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규 목사의 회고록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를 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나의 어설픈 오만은 여지없이 어긋났다. 홍성우 변호사의 증언집 <인권변론 한 시대>의 얼개를 처음 들었을 때는 그 시대를 겪었거나 귀동냥을 했기 때문에 대충은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천만의 말씀이었다. 몰랐거나 다시 기억을 상기시켜준 내용들이 적지 않았다.
1970년대 선봉에 서서 박정희 독재체제와 싸웠던 김지하 시인의 필화사건이 만 15년이 지나 결국 재판시효 만료로 면소종결됐다고 한다. 장기간의 독방생활로 시인에게 환청과 정신분열의 고통까지 입히고 국제적인 구명운동의 초점이 됐던 사건으로서는 어처구니없는 결말이다. '고문기술자'의 표적이 됐던 김근태씨가 가공할 고문의 실태를 폭로하기 위해 재판부에 낸 장문의 '탄원서'가 법원 기록에서 실종되기도 했다.
책에서 언급된 사건들은 길어야 36년, 37년 전의 일이지만, 피부로 체감하는 사람들은 우리 사회에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젊은 세대에게는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얘기와 별로 다름이 없을 수도 있다. 그래서 홍 변호사의 증언이 고맙다. 시대적 위기감이 생생하게 전달돼 온다. 그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에 대해 주모자들을 죽여 버려야 된다고 몰아가는 분위기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변론했기 때문에 살려낼 수 있었다고 자부를 했다. 평소에 공치사를 하지 않는 홍 변호사의 성품을 헤아리면 험악했던 분위기를 직감할 수 있다. 변호사가 변론을 하다가 정보기관에 연행돼 투옥되거나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던 시대의 얘기다.
맡았던 사건의 형식적 성적표는 초라하다 못해 엉망이다. 인권변호사가 변호를 하면 풀려나기는커녕 다 감옥에 가는 상황에서 수임한 사건의 피고들이 징역 몇 년을 받을지는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홍 변호사의 활동이 지금도 의미가 있는 것은 그가 '역사적 법정'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검사의 공소장과 판사의 판결문이 때로는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사법부의 죽음 시대에서 그와 같은 인권변호사들은 읽어라도 보라는 심정으로 항소이유서를 썼다. 당시 많은 판사들이 거들떠보지 않았을 이런 항소이유서들이 현재 수많은 원죄사건 재심공판에서 결정적 구실을 한다.
무엇보다도 인상 깊은 것은 홍 변호사가 관련 문서들을 수십년 동안 보관해왔다는 점이다. 작년에 '국치백년' 관련 기획기사를 쓰면서 일본과 한국의 역사학자들을 연쇄적으로 인터뷰한 적이 있다. 재미있는 일화를 많이 들어서 보람이 있었지만, 마음에 사무친 한 가지만 꼽는다면 사료나 자료 정리의 중요성이었다. 몇 분에게 자신의 업적으로 자부하는 게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자료집 편찬을 꼽았다. 처음에는 좀 의아했다. 당연히 대표 저서나 논문을 언급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간토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 3·1운동, 독립운동 등에 관해 여러 자료집을 낸 강덕상씨는 이런 식으로 설명을 했다. 특정 시점을 기준으로 자신이 어떤 주제를 처음 다뤘거나 새로운 논점을 제기하는 논문을 쓰기는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것을 넘어서는 후학들의 저작이 반드시 나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자료는 그때그때 바로 정리하지 않으면 영원히 유실될 위험이 있다. 그래서 자신의 책임 아래 모아놓은 자료집을 토대로 젊은 연구자들이 연구를 하는 것을 보는 기쁨이 아주 크다고 했다. 가쿠슈인대의 동양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조선총독부 관련 자료를 정리하고 있는 미야타 세쓰코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연구자들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언젠가 이 자료들을 능숙하게 활용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리라고 믿으며 정비를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말했다. 나로서는 참 낯선 얘기였다.
그래서 홍 변호사를 설득해 자료들을 기증받고 증언을 하도록 한 한인섭 교수나 원고를 정리한 연구원, 대학원생들의 노력을 높이 평가한다. 사족을 단다면 인명, 지명, 사실관계에서 약간의 오기들이 보인다. 워낙 많은 사건들에 걸쳐 있어 불가피했겠지만, 하나의 사료로 남게 되는 만큼 보완을 해 나가면 더욱 의의가 있을 것이다. 대기자
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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