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7-27

독립 언론 위해 얼마를 지불할 텐가-우석훈-시사인 9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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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언론 위해 얼마를 지불할 텐가
앞으로 한국 언론의 발전은 ‘미디어법’을 통한 신문·방송 통합이 아니라, 언론의 ‘독립성’에 대한 시민들의 ‘사회적 지지’에 달렸다.
[94호] 2009년 06월 29일 (월) 11:38:34우석훈 (경제학 박사·<88만원 세대> 저자)
문화일보라는 신문이 있다. 나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꽤 인연이 깊다. 내가 한국에서 신문 칼럼으로 데뷔하게 된 것은 서울신문에서 1년 반 정도 지면을 허락해주었기 때문이지만, 실제로 가장 오래 칼럼을 쓴 곳은 한겨레이다. 그 한겨레보다도 문화일보와 더 인연이 많다면 비교가 될까? 내가 처음으로 월급을 받으며 사회생활을 시작한 곳이 그룹사 시절의 현대건설이었고, 당시 회사에서 하고자 하는 얘기를 문화일보를 통해 하도록 되어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 후에도 이런저런 인연으로 아토피 캠페인을 벌일 때에는 자문위원을 맡은 적도 있다. 이런 문화일보가 한동안 경영이 어려웠다고 아는데, 정부가 바뀌면서 지난해부터 경영사정이 상당히 개선되었다고 들었다. 이제는 현대그룹을 대신해 정부가 든든한 스폰서가 되어준 것인가? 일본과 비교한다면, 우리 언론 시장의 작동방식이 얼마나 다른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지난해 <시사IN> 창간 1주년을 기념해 연 심포지엄 ‘독립언론으로 살아가기’에서 해외 언론 사례를 들며 발제하는 이봉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장.
물론 일본도 현재 아사히신문을 제치고 더 왼쪽으로 이동한 도쿄신문의 경우는 주니치라는 든든한 물주가 있기는 하다. 선동열의 주니치 드래곤스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주니치가 바로 도쿄신문의 소유자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신문사의 기조가 그룹의 경영방침과 이념을 기계적으로 전달하지는 않는다. 연전에 일본의 어느 한 비정부기구 회원이 아프간에서 피랍되어 살해된 사건이 발생했는데, 대다수 신문은 개인이 부주의해 벌어진 불상사라는 논조로 보도를 했지만, 도쿄신문의 기조는 그렇지 않았다. 이 일은 일본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며, 주요 일간지 중에서는 가장 독립적인 논조를 취했다.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문화일보나 중앙일보가 한겨레나 경향신문보다 더 인권주의적 논조를 취한 셈이다. 후문에 따르면, 당시 아사히 독자 상당수가 도쿄신문으로 옮아갔다고 한다. 

‘평기자의 독립성 결여’가 가장 심각


정치라는 눈으로 보면, 한국이나 일본이나 후진국인 것은 마찬가지인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론 시장까지 일본이 후진국인 것은 아니다. 도대체 이 차이가 어디에서 생겨나는 것일까? 일본 언론인이라고 해서 원래부터 한국 언론인보다 더 진지하고, 더 직업정신에 투철하고, 더 유능할까? 개별적으로는 다를 이유가 없어 보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다. ‘팩트’라고 얘기하면, 한국 언론은 팩트의 취사선택부터 이른바 ‘데스크’의 견해가 너무 강하게 반영된다. 신문사가 독립적이지 않고, 데스크가 독립적이지 않은데, 이 상황에서 개별 기자들이 독립적이기를 기대하기는 좀 어려울 것 같다. 그러다보니 취재에 대해 기자들이 느끼는 책임감 역시 한국과 일본은 차이가 좀 생겨나는 것 같다. 사람은 어차피 다 비슷한 존재이다. 더 열심히, 더 공을 들이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에게 책임이 있고, 그 책임을 실제로 질 때 그렇게 하는 것 아닌가? 주요 기사의 경우 한국 신문에 나오는 얘기는 어차피 아주 단순한 팩트 몇 개를 제외하면, 무슨 말을 할지 뻔한 경우가 많다. 외신의 경우는 더 가관이다. 어쩔 수 없이 나도 외국 정보를 얻기 위해 프랑스어권이나 독일어권 신문을 보게 된다. 

그건 그렇고, 지금 보수 신문을 포함해서 한국의 신문들이 처한 가장 큰 문제는 ‘독립성’ 결여이고, 정조준해서 얘기하면 ‘평기자의 독립성 결여’가 가장 심각하다. 이것이 도대체 왜 문제인가? 전문 사회라는 표현을 쓴다면, 일종의 사회적 분업에 따라 대다수 국민이 정보 습득과 판단 근거를 언론에 의존하고 있다. 그 판단이 이른바 ‘바이어스(bias)’라는 편향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회의 전체적 판단 자체가 구조적으로 왜곡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잘못된 판단을 내릴 때의 손실을 ‘사회적 비용’이라고 한다면, 그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것이 사회적 편익이 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독립적 언론 혹은 괜찮은 언론에 대한 시민들의 ‘지불  의사’를 이론적으로 끌어낼 수 있다. 정말로 제대로만 얘기하고, 제대로 된 판단을 한다면, 개인은 몰라도 그 사회는 거기에 대해 경제적 대가를 지불할 의사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지불 의사를 구체화하기는 어렵다. 수년 전 홍콩에서 인터넷 기사에 대한 지불 의사를 조사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의 지불 의사는 0원이었다. 한국에서도 조사하나 마나 그럴 것이다. ‘인터넷 기사에 대해 얼마의 지불 의사를 당신은 가지고 계십니까?’라고 물으면, 지불 의사는 사실상 0원이 될 것이다. 돈 내고 인터넷 기사를 볼 사람이 없다는 것을 경제학에서는 이렇게 표현한다. 그러니 결국 누군가는 지불해야 할 기자들의 활동비가 인터넷 시대에는 나올 데가 없는 셈이다. 넓게 보면, 지금 한창 시끄러운 이명박 정부의 언론악법이라는 것도 그 출발점은 인터넷 시대에 적응할 방식을 찾지 못한 조·중·동의 새로운 시대에 대한 적응 시도 아니겠는가? 그러니 이 세 회사가 먹고살 방식을 찾아주기 위해 우리는 국회 공전이라는 사회적 비용을 치르는 셈이다. 

하여간 국가와 기업이라는, 지불자와 광고시장이라는 수입 원천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이 언론 시장에서 어떻게 하면 독립된 어조와 조금은 품격 있는 분석을 세울 수 있을까? 국민주 방식의 한겨레와 기자 사주라는 방식의 경향신문 역시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인데, 만약 시민 영역에서 ‘사회적 지지(social support)’라는 형식으로 그 비용의 일부를 담당하지 않는다면, 장기적으로는 결탁 아니면 파산이라는 두 가지 결론 말고는 나오기가 어렵다. 

<시사IN> 모델 성공 여부가 시금석


잠깐 대학생의 눈으로 상황을 보자. 대학생들은 이제 더 이상 신문을 읽지 않으니까, 신문 시장에서 소비자라는 관점으로 보면, 매력이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조·중·동은 대학생 등록금 문제나 그들의 여러 가지 인권 문제를 다루지 않게 된다. 경제 권력의 역학으로 보면 단순한 이치이다. 한마디로 잠재 소비자로서 대학생은 버려진 존재가 되는 셈이다. 조금 넓게 보면 20대도 마찬가지이다. 시장이라는 것은, 그냥 내버려두면 이렇게 경제적 권력, 곧 힘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 그러나 사회를 공동체라는 큰 눈으로 보면, 대학생이 한국 사회에서 과연 버리고 갈 존재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생태, 젠더, 지역 거주민 등으로 연결되는 한국 경제의 약한 고리의 문제를 어떻게 제시하고, 경제적 권리와 인권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그냥 내버려두면, 한국에서 약자는 더 약자가 되는데, 이 상황이 언론이라는 필터를 통해서 완화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강해지게 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간지는 아니지만, <시사IN>이라는 잡지의 ‘독립 언론’으로서의 실험은 한국에서 중요하다. 사회적으로 의미 있으면서 경제적으로도 의미 있는 언론의 가능성을 이 잡지의 성공 여부가 보여주리라고 생각한다. <시사IN>은 <시사저널>에서 독립할 때 그야말로 시민들의 ‘사회적 지지’에 의해 만들어진 자금으로 움직이는데, 이러한 모델이 만약 가능하다면 인터넷 시대, 그리고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사회적 공익이라는 관점에서의 경제 모델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지금까지 흐름은 나쁘지 않았고, 이제 곧 경영이 흑자로 전환될 것이라고 한다. 만약 <시사IN>의 실험이 성공한다면, 조금 더 큰 규모의 일간지 혹은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잡지들도 가능하지 않을까? 

나는 한국 언론에 이념이 투철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이념이 없어도 상관없다. 정확하게만 써준다면…. 그러나 지금 한국의 언론은 정부 부처의 브리핑 베끼기와 미국 언론 베끼기, 그 이상은 아니다. 경제 기사는 더 심하다. 기자가 현장에서 실제로 취재하고, 기획해서 만드는 제대로 된 경제 기사가 조·중·동에서 사라진 지 오래이다. 그러니 사실은 없고 해석만 있는 이상한 기사 릴레이가 되는 것 아닌가? 이 상황에서 결국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언론 발전의 길은 ‘미디어법’을 통한 신문·방송 통합이 아니라, 결국 ‘독립성’에 대한 시민들의 사회적 지지가 아닐까? 이처럼 제대로 된 언론을 위해 우리는 “얼마를 지불할 것인가?” 이 지불 의사에 따라 선진국으로 가는 길이 열린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신문들을 가지고 우리가 선진국이 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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