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 전쯤 검찰총장을 지낸 분과 점심을 함께 했다. 자리에서 물러나 보니 전화 답신 안 해주는 게 가장 서운하더란다. 한번은 부산의 지인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비서에게 “전화 좀 달라”고 말해놨는데, 꿩 구워 먹은 자리였다. 짜증이 나서 다시 수화기를 들고 “그렇게 살지 말라고 전해달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그 지인, ‘앗 뜨거워라’ 하고 케이티엑스(KTX) 타고 천릿길을 달려왔단다. “비서가 깜빡한 것”이라고 해명하느라고.
검찰 고위직 출신 변호사들이 선임계도 내지 않고 전화 한 통화에 수억원을 받는다는 내용의 기사를 내보내면서, 이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분, 결단코 ‘구악’ 아니다. 퇴임 뒤에도 몸가짐을 정갈히 해서 후배 검사들로부터 존경받는 분이다. 이날 점심도 빈대떡에 소주 한병 나눠 마신 뒤 냉면 한 그릇씩 더 했을 뿐이다. 그래도 전화 한 통화가 갖는 괴력은 냉면 육수에 떠 있는 얼음처럼 서늘하게 다가왔다.
모시고 있던 분들의 전화를 모른체하기란 참 힘들 것이다. 제일 신경 쓰이는 건 평판 때문이란다. 검찰 간부 출신의 ‘전관 변호사’들은 다 장관·총장 등과 가까운 사이인데, 한번 ‘싸가지 없다’고 찍히면 승진 길이 막혀버리기 십상이다. 실제로 어느 검사는 이런 전화를 건 전관 변호사에게 “선임계 내고, 정식으로 변호를 하시라”고 이야기했다가, ‘천하의 또라이’가 돼버리고 말았다. 그러니 힘없는(?) 평검사들의 유일한 무기는 단결뿐이다.
검찰의 집단행동은 평검사회의라는 형태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 분위기는 평(平)이 뜻하는 저항성이나 자기성찰과는 거리가 있다. 2003년 참여정부 때는 인사개혁 움직임에 맞섰고, 2007년에는 검사의 수사권 약화에 반발했으며, 얼마 전에는 검경 수사권 갈등에 깃발을 들었다. 움직일 때마다 검찰의 조직이기주의로만 비쳤다.
판사는 검사보다 훨씬 범생이지만, 저항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정권이 입맛에 맞는 대법원장을 앉히려고 하자, 똘똘 뭉쳐서 몰아낸 적이 있다. 2008년 촛불집회 때는 재판 지침이 담긴 법원장의 전자우편을 기자들한테 슬쩍 흘려서 문제를 까발리기도 했다. 국회의 사법개혁에 법원도 검찰 못잖게 저항했는데, 검찰만 유독 욕을 먹은 건 이런 배경 때문일 거다.
그러니 평검사들이 진정 조직을 사랑하고 직업에 자부심을 갖는다면, 전화변론 같은 내부의 문제부터 평검사회의에서 다룰 일이다. 전화변론을 거부한다는 결의문이라도 나온다면 전관들도 함부로 전화질을 하지 못할 거고, 국민들의 눈길도 따사로워질 것이다.
민망한 경험이 하나 있다. 10년 전쯤 집안의 가까운 형님한테 급한 연락이 왔다. 관급 공사를 따내려고 공무원에게 돈을 찔러주다가 들통이 났다는 것이다. 판검사 하나 없는 변변찮은 집안이다 보니 기자 빽이라도 붙잡고 싶은 거였다. 출입기자 시절 알고 지내던 고위직 한 분을 찾아가 하소연을 했고, 그분은 그 자리에서 해당 지검의 검사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주었다. 처음 해보는 청탁이었지만 다 순조롭게 풀리는 듯했다. 그러나 담당 검사를 직접 찾아갔더니, 이러는 거다. “아실 만한 분이 왜 이런 부탁을 하십니까.” 얼굴이 화끈거려 얼른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물론 형님은 구속됐고, 형수님으로부터는 “괜히 서방님이 나서서 징역만 더 살았다”는 얘기를 들어야만 했다. 서운하기도 했지만, 그 젊은 검사의 똘망똘망한 눈동자는 잊을 수가 없다.
그러니 뜻 맞는 친구의 얼굴이 떠오르면 전화를 돌릴 일이다. 평검사회의 한번 하자고. 전관들의 전화에는 전화로 맞서는 게 상책이다. kyu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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