운동은 '희망버스'라는 아날로그 운송수단을 통해 디지털의 네트워크로 묶인 대중을 현실의 공간 속으로 불러내는 데 성공했다. 전통적인 노동운동은 조직(organization)의 운동, 즉 한 작업장에서(장소의 일치) 같은 작업라인(시간의 일치)에 따라 일하는 노동자들의 조직력과 단결력을 바탕으로 한 운동이었다. 반면, SNS의 운동(?)은 각각 장소와 시간을 달리하는 대중의 느슨한 망(network)이다. 희망버스는 이 디지털의 전략을 재매개함으로써 가상현실에 갇혀 있던 네트워크를 성공적으로 물질화해낸 것이다.
뒤집어 생각하면 희망버스는 SNS(뉴미디어)의 운동이 현장지원이라는 조직(올드 미디어)의 투쟁을 재매개했다고 할 수도 있을 거다. 김진숙과 김여진이 트친이 된 것은 조직과 네트워크의 이 행복한 결합을 상징한다. SNS는 85호 크레인을 방문한 김여진을 통해 육중한 현실로 나아가는 통로를 마련한 반면, 노동운동은 스마트폰을 손에 든 김진숙을 통해 SNS라는 가상세계의 수많은 거주민을 만날 수 있었다. 김여진이 현장에 오지 않았거나 김진숙이 스마트폰을 활용하지 않았다면 한진중공업 사태는 '사건'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새로운 현실의 존재론
물론 그보다 중요한 것은 역시 디지털 대중의 자발성이다. 과거에 대중은 매체가 제공하는 정보의 수용자에 불과했으나, 오늘날 대중은 외려 매체에 정보를 제공하는 송신자로 변했다. 매체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오늘날, 기사는 그 자체만으로 기사가 될 수 없다. 대중이 링크를 걸어 리트윗을 해줘야 비로소 기사는 '사회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오늘날 대중은 댓글과 멘션과 리트윗을 통해 자신들이 사회적으로 중요하다고 믿는 사건을 기꺼이 '사건'으로 등록시키려 한다. 그런 식으로 그들은 한진중공업 사태를 '사건'으로 만들어냈다.
희망버스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미 현실(reality)의 개념이 변화했다는 것이다. 가상이 현실로 나아가고, 현실이 가상으로 들어와 복잡하게 뒤엉키는 혼합현실(mixed reality).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들어 사는 새로운 현실의 정체다. 귄터 안더스는 "사건이 원본보다 복제된 형태로 더 큰 사회적 중요성을 띠는 것"을 빌어먹을 현실이라 성토했으나, 그의 푸념에 아랑곳없이 오늘날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이 결합된 혼합현실은 이미 우리의 세계가 되어버렸다. 문제는 바로 그 새로운 현실의 존재론에 적응하고 진화하는 것이다.
[한겨레 기사돌려보기]결정적 순간 보수는 말한다 “관둬라, 소용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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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개혁 거짓말 그리고 김문기 - 한겨레21, 이제훈, 2011-06-20. 제8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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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010년 소득양극화 완화, 왜?- 한겨레21 김기태, 2011-04-20. 제85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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