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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칼럼] '편의주의적 순결주의' 의 비극 노무현 정권의 무능·혼란·태만을 부른 '순결 이데올로기' 좀 불결해지더라도 이중잣대 버리고 언행일치를 하는 편이 낫다
▣ 강준만/ 전북대 교수·신문방송학
"열린우리당의 대중적 이미지는 무능, 태만, 혼란이며 성과 없는 이미지 정치만 계속하다가는 지지도 상승은 물론 차기 대권 승리도 어렵다." 지난 5월30일 전북 무주리조트에서 열린 '열린우리당 의원·중앙위원 연석 워크숍'에서 주제 발표자로 나선 한국사회여론연구소 김헌태 소장이 내린 평가다. 대부분의 신문들이 '무능, 태만, 혼란'을 큼지막한 활자로 뽑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열린우리당에게 타격이 컸을까? 아니다. 아직은 열린우리당이 살아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쓴소리를 자청해서 들을 만큼 아직은 조금이나마 열려 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기에 노무현 정권(이하 열린우리당 포함)이 그 지경이 된 건지 근본적인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전쟁터에 아들을 보낸 노빠
너무 사회과학적이고 학술적인 분석만 하려 들지 말고 좀 쉽게 생각해보자. 이 글을 쓰는 지금 행담도 개발 의혹이 주요 사회적 의제를 점령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전 청와대 인사수석 정찬용씨에게 부적절한 임무를 맡겼었다는 보도가 터져나온데다 보수 신문들엔 저주에 가까운 '노 정권 때리기'가 활기차게 이루어지고 있다. 나는 글의 주제를 바꾸려고 했다. 노 정권을 비판하는 글은 노 정권이 잘나갈 때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내가 노 정권을 열렬히 지지했던 2년 전에도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나를 포함해 '노빠'로 볼 수 있는 몇 사람이 모였는데, 그들의 한결같은 의견은 수구파의 '노무현 때리기'가 너무 심하니 개혁파는 노 정권에 대한 고언을 삼가고 노 정권을 위로하면서 수구파에 대한 반격에 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지금의 유시민 의원처럼 '노무현의 정치적 경호실장' 노릇을 하는 데에 지식인들의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결의를 한 셈이다. 나는 그게 지금도 노빠들의 공통된 논리이자 정서일 것이라 믿는다. 과거 정치 지도자와 지지자들의 관계는 지도자가 아버지요 지지자가 자식인 '아버지 모델'이었지만, 지금 노 정권과 그 지지자들의 관계는 '어머니 모델'이다. 노빠는 전쟁터에 자식(노무현)을 보낸 어머니의 마음으로 늘 노심초사한다. 자식의 흠은 전쟁터라고 하는 비상 상황에 비추어 아주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식이 좀 옳지 않은 일을 했다 하더라도 그게 다 구국 일념에서 비롯된 것이라 믿기에 모른 척하거나 그마저 옹호한다.
노무현과 김근태의 차이
어머니도 순결하고 자식도 순결하다. 원초적으로 불결한 자들에게 순결한 자의 과오나 일탈을 지적할 자격이 있는가? 없다. 한 노빠의 주장에 따르자면, "사실 우리가 선(善)이잖아요. 그럼 당연히 우리가 상대하고 있는 수구가 악(惡)일 테고… 우리가 선이라는 도덕적 우위를 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 나라는 수구판입니다." 그건 노빠들만 갖고 있는 생각이 아니다. 노 정권 내의 개혁파들도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 그래서 서로 죽이 잘 맞는 것이다. 나는 노 정권의 가장 큰 문제가 바로 그런 '순결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열정에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놀라는 건 그 지속성이다. 열정의 수명은 짧은데도 노 정권의 열정은 끝을 모른다. 왜 그럴까? 나는 그걸 놓고 고민하다가 '편의주의적 순결주의'라는 개념을 떠올렸다. '편의주의적 순결주의'라는 개념의 저작권자는 지난해 총선 불출마 선언을 한 뒤 지금은 방송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정범구씨다. 그는 당시 "노무현 대통령에게 어떤 순결주의 같은 것도 있어 보여요. 그런데 그 순결주의가 상당히 편의주의적 순결주의라는 거지요"라고 말했다. 이 평가는 노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고 노 정권이 안고 있는 문제의 핵심을 제대로 짚어준 탁견이라는 생각이 든다. 노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사랑하는 그의 최대 매력은 순결주의다. 한국 극우파의 이론적 전위를 자처하면서 사사건건 노 대통령에게 저주를 퍼부어대는 조갑제씨마저도 노 대통령이 '순진한 성격'을 가졌다고 평가한 걸 보면, 노 대통령은 '순결' 그 자체라 해도 좋을 법하다. 반대파들은 끊임없이 노 대통령의 '막말'을 공격해대지만, '막말'이야말로 그가 순결하다는 최대의 증거로 간주된다. 그건 그가 최고 권좌에 오른 뒤에도 전혀 변질되지 않았다는 확신을 지지자들에게 안겨준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놓쳐선 안 될 건 한 정치인이 시종일관 순결을 고수하면서도 대통령 자리에 오를 수 있었겠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한국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축복받은 나라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볼 건 아니다. 바로 여기서 '편의주의적 순결'이라는 개념이 빛을 발하는 것이다. 정치평론가 양동주씨는 민족 문제를 다루는 진보적 월간지인 <민족21> 2004년 3월호에 <노무현 살렸다가 죽이는 '강준만의 대(對)국민 사기극': 강준만식 노무현론의 오류 몇 가지>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한 바 있다. 그는 김대중의 대북정책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내가 김대중과 민족을 '배신'한 노무현을 '영웅'으로 만들었다가 뒤늦게 돌아서 비판을 하는 '대국민 사기극'을 벌이고 있다고 질타했다. 양씨의 분노는 노무현과 김근태의 비교평가와 관련돼 있다. 내가 보는 그의 핵심 주장은 다음과 같다. "노무현의 20년 정치 여정의 이정표는 강준만 자신이 왜곡된 지역주의의 아류로 숱하게 비난하여온 '3김 청산'이었다. 노무현과 그의 조숙한 386 참모들은 대권을 쟁취하기 위한 여정에서 교묘한 위장술을 성공적으로 구사하였다. 공식적으로나 비공식적으로도 노무현은 DJ에게 철저히 아부하였고 그 대상은 동교동 구주류라면 누구든 상관없었다. 노무현은 실질적으로 김근태 의원이 이끈 당정쇄신 운동에 단 한번도 참여하지 않았고 같이 하자는 권유도 단호히 뿌리쳤다. 노무현의 위장술에 대한 공개된 혹은 공개되지 않은 사실과 증언들은 얼마든지 널려 있다. 노무현에게 '올인'한 <한겨레> 신문이 일부러 감추었다고 해도 모든 미디어들을 꼼꼼히 살펴보는 강준만이 이를 무시한 것은 솔직히 말해서 그의 지식인으로서의 양심을 의심케 한다." 내가 <한겨레> 수준의 양심을 갖고 있는 걸로 평가받는 것엔 전혀 이의가 없으므로 내 변명은 관두고 하던 이야기나 해보자. 여기서 중요한 건 '편의주의적 순결'이다. 즉, 양씨의 비판은 거칠기는 하지만, 노무현이 대권 쟁취를 위해 '순결'보다는 '편의주의'에 무게를 둔 사례가 많았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문제는 집권 뒤였다. 노 대통령의 순결주의에 반했던 사람들 중에서도 갈등 관계에서 자신에게 유리하게끔 '순결'을 무기로 이용하는 그의 편의주의엔 더 이상 지지를 보내지 않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사람과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잣대를 적용하는 자의성에 염증을 느꼈다고나 할까? 나를 포함해 민주당 분당에 반대했던 사람들 중 상당수가 그런 경우였을 것이다.
순결은 상호소통을 방해한다
비상한 상황에선 그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비상하지 않은 상황에선 편의주의적 순결주의는 매우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게 돼 있다. 지금 비판의 표적이 되고 있는 노 정권의 문제들은 대부분 그런 편의주의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더욱 큰 문제는 지지자들의 경우엔 '순결'에 더 무게를 두므로, 비판자들과 지지자들 사이의 상호 소통은 말할 것도 없고 중간파와 지지자들 사이의 대화마저 불가능해진다는 점이다. 그 '순결'은 늘 비장미와 결합하기에 더욱 그렇다. 비장미를 위해 적(敵)은 늘 과대평가된다. 노 대통령이 "학벌사회, 연고사회인데 일류학교 나온 사람들 사이에서 잘 짜인 사회 속에 제가 돛단배처럼 떠 있지 않나"라고 말한 건 당시의 비상한 상황에선 이해할 수도 있지만, 그런 의식과 발상은 늘 평소 실력이다. 노 정권 창출 공신 중의 한 사람인 안희정씨는 "젊은 세대가 정권의 주역이 된 것은 5·16 군사쿠데타 이후 40년 만"이라며 "그때는 군인들이 총칼 들고 한강을 건너 정권을 장악했지만 우리는 노사모와 노란 목도리를 매고 한강을 건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는 참여정부가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한 최초의 정부"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게 안씨 혼자만의 생각일까? 그렇지 않다. 거의 모든 노 정권 실세들이 갖고 있는 생각이며, 그 생각은 자주 발설됐다. 노 정권의 비극은 바로 그런 '순결주의적 오만'에서부터 비롯됐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국정 운영의 현실 문제는 '순결'만으로 돌파할 수 없다. 여기서 불결과 순결의 경계선은 사라진다. 예컨대 빈곤 문제와 실업 문제에 순결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노무현 정권의 '평론가 정치'
노 정권이 내내 '평론가 마인드'를 고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노 정권 사람들은 그간 담론을 창출하는 지식인 집단처럼 행세했다. 노 정권에서 말깨나 하는 사람들은 모두 탁월한 평론가였다. 물론 모두 좋은 뜻에서 그랬으리라 믿는다. 문제는 그런 '평론가 정치'로 골수 지지자들을 위로한 것까진 좋았지만 일반 국민의 기대 수준마저 턱없이 높여놓았다는 점이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에서부터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집권하자마자 국민의 기대 수준을 낮추느라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한국에선 정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대선은 끝나 집권이 시작됐는데도 현란한 언어의 성찬은 계속됐다. 내내 대선 유세의 연속이었다.
한국 정치의 산전수전을 다 겪은 국민이 실제로 무언가 크게 기대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노 정권의 행태만큼은 이전 정권들과는 달라도 무언가 다를 거라고 기대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당은 4·30 재보선 참패에 대해 5월27일에 내놓은 패인 분석 보고서에서 내적 요인으로 '정체성 혼란'을 들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그게 아니다. 자꾸 그렇게 거창하게 생각하고 말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하니까 '개혁-실용' 논란 같은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내부 싸움질로 날을 새게 되는 것이다. 귀가 따가울 정도로 반복해서 무얼 하겠다고 약속했던 사람이 그 약속을 어겼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이 '정체성 혼란'에 빠졌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냥 '거짓말을 했다'고 말한다. 여당은 거짓말을 한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의도했던 거짓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여기서도 문제가 되는 게 편의주의적 순결주의다. "우리는 순결하기 때문에 반드시 이겨야 하고 우리가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순결의 이름으로 용서받을 수 있다." 이런 사고방식이 드라마틱하게 현실로 나타난 것이 지난 4·30 재보선이었다. 우리는 순결하고 우리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한 최초의 정부'라는 자만심은 다른 모든 면에서도 이중 잣대를 남발하게 만들었다. 노 대통령이 고수하는 것처럼 비치는 이른바 '당정분리'는 편의주의적 순결주의의 극치다. 노 대통령의 진심과 선의는 믿는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그건 실현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쇼'로 전락할 수밖에 없게끔 돼 있다. 예컨대 2004년 5월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경선에 나선 천정배, 이해찬 두 후보는 서로 "노심(盧心)은 내편"이라고 주장했다. 천 후보의 노무현 독대(獨對)가 알려지자 이 후보쪽은 이 후보도 노 대통령과 전화통화를 했다고 반격했다. 이 우스꽝스러운 일이 예외적 사건인가? 아니다. 이런 일은 늘 벌어진다.
'당정분리'는 백해무익한 쇼였다
권력은 상호관계다. 권력자의 의지만으로 바뀔 수 없다. 청와대가 과거에 비해 크게 달라졌다는 건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인데도 왜 청와대 사칭 사기 사건은 여전히 계속되는가? 사람들의 마음속, 아니 온몸에 프로그래밍된 권력에 대한 기억·경험·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당정분리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노 대통령이 아무리 이전 대통령들과는 다르다 해도 대통령이 총리나 장관에게 위임하지 않고 배타적 권한으로 직접 임명하는 자리가 460개나 된다고 하는 사실은 불변이다. 한 자리 차지하기 위해 몸살을 앓는 엘리트들이 수천, 수만명에 이른다. 그들에게 대통령은 박정희 때나 노무현 때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 눈도장 찍어야 할 대상일 뿐이다. 그런 엄연한 사실 앞에서 무슨 얼어죽을 '당정분리 쇼'란 말인가? 그건 아주 백해무익한 쇼였다. 순결을 과시하면서 책임은 지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선 매력이 있겠지만, 그건 동시에 '무능, 태만, 혼란'을 낳은 주범이었던 것이다. 이제 노 정권은 편의주의적 순결주의의 함정에서 탈출해야 한다. 편의주의가 순결의 열정을 지속시키고 확대재생산하는 순환에서 빠져나와 겸허하고 차분해져야 한다. 남에겐 엄격하고 자신에겐 관대하며, 그런 이중성을 순결의 이름으로 사하려는 발상도 버려야 한다. 좀 불결해지더라도 이중 잣대를 버리고 언행일치를 하는 게 훨씬 더 나은 선택일 것이다.
* '강준만의 세상읽기'는 '한홍구의 역사이야기''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와 함께 3주에 한번씩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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