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7-29

보수가 독점하는 사법부 한겨레 21 2011.07.05. 제868호



보수가 독점하는 사법부 [2011.07.05. 제868호]
▣ 김남일
[이슈추적] 임기내 대법관·헌법재판관의 9할 임명하는 MB정부… 보수 획일화 우려 속 멀어지는 대법관·헌법재판관 구성 다양화
화끈하다. 미증유의 뜨거운 답변이 아닌가. 헌법의 세계는 벌금 몇십만원을 두고 판사와 검사, 변호사가 쪼잔하게 싸우는 마이크로한 풍경이 아니었던 것이다. 헌법 재판은 추상적인 헌법 조항, 그 해석의 ‘전선’을 두고 재판관들이 자신의 가치관과 철학을 동원해 맞붙는, 수십 년간 이어져온 ‘진지전’이라는 것을 조용환 헌법재판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는 실증해 보였다. 이명박 정부 들어 자취를 감추다시피 한 ‘헌법재판관·대법관 구성 다양화’에 마중물을 한 바가지 시원하게 부어넣는 상징적 장면이기도 했다.
» 대법원 전원합의체 모습. 어렵게 쌓아올린 대법관 구성 다양화가 이명박 정부 들어 급속히 후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대법관을 ‘법관 승진 인사’로 이해하는 사법부의 보수적 행태도 되살아나고 있다. 한겨레 김명진

MB 임기내 대법관 14명 모두 임명
이명박 정부에서 임명된 헌법재판관은 2명, 앞으로 임명하게 될 재판관은 헌법재판소장을 포함해 6명이나 된다. 전체 9명의 재판관 가운데 8명이 이번 정부에서 교체된다. 누가 재판관이 되든 관심 없다면, 그럼 이건 어떤가. 수명을 다해가는 이명박 정부가 남은 임기 동안 임명하게 될 대법관은 대법원장을 포함해 7명이다. 대법관 14명(법원행정처장 포함)이 모두 이번 정권에서 교체됐거나 교체된다. 없던 관심도 생겨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용환 후보자는 7월에 퇴임하는 조대현 헌법재판관의 후임으로 민주당이 추천한 인사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창립 회원으로, 국가폭력·조작 사건 피해자들의 재심 사건 변호를 많이 맡았다. 지난 6월28일 조 후보자의 국회 인사청문회가 열렸다. 조 후보자가 공격받은 지점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위장전입. 변명의 여지가 없다. 명백한 잘못이니 본인이 알아서 진퇴를 결정하거나 국회가 처리할 문제다. 또 하나의 공격 지점이 의도하지 않게 ‘재판관 구성은 왜 다양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건드렸다. “천안함 폭침이 누구 소행인가”를 묻는 다소 유치한 국회의원의 질문이 발단이 됐다. 헌법을 다루는 재판관이니 국가 정체성에 대한 생각을 ‘검증’해보겠다는 의도가 담긴 질문이었다.
이제까지 ‘너의 소신은 무엇이냐’고 묻는 이런 유의 질문에 굳이 성실하게 답변한 후보자는 없었다. 소나기만 피하면 임기 6년 동안 햇볕 쬐며 살 수 있으니 명확한 답변보다는 구렁이 담 넘어가는 스르륵 답변이 대부분이었다. 지난 3월 이정미 헌법재판관 후보자(대법원장 추천)의 인사청문회를 보자. “군 대체복무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도입 범위는 의원들이나 국민 전체 입장에서 정해야 되지 않나 싶다. 저보고 소신 없다고 하는데 판사를 오래 해서 발언이 조심스럽다. 말을 아낀 부분도 있고 내 마음속 견해가 있어도 소신껏 밝히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는 점을 양해해달라.” “간통죄 존폐는?” “앞으로 심리하게 될지 모르는 부분이라 의견을 밝히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인사청문회용 답변의 정석은 이런 것이었다.

하지만 조 후보자는 보고 있으면 답답하기 이를 데 없고, 듣고 있으면 하나 마나 한 말씀이 난무했던 그간의 인사청문회와는 이별을 고했다. 천안함 침몰 질문에 “북한이 저질렀을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고 답변했다. 의원들은 성이 차지 않았다. “북한 소행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는 말이냐”며 거듭 고백을 강요했다. 조 후보자는 “정부 발표를 신뢰하나 직접 보지 않았기 때문에 확신할 수는 없다”고 답했다.
천안함 침몰 이후, 정부의 태도는 신뢰를 얻기에 충분하지 못했다. 조 후보자의 답변은 합리적 이성을 지닌 시민이자, 사실관계에 극히 예민한 촉수를 지닌 율사가 고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선택지 중 하나였다. 이러자 한국 사회에서 헌법이 보장하는 양심(사상)의 자유는 힘있는 쪽만의 자유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어하는, 이른바 보수 언론에서 벌떼처럼 일어났다. “중립을 지켜야 할 판사의 발언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편향된 사고” “헌법재판관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사회의 중심 가치를 지켜나갈 수 있는 균형감각이 중요”.(<조선일보>) “헌법은 국가 정체성을 맨 먼저 규정한다. 헌법 제1조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로 시작하는 이유다. …과연 그러한 국가관과 인식체계로 헌법적 판단을 바르게 내릴 수 있겠나.”(<중앙일보>)
» 헌법재판소 건물 꼭대기층에는 커다란 무궁화 9개가 양각돼 있다. 9명의 헌법재판관을 상징한다.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들은 ‘지혜의 아홉 기둥’으로 불린다. 한국에서는 재판관 구성의 다양화부터 시급한 실정이다. 한겨레 박종식

헌재, 다양한 가치와 이해관계 대변해야
천안함 침몰에 대한 다른 의견을 낸다고 해서 국가 정체성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조 후보자의 답변은 주류의 사고에 편입되지 않는 가치를 대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보수 언론은 헌법 가치와 국가 정체성을 신줏단지 모시듯 하지만 정작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는 헌법 전문을 무시하고 이승만 전 대통령이 나라의 뿌리라고 주장한다. 헌법 가치를 들먹이는 말들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한 꺼풀 뜯어보면 ‘진보 성향 재판관은 초장부터 걸러내겠다’는 의지가 논리를 앞선다. 보수 정권 아래에서 ‘헌법 해석의 획일화’를 단단히 다져놓겠다는 포석이다.
헌법학계 인사들은 헌법 재판을 두고 재판관 9명 저마다의 가치관과 가치관, 철학과 철학의 대결이라고 평한다. 헌법적 지식도 중요하지만 결정적이지는 않다는 것이다. 민형사 재판에서 법관에게 요구되는 것과 같은 정밀한 수준의 법 지식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대신 주류의 가치뿐만 아니라 주류와는 결이 다른 가치와 이해까지도 큰 틀에서 포괄하고 이를 기본권으로 보장한다는 헌법적 감수성이 필수적이다. 재판관 9명이 모두 ‘사회의 중심 가치’만 대변한다면 헌법 재판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보수부터 진보까지, 메인스트림에서 사회 밑바닥 소수자까지 9명이 대변하는 가치와 이해관계가 다양할수록 헌법은 법전에서 나와 일상에 넓게 밀착한다. 살아온 길과 배경이 다르고, 전문 분야가 다른 다양한 재판관들이 필요한 이유다.
실제 재판 과정에서 굳어 있는 헌법에 생생한 질감을 부여하는 것은 법률 지식이 아닌 재판관 개개인의 가치관인 경우가 많다.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이 서로 충돌할 때 어느 쪽 손을 들어줄지 판단하는 것은 헌법 지식이 아닌 재판관 개인이 살아오며 확립한 경험칙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정이지만 재판관 가운데 사병 출신이 많았다면 국방부 불온서적 지정 사건의 결론은 달라졌을 수도 있다. 재판관 대부분이 서울 강남에 집이 없거나 수십억원대 재산가가 아니었다면 종합부동산세 사건의 결론도 바뀌었을지 모른다.
이웃 일본만 해도 우리의 헌재에 해당하는 최고재판소 재판관에 법학교수, 외교관, 행정부 공무원 등이 포함돼 있다. 하지만 우리 헌법재판소 구성은 다양성과는 거리가 멀다. 헌법재판관은 법관 자격이 있고 법조 경력 15년 이상인 사람 가운데 대통령, 국회, 대법원장이 3명씩 임명·선출한다. 1988년 설립된 헌재는 1·2기 재판부만 해도 역동성이 있었다. 재판관들도 진보·보수의 성격이 뚜렷했고 의미 있는 결정도 많이 나왔다. 헌법학계 관계자는 “1·2기 때까지만 해도 헌법재판관으로 가게 되면 ‘법조 인생이 그저 그렇다’는 말이 나왔다. 하지만 헌재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제도권 내 엘리트들이 오는 기관이 됐다. 그게 대략 3기 재판부부터다. 현재의 4기 재판부 구성을 보면 분위기가 완전히 법원 내 엘리트들이 오는 곳이 된 듯하다”고 했다. 4기 재판부는 민변 회장 출신인 송두환 재판관과 검찰 고위직 출신인 김희옥 재판관을 제외하고 모두 고위 법관으로 있다가 헌재로 자리를 옮겼다. 임기 중간에 물러난 김희옥 재판관을 대신해 또다시 검찰 출신인 박한철 재판관(대통령 추천)이 임명됐다. 법에도 없는 이른바 ‘검찰 몫’이라는 게 적용됐다. 그나마 3월에는 이공현 재판관 후임으로 여성인 이정미 재판관이 임명됐다. 참여정부 시절 임명된 전효숙 재판관에 이어 두 번째 여성 재판관이다.
성향과 전문 분야 차이없는 대법관들
다양화 요구는 정치·경제·사회적 갈등이 깔때기처럼 모여드는 대법원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명박 정부에서 임명된 대법관은 이제까지 7명이다. 전원 남성, 전원 50대, 전원 서울대 법대 출신이다. 판사 출신으로 교수 재직 중 대법관이 된 양창수 대법관을 제외하고 현직에 있던 고위 법관들이 대법관으로 임명됐다. 진보니 보수니, 노동·환경·여성이니 전공을 따질 게 별로 없다. 성향이나 전문 분야에서 별 차이가 없다는 얘기다. 사법연수원 기수에 따른 연공서열을 벗어나지 못했다. 한참 과거로의 회귀다.
이는 참여정부 시절과 큰 차이를 보인다. 2004년 사상 첫 여성 대법관인 김영란 대법관이 임명됐다. 여성도 여성이지만 사법연수원 기수도 10년 정도 뛰어넘는 파격이었다. 나이도 40대였다. 이듬해에는 판사로 있다가 변호사로 활동해온 진보 성향의 박시환 대법관과 비서울대 출신(원광대)으로 노동법이 전문인 김지형 대법관이 임명됐다. 2006년에도 이런 관행은 이어졌다. 진보개혁 성향의 판결을 해온 이홍훈 대법관, 여성인 전수안 대법관이 임명됐다. 김영란·박시환·김지형·이홍훈·전수안 대법관은 이후 ‘독수리 5형제’로 불리며 보수적인 대법원 안에서 나름의 균형추 역할을 해왔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대법관 13명)의 절반에도 이르지 못해 판례 변경도 쉽지 않았지만, 보수 언론 등은 대법원에 이런 사람들이 5명씩이나 된다는 사실을 못마땅해했다. 특히 가장 진보적 색깔을 드러낸 박시환 대법관에게 집중적 공격이 가해졌다.
독수리 5형제도 6년 임기를 맞았다. 지난해 김영란 대법관이 임기 6년을 마치고 퇴임(후임 이인복)했고, 지난 5월에는 이홍훈 대법관이 임기를 채우기 전 정년퇴임(후임 박병대)했다. 박시환·김지형 대법관은 올해 11월에, 전수안 대법관은 내년 6월에 물러난다. 대법원장 역시 석 달 뒤인 9월이면 6년 임기가 끝난다. 대법원장은 차관급인 고법 부장판사를 포함해 법관 2500여 명의 인사권을 가진다. 대법관 13명 전원에 대한 임명 제청권도 쥐고 있다. 누가 대법원장이 되느냐에 따라 대법관 구성도 큰 영향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런 막강한 권한을 가진 대법원장은 이명박 대통령이 지명한다. 참여정부 시절 사법부 내부의 거센 반발에도 연공서열 등을 깬 대법관 임명이 가능했던 데는 시민사회단체의 지속적인 노력에 더해 청와대의 의지가 크게 작용했다. 그런 탓에 이명박 정부에서 대법원 구성의 급속한 보수화를 우려하는 시각이 많다. 이번 정부에서 짜놓은 대법원 진용은 다음 정권 내내 힘을 발휘하게 된다.
지난 6월28일 참여연대·새사회연대·민변 등이 참여한 ‘대법관·헌법재판관 교체 대응 인권시민사회단체 연석회의(준)’ 주최로 바람직한 대법관·헌법재판관 구성 기준을 논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발제자로 나선 임지봉 서강대 교수(헌법학)는 “대법원은 최종적인 법 해석과 법 적용의 막강한 권한을 가진 국가기관으로, 어떤 국가기관보다도 국민 일상생활의 구석구석에 큰 영향을 끼친다. 헌재 역시 헌법 해석을 통해 일체의 공권력 행사나 불행사에 대한 위헌을 선언하고 한 사회의 가치기준을 제시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한계
여성 대법관이 생기자 여성에게는 인정되지 않던 종중원 지위가 인정됐다. 삼성의 불법 경영권 승계에 손을 들어준 것도 대법원이었다. 수백 년을 이어온 동성동본 혼인 금지를 하루아침에 무효화한 것은 헌재였고, 행정수도 사건에서 관습헌법이라는 논리를 만들어 한국 사회를 500년 전 조선시대로 돌려놓은 것도 헌재였다. 법조계의 한 인사는 “이 동네는 워낙 보수적이다. 한쪽 날개만 너무 비대하다. 구성의 균형을 맞춰보려 해도 금세 과거로 돌아간다”고 했다. 스스로는 절대로 바뀔 수 없다는 얘기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한계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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