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7-28

'운동권 정서' 버리는 게 답일까?- 안병진- 시사인 1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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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권 정서' 버리는 게 답일까?
운동과 정치의 관점이 융합할 수 없다는 관점을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제대로 된 운동과 정치가 아니어서 문제이지, 운동과 정치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177호] 2011년 01월 28일 (금) 11:59:20안병진 (경희사이버대 교수·미국학)
   
한동안 정치학자들 사이에서 이제 진보 진영은 제발 운동권 정서를 버리고 제대로 된 정당, 제대로 된 정책 입법에 집중해야 한다는 명제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그들의 지적은 굳은 이념과 무조건적 비타협 투쟁이 곧 진보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타당했다. 진보의 궁극적 실현은 오히려 수많은 미시적 정치 과정의 미로와 성가신 연합, 그리고 흡족하지 않은 타협의 결과에 의한 경우가 더 많다.

하지만 난 당시 그러한 주장이 때로는 균형감 있는 선을 넘어 과도하게 운동의 정서에 대해 비판적인 논지로 나아가는 것이 못마땅했다. 왜냐하면 나 스스로가 항상 운동의 관점에서 정치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난 프랑스 철학자 펠릭스 가타리의 ‘항상 권력의지를 경계하라’는 말을 가장 좋아한다. 권력의지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운동의 관점이 약해지고 협소한 의미의 권력의지만 강해지는 순간 우리는 정체성이 바뀌면서 그저 괴물로 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동안 나의 주장은 큰 공명을 받지 못하는 소수파의 주장으로 남아 있어야 했다. 왜냐하면 흔히 한국이 중요한 벤치마킹 대상으로 여기는 미국 등의 ‘선진 정치’가 운동이 아니라 정당 중심으로 움직이고, 한국은 이미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그 두 가지 단단해보이는 가설의 토대가 흔들리고 있다.

첫째, 진보 집권을 실현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정치관 자체가 ‘영구적 운동으로서의 정치’이다. 그는 대선 기간 자신의 선거 과정을 단지 여론조사나 기부금 모금, 엘리트들의 정치 광고전 등을 위주로 하는 정치 캠페인으로 규정하는 것을 거부하고, 아래로부터의 사회운동의 일환으로 간주했다. 이로 인해 주변 선거 전략가들이 그를 정치 철부지 혹은 운동권으로 취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클린턴 시대의 주류 진보 정치가 정치의 혼이 약화된 채 권력 쟁취의 관점, 여론조사의 관점에만 지나치게 매몰된 것에 비판적이었다.

철부지 운동권 취급을 받았던 오바마는 집권에 실패했을까? 이제 모두가 알 듯이 그는 선거의 구도, 미국 정치의 개념을 바꾸면서 의미 있게 집권하는 데 성공했다. 정치를 운동으로 사고하기에 백악관 진입 이후 정치에 실패하고 있는가? 비록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어려운 조건에서 부침과 오류를 거듭하지만, 그는 유연한 타협을 통해 의료보험 개혁에 성공했다. 그래서 난 운동과 정치의 관점이 서로 융합할 수 없다는 관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제대로 된 운동, 제대로 된 정치가 아니어서 문제이지 운동과 정치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다.

진보 정당들, 운동권 정서 때문에 대중 정당 못 되는 거 아니다


둘째로,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지극히 허약한 수준, 정당의 극단적으로 취약한 토대를 더 절실히 자각하기 시작한 지식인들이 근대에 탄생된 정당 그 자체에 대한 과도한 환상에서 벗어나고 있다. 현재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진보신당이 운동권 정서 때문에 대중적 정당으로 거듭나지 못하는 걸까? 물론 여전히 일부 활동가들만의 정당 모델에 머물러 있다는 점에서는 타당한 지적이다. 하지만 일부 활동가들의 패러다임이 극히 협소한 사고방식이어서 문제일 뿐이지 운동적 사고 자체가 원죄는 아니다. 오히려 현재 문성근씨의 ‘백만민란운동’에 대한 지식사회의 기대감이 상승하고 있는 것에서 보이듯, 대중적 정당의 출발은 대중적 운동에서 시작된다. 사실 아직도 운동의 시각은 한국 정치에서 턱없이 부족하다.

한때 ‘미드(미국 드라마) 폐인’을 양산한 진보적 정치 드라마 <웨스트 윙>에서 백악관 입성에 성공한 진보 정치가들이 자신의 과제를 과거 러시아의 과격한 혁명가인 트로츠키의 영구 혁명에 비유한 것을 보고 놀란 기억이 난다. 즉 그들은 마치 영구 혁명처럼 민주주의란 부단히 운동의 관점에서 혁신되어야만 생명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웨스트 윙>과 그 드라마 정신의 화신인 오바마는 진보 정치의 혼을 이해하고 있다. 오바마는 오늘도 백악관에 어둠이 내리면 홀로 앉아 “이 일을 하면서 나의 정체성까지 바꾸지는 않을 것이다”(게임 체인지)라고 되뇌고 있을지 모른다. 즉 자신은 영원한 운동가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겠다는 결의이다. 진보의 집권과, 집권 이후 성공을 간절히 바라는 이들이 곱씹어볼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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