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7-28

그린비 대표 유재건- 김현미- 기획회의 16호- 2005-03-21

그린비 대표 유재건

 등록일 : 2005/03/21

20년 만에 출판하는 재미를 알다
  
김현미|<동아일보> 미디어출판팀 차장   khmzip@donga.com

‘기획회의가 만난 사람’은 섭외부터가 만치 않다. 도대체 누구를 만날 것인가, 기준을  정해놓은 것이 없어서 인터뷰의 목적을  설명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막무가내로 “그냥 만나죠”고 하거나 “내일  갑니다”하니, 섭외하는 사람이나  섭외당하는 사람이나 난감하기는 마찬가지다. 

국내에서 매출 순위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출판사 대표는 “신생출판사 소개하는 자리인 것 같은데 격이 안 맞아서…”라며 거절하고, 책을 내기 시작한  지 1-2년 안팎의 출판사는 “보여줄 게 없어서…” 하며 물러앉는다. 나름대로 순위에 오를 만한 책도 내고 열심히 한다 싶어 연락하면 “너무 나서는 것 같아서…”라며 쑥스러워하고,  연륜에 비해 팔리는 책이 없어 고민하는 출판사는 “나중에 책이 좀 나가면…”이라고 뒤로 미룬다. 

그러고 보니 참 다양하게 만났다. <송인소식>에서 <기획회의>로 제목을 바꾼  뒤 <기획회의> 1호에 랜덤하우스중앙의  최봉수 사업운영부 실장이  초대됐고(이 기사는 <국민일보> 이영미 기자가 썼다),  이어 ‘푸른역사’ 박혜숙,  ‘두앤비컨텐츠’ 김민기, ‘루비박스’ 원형준, ‘뿌리와이파리’ 정종주, ‘필맥’  이주명, ‘마루벌’ 이명희,  ‘보림’ 권종택, ‘황소자리’ 지평님, ‘이제이북스’ 전응주, ‘서해문집’ 김흥식, ‘황매’  정정란, ‘미래의창’ 성의현, ‘개마고원’ 장의덕, ‘푸른책들’ 신형건 순이다. 

아무리 보아도 출판사의 연륜 대로 줄을 세운 것도  아니고, 베스트셀러라는 화젯거리를 제공한 출판사 탐방도 아니다(간혹 있지만). 그렇다고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출판계 새내기들을 초대하는 자리는 더더욱 아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 이 인터뷰를  진행하는 한미화 씨와 나 사이에 이런 공감대가 형성됐다. 그냥 궁금한 사람으로 하자. 출판계에 얼굴이 너무 알려지지 않아서 “누구야?” 하게 되는 경우, 이름은 알려졌지만 유난히 인터뷰에 인색한 경우, 이즈음 출판사 속사정이 알고 싶은 경우 등 궁금한 일이야 많았다. 

그러구러 10여 회를 넘기고 다음 인터뷰 대상이 ‘그린비’ 유재건 대표라고 하자 주위 사람들의 표정이 ‘전혀 궁금하지 않은데?’였다. 하긴, 그린비는 2003년 ‘리라이팅 클래식’ 시리즈 이후 숱하게 언론에 오르내렸고, 유재건 대표와 김현경  편집장이 여러 지면을 통해 수시로 ‘기획의 비밀’과 ‘출판의 비전’에 대해 털어놓았으니 더 이상 새로운  이야기도 
없을 듯하다. 

정말 그럴까? 나는 그린비의 독자가 두 부류라고 생각한다.  『삐뽀삐뽀 119 소아과』로 그린비를 기억하는 사람과 ‘리라이팅 클래식’ 이후 그린비를 알게 된 사람. 두 독자층이 겹치지 않는 것처럼 우리가 아는 그린비가 전부는 아닐 수도 있다. 그런 기대 속에 마포구 신수동에 자리한 그린비를 찾았다.

주인보다 객이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유 대표와 김 편집장이 동시에 찬바람을 몰고 들어온다. 끼고 들어오는 것이 필시 교정쇄다. ‘세계를 뒤흔든 선언 시리즈’라며 책 네 권의 표지와 본문 교정쇄를 보여주는 유 대표의  표정이 상기돼 있다. 2005년 들어  1월 한 달은 신간을 못 냈고 대신 2월에 이 시리즈 네 권을 한꺼번에 낸단다. ‘세계를 뒤흔든 공산당선언’ ‘세계를 뒤흔든 독립선언서’ ‘세계를 뒤흔든 시민불복종’ ‘세계를 뒤흔든 녹색선언─ 침묵의 봄’ 언뜻 제목만 보고도 사고를 쳤구나  싶다. 200쪽이 안되는 얇은 책이라는 말에 약간 안심이 됐지만 올컬러인데 9900원이라는 말을 듣고  또 걱정이다. 인문시장에 아직 봄은 오지 않았는데…라는 생각을 하며 왜 이리 노파심이 앞서는지 걱정 많은 나를 탓했다.  





김현미(이하 김) 그린비는 2003년 리라이팅 클래식 시리즈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인문교양 전문 출판사로 자리 잡기 이전의 그린비가 궁금해요. 그린비의 첫 책은 무엇이었나요? 
유재건(이하 유) 제가 독립하게 된 사정부터 이야기해야겠네요. 일월서각, 새벽 등 1980년대 후반까지 사회과학 출판사에서 일했어요. 그런데 하고 싶은 출판을 하기에 사회과학 출판의 입지가 너무 좁은 거예요. 하다못해 무크지 한 권 만들  여건도 안 되고(이 말을 하면서 그는 어려움 속에서도 <인물과사상>을 펴낸 개마고원에 찬사와 안타까움을 털어놓았다. 잡지는 정말 자기가 하고 싶었던 일이고 언젠가는 꼭 해보리라는 말과 함께). 먼저 일반 출판물을 해서 자본을 축적하자고 결심했죠. 섣불리 잡지를 냈다가는 몇  년 못하고 좌절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1년 정도 집현전에서 일반물의 감각을 익히고 1991년에 독립을  했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때는 더 이상  배울 게 없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배울 게 무지 많았는데 말이죠. 그린비 첫 책이 보스턴컨설팅 그룹의 『4차원 경영』이었어요.

그로부터 3년 후쯤 윤은기 씨가 ‘시테크’라는 개념으로 유행시킨 내용인데 ‘타임 베이스 경쟁’이라는 자체가 당시로서는 아주 신선했죠. 첫 책이 교보문고 경제경영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것을 보니까 기분이 묘하더라고요. 왠지 잘 될 것 같았죠. 실제로 두 번째 책도 히트였어요. 오숙희 씨의 『내가 만난 여자 그리고 남자』를 냈는데 반응이 정말 뜨거웠죠. 1년  6개월 만에 5만 부가 팔렸으니까요. 대박이구나 입이 저절로 벌어지는데 갑자기 저자가 절판을 하자고 해요. 그 무렵 오  선생이 그만 이혼을 하게 됐어요. 책  내용이 가정, 부부 간의이야기인데 저자 자신의 상황이 달라졌으니까 책을 계속 낼  수가 없다는 겁니다. 저로서는 너무 아까웠죠. ‘당신 부부가 이혼했다 해서 과거에 잘 살았던 것이 거짓말은 아니지 않느냐. 잘 살다가 못 살 수도  있다’면서 저자를 설득했지만 완강했습니다. 내버려 두면  20만 부는 나갔을 책인데 더 이상 어쩔 수  없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워요. 설령 5만 부가 아니라 50만 부라 해도 제가 먼저 절판하자고 해야 했을 일이었죠. 

      1회부터 2루타, 3루타를 연거푸  치셨군요? 경제경영서와 페미니즘  책이라는 것이 뜻밖이긴 하지만요. 
      제가 경제학을 전공한 게 조금 관계가 있을 것이고,  사회과학 하던 시절부터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우호적이었어요. 오숙희 선생  책 이후에도 여성민우회, 여성의집 등과  매 맞는 아내 이야기 등 페미니즘 관련 책들을 쭉  기획했어요.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는 사람들이 영화제목으로만 기억하는 게 속상하지만, 사실 저희 책 제목이었거든요. 그때는 제목이 너무 튀고 내용도 너무 앞서갔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10년 후쯤 이프에서 『아주 작은 차이』로 다시 나와 대표적인 페미니즘 책으로 인정받고 있죠. 페미니즘 책을 내면서 한쪽으로 돈 버는 책을 기획했죠. 유머집. 그냥 안타가 아니라 홈런을 쳤어요. 

이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와 원고를 정리하기  위해 다시 자료를 들추다가 김현경  편집장이 <기획회의> 9호에 실린 ‘기획자 노트 릴레이’에서 고백한 그린비의 과거사를 다시  보게 됐다. 무심히 넘어갔는데 이런 대목이 있다. 

“그린비가 생긴 지 3-4년쯤 된 신생 출판사라고 알고 계신  분들을 꽤 만나는데, 그분들이 과거의 그린비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생긴 오해다. 과거 그린비를  대표하는 책은 몇 달 전 한 인문학자가 자기 홈페이지뿐 아니라 일간지의 지면까지 빌려 비아냥거려 놨듯  『화장실에서 보는 책』이라는 유머집이다. 유머집을 내다 인문서를 내는  게 비아냥거림을 당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유머집을 시리즈로 다섯 권이나 냈고, 꽤 팔았다.”

그린비는 『화장실에서 보는 책』이라는 유머집을 꽤 판 정도가  아니라 너무 많이 팔았다. 다섯 권 합쳐서 100만부 쯤. 그것도 소리 소문 없이. 

      그렇게 책 팔아서 그 돈을  다 어디다 쓰셨어요?(100만부라는 말에 놀라  주책없이 내 입에서 나온 질문이다)
      영화소설 낸다고 간단하게 1억 날리고, 참 어이없게 많이 날렸죠. 한때 『사랑과 유혹』이나 『연인』 같은 영화소설이 30만 부씩 나갔거든요. 저도 욕심이 났죠. 영화관련  책을 한꺼번에 10권씩 계약했어요. 그때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다른 출판사로부터 욕도 많이 먹었죠. 저작권회사와 그린비가 무슨 관계인데 영화책을  모두 그린비로 몰아주느냐고 원성이 자자했어요. 그런데 그 책들  초판 1만 부씩 찍어서 9000부가  반품으로 돌아왔으니 1억 원이 순식간에 날아가더라고요. 

      욕먹고 책 안 팔리고 그린비로서는 최대 고비였겠네요. 그  무렵 유머집 판매도 곤두박질했다면서요?
      네. 유머집 1-2권은 정말 잘 나갔어요. 매달 5000부씩  중쇄를 찍을 정도니까. 한꺼번에 100만부가 아니라 91년부터 IMF 직전까지 꾸준히 100만 부 가량 팔렸죠. 그런데 1997년 유머의 패러다임이 바뀌자 하루아침에, 거짓말처럼 책이 안 팔렸어요.  <딴지일보> 식의 엽기, 패러디, 비주얼이 섞인 유머가 확산되면서 말로만 웃기던 유머는 아주 구태의연한  것이 되어버린 겁니다. 정말 막막했죠.

      그때 구원투수가 소아과 의사 하정훈 선생이었나요? 얼마 전 <기획회의> ‘이  저자가 팔린 이유’에 등장하는 제목을 그대로 옮기면 ‘대한민국 엄마라면 누구나 아는 이름 하정훈’.  
      1997년 『삐뽀삐뽀 119 소아과』가 나와서  지금까지 왔으니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셈이지만, 이 책을 기획할 때는 많이 팔리기보다  오랫동안 팔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아이들은 계속 태어날 것이고 이런 책을 계속 필요할 테니까요. 그런데 기획을 해놓고 출판사 사정이 아주 어려워졌어요. 당장 출판사를 접어야 할지도 모르는데 책은 6개월이 걸릴지 1년이 걸릴지 알 수 없으니 불안했죠. 빨리  내자고 재촉하고 싶지만 저자와의 신뢰가 있으니까 기다릴 수밖에 없었어요. 저자나 출판사 모두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책이니까 정확하게 만들어야 한다, 절대적으로 시간이 필요하다는 데는 생각이 같았으니까요.

2002년 『삐뽀삐뽀 119 소아과』 전면 개정판 이후 저희는 쇄를 거듭할 때마다 수시로 개정을 해왔어요. 저자는 예방접종 약값이 3만원에서 3만5천원으로  오르면 다음 쇄에서 반드시 고치자는 양반이니까요. 한 번은 엄마들에게 짧은 시간 가급적 많은 설명을 해주기 위해 말을 빨리하는 연습을 했다는 말을 듣고 놀란 적이 있어요. 그런 저자의 성실성이 『삐뽀삐뽀 119 소아과』를 오랫동안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책으로 만들었다고 봐요. 제가 바라던 대로 오래 팔리는 책이면서 잘 팔리는 책이니까 더 말할 필요가 없죠. 



출판 10년 돌아보니 돈도 명예도 없더라
      출판사 경영 차원에서만 보면 하정훈 같은 최고의 필자를 잡고 계속 육아서를 개발하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될 텐데 왜 지속적으로 그쪽 분야를 기획하지 않고 인문 쪽을  선택했나요? 
      주위에서 그런 말을 많이 해요.  만약 돈 욕심을 낸다면 『삐뽀삐뽀 119 소아과』  한 권 갖고 있고 1년에 책 한두 권만 내면 되요. 『삐뽀삐뽀 119 소아과』를 중심에 두고 가지치기를 해서 육아 전문 출판으로 가는 게 어떠냐고 하는데 올해 하정훈 선생과 이유식 책 한 권이 더 나오는 정도입니다. 물론 『삐뽀삐뽀 119 소아과』는 출판사에게 정말 고마운 책이죠. 이 책이 궤도에 오르기  전까지 97,98,99년까지 출판사 경영이 너무  악화돼 문을 닫아야 할  지경이었어요. 

그런데 그 동안 낸 책 목록을 보니 너무 마음에 안 들고, 돈은  돈대로 없고 이게 뭐냐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가 출판 10년 하면서 단계를 설정하면 안 된다는 걸 알았어요. 돈 벌면 나중에 하지는 거짓말이에요.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거든요. 그때그때 하고 싶은 책을 하지 않으면  내년되면 또 상황이 달라지고. 그때부터 돈이 있든 없든  차분하게 인문서를 준비하기로 마음먹었어요. 다행히 『삐뽀삐뽀 119 소아과』 덕분에 매출 부담에서  벗어나 정말 하고 싶은 일, 내고  싶은 
책을 낼 수 있는 자신감과  용기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출판을  ‘재미있게’ ‘소신있게’ 하려면 5년 아니 10년 팔릴 책을 몇 개만 가지고 있으면 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100만 부짜리 바라지도 않고, 바란다고 될 일도  아니다, 10년 팔릴 책을 50종만 만들자고  생각했어요. 솔직히 한꺼번에 100만 부가 나가면  출판사는 ‘오버’하게 되어 있어요. 갑자기  사원
채용하고 규모 늘리고 그러다 보면 무리한 기획을 하게 되고…. 저는 10년 동안 10만 부 팔리는 책을 목표로 길게 보고 출판을 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14년 동안 그린비가 낸 책이 몇 종이나 됩니까? 
      대략 120종.

      1년에 10종도 안되네요? 그린비라는 이름의 무게에 비하면 생각보다 너무 적네요.
      그래서 올해는 최소 20권을 내자고 했어요.  그러나 요즘 출판계가 다품종소량생산으로 가는 것은 반대입니다. 책이 안 팔리니까 자꾸 새로운  책을 내서 기본을 맞추려고 해요. 나중에 그게 다 반품으로 돌아옵니다. 그 고리를  끊을 수 있어야 해요. 다품종소량생산은 일단 책의 질을 담보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책에 따라 다르겠지만 웬만큼 깊이 있는 사유와 재미, 내용을 담아내려면 다른 공산품과 달리 일정정도 시간이 필요해요. 그런데  다품종소량생산이라고 해서 자꾸 밀어붙이기 출고를  하려면 방법은 대충 내는  거죠. 

그러나 그 책은 시장에서 오래 살아남지 못해요. 편집자도 한 달  정도 그 책에 집중하고는 잊어버리죠. 저는 출판사의 역량에 맞게 적당히 내고 관리를 잘 하자는 쪽이에요. 이를테면 남경태의 ‘종횡무진 시리즈’는 6년째인에 1년에 1쇄 1000부를  찍거든요. 그래도 초판까지 합쳐서 1만 부가 넘었어요. 다른 출판사라면 1년에 1000부짜리  책이라면 벌써 절판했겠지만 저는 끌고 갑니다. 1000부가 별것 아닌 것 같아도 50종, 100종만 되면 그게 다 기본매출이  되거든요. 이미 갖고 있는 책을 관리할 생각은 안하고 1년에 최소 3000부 5000부는 나가야 한다고 자꾸 새 책만 찾다보면 어느 시점에서 돌아보면 출판사는  남는 게 없어요. 그래서 저는 1000부도 소중하다고 말하죠. 저자들도 그런 출판사를 고맙게 생각하고요. 

      그린비의 목록을 훑어보면 일단 무겁다는 인상이에요.  인문 교양이라도 더 대중적인 접근을 할 수 있을텐데 굳이…. 인문 출판사로서  출발이 마르크스 박사학위 논문이라는 것은 더더욱 놀랄 일이고요. 
      인문을 하겠다고 마음먹고 나니까 기반이 없어요. 어디 누구를 찾아가서 이 답답한 속내를 털어놓을까, 그때 이진경이라는 이름이 떠올랐죠. 1999년 그의 책을 좋아했다는 인연 하나만으로 무작정 찾아갔습니다. 당신의 책을 내고 싶다고 했죠. 박사학위 논문밖에 없다며 보여주는데 도표도 많고 전문용어도 그렇고 한마디로 인문을 시작하는 출판사에게 너무  셌어요. 그때 이진경 씨로부터 고병권 씨를 소개받았고 맑스  박사학위 논문이니 나와야 하는 이유를 듣게 됐죠. 그 책이 2001년 고병권 번역으로  나온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에요. 

누군가 만나러 가면 또 누군가가 그를  만나러 와있고 자연스럽게 알게 되고 이런 식으로 한 명 한 명 필자를 알아갔죠. 당장  책을 내려는 목적보다 그때는 그들과 어울리며 배워가는 것이 즐거웠어요. 몇 년 뒤 이진경 씨가 갑자기 보자고 해요.  갔더니 『철학자와 굴뚝청소부』를 주면서 내달라는 겁니다. 그 책은 다른 출판사에서 1993년에 나와 이미 10만 부가 넘게 팔렸고 매년  5000-6000부씩 찍는 스테디셀러였는데 그 책의 판권을 넘겨주니 얼마나 고마웠는지. 참 이 책 개정판이 3월초에 나와요. 이렇게 인문의  기반을 닦아갔죠. 

매출 신화에 사로잡힌 한국 출판계
      ‘리라이팅 클래식’이 그렇게 시작됐군요. 2-3년 사이 그린비는 인문 출판사로 완전히 자리를 잡고요.
      리라이팅 시리즈는 저술가이며 번역가인 남경태 씨의  도움이 컸어요. 하루는 남경태 씨가 저희 사무실에 놀러왔다가 모 출판사 기획회의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5명의 기획위원들이 프로젝트팀을 꾸려 고전 관련 책을 기획했는데 의견이 팽팽히 맞서 성사되지 못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대부분 고전을 너무 엄숙하게 받아들이더라, 어떻게 고전에 손을 댈  수 있느냐, 잘못하면 고전에 누가 된다는  식인데 시대착오라는 거였어요. 아무리 좋으면  뭐하나, 아무도 읽지 않는데, 고전을  읽게 만드는 책이 나오면 좋겠다,  가장 좋은 방법은 ‘번안’이라고 하는데 뭔가 확 머리 속에 들어오는 거예요. 

고전을 번안한다는 개념이 너무 과격하다  싶어서 리딩클래식을 제목으로 잡았는데  여기서 리딩은 ‘이끈다’와 ‘읽는다’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것이죠.  그런데 수유  쪽 연구진은 ‘리딩’만으로는 의미가 없다고 반대했어요. 여전히 고전에 짓눌리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죠. 고전을 해설하는 방식은 지금까지 누구나 다 해왔다. 이제는 다시 써야 한다. 그래서 리라이팅이 된 겁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는데 6개월 정도  기획회의를 하고 원고가 나오면 서로 모니터를 하면서 완성해 가니까 뭔가 될 것 같더라고요.  그때 주제를 20개 정도 잡고 그 중 15건을 계약했어요. 

지금까지 다섯 종이 나오고 계속 쓰고 있으니까 생각대로라면 리라이팅 클래식을 100권쯤  내고 싶어요. 고미숙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은 지금까지 4만 부 가량 나갔어요. 매달 1000부씩은 나가는 것 같네요. 고병권의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5000부 팔고 6000부 째 찍었고요. 그 정도면 대만족입니다. 이 정도면 1년 매출이 10억은 넘으니까요. 




김      ‘리라이팅 클래식’ 이후 그린비의 출판 방향이나 유 대표 자신의 출판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나요? 
유      20년 가까이 출판일을 했지만 그처럼  언론의 주목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어요. 아 이렇게 하는 게 가능하구나, 이런 책을 매년 한 권씩만 내놓을 수 있다면 좋겠다, 계속 분발해야 하는 이유가 그것일 수도 있겠구나, 이런 식으로 출판의 의미를 비로소 깨달은 것이죠. 그리고 보니 출판이 재미있더라고요. 비판이나 오독을 두려워하지 말자는 용기도 생기고. 원고를 보는 기준도 달라졌어요. 

예전에는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는 방식으로 기획이 됐느냐 문체는 어떠냐를 따졌는데 지금은 저자만의 독특한 주장이 담겨  있느냐를 먼저 봐요. 전통적으로 인문교양 출판이 독자들을 대하는  태도는 이래요. 당신들 이런  것 모르지? 이렇게 우리가 잘 정리해 놓았으니까 이것 보고 배워라. 그러나  리라이팅 클래식을 하면서 그린비는 태도를 바꾸었어요. 문제를 던져놓고  당신(독자)과 우리(필자, 출판사)가 함께 고민해보자. 틀리면 틀린대로 이야기 해보자. 책을 통해 독자들과 커뮤니케이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고 할까요. 20년 만에 그걸 배웠어요. 

      이제 안정된 매출도 확보했겠다, 인문 출판사로서의 입지도 다졌겠다, 출판사  규모 면에서 욕심을 낼만도 한데….
      말씀드렸잖아요. 다품종소량생산은 죽어도  못한다고. 드디어 단행본만으로  연매출 300억 원대 출판사가 나왔다고  야단인데, 과도하게 매출목표를 설정해놓고  자신의 색깔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생각해보세요. 한참 출판에 재미가  생긴 후배들이 매출을 획기적으로 높일 방법이 없느냐고 물어와요. 그때마다 답이 없다, 그럴 필요도 못 느낀다고 대답하면 굉장히 실망해요. 20년 가까이 출판을 했다면서 그런  노하우 하나 없느냐는 반응인데 그게 정답이거든요.

그리고 왜 올해 매출 10억을 했으면 왜 내년에는 20억을 해야 하느냐고 되묻죠. 10억일  때와 20억일 때 내는 책이 엄청나게 다른 것도 아니고 비슷비슷한 책을 쏟아내면서 그것이 우리 출판계에 무슨 도움이 된다는 것이지 묻고 싶어요. 적어도 출판사라면 매출을 목표로 잡아서는 안돼요. 매출을 따라가다 보면 본질을 놓치게 됩니다. 매출을 잡기 전에 올해 우리가 정말 내고 싶은 책이 무엇인지, 책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지 결정해야죠. 그런  책을 내다보면 연말에 15억도 되고 20억도 되면 참 좋겠지만 안 될 수도 있잖아요. 

그린비 책은 5000부에 만족해요. 늘 5000부가  최대치라고 생각하고 내요. 그런 책을  1년에 15종 정도만 내도 기본을 유지할 수 있거든요. 그렇지 않고 매출만 높이 책정해 놓고 이 책 저 책 건드리다 보면 출판사의 컬러도 없어지고  10권 중 1권이 몇만 부 나간다 해도  결국 반품으로 들어오는 것을 감당할 수 없게 됩니다. 저는 매출을 목표를 잡지 않겠다고 결심했어요. 내고 싶은 책을 돈이 없어서 내지 못하는 일은 없어야 하고, 우리 직원들이 대기업 수준의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그 정도면 연매출 30억 정도면 최대치라고 생각해요 그 이상의 매출은 불필요할 수도, 아니  나쁠 수도 있어요. 

큰 규모의 출판사일수록  기획과 편집이 분리되고 마케팅 홍보가 따로 있는데, 저희는 분업을 거의 하지 않아요. 지금도 밤새 교정을 보고 디자이너와 함께 표지를 고민하고 수시로 지하창고에 내려가 반품이 얼마나 들어오는지 살펴보며 출판의 현실을 생생하게 느껴요. 그것이 출판을  열심히 하게 만드는 동력이라고 보고요. 그렇게 나온 책을 팔아서 나와 같이  하는 식구들(편집 5명, 영업 1명, 경리 1명, 창고 1명)이 생활하고, 좋은 기획이 있으면 책으로 낼 수  있는 여력이 있다면 만족해요. 

조분조분 할 말 다하는 유  대표와 이야기하는 동안 출판을  ‘재미’로 한다는 말이 자칫 ‘오독’의 여지는 있지만 가슴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깨달았다. 그가 출판으로 돈을 벌려는 목적도 분명해보였다. 언젠가 <뉴 레프트 리뷰> 같은 잡지를 꼭 한 번 내보고 싶단다. 들뢰즈의 책을 준비 중인데 한 사람이 열심히 매달려도 최소 4개월은 걸리는 작업이어서 강약완급을 주기 위해 한 달 만에 낼 수 있는 책과 적절히 섞이도록 노력한다고 했고, 『속도와 정치』처럼 500-700부  나갈 책만 연달아  만들면 지루하기  때문에 중간중간에 ‘이유식’처럼 좀더 가볍게 만들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들을 섞어 내면 지치지 않고 출판을 할 수 있다고 했다. 20년 만에 그가 공개한 출판 노하우였다.

기사게재 : <기획회의> 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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