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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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진정성의 정치가 과잉될 때 / 박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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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상훈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정치학 박사
좋은 정치란 권력적이지 않을 때 가능하다거나, 혹은 권력이 아니라 진정성으로 일할 때 실현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내 생각에 진정성에 의존하는 정치는 문제가 있다. 공허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무책임성을 모면하려는 알리바이가 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자신에게 정치란 권력 행사가 아니라 "봉사하며 살아가는 일"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북한에 대해서는 "진정성을 보이라"는 요구로 일관하면서 사실상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은 정치란 "원칙과 진정성을 갖고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일"이라는 말만 계속할 뿐 현실의 권력관계와 무관한 존재처럼 행동한다. 야당인 민주당 역시 이명박 대통령을 비판할 때마다 "진정성을 갖는 정치"를 앞세운다. 이번 민주당 원내대표 경선에서도 "국민에 대한 봉사"와 그 "진정성"을 출마 이유로 내건 후보가 많았다. 물론 이들의 진정성 담론은 진짜가 아닌 상투적 정치담론일 뿐, 중요한 것은 진정한 진정성에 있다고 반박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 또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잘 알고 지내는 후배가 하나 있다. 2004년 민주노동당이 원내에 진입하자 진보정치의 꿈을 같이 일궈가고 싶다며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중앙당 상근 활동가를 자원했다. 그런데 그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당의 결정이 가끔 있었단다. 그래서 당 지도부 가운데 한 분을 만났을 때 그 이유를 따져 물었다. 그랬더니 그분은 그 이유를 설명해주는 대신, 따끔한 훈계를 했단다. 후배의 문제제기가 무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내 관심을 끌었던 것은 그분의 말이었다. 핵심은 "우리 당의 지도적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평생 개인 삶을 희생해가면서 운동에 헌신했고 지금도 사심이나 권력욕 없이 다들 그렇게 일하고 있는데 그 진정성을 의심하는 태도는 잘못이다"라는 것이었다. 내 생각에 그분의 말에는 분명 진정성이 실려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런 분들의 헌신과 희생 덕분에 민주화도 되고 진보정치의 힘든 길이 개척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그런데 그 바람에 지도부란 당내 위계구조 위에 서 있고 권한과 영향력을 더 많이 갖는 권력자라는 사실이 인식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결정에 대한 설명의 책임이라는 민주정치의 원리가 소홀히 여겨지고 말았다. 권력이 아니라 진정성이라는 그분의 윤리적 태도는 결과적으로는 이견을 억압하는 기능을 했는데, 흥미로운 것은 후배의 태도였다. 그런 경험이 있은 뒤 그는 웬만해서는 자기 생각을 표출하지 않았다는데, 뭔가 이견이 있다가도 그걸 말하기에는 자신이 살아온 평범한 회사원의 삶이 부끄럽게 느껴지더라는 것이다. 이런 심리적 상황에서 적극성과 자발성을 갖기는 어려웠고 결국 삶의 보람을 찾지 못한 후배는 당직을 그만두었다.

진정성은 인간의 윤리적 삶을 이끄는 매우 중요한 내면적 가치가 아닐 수 없다. 그것 없이 개인의 참된 삶은 유지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대부분 권력관계로 움직여지는 정치의 세계에서 자신을 지켜내기 어렵다. 그러나 그런 내면적 가치를 자신의 외양으로 삼을 때 혹은 자신이 옳기 위해 그런 윤리성을 동원해 타인의 행위를 제약할 때 그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권력이 아니라 진정성으로 정치해라!" 해서 정치가 좋아지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정치의 세계에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권력 현상을 이해하고 그것의 긍정성을 선용하는 동시에 권력이 자의적이 되지 않도록 책임성을 부과하는 문제에 더 관심을 갖는 게 훨씬 좋은 일이라고 본다. 우리 정치가 필요로 하는 것은 진정성으로 일을 한다는 정치가가 아니라, 권력을 알고 이해하고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바람직한 가치를 위해 권력을 실질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정치가이자, 그러기 위해 내적으로 단단한 신념과 외적으로 탄탄한 실력을 갖추려 노력하는 정치가가 아닌가 싶다.

박상훈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정치학 박사




기사등록 : 2011-05-15 오후 07:3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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