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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26

“삶의 브레이크를 한번씩 밟아보세요”(이재철)- 조현// 한겨레 휴심정, 2010-12-23


“삶의 브레이크를 한번씩 밟아보세요”

조현 2010. 12. 23
조회수 3413 추천수 0
‘100주년 기념교회’ 이재철 목사의 성탄 인터뷰 

img_01.jpg성탄절을 앞두고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100주년기념교회) 담임 이재철 목사(61)를 찾았다. 서울 마포구 합정동 144 한강변에 위치한 100주년기념교회는 언더우드, 아펜젤러, 베델, 헐버트 등 초기 선교사 415명의 유해가 안장된 양화진선교사묘원의 ‘묘지기 교회’다.

겸재 정선이 낙조가 가장 아름답다고 했다는 양화진 위로 둥근 달이 떠오른 21일 밤. 한인교회의 초청을 받아 독일에 다녀온 그는 긴 비행을 한 것 같지않은 평안한 모습으로 그리스도의 세계로 안내했다.



성탄절은 ‘자기멈춤’의 시간 
베를린에서 호텔이 아닌 가정 집에서 묵었다는 그는 가까이서 지켜본 유럽가정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밤이면 창문 밖에서 셔터를 내려 빛까지 차단해 외부와는 완전히 단절된 유럽인들의 삶을 보고 부러움보다는 안타까움이 밀려왔다는 것이다. ‘사회 안전망’을 잘 갖추고 있어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유럽사회에 대해 그는 그만의 관점을 내보인다. ‘대부분이 홀로 외부와 단절된 채 살아가는 그들이 이렇게 살다가 인생을 마감할 때 무엇을 느낄지’ 가엽다는 표정이다. 2남5녀의 막내로 태어나 자신도 네아들을 둔 대가족의 틀에서 살아온 그에게 ‘1~2인 가정’은 더욱 이해되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그는 또 유럽인들이 가진 안전망이나 사회적 부가 행복의 조건이 아니란 것을 미국의 사회학자이자 목회자인 토니 캄플로의 말을 빌어 설명한다. 토니 캄플로는 ‘사람이 죽는 순간에 자기가 못다 이룬 업적을 후회하는 사람은 없다. 모든 사람은 죽기 전 바르게 살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왜냐면 죽음이 자기를 덮치는 순간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라고 했단다.


“목회하면서 장례식을 수 없이 치르고, 임종을 지켜보았지만, ‘내가 그 때 투자를 더 했더라면 더 부자가 됐을텐데’라거나 ‘그 때 줄타기를 제대로 했으면 장관 한 자리는 했을텐데’라고 후회하는 사람을 단 한명도 보지 못했다. 한결같이 ‘살면서 해야할 것을 하지 못한 것’,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한 것’을 후회했다.”



해야할 일 못할 때 후회 커져 
그는 20대 때 사업에 성공해 서울에서 가장 큰 빌라에 살며 벤츠를 굴리고 룸살롱에서 돈을 물쓰듯 쓰며 살았지만, 지금은 집조차 없다.  성서에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했지만 이것을 믿고 무장해제하는 그리스도인은 찾아보기 쉽지않고, 바벨탑의 욕망이 더욱 치성한 현실에서  ‘두려움 없이 안전망을 벗어버릴 수 있는 뱃포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믿음이다. 성공과 부의 늪에서 방탕한 삶에 젖어 살던중 아내의 일기장에서 자살 충동과 우울을 보고 절규하던 그에게 ‘그의 주님’이 다가와 안아 준 뒤 그는 ‘그분이 언제가 함께 하심’을 믿는다. ‘그분’만이 그의 유일한 안전망이 된 셈이다. 그는 <홍성사>라는 대표적인 출판기업을 세운 장본인이고, 강남 ‘주님의 교회’를 대형교회로 키워냈고, 이곳 ‘100주년기념교회’에 온지 5년동안 매년 신자가 1천명씩 느는 ‘경이로운 성장’의 주역이지만, 그의 진정한 성공은 오직 ‘성공’에 목매지않는 자유에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주님의교회’ 담임직을 홀연히 벗고 떠날 수 있었고, 네 아들에게도 ‘너희에게 줄 유산은 없다’는 것을 선언할 수 있었다. 그는 15살 때 선친이 별세한 뒤 스스로 세상을 개척해온 자신처럼 자식들에게도 “인생길은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또한 강고한 믿음에 근거한다.


실패가 재산, 스스로 개척해야 
“스스로 결정하고 가봐야 한다. 그런 과정에서 실패를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실패해야 자기 길을 찾을 수 있다. 주님께선 나처럼 수렁에 빠진 사람도 건져주었는데, 다른 사람이라고 그냥 버려둘 리 없다. 아이들이 한 순간 실패의 늪에 빠질 수 있고, 허우적 거릴 수도 있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면 그런 실패조차 재산이 되리라는 것을 믿는다.”

실패와 좌절에 굴하지않는 용기와 희망의 메시지 때문일까. 지난 9월 <목회와 신학>의 설문조사에서 그는 우리나라 30대 목회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저자로 나타났다. 그는 세상이 ‘성공’만을 얘기할 때 ‘삶의 가치’를 얘기한다.
 “인생은 시계 초침이다. 거창한 게 아니다. 죽음이 멀리 있지도 않다. 초침 일초 일초가 쌓이면 하루가 되고, 하루가 쌓이면 한달이 되고, 일년이 된다. 그렇게 일생이 된다. 일초를 아무렇게나 살면 일생이 소중해질 수 없다.”
젊은이가 절반에 이를만큼 젊은이 비율이 높은 100주년기념교회에서 그는 그저 바쁜 젊은이들에게 ‘어서 빨리 달려라’고 채근하지않고 오히려 ‘멈추라’로 말한다.
 “성탄은 주님을 믿든 믿지않든 일년에 한번 있는 ‘자기 멈춤’의 시간이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지금 뭐하고 있는가. 어디로 가는가를 생각해보는 시간이다. 자동차에 엑세레이터만 있으면 차는 흉기가 된다. 브레이크가 있어야 한다.”

마침내 멈춘 자에게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생한 기운을 안겨준다. ‘생기’야말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온 이유란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어 호흡을 불어넣었다고 돼 있다. 생기를 불어넣어 생영이 되게 한 것이다. 흙이 호흡과 합쳐지면 인간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생기와 단절됐다.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어 생영이 살아나 사람이 사람되게 한 것이다.”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이재철 목사는…> 

이재철 목사는 1949년 부산에서 태어나 한국외대 프랑스어과를 졸업했다. 1974년 홍성통상주식회사를 설립해 사업을 해 청년실업가로 활약했다.
 삶에 비관한 아내의 일기장을 보고 회심해 1985는 36세의 나이로 장신대 신학대학원에 입학했고, 1988년 주님의교회를 개척했다. 그는 개척 초기의 약속대로 10년 임기가 끝나자 사임하고 자원해 총회 파송선교사로 스위스 제네바한인교회에서 3년간 머물며 한인교인들을 상대로 목회했다.

2001년 귀국해 집필에 전념하다가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의 부름을 받아 2005년 7월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 담임목회자로 있다. 저서로는 <매듭짓기>, <인간의 일생>, <내게 있는 것>, <참으로 신실하게>, <새신자반>, <성숙자반>, <비전의 사람>, <청년아, 울더라도 뿌려야 한다>, <믿음의 글들, 나의 고백>, <아이에게 배우는 아빠>, <회복의 목회>, <회복의 신앙>, <요한과 더불어>, <사도행전 속으로 1>, 사도행전 속으로 2> 등이 있다.


다음은 일문일답이다.
-주일날 설교할 원고지 50~60매를 설교 전까지 모두 외운다고 들었다. 어떻게 그렇게 기억력이 좋은가.
“사람이 못났으니까 외운다. 기억력이 좋아서가 아니라 못나서 노력하는 거다.”
-젊어서 돈도 많이 벌어보게 하고, 이렇게 목회도 잘하게 하고, 특정한 사람에게만 능력을 밀어주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공평한 분은 아니지 않은가.
“(웃음) 그렇지 않다. 저는 없는 것 투성이다. 능력이 없어서 사업에도 실패하고 곤두박질 쳤다. 저는 무능력한 사람인데 보이지 않는 그 분이 제 삶을 주관해주었다. 그야말로 하나님 은혜로 사는거다.”


15살에 아버지 돌아가시자 “내가 가장이구나” 생각 
-일찍부터 사업에 눈을 떴는데, 그런 감각을 키워준 분이 주위에 있었는가.
“아버지가 사업을 했다. 사업도 하고, 문필활동도 했다. 아버지의 좋은 자산이 그대로 이어졌으면 좀 더 괜찮아졌을텐데, 일부분만 이어졌다. 아버지는 내가 15살 때 돌아가셨다. 누님 5명에 형님 1명을 위로 둔 막내로 태어났다. 형님이 어릴 때 돌아가셔 얼굴도 기억나지 않으므로 내가 외아들인 셈이다. 15살 때 아버님이 고혈압으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날 밤 생각한 것이 이제 내가 가장이구나 하는 것이었다. 누님 셋은 출가했고, 셋은 출가하기 전이었다. 누님이나 어머니도 내 호적에 등재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일찍 별세한 것이 책임감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나.
“아버지가 오래 살았다면 나도 모르게 의타적인 사람이 됐을 것이다.  그런 것도 ‘그 분’의 섭리로 느껴진다. 늘 감사하게 여긴다. 상반된 두 마음이 있었다. 내가 어려울 때 아버지가 있었으면 버팀목이 되고, 길잡이가 됐을텐데하는 마음과 함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내가 일찍 자립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었다.”


청년 때 사업도 그분에 의해 이루어진 일 
-어떻게 일찍부터 사업을 벌일 용기가 났나.
“사업을 벌였다기보다는 그런 여건이 주어졌다. 제 인생을 돌아보면 제가 의지를 가지고 하려고 한 일은 된 일이 없고, 모두가 되어진 일이다. 그 분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다. 사업도 마찬가지다. 사업 시작할 때가 20대 중반인데, 제 의지로 되는 일은 아니었다. 제가 상황을 끌고 갔다기보다는 그 상황이 주어졌다. 제가 외아들이니까 병무용어로 ‘부선망2대독자’다. 그래서 군을 면제해준다. 병역법 41조2항이다. 그런데 면제확정은 만30세에 된다. 대학 졸업하던 해 언론사에도 시험쳤는데, 마지막에 다 떨어졌다. 모든 조건이 군필자여야됐기 때문이다. 나중엔 군에 가겠다고 자원했더니 방위해라해서 방위를 마치고 제대했다.


1972년부터 외국인회사서 해외 밥먹듯 다녀 
대학 마치고 유태인회사인 아이젠버그에 들어갔다. 그곳은 화란항공사인 KLM의 한국대리점 역할을 했는데, 그곳에서 외대 사무처장에게 학생 한명 추천해달라고 의뢰가 갔는데, 사무처장이 화란은 프랑스가 가까우니 프랑스어가 필요할 것이라고 나를 추천했다. 막상 시험 치르러 가보니, 영어하는 사람을 뽑았다. 각 대학의 영어과 학생들이 와있어서 나는 합격 기대도 안했다. 그런데 지점장이 마지막 인터뷰를 하는데, 영어로 물으면 자꾸 프랑스말로 대답이 나왔다. 그래서 지점장은 이 학생은 영어도 되고, 프랑스어도 된다고 생각하고 나를 뽑은 것 같다. 외국회사에서 직장생활하면서 외국과 비즈니스 하는 회사를 만들수 있었다. 그것은 대학 사무처장의 실수로 된 일이었다. 내가 만들려고 한다고 주어질 수 없었다. 그 인생의 연장선상에서 내가 있는 것이다. 71년 2월이 대학졸업인데 70년 10월부터 일을 했다. 72년부터는 해외연수를 다녔다. 대한민국 외무부 공무원을 제외하고, 국가에서 일 보내고, 취업시키는 기관 빼고 민간인에게는 한달에 300명에게만 여권을 주던 때다. 그 당시엔 누가 외국에 여행하면 목사님부터 친척까지 공항에 가서 꽃다발을 주던 때다. 그런데 해외에 밥먹듯이 다니면서 20대 때 다른 세상을 보게 됐다.”


과도한 재물이 방탕한 생활 부르던 1984년 신학대학 ‘결심’ 
-뒤늦게 신학대학 가서 목회까지 할 의사가 있었나.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내가 사업을 하려면 교통부 장관이 면허를 줘야했다. 경쟁상대가 대단한 기업인들이었다. 내 나름대로 하나님께 면허주시고, 사업 하게 해주시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기도했는데, 막상 주체할 수 없는 돈이 주어졌는데, 한거라곤 방탕하는 거 밖에 없었다. 인생 철학이 없는 젊은이에게 과도하게 주어진 재물은 독약일 뿐이다. 1984년 주님을 뵙고, 신학대학 가겠다고 한 것은 저처럼 의지가 약한 사람이 주님을 만난 경험에서만 그치면 다시 옛날 삶으로 돌아갈 것 같아서였다. 옛삶이 잘못된 것을 깨달으면 제 정황을 바꿔야하지않겠느냐 생각했다.”

-방탕한 생활 속에서 만나던 친구들이 있고, 입에 익은 술이 있는데, 그렇게 단칼에 옛습관이 끊어졌는가.
“36년 동안 제 욕망이 원하는 길을 걸어갔었다. 어릴 때부터 모태신앙이어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주중 삶은 엉망이니만큼 주일에는 더 열심히 교회에서 봉사했다. 주중의 삶은 내 의지로 끊지는 못하지만 참 기쁨이나 의미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버리고 싶었지만 내 의지로는 버려지지가 않았다. 그 후 무엇이 가치있고, 무엇이 의미있고, 무엇을 잡고, 무엇을 버려야하는지를 알게 된 분기점이 있었고 새롭게 선택한 길이 더욱 소중했다. 제 결단만으로 했다면 옛길에 대한 미련이 있을 것이지만, 저를 찾아와주신 그분으로 인해 제가 가야 할 길을 아니, 옛길은 무의미했다. 어린 아이들이 소꿉장난 할 때 구리반지를 금반지라고 끼지 않은가. 그러나 그 소녀가 커서 남자친구에게 금반지를 받으면 구리반지는 더 이상 끼지 않는다. 사도 바울이 다마스쿠스를 가다가 임하신 그 분을 의지해서 돌아섰다. 제게 임해주신 그 분으로 인해서 그 모든 것이 아무 의미 없는 휴지처럼 보여 어떤 미련도 없이 버릴 수 있었다.”


교인 입장서 “해야 할 것” 생각…예배당 안 짓는 원칙 세워 
-목회하면서 예배당을 짓지않는다거나 미리 예산을 세워 헌금을 강요하지않는다는 등의 교회 운영 방침을 세운 어떤 계기가 있었나.
“길을 걸어갈 때, 내가 오늘 서울역 가야지 해서 내가 걸어가지만, 오늘의 내가 아니고, 나의 오랜 날들이 합쳐진 내가 가는 것이다. 목회를 하지 않고 신학교를 갔음에도 불구하고 목회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주어졌을 때 왜 그분이 나에게 목회를 시키시는가. 나에게만 그 분이 요구하는 게 뭔가. 신학교 들어가기 전에 교회에 가서 교인으로서 교회와 교직자들에 대해 무엇을 느꼈던가를 생각했다. 25살에 교회 집사가 됐다. 십년 이상 집사로서 교회를 다니면서 교회는 이런 걸 하면 안되는데, 교회는 이렇게 해야 하는 데 하며 교인 입장에서 느꼈던 것들이 있었다. 교인의 입장에서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하지 말자,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하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며느리가 시어머니 욕하면서 배운다고 하지 않은가. 또 자신이 그 위치에 올라서면 다 통념이라는 이유로 받아들여 군림하고, 내 한몸 사리사욕을 채우는 게 많은 사람들이 하는 것 아닌가. 어떻게 초심을 이 나이가 되도록 실행에 옮길 수 있었나.
“그 분과 저와의 관계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인생에서 제가 계획하고 이룬 일이 많다면 기존의 길에서 약간 첨삭만 하면서 갔을 것이다. 하지만 내 인생에서 전부 되어진 일 밖에 없었다. 되어지게 한 그 분이 주님이시다. 그것을 확인하고는 내가 있을 수가 없다. 나를 살려주신 그 분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니 내 개인의 생각은 부질없어졌다. 성경을 읽어보니, 교회는 이렇게 해야 돼. 이렇게 하지말아야 돼 그것을 알려줬다.”


‘편식’ 막기 위해 성서 순서대로 설교 
-이럴 때 늘 궁금해지는 것은 왜 같은 성경 구절을 읽고도 그렇게 해석과 생각과 행동이 다르냐는 것이다. 더구나 자기에게 특별히 영감을 주는 구절이 있고, 선호하는 구절이 있을 텐데 편식을 막기 위해 성서를 빠짐없이 순서대로 예배시간에 설교하다니, 독특하다.
“하다보니 그것도 다 은혜가 된다. 큰 철학이 있다기보다는 상황이 주어지고, 그 상황에 순종하면서 이렇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 저를 버리고 가다보면 이 길이 맞았구나 확증시켜주고, 그래서 소신껏 걸어갈 수 있었다.”


집 없지만 보이지 않는 그분이 ‘노후대책’ 
-개인 집도 없이 산다고 들었다. 사업적 능력이 탁월해서 언제든 만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한국인 중장년의 화두는 노후대책이다. 현대는 불안의 시대다. 불안하니 노후 대책이 필수적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집도 없고, 아무런 대책 없이 노후를 맞는 것이 불안하지않는가.
“믿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인데, 오늘날은 있는 것만 믿으면서 믿음이 붕괴됐다. 노후대책은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그 분을 믿는 것이 아니다. 젊은이들에게 ‘우리 각자는 소명대로 사는 것’이라고 말해준다. 모든 사람이 나처럼 살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소명대로 산다. 예수님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뭔가를 이루게 해주면 그 때 믿겠다고 한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고 거래다. 하나님은 거래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원한다. 저와 제 처에게 주어진 소명이 같다. 노후대책이 없어도 오늘까지 지켜준 그 분이 내일도 나를 책임져줄 것이라고 믿는다. 스위스 라브리공동체의 창시자 에디트 쉐프 부부는 2차대전이 끝나고 눈에 보이는 것들이 하나님을 대체하자, 알프스 산자락에 나무 별장 한채를 구해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기만 해도, 엘리야에게 까마귀를 보내 먹이신 것을 보여준 하나님의 영광을 증명하기 위해 살자고 했다. 그들은 외딴 집으로 들어갔지만 죽을 때까지 한끼도 안굶었다. 유럽에 그들이 있었다면 아시아에는 토레이(대천덕) 신부 부부가 있었다. 그들이 공동체를 시작한 시기가 비슷했다. 쉐프 박사는 최고 잘사는 나라 스위스에서 시작했다면 토레이신부는 못사는 한국에서도 최고 오지에서 시작했다. 당시 강원도 황지는 오지 중의 오지였다. 기차역에서 세시간 걸어 들어간 곳이다. 토레이 신부가 더 귀한 길을 간 것이다. 그게 믿음이다.”


진리의 푯대 쫓아야 인생이 허물어지지 않아 
-100주년기념교회엔 젊은이들이 많이 온다. 젊은들에게 어떤 ‘삶의 가치’를 전해주는가.
=인생은 시계 초침이다. 거창한 것도 아니고, 죽음이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초침 일초 일초가 쌓이면 하루가 가고, 하루가 쌓이면 한달이 가고, 그게 일생이 된다. 사람들은 일생하면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일초는 우습게 여긴다. 일초를 허비하고, 일생이 소중해질 수 없다. 에베소서 5장16절에 ‘세월을 아끼라’는 말이 있는데,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을 효율적으로 하라는 말이 아니다. ‘엑사고라소’라는 말은 ‘건져올리다’, ‘시간을 건져올려라’는 말이다. 하루에 똑같이 24시간이 스쳐 지나가는데, 오늘도 물거품처럼 날린 사람도 있지만, 그것을 건져올리라는 것이다. 그것을 건져올리는 잣대는 진리 밖에 없다. 진리의 푯대를 쫓아가면 인생이 허물어지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코끝의 호흡이 멈출 때 후회하게 된다.”
-자녀가 몇인가.
“아들만 넷이다.  내 처가 아이들을 사랑해줘서 감사하다. 요즘은 여자가 아이를 안낳겠다고 하면 못낳는 것 아니냐.”
-집도 재산도 갖지않고, 자식들에게 물려줄 것도 없으니, 자식들이 불안해 하지 않은가.
“아들들에게 말했다. 세상이 말하는 유산이란 없다. 인생길은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 어려서부터 자율과 자립을 강조했다. 스스로 결정하고, 가봐야 한다. 실패를 절대 두려워하지 마라. 실패해야 자기 길을 찾는다. 저처럼 수렁에 빠진 사람도 건져줬는데, 그 아이들이 한 순간 실패의 늪에 빠질 수도 있고, 허우적거릴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또한 재산이 되리라 믿는다.”
-국회에서 기독교 여성들을 모아놓고, 자기 자식들만 잘되라고 기도하고, 밖에선 부동산 투기나 한다고 질타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것이 불안한 현대인들 아닌가. 자신이 불안하니 내 자식이라도 덜 불안하라고 안전망을 쳐주기 위해서 죽자살자 외고에 자사고에, 명문대에 보내려고 혈안이 돼 있는 것 아닌가.
“사람들이 두가지를 착각한다. 자기 시대가 도덕적이나 윤리적으로 붕괘돼 있고, 자기 시대가 과학이 가장 발달돼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 이 사회의 병리현상은 오늘날만이 아니라 처음부터 있는 것이다. 그것을 거슬러가느냐, 편승하느냐, 그 차이다. 인생이 달게 끝나느냐. 쓰게 끝나느냐, 그거다. 눈에 보이는 안전장치를 다 쳤는데 그 속에 행복에 있는가, 사랑이 있는가. 보이는 것에 영원한 가치가 있느냐 따져보면 아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것에 따라 삶의 결과가 달라진다.”


쪽방 같은 곳에서 외로운 삶 살아가는 현대인 가슴아파 
-핀란드가 보기엔 교육천국이고, 안전망을 잘 갖춰놓은 듯 보이지만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을 찾지 않고, 대부분이 1인 가정으로 외로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얘기한 적이 있지 않나. 유럽인들이 불행하다고 보는가.
“이번에 베를린의 한인교회 연합집회가 있어서 갔는데, 숙소가 호텔이 아니고, 가정집이었다. 유럽에 가봤으면 알겠지만, 유럽의 집은 반드시 창문 밖에 셔터를 내린다. 그러면 해가 떠도 캄캄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커튼을 쳐도 빛이 들어오는데, 유럽은 바깥 세상과는 완전히 단절된다. 많은 이들이 홀로 가정을 이루고 사는데, 셔터를 내리고 골방 같은 데 있으면 밤에 뭘 느낄까. 카페나 햄버거 집에 가면 마주 앉는 테이블이 아니고, 혼자 벽보고 먹는다든가. 유리창보고 먹는다. 이렇게 살다가 인생이 끝나면 자기 인생에 대해 뭘 느낄까. 미국의 사회학자이자 목회자인 토니 캄플로가 ‘사람이 죽는 순간에 자기가 못다 이룬 업적을 후회하는 사람은 없다. 모든 사람은 죽기 전 바르게 살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고 했다. 목회하면서 장례식 수없이 치르고, 임종을 지켜봤는데, ‘내가 투자를 더했으면 더 부자가 됐을텐데, 그 때 줄타기 잘했으면 장관 한 자리 했을텐데’라고 그것을 후회하는 사람은 보지못했다. ‘해야될 것을 못한 것, 하지말아야 될 것을 한 것, 그것을 후회한다. 토지 캄플로는 ‘인간은 죽음이 자기를 덮치는 순간에 딴 세상이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에 그런다고 했다. 독일에서 쪽방 같은 곳에서 셔터를 내리고 어느날 비수처럼 죽음이 찾아왔을 때 어떻게 생을 마감할지 가슴이 아프다.”

-지난 며칠 동안 연평도 폭격훈련으로 인한 전쟁공포로  떨고 있었는데, 목사님은 안전지대에 있었다.(웃음) 이 상황을 어떻게 보나.
=독일에 가 있을 때 교민들 중에 자식들이 서울에 유학하는 사람도 있고, 서울에 사업 때문에 출장가야 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그분들도 전쟁을 겁냈다. 누군가가 비슷하게 쓰긴 했던데, 전쟁은 난다 안난다 속단할 수는 없다. 사소한 우발적인 것이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일반적으로 가진 게 많은 사람은 전쟁을 무서워한다. 한반도에서 누가 가장 부자인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다. 북한 땅이 혼자 것이다. 2천만이 자기 노예 아닌가. 흔히 북한은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기층민은 이렇게 살 바에야 전쟁이라도 하자는 생각도 하겠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전쟁이 나면 모든 것을 잃는다.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 쉽기도 하지만, 일어나는 게 어렵기도 하다. 교회와 정부는 역할 자체가 틀리다. 어떤 상황에서든 모든 종교를 포함해서, 종교는 종교가 구현하고자 하는 사랑을 구현하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국가는 안보의 경계의 끈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교회가 정부의 역할을 대신해서도 안되고, 정부가 교회의 역할을 대신해서도 안된다. 각자의 역할에 충실해야한다.”


4대강 찬성, 반대 의견 포괄해 ‘신앙공동체’ 이뤄야 
-그러면 환경문제건 평화문제건 교회는 관심을 갖지 않고, 무관심해야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불교신자든, 그리스도인이든, 개개인은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 정치적인 소견을 가지고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진전된 민주사회를 지향하는 길이다. 하지만 교인들이 모두 모여 있는 종교는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 어떤 교회는 4대강 찬성하는 사람만 있고, 어떤 교회는 반대하는 사람만 있다면 그것이 교회이겠는가. 친목단체일 수는 있다. 교회의 가장 기본성이 보편성이다. 어떤 이념이든지 다 들어와 어울릴 수 있어야 한다. 로마 식민지인 유대에서 마태는 세리였다. 당시 세리는 매국노였다. 시몬은 열심당원이었다. 급진주의자다. 시몬의 입장에서 마태는 청산해야할 공적1호였고, 마태의 입장에서 시몬은 천하대세를 읽지못하는 철부지였다. 그들이 예수님 때문에 한테이블에 앉은 것이다. 4대강 반대나 찬성쪽으로 한목소리를 내는 게 아니라. 찬성하는 사람도, 반대하는 사람도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할 사회를 이루어 신앙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것이 교회가 지향할 바가 아닌가. 나도 개인적인 의견이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개인적인 의견을 드러내지 않는다.”

-사회적인 현안이기 때문에 교회가 침묵하고, 권력의 불의에도 눈을 감아야 하는가.
“의나 불의의 문제일 때는 분명히 밝혀야 한다. 하지만 4대강은 선악의 문제라기보다는 우선순위나 정책의 문제, 관점의 문제다. 선이나 악, 의나 불의가 분명할 때는 말할 필요가 없다. 2차 대전에 끝나고, 드골이 프랑스의 대통령이 됐는데, 사임하고, 드골이 다시 국민의 부름을 받고 총리가 됐다. 좌우가 극심히 대립하다가 통합의 시대로 들어가는데, 드골이 한 말이  ‘나는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다. 나는 그위에 있다’고 했다. ‘나는 그 위에서 군림한다’는 교만이 아니고, 우파도 좌파의 대통령도 아니고 프랑스 모두를 위한 대통령이라는 것이었다. 4대강은 개개인이 판단할 문제이지, 단체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사회통합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여야에 대해서도 한 교회 목사는 수십년 동안 일관되게 한편만 들고, 강남의 모교회는 일관되게 반대편만 든다면 둘 다 문제가 있지 않은가.”


예수는 사람을 사람되게 하기 위해 오신 것 
-예수 그리스도가 온 성탄절기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왜 왔는가.
“예수님은 사람을 사람되게 해준 분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보면 흙으로 사람을 지었다고 했다.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래서 생영이 된 것이다. 흙과 호흡이 합쳐지면서 인간이 된 것이다. 죄로 말미암아 생기와 단절됐다. 예수님은 흙에 생기를 다시 불어넣기 위해 오셨다. 사람을 사람 되게 하기 위해서 오셨다. 공동묘지를 뛰어넘는 사람으로 생기를 누리는 생령으로 살게 한 것이니까 우리에게 복음이다. 어머니 태속에 있는 것을 태아라고 하지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다. 또 내 심장이 마비되면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시체라고 한다. 사람은 자기 코로 호흡하는 순간부터 호흡이 멎는 순간까지만 사람으로 본다. 인간의 호흡은 하면 할수록 늙어간다. 그리고 결국 흙으로 돌아간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그 영혼을 호흡함으로써 사람답게 살게 된다.”

-지구상에서 제일 정신없이 바쁘고 스트레스 많이 받는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 아닌가.  이에 동의하는가. 그처럼 바쁜 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충분히 동의한다. 성탄은 주님을 믿든 믿지 않든 일년에 한번 자기멈춤의 시간이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지금 뭐하고 있는가. 어디로 가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라고 하는데, 왜 구원자인가. 나는 구원의 삶을 살고 있는가. 자동차가 엑세레이터만 있으면 흉기다. 브레이크가 있어야 한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2011-08-18

교회 크기 따지지 말고 영혼 위해 몸 던져라 신학생 컨퍼런스, 이재철 목사의 ‘신앙과 인생’- 김성회// 미주뉴스앤조이, 2011-08-10


교회 크기 따지지 말고 영혼 위해 몸 던져라
신학생 컨퍼런스, 이재철 목사의 ‘신앙과 인생’
2011년 08월 10일 (수) 10:48:58김성회  peace@newsnjoy.us

<미주뉴스앤조이>에서 주최한 제 3회 신학생 컨퍼런스는 기존의 방식을 탈피해 참가자들이 자유롭게 질문하고 강사가 대답하는 형태로 진행이 됐다. 참가자들은 "한 달에 쓰는 책값이 얼마인가"라는 가벼운 질문부터 "왜 이렇게 어렵게 목회를 해야하는가"라는 목회자로서의 존재에 대한 고민까지 쏟아냈다. 1회 강사로 나선 이재철 목사와 참가자들의 대담을 옮겼다.

안식달을 맞아 마틴 루터의 고향을 7월 말에 일주일 동안 여행했다. 가장 마지막 날 찾아갔던 아이스레벤이라는 도시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 아이스레벤은 마틴 루터가 태어난 도시다. 마틴 루터가 태어난 집은 기념관이 되어 있는데 그 집 옆에 성 베드로 성당이 있다. 마틴 루터가 세례를 받은 곳이며 삶이 시작된 곳이다. 그런데 그 도시가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주는 이유는 바로 그 도시에서 마틴 루터가 죽었기 때문이다. 성 안드레아서 교회가 있는데 거기서 한 설교가 마지막 설교였다. 그리고 거기서 쓰러져 성 안드레아서 교회 앞 집에서 죽었다. 태어난 집과 죽은 집이 직선으로 200미터가 되지 않는다. 생과 사의 거리가 200미터가 되지 않는 곳이었다.
  
 
 ▲ 이재철 목사. 
 
마틴 루터가 그 거리를 걸어갔는데 그의 삶을 통해서 세계의 역사가 바뀐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생과 사는 붙어있다. 글자 자체가 '과'라는 토씨 사이에 붙어있지 않은가. 우리 중에 20년 사는 사람, 90년 사는 사람이 있지만 그 자연 길이가 얼마이던 간에 생과 사는 붙어있다.

어떤 사람의 인생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역사의 지평에 영향을 미친다. 마틴 루터처럼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고 같은 독일에서 태어난 히틀러처럼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이번 2박 3일의 여정이 생과 사의 기로에서 우리가 어떤 길을 걸어가고 있는가, 내가 떠나고 난 뒤에 역사에 무엇을 남길지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아이스라는 것은 얼음, 레벤이라는 것은 삶을 뜻한다. 마틴 루터가 태어나고 죽은 곳은 ice life라는 뜻이 된다. 한 인간의 삶에 대한 평가는 냉정하다는 뜻으로 읽혔다. 2월부터 안식월 중인데. 두바이와 사우디아라비아 지나면서 선교사 대회 참가하고 2월말부터 6개월간을 그냥 쉬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이 6개월만의 처음이다. 내가 말하는데 적절한 단어가 사용 안 되거나 표현력이 짧아도 양해 바란다.

“선교사를 볼 때 자녀를 어디서 공부시키는가 본다”


참석자 / 한인 디아스포라 사역으로 선교 사역을 감당했고 목회를 오랫동안 해오면서 많은 선교사들을 만났을 텐데 선교사로서 목회자로서 어떤 것이 가장 구비되어야할 자질인가. 한국 교회 선교가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한국 교회 선교의 현실은 어떻고 과제는 무엇인지. 한국 교회 선교의 미래를 위해서 목회자들이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의견을 듣고 싶다.

이재철 목사 / 주님께서 너희는 땅 끝까지 가서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지상 명령이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2000년 전부터 땅 끝에 대한 부담감을 가지고 살아왔다. 예수님께서 땅 끝이라고 말씀하실 때, 당시 사람들은 땅 끝이 평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구는 둥글다. 그러니까 한 방향으로만 계속 가면 내가 있는 지점으로 다시 오게 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땅 끝은 절대로 지리적 땅 끝이 아니다. 땅 끝은 내가 두발 딛고 서 있는 내 삶의 현장, 우리 집 안방이고 내 교회다. 선교를 지리적으로 보니 선교와 목회가 분리된다. 이러다 보니 선교를 고상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 목사가 자기 아내와 자식과 함께 살고 있는 이 방이 땅 끝이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곳이 땅 끝의 출발점이라고 가르치셨다. 갈릴리가 출발점이었다. 자기 집 안방, 내 학교, 내 가게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지구 반대편에 가서도 선교사로 살 수 있지, 그렇지 못하면 종교 사업가 밖에 될 수 없다.

존경하는 어른 대천덕 신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미국에서 명문 대학을 졸업했다. 한국에서 (현재 성공회대학교의 전신인) 성미카엘신학교의 학장도 맡았다. 1964년에 강원도 황지에 들어가 선교를 시작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해도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산으로 들어갔다. 당시의 강원도 황지는 청량리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밤새 가야했다. 역에서 내려서 세 시간을 걸어야 나오는 곳이었다. 대천덕 신부가 거기에서 예수원을 하면서 당신 딸과 아들을 그 분교에 보냈다. 이유는 하나였다. '내가 한국인을 사랑하고 내가 황지를 선교지로 삼았다면 내 자식도 여기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천덕 신부가 아이들을 그 분교에 보낼 때 두려움이나 고통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먼저 하나님의 나라의 의를 구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해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대천덕 신부는 선교비를 자식 교육에 쓰지 않았다. 자식들은 더 커서 자기가 선택할 시기가 왔을 때 나가서 자기가 일할 자리를 찾았다. 대천덕 신부는 종교 사업을 한 사람이 아니다.

나는 선교사들을 볼 때에 그들이 자신의 자녀를 어디에서 공부시키는가를 본다. 나는 제네바에 3년을 있었는데 만약에 제네바가 아프리카 오지였다면 아이들을 데려갔을 것이다. 내 아이들을 데려가지 않고 혼자 갔던 이유는 가난한 제네바한인교회가 자립하지 못하고 봉급의 60%만 받고 일해 달라는데 그런 곳에 아이들을 데려가면 자녀 교육을 위해 갔다고 오해할까 싶어서였다. 내가 가는 선교지가 아이들을 공부시킬 수 없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어떻게 선교지를 섬길 수 있겠는가. 내 수준에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분들 수준에 맞추어 사는 것이 선교다. 선교의 가장 큰 문제는 선교지를 지리적 거리 문제로만 생각하는데 있다. 본질적으로 땅 끝이 어딘가, 내 수준에선 내가 시혜자가 되는 것. 본질적인 문제가 규명되지 않는 한 문제가 계속 생길 일이라고 본다.

우리가 그동안 안이하게 너무나 많은 선교사를 내보내 역풍을 맞았다. 영국을 보면 경제적으로 어려울수록 선교사의 파송이 더 많았었다. 영국이 경제적으로 어려울수록 젊은이들이 취직할 데가 없었다. 그런데 선교사로 나가면 자식 교육까지 다 되니 경제가 어려울 때 선교사 지망생이 폭증한 것이다. 선교의 본질을 깊이 생각하지 않은 것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

  
 
 ▲ 이재철 목사에게 질문하고 있는 참가자. 
 
참석자 / 믿음의 길을 갈 때 자기가 가는 길이 하나님의 뜻인지 어떻게 알고 갈 수 있을까. 이성과 지성을 넘어서는 말씀을 들었다고 생각했을 때 그런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영성이 필요한 것 같다. 지성과 영성의 갈림길에 섰을 때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것, 하나님 마음에 얼마나 맞는가를 아는 것을 실생활에서 어떻게 알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좀 알고 싶다. 

이재철 목사 / 지금 내 곁에 계신 하나님에 대한 통찰력이 바로 영성이다. 내가 화장실에 가든, 안방에 있든 어디에 있든 그곳에 계신 하나님을 알아보는 것이다. 현존자 하나님, 언제나 나와 함께 하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해 깨어있는 의식을 가지는 것이 영성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내가 바라는 것을 성취시켜 주기 위해 내 옆에 계시는 분이 아니시다. 내 곁에 계신 그분은 이분 곁에도 계시고 저분 곁에도 계신다. 사람의 계산상으로는 손해가 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책임져주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두 길을 놓고 어떤 길이 하나님을 원하시는 곳이 어딘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을 때 하나님의 뜻은 나에게 유리한 것에 가있지 않고 모두에게, 다른 사람에게 유리한 것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저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나를 당신의 통로로 쓰시길 원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선택의 기로에서 선택은 아주 쉽다. 아무리 하나님을 믿어도 그 통찰력을 접어두고 내 중심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

이삭을 바치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을 때 아브라함이 어떤 심정이었을지 ,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혹은 고민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아브라함은 고민이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안 죽이실 것이다 죽여도 살릴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하인을 밑에 두고 아들에게 나무를 지우고 올라가자 이삭이 양이 어디 있냐고 묻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다'고 대답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히브리 본문을 영어 성경은 "we will come back"이라고 했다. 내가 아니라 우리였다. 내가 믿음을 보았다. 성경이 뭐라고 하냐시면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하나님이 멈추라고 할 때 가장 먼저 한 일이 눈을 들어 숫양이 있는지 먼저 확인했다. 다른 면으로 보면 아브라함이 고민이 굉장히 많았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아브라함이 믿음의 수준에 올라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브라함이 갈등도 있고 번민도 있었겠지만 믿음으로 응답했다. 영성의 삶은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 하시는 통찰력을 키우는 것이다.

참석자 / 목사님의 책을 읽어보면 자기 비움을 말했는데, 자기 비움을 실천하기 위해서 주님의교회를 내려놓으셨는지, 내려놓음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것은 무엇이었는지 듣고 싶다.

난 주님을 만나기 전 정말 타락한 사람이었다. 내가 지금 목사로 살아가니 미화시켜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노름꾼에, 술꾼에 심지어 마리화나까지 손을 댔다. 만약 마리화나가 내 몸에 맞았다면 중독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오늘날처럼 서울에서 마약을 구하기 쉬웠다면 마약도 했을 것이다. 그런 수렁에 있는 사람을 주님께서 내 처를 통해서 구원해줬기 때문에, 바울이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는 심정을 잘 알았다. 비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자기와의 싸움이 어려웠다. 사람이 큰 싸움에서는 잘 이긴다. 작은 싸움에서는 넘어진다. 속에서 일어나는 작은 것들을 다스리는 것이 어렵지, 자리를 내려놓고 하는 것은 어려움이 없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였다.

참석자 / 장남으로서 부모님 섬기는데 어려움이 많다.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부모로부터 자립하는 것을 많이 배우고 있는데, 목회자가 어느 선까지 부모님과 가족들을 돌보는 것인지 기준선이 있다면 알려달라.

이재철 목사 / 그리스도인이 부모님을 모시는 것은 유교에서 이야기하는 부모를 공경하는 차원이 아니다. 이것은 그것 봐도 한 차원 더 높아야한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하나님은 안 보이신다. 안 보이는 하나님에게 어떻게 순종의 삶을 살겠는가. 안 보이는 하나님에게 순종의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은 보이는 누군가에게 순종하고 사는 것이다. 거기서 순종을 배워야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에 보이는 순종의 대상이 부모님이다. 부모님들이 어긋난 행동을 보여줄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모시는 마음이 순종하는 마음이다. 그것이 훈련이 되는 것이 단순히 부모와의 관계뿐 아니라 하나님의 관계로 연장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 부모와의 관계를 껄끄러워하는 그 어떤 장남도 자기 자식은 끔찍이 사랑한다. 그 아이가 자기와 같이 살까 말까를 고민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식은 결국 내가 하는 대로 나를 보고 배운다. 내가 부모와 거리를 두고 살면 반드시 내 자식도 거리를 두고 산다. 자기 부모에게 의무를 다하지 않고 자기 자식만 사랑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안타깝다. 자식에게 내가 내 부모에게 하는 것처럼 나에게 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말로 카바드라고 쓰여 있는데 그것은 무겁다는 뜻이다.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그분이 살아오신 삶의 무게를 존중하는 것이다. 내가 기독교인으로 부모님들 모시고 사는 것은 내 마음으로는 못 배우고 못마땅해도 모시는 것이 아니다.

내 아버지는 나보다 30년 먼저 사신 분이다. 그 무게를 존중하면 병석에 누워있는 아버지도 내 멘토가 되는 것이다. 부모와 반드시 한 집에서 같이 사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양로원에 보낼 수도 있다. 형편에 따라서 하면 된다. 제일 중요한 것은 마음속에 부모님의 삶의 무게를 존중하는 것, 그것이 있느냐 없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그것만 있으면 부모님과의 많은 갈등의 부분이 해소된다.

특히 목회자의 가정은 투명한 유리가 꽂혀있는 쇼윈도우여야 한다. 누구든지 그 집을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한다. 부부는 어떤가, 자식은 어떤가, 세상 사람들대로 교육시키는가, 아니면 정말 하나님 말씀대로 교육시키는가. 부모와의 관계는 어떤가.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는 우리 목회자가 부모님과의 관계를 성경에맞추어 확립해가야 한다.

형제도 부모도 한 몸이 될 수는 없다. 오로지 부부만 한 몸이 될 수 있다. 부부는 0촌, 부모는 1촌, 형제는 2촌이다. 부부 관계, 아내와 남편은 서로가 0순위가 되어야 한다. 부모는 1순위다. 부모를 공경하는데 아내가 뒷전이어서는 안 된다. 내가 부인을 사랑하기 때문에 아내가 내 부모를 일촌으로 모시는 것이다. 요즘 보면 결혼하고 나서 자기 자식을 0촌으로 생각하는 여자들이 있다. 그 다음에 개가 1촌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웃음) 또 이 아들을 결혼시켜놓고 나서 아들이 운전하는데 엄마가 아들 옆에 앉는 사람이 있다. 며느리는 뒷자리에 앉고. 부부가 0촌이 될 때 바람직한 부부가 된다. 그것이 자식들에게 행복과 사랑의 교육이 되는 것이다.

참석자 / 아들과 관계가 어떤지. 아들에게 아버지인지 목사인지? 

이재철 목사 / 나는 내 아이들을 목사의 자녀로 키우지 않았다. 대부분의 목사들이 자녀와의 관계에서 갈등을 낳는 경우가 많다. 목회자 자녀에게 요구되는 도식적인 모습을 요구하지 않고, 아이들과 가족들과 같은 가치관을 지니려고 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길과는 다른 길을 걸어가려고 했다.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동의해줬고 잘 자라줬다. 목사의 아들이기 때문에 뭘 구속을 받거나 그러지 말고 하나님이 너를 이승훈으로 만들었으니 이승훈답게 살라고 가르쳤다. 자녀들 스스로 목사의 아들답게 처신하려고 애써주는 측면은 있다.

선교는 교가 아닌 도를 퍼뜨리는 것

참석자 / 미국 교회에서 미국 목회를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선교의 본질에 가장 갈등이 많아서 한국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엔 한국 교회에서 선교 이야기가 나오면 항상 전도와 연결시킨다. 선교위원회 회의 때 전도 이야기만 하기에 선교는 더 광범위하다고 하니까 모두 나를 이단 보듯이 했는데, 왜 한국 교회는 ‘사회 문제(social witness)’까지 선교에 포함 못시키나.

이재철 목사 / 사람들이 전도만 한다고 할 때 그 전도라고 하는 것은 본래 의미에서 왜곡된 것이다. 예수 믿고 천당 가시오라고 하는 것은 실상은 전도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전도라는 말이 그렇게 바뀌었다. 선교는 어디 가서 사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런데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는 말이 예전 번역으로 보면 태초에 도가 있으니라였다. 그 도가 예수그리스도시다. 예수 그리스도가 도인 것이다.

선교라는 것이 번역이 잘못 됐다. 교를 퍼뜨리는 것이 아니라 도를 전하는 것이다. 도를 전하려면 삶이 빠지면 안 된다. 내가 도 위에 있을 때만 선교가 되는 것이다. 도대로 사는 사람이면 참된 선교사다. 내가 가서 어떻게 사는가의 문제이다. 산다는 것은 결국 그분의 통로가 된다는 것이다. 그 삶이 배제되면 그 삶이 선교나 전도냐 어떤 말이 되던 간에 비본질적인 후유증이 파생되기 마련이다.

  
 
 ▲ 신학생 멘토링 컨퍼런스에서 김영봉 목사와 이재철 목사가 참가자들과 대화하고 있다. 
 
김영봉 목사 / 대부분의 이민 교회에서 겪고 있는 문제라고 본다. 전도 일변도로 교육 받은 사람들이 어느 교회에나 있고 선교라고 하는 것이 도를 살고 함께 동행함으로써 하나님을 알게 하는 과정으로 생각하지 않고 어쨌든 전도하고 영접 기도까지 해야 선교라고 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참석자 / 삶을 살면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가 잘 될 때 주님을 위해 죽을 수 있다고 맹새하다가 안 될 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지 않는다는 감정적 우울증이 오기도 한다. 감정적, 믿음적 신앙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한 이후에도 인격적 만남이 있기 전의 삶으로 회귀하고 돌아오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때 신앙적 갈등이 생긴다. 

이재철 목사 / 감정으로 하는 문제, 믿음으로 하는 문제, 탕자가 돌아오지만 빗나가고 돌아오고를 반복하는 것을 불교에서는 돈오돈수, 점오점수라고 가르친다. 돈오돈수는 한 순간에 깨우치고 완성된다는 것이고, 점오점수는 수련을 통해 깨닫고 수련을 통해 갈고 닦는다는 것이다. 끊임없는 수련을 통해서 되어져간다는 것이다. 그 논쟁이 20년 전에 크게 있었는데 불교에 뜻 있는 승려들은 두 가지가 다 있어야한다고 봤다.

사람들은 사도 바울의 삶을 보고 다마섹에서 예수님 만나고 확 돌아서서 개신교의 선봉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아라비아 경건 훈련 3년, 고향 다소 칩거까지 무려 13년이 훈련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도 바울은 죽을 때까지 주님의 복음을 들고 나가면서 날마다 나는 죽는다 하며 주님의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데 그것은 훈련이다. 죽을 때까지 훈련이다. 그런데 그 훈련이라는 것은 부부지간도 마찬가지 다 연애할 때 사랑해서 하지 않나.

선교를 나갈 때 내가 가야 한다는 뜨거운 마음으로 가지만, 그게 그렇게 쉽지 않다. 남녀 관계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감정으로 사랑해서 결혼하지만 훈련을 통해서 평생을 함께 사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훈련을 통해서 깊은 사랑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주님 안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훈련해 가는 것이 필요하다.

“남이 돌보지 않는 사람을 위해 목회하게 해달라 기도했다"

참석자 / 이민 교회에서 목회를 경험하다보니 많은 교회에 담임목사와 부교역자 간의 갈등이 있다. 결국 부교역자가 담임목사에 대한 안티 세력을 데리고 나가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되고, 빠져나간 교회가 또 분열하는 아픈 모습을 보게 된다. 목사님이 생각하시는 가장 중요한 목회란 무엇인가.

이재철 목사 / 안티 교인 몰고 나가면 같은 일이 반복된다. 목회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목회는 소명으로 하는 것인데 그 소명은 인간에 대한 소명이다. 정말 한 심령, 한 인간을 위해서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소명에 내가 나를 드리는 것이 목회다. 그 때 그 과정을 통해서 당신이 열매를 이루어 가시고, 그 열매만 쓴 열매로 끝나지 않는 것이다.

제네바한인교회를 포함해 3번의 목회를 했는데, 내 경우를 말하자면 세 번 다 내가 자청하지 않았다. 세 번 다 내 자의와는 전혀 상관없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 세 번이 다 사람에 대한 소명감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주님의교회를 시작하게 된 것은 여성 문인들과 우리집 2층에서 성경 공부를 하는데 어느 분들이 교회를 같이하자고 제안을 해오면서 시작됐다. 나는 그 교인들에게 "내가 워낙 타락한 사람이었고 신학교도 목회를 하러 간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고 내 인생을 예전처럼 답습하고 싶지 않아서 신학교를 간 것이었다. 난 술을 매일 마시고 마리화나까지 해본 타락한 사람이었다. 개척한 교회는 없던 것이 생기는 교회다. 성결한 목사가 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며 거절했다.

그러면 성경 공부만 하자고 해서 시작했다. 그 당시에 대표적인 대형 교회 분란이 있을 때 나오신 분들이었다. 나를 아는 그 교회 교인들이 "나쁜 사람이다"며 놀지 말라고 했다. 마지막에는 친척들까지 전화를 해서 "이제 신학교 가서 새 인생 사는데 이력에 흠나는 짓 하지 마라"고 경고했다. 마지막에 그 전화를 받고 전화기를 내려놓으면서 결심을 했다. 아 교회를 해야겠구나라고 결심했다.

나는 목회할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도하면서 "하나님 혹 제가 목회를 해야  한다면 남이 돌보지 않는 사람을 위해 목회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모든 사람이 놀지 말라면 내가 놀아주겠다는 간단한 생각으로 주님의교회를 시작했다. 주위에서 나를 아낀다는 모든 사람들이 놀지 말라는 사람들과 놀기 시작했다. 6가정인가 7가정이 시작했다. 그 사람들이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학력이나 신앙경력으로 부족한 분들이 아니었다.
백주년기념교회도 선교사 묘역을 지키는 교회를 세워야 되겠는데 나를 오라고 원로들이 부탁했다. 그래서 나는 할 수 없다고 사양했다. 그랬더니 그 어르신들이 울면서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다시 시작했다. 어른들이 그렇게 지키려는데 못 지키고 있는 사실에 그렇게 안타까워하시는데 그분들을 위해서는 내가 해야하지 않겠는가 생각했다.
큰 목회 작은 목회 따지지 말고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영혼이 누구인가, 그 영혼을 위해 몸을 던져라. 비움을 이야기할 때 비움과 자기 싸움을 혼돈할 것 같은데 편해지고 싶을 때 편하게 있고 싶을 때 나와 싸워야 한다.
*후속 기사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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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 외에 어떤 길을 가겠습니까?" 신학생 컨퍼런스에서 이재철 목사와 참석자들이 눈물 쏟은 사연- 김성회// 미주뉴스앤조이, 2011-08-15


"이 길 외에 어떤 길을 가겠습니까?"
신학생 컨퍼런스에서 이재철 목사와 참석자들이 눈물 쏟은 사연
2011년 08월 15일 (월) 18:37:56김성회  peace@newsnjoy.us
"목사님, 우리가 이렇게까지 해서 살아야 합니까?" 신학생 멘토링 컨퍼런스 둘째 날인 8월 9일, 스무 명 남짓한 교인들과 함께 교회를 개척해 목회하고 있다는 한 참가자는 질문과 함께 눈물을 쏟았다. 이재철 목사의 책을 하나도 빠짐없이 읽었다는 그는 책을 대할 때마다 행복했지만, 정작 그렇게 살 자신이 없었기에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고백했다. “십자가가 저렇게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겠나"는 물음과 함께.

이재철 목사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반추하며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허랑방탕한 알코올중독자에 도박 중독자였습니다. 마리화나에도 손을 대었습니다.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저는 도저히 목사가 될 수 없는 무자격자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의 보혈로 저를 구원해주셨을 뿐 아니라, 저를 당신의 종으로 세워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많이 탕감 받은 자는 많이 사랑하고 적게 탕감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저는 세상에서 가장 많이 탕감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살수밖에 없고, 죽도록 그분께 충성할 수밖에 없습니다."

참석자의 질문에 대답하던 이재철 목사의 목소리도 떨리기 시작했고,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 이재철 목사는 눈물을 닦으며 질문을 한 참가자에게 "우리 목회의 동기와 출발점이 내가 아니고 그분이 된다고 하면 이렇게 까지라도 해야 하냐고 물을 것이 아니라, 이 길 외에 어떤 길을 가겠습니까 하고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참된 목회자가 되기 위해 몸부림치는 목회 초년생의 절규에 이재철 목사는 쉽게 꺼내놓기 쉽지 않은 지나온 삶의 질곡을 조심스럽게 공개했다. 자신의 고백을 통해 한 젊은 목회자가 평생 참된 목회자로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기를 위한 마음에서였다.
  
 
 ▲ 이재철 목사. 
 
강의 형식이 아닌 질의응답이 오고가는 현장의 분위기를 글로 표현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무모한 일이기도 하다. 내용보다 더 중요한 정황을 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내용을 옮긴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신학생 멘토링 컨퍼런스의 현장은 멘티들의 영적인 고뇌와 멘토들의 따뜻한 위무가 함께하는 자리였다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다음은 이재철 목사의 두 번째 강의 때 오고갔던 내용들이다.
참가자 / 예전에 스님과 신부를 모셔서 강의를 열었다고 들었다. 아이들에게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뉴에이지 사상과 다원주의가 강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종교를 뛰어넘는 감염이 들어오면 안 된다는 우려가 있는데 이런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이재철 목사 / 스님과 신부가 독신으로 산다. 그렇다고 개신교 목사가 스님과 신부가 추구하는 구도의 정신보다 엷어야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스님도 사귀어보고 신부님도 사귀어보라고 진심으로 당부한다. 구도자가 어떤 중심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알게 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도'로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일종의 '도'를 쫓는 구도자다. 한국의 유명한 사찰의 스님들이 기거하는 곳을 담 너머로 들여다보면 고무신들이 자로 잰 듯 가지런하게 놓여있고, 아무개 신부의 책상 위에는 비뚤어진 것이 없다.

내가 도를 추구하면 내 주위가 저절로 정돈된다. 목사들이 식당에 가면 구두를 꼭 남이 정리해줘야 한다. 우리 교역자에게 해주는 말이 있다. 교인들은 목사가 하는 말에 감동 받지 않는다. 목사가 떠난 책상을 보고 감동 받는다. 밥알을 지저분하게 남기지 마라. 책상을 깨끗하게 정리해라.

우리 구도의 정신은 신부, 스님 이상으로 철저해야 한다. 독신이 아닌 이상 가족이 함께 결단해야 한다. 아이들 키우면서 목사의 아들이 아니라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살도록 노력하고 있다. 내가 목사로 살기로 결단했기 때문에 내 아내와 아이들도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목회자가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모두 포기하면 권위는 저절로 생겨난다. 함께 목회하고 살아가는 교인들에 의해서 권위는 생겨난다. 사람들이 목사를 신뢰한다.

목회자는 경제적인 자립이 되어야한다. 그것은 자기가 필요한 만큼의 돈을 스스로 벌어들일 수 있는 능력이 아니고 자기에게 주어진 경제적 상황에 자기를 맞출 수 있는 능력이다. 그 상황에 나를 맞출 줄 아는 것, 물질로부터 초월하는 것 그 이후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고 바울은 말한다. 100주년기념교회에서 415만 원 봉급을 받는다. 세금을 떼고 나면 약 370만 원 정도를 받는다. 내 아내가 홍성사를 경영하면서 약 300만 원 받는다. 거기에서 십일조한다. 판공비는 따로 없다. 내가 쓴 책이 상당히 많이 나갔다. 그 인세가 1 억이 모였을 때, 홍성사가 조그마한 창고를 지어야 해서 그 돈을 다 줬다. 또 인세가 5,000만 원 모였을 때 홍성사 직원들이 다 같이 홍성사 문을 닫고 터키 성지 순례를 다녀왔다.

내가 주님의교회를 퇴임했을 때, 교회에서 나에게 예우를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냐고 물어왔다. 주님의교회에서 몇 억 받았다는 소문을 들었다. 하지만 정말 타락했던 나를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나를 구하셔서 내가 주님의교회에서 목회하면서 내가 월급을 받는 고용인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았다.

나는 교인들과 더불어 사는 가족이라고 생각했다. 가족이라고 생각했는데 퇴직금을 준다고 해서 사양했다. 재정 장로가 목사님이 퇴직금을 받지 않으면 후임자들이 받을 수 있겠는가 하고 문제 제기를 했는데, 일리가 있는 지적이었다. 그래서 법적 퇴직금만 달라고 했다. 퇴임할 때 한 달 봉급이 220만 원이었는데 열 달치인 2,000만 원을 퇴직금으로 받았고, 그 돈은 정신여고 건축 기금으로 다 냈다.

내 처와 나는 돈을 모으는 통장을 가지지 않고 우리 명의 집을 가지지 않기로 하나님께 서원하고 살고 있다. 늙어서 어떻게 살겠는가라는 질문에 어제 셰퍼 박사와 대천덕 신부 이야기를 하면서 나왔었는데, 두 분이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

한 분은 알프스 산 속에서 한 분은 강원도 황지 산 속에서 계시는데 그분들이 살아생전에 단 한 번도 굶은 적이 없다고 했다. 하나님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해결해 주신다. 셰퍼 박사의 경우 어느 날은 살림 사는 집사가 와서 내일 먹을 것 없다고 했다. 새벽이 되니 사람들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청년들이 들어오는데 청년들 어깨에 빵, 버터, 과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평소 아침 식사 시간에 도착했다고 한다. 어디서 왔냐고 물으니 영국 런던에서 왔다고 했다. 몇 달 전부터 준비해서 어제 영국에서 출발했다고 했다. 셰퍼 박사에게는 그것이 그냥 빵이 아니었다. 주님께서 셰퍼 박사에게 빵을 주기 위해서 몇 달 전부터 영국 청년들을 감동시키고 비행기를 태워서 모든 것을 시간을 맞춰 오지 않았나.

나도 그런 리듬으로 살려고 애쓰고 있다. 목회자가 큰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노후 걱정을 하고, 자기가 사랑하는 교인들에게 퇴직금으로 몇 억 내라고 하며 한국에서 요즘 싸움이 자주 벌어지지 않나. 우리가 정말 물질에서부터 자유하는 이 믿음, 내가 내 기득권을 포기하고도 걸어갈 수 있는 리듬으로 간다면 내게 예금 통장이 하나 없어도 하나님께서 내 노후 대책이 되어주리라 믿는다.

참가자 / 내가 칭찬하면 하나님 칭찬을 가로채는 것은 아닌가, 칭찬은 어디까지 해야하는가?

이재철 목사 / 내가 주님의교회에서 목회할 때, 어떤 여집사가 새벽 기도가 끝나면 아무도 모르게 타월을 갈았다. 아무도 모르게 주님을 위해서 봉사하는 자리에 주님의 터치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목회자의 칭찬과 사람의 칭찬이 얼마나 공허한지 알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하시는데 저 분만이 즐기는 하나님의 교류를 방해하지 말자며 새벽 기도 끝나고 바로 화장실을 가지 않았다.

헌금 봉투에 이름 안 쓰는 것도 그래서 시작한 일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일 원이든 만 원이든 내가 내서 하나님께 오는 위로를 내가 받으면 세상 사람들의 스포트라이트가 아무 소용없게 된다.

우리가 아이를 키우는 데 단계가 있다. 교인들 중에는 어깨를 쓰다듬어야 할 교인도 있고 내가 말로 칭찬해야 할 교인도 있고 한 번 툭 쳐야 할 교인도 있다. 그러나 평생을 교인이 목회자의 칭찬의 틀 속에 갇혀 있게 하면 안 된다. 주님의 손길을 바로 느낄 수 있도록 통로가 되어주는 것이 목회자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참가자 / 백주년기념교회의 직분 호칭, 제도 문제에 대해 직접 들어보고 싶다.

호칭 제도는 잘 아시리라 생각한다.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제네바에서 칼뱅이 개혁을 했다. 칼뱅이 개혁을 할 때 칼뱅은 장로교회라는 이름으로 만들지 않았다. 칼뱅은 개혁 교회(reformed church)를 시작했다. 교황 일인 치하의 교회를 개혁(reform)하는 교회를 만든 것이었다. 교인들의 뜻을 대의하는 장로들을 뽑아서 대의정치를 하게 한 것이다.

우리가 교회를 개혁하는데 내가 제네바에서 하는 시스템을 따를 필요가 없다. 현지의 시스템에 맞추라고 칼뱅이 말했다. 그 모든 교회의 이름은 개혁 교회(reformed church)다. 칼뱅의 개혁 정신을 살리는 교회다.

교인들이 선출한 장로가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장로를 하는 것이 미국의 정서에 맞지 않아 미국의 장로교회는 직능의 의미로 장로를 삼았다. 20대 장로는 20대를 대표하는 직능 대표로 뽑히는 것이었다.

이 장로교가 한국의 유교적 가부장 제도와 결합하면서 변형됐다. 지난 1~20년 동안 장로 제도에서 그치지 않고 장로에 필적하는 직분을 주기 위해 세계 유일의 권사 제도를 만들었다. 이 직분 제도가 한국의 교회를 부흥하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100년을 지나오면서 장로, 권사가 계급화되고 서열화되면서 교회의 문제점이 된 것이 실상이다.

그래서 봉사자인 장로, 권사 투표를 하는 데 돈을 쓰지 않나. 교회에 따라서 차량 안내를 해라, 성가대 대장을 해라하는 식의 장로 잘 뽑히는 부서가 있다. 오늘날 한인 교회는 어떤가? 장로, 권사 안 주면 교회를 떠나지 않나. 장로, 권사라고 하는 제도가 변질된 것이다.

한국 교회의 장로, 권사 제도가 큰 기여는 했지만 지금은 부작용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바꿔 입어야 할 백년 된 옷을 바꾸지는 않는다. 장로를 뽑아야 임직예배할 때 헌금을 할 것이고, 그게 교회 재정이 도움이 되니, 이런 악순환이 반복된다. 감리교는 본래 장로가 없지만 한국에는 있지 않나. 침례교도 마찬가진데, 호칭 장로가 재작년 통과됐다고 들었다. 다른 교단과 일할 때 다른 교단은 다 장로가 나오는데 자기들만 집사가 나오면 차이가 난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걸 보면 장로 제도가 철저한 계급제가 되었다고 봐야한다.
처음 주님의교회에 가면서 나는 10년, 장로는 13년으로 임기를 정했다. 내가 퇴임하고 나서 장로들이 인수인계해야하니 3년을 보탠 것이다. 장로, 권사, 집사는 임기 끝나면 백의종군하는 것으로 법을 바꿨다. 이러한 결정 이후에 다른 교회에도 임기 정하고 신임 투표하는 무브먼트가 있었다.

2005년부터 목회한 백주년기념교회는 20개 교회와 26개 교회 기관이 연관돼 있는 초교파 교회였다. 교회는 모든 교파를 어우르는 연합교회지만 제도적으로 어느 한 교회의 헌법을 따르는 일은 없는 독립교회로 존재했다. 이런 초교파적인 교회라면 한국 교회에선 언젠간 고쳐져야 하는 장로, 권사의 폐습을 없애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해 제도를 바꾸자고 했다. 장로, 권사가 서열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호칭제로 하자고 제안했다. 아무리 믿음이 뛰어나더라도 돈이 없으면 장로가 될 수 없는 것이 한국 교회의 현실이기 때문에 일정한 기준을 두고 호칭제 장로를 두자고 했다.

막상 시행되자 우리 교인이 늘어나다 보니 우리 교회가 마구 장로, 권사를 세우기 때문에 교인이 늘어난다는 이야기가 도는 등 여러 가지로 역풍을 맞았다. 나는 언젠가는 반드시 바뀌어져야 할 것이라고 본다. 20~30년 후가 되면 현재와 같은 장로, 권사 제도는 바뀌어 질 것이라고 본다. 첫 번째 발판을 까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했다.

참가자 / 죽은 자를 위한 기도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영어 성경에 맨 앞에 사도신경에 보면 descended into hell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글 사도신경에는 이것이 없다. 모든 교회가 이것을 신앙으로 고백한다. 그 구절을 임의로 삭제하고 신앙고백하는 나라는 유일하게 우리나라밖에 없다.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구설수에 오르기 싫어서 그러는 것이다.

이 구절이 빠지게 된 정황은 아무도 모르지만 추정할 수 있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와서 번역했던 초기 사도신경에는 이 구절이 들어있다. 천주교, 성공회에는 들어있다. 그런데 1905년인가 언제인가 각 교단 선교사들이 각 교단별로 찬송가를 가지고 있다가 통합 버전을 만들기로 했는데 한 교단의 선교사가 그 부분에 반대 의견을 냈다. 한 찬송가를 만드는 조건으로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시고' 이 부분을 빼자고 주장했다. 그 찬송가에서부터 빠져있는 것을 보고 추정할 수 있다.

한기총에서 2년 전에 NCC 와 같이 주님의 기도와 사도신경을 재번역했는데 거기에 보면 각주를 달았다. '대부분의 사본에 없었다'는 말이 첨가됐다. 한국의 대부분 사본에 없다는 말이었다. 여러분이 교회에서 사도신경을 가르칠 때, 누군가가 젊은 선교사가 의도적으로 뺀 불완전한 사도신경을 그대로 가르치겠는가? 원문을 가르쳐야한다고 생각한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지옥에 내려가서 그 곳에서부터 천국에 가셨다고 나와 있다. 그래서 천상, 지상, 음부가 예수님의 힘이 모두 미치게 되는 것이다. 나도 신학교에 가서 사도신경 원문에 그 구절이 나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래서 우리는 라틴어 원문으로 교인들에게 사도신경 강해를 했다.

예수 안 믿고 지옥에 간 사람 예배를 드려줄 수 없다는 목사의 이야기를 봤다. 지금 내 남편이 예수 믿지 않고 교통사고로 죽은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그 장례식을 집전하지도 않고 기도도 안 해준다면 예수님의 은혜는 무엇인가 생각해봐야 한다.

모 기관지에 어떤 사람의 질문에 대해서 상담한 글을 읽었다. 자매가 교수에게 질문했는데 동생이 예수 안 믿고 죽었다. 눈만 감으면 동생을 위해 뭔가 기도를 해주고 싶었다. 내가 죽은 동생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냐는 질문이었다. 이에 안성모 교수는 목회적 차원에서 대답했다. 초대 교회, 가톨릭의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이야기하면서 신학적으로 옳고 그름을 떠나 목회적 차원에서 기도한다고 답변한 것이다. 그 글을 읽고 나는 안 교수의 입장을 지지한다고 딱 한 줄 썼다. 단서를 달았다. 구원은 전적으로 주님의 몫이니 구원의 여부는 우리가 이야기는 할 수 없다고 했다.

그 구절을 가지고 이재철 목사가 죽은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했다고 말했다. 결국 그분들이 역풍을 맞고 그들이 그런 비방을 중단했다.

김영봉 목사 / 이번 주 설교 준비하면서 똑같은 이야기가 나와 말씀드리는데, 미국 사람이 새 도시로 이사 가서 교회를 찾는데 마땅한 곳이 없었다. 장례식에 참여를 했는데 그런데 집례하는 목사님이 이 사람은 예수를 영접하지 않고 죽었기 때문에 지옥에 갔습니다. 여러분들도 지옥에 가지 않도록 예수님 영접하라고 이야기 했다고 했다. 장례식을 마치고 가면서 남편이 아내에게 이야기 했다. "이렇게 용기 있는 목사라면 이 교회에 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것을 용기있다고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분별력이 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나는 코마상태에 빠져있는 사람조차 영혼으로는 하나님과 교통한다고 믿기 때문에 입으로 고백하는 것에 집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분과 하나님 사이에 일어난 일을 우리가 어떻게 아는가. 우리로서는 그분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 사람이 예수를 영접 못하고 죽었다고 하더라도 그 관계에 대한 판단은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그런데 교리적 판단, 잣대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 이재철 목사. 
 

참석자 / 오늘 날 시대가 말씀의 시대다. 그런 말씀이 소비되는 시대. 클릭 한 번이면 대한민국 명 설교가들의 설교를 들을 수 있는데, 나 역시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때마다 큰 깨달음을 얻는다. 그걸 나누기도 한다. 스무 명의 성도들과 함께 말씀을 나누는 나는 어떤 자리 매김으로 해야 하는지, 그렇게 좋은 설교를 다 들을 수 있는데, 내가 말씀을 전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들에게 담임 목사로서 이 말씀의 홍수에 시대에 무엇을 전해야하는지 알고 싶다.
우리가 이렇게까지 해서 살아야 하는가. 목사님의 책을 하나도 빠짐없이 읽을 때 마다 참 좋고 행복했다. 항상 그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며 눈물이 난다. 나는 그렇게 살 자신이 없다. 십자가가 저렇게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겠나. 

이재철 목사 / 참가자께서 말씀하신 "왜 그렇게까지 해서 사는가" 하고 물었는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 분께서 살려주셨기 때문이다. 난 대학교를 졸업하고 외국인 회사에 있다가 사업을 시작해서 큰 돈을 벌었다. 20대에 큰돈을 벌었으니 내 주위에 얼마나 많은 중매쟁이들이 있었겠는가. 50번도 넘게 중매를 봤다. 그러던 중 한 번 파혼의 아픔을 겪은 여성분을 만나게 됐는데 이 분과 결혼을 하기로 결심을 했다. 내가 스물일곱 살 되던 삼월 하순에 결혼했다. 결혼하고 2주 만에 아내가 암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가진 돈으로 2년 동안 대한민국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썼다. 심지어는 외국에서 사람을 불러오기도 했고, 전국의 기도원도 다 돌아다녔다. 하지만 결국 2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홀아비가 되어서 장례식에서 뼈를 뿌리면서내 마음속으로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나 이제 당신을 안 믿겠다. 당신 말씀을 통해 뭐라고 했는가. 이 세상의 어떤 부모가 떡을 달라는데 돌을 주나. 내가 당신에게 떡 달라고 했나, 내가 생선 달라고 했나, 당신이 천하보다 더 귀하다는 생명, 결혼한 지 2주 만에 암 환자 판명난 이 생명 구해달라고 했는데 생명 거두어갔다. 나도 당신 안 믿겠다"라고 결심하고 집에 갔다.

집에 가서 오후 3시에 침대에 누웠다. 왼쪽 창문에서 햇볕이 들어오는데, 처음 보는 빛이었다. 그때 마치 타자기가 활자를 칠 때 나는 소리와 함께한 글자씩 보이는 듯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지 않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죽어도 영혼이 죽지아니하리니."성경도 제대로 읽지 않을 때였기에 그런 구절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지만, 나는 버리지만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않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내를 잃은 아픔은 가시지 않았고, 마리화나에 손을 댈 만큼 정말 형편없이 살았다. 하지만 그런 만큼 주일에는 더 열심히 봉사했다. 그게 면죄부였던 셈이다. 주일날 봉사하지 않으면 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중략>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몇 번 만나고 나서 아내에게 "나는 당신의 결혼 상대가 될 수 없다, 나는 결혼해서는 안 될 7가지 이유가 있다. 결혼도 해본 사람이고, 나는 술꾼이고, 나는 당신만큼 세상의 학력도 좋지 않고, 지금 하고 있는 사업도 부도가 났다"는 등의 이유를 댔다. 당신 같이 훌륭한 사람은 정말 좋은 남편 만나라고 했다. 만약에 그저 내가 그 사람을 보고 이 사람 괜찮으니까 내 사람 만들어야지 했으면 깨졌을 것이다.
이 사람이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눈물을 흘리고 한 마디를 했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래서 나와 결혼했다. 그런데 내 삶의 습관이 어디 가겠나. 결혼하고 늘 술 먹고 새벽 2시에 들어갔는데 아내가 나를 기다리다 엎드려 잠이 들어있는데 머리맡에 일기장이 있었다. 지금도 내 아내의 서랍을 열어보지 않는다. 그런데 그 때 이상하게 그 일기장을 한 번 봐야할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 일기장에 눈물 자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일기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난 오늘도 하염없이 논길을 걸었다. 그리고 죽음을 생각했다. 손목을 그을까, 약을 먹을까"는 내용의 고민을 쓰다가 "아니다. 그래도 주님께서 내게 맡기신 남편인데. 내가 믿어야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내 처는 술독에 빠져 있는 나에게 싫은 소리를 한 번도 안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내가 방탕한 삶을 살아도 이 사람은 뭘 모르는구나 하고 여겼다. 그런데 그 일기장을 보면서 나 때문에 죽음까지 생각하면서도 예수 때문에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예수님의 사랑을 그렇게 수없이 들었는데, 그 사랑은 단지 책 속의 사랑이요, 전설 속의 사랑이었을 뿐 그런 사랑을 누구도 보여준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사랑을 내 아내의 일기장을 통해 확인했던 것이다.
그 순간에 난 술이 머리끝까지 취해 있었지만 성령을 만났다. 그 날 내 인생이 바뀌었다. 내가 밤새도록 지나온 과거를 보면서 잘못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고 아침에 일어나서 '내가 내 인생길을 바꾸어야겠다. 그냥 있으면 또 이 인생을 답습할 것이기 때문에 인생길을 바꿔야겠다'라고 다짐했다. 내 인생길을 바꿔야겠다고 아내에게 이야기했더니 아내가 "고맙다. 이런 날을 기다렸다"고 했다.

그리고 신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사람들이 나에게 교회(주님의교회)를 개척하자고 제안해서 그 교인들에게도 나의 지나온 삶을 다 이야기했다. 그런 과정을 거치고 주님의교회를 시작했다.

나는 허랑방탕한 알코올중독자에 도박중독자였다. 마리화나에도 손을 대었다.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나는 도저히 목사가 될 수 없는 무자격자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의 보혈로 나를 구원해주셨을 뿐 아니라, 나를 당신의 종으로 세워주셨다. 주님께서 많이 탕감 받은 자는 많이 사랑하고 적게 탕감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나?
나는 세상에서 가장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살 수밖에 없고, 죽도록 그분께 충성할 수밖에 없다. (눈물)

그렇기 때문에 내 의지나 내 노력이나 내 자신을 위해서 이렇게 하지 않는다. 그 분이 나를 살려주셨고, 내가 그 분에게 내 삶을 드릴 때, 그 분이 내 아이들, 내 삶을 책임져 주시는 것을 매일 매일 확인하기 때문에 나에게 있어서 이 이상 최선의 길이 없다.

질문한 분은 나와 다른 인생을 살았지만 정말 예수님의 보혈이 죽음에서 나를 살렸다고 생각한다면 그 은혜의 무게는 당신이나 나나 똑같지 않겠나. 우리 목회의 동기와 출발점이 내가 아니고 그 분이 된다고 하면 이렇게까지라도 해야합니까가 아니라 이 길 외에 어떤 길을 가겠습니까 하고 물어야 한다.

초대 교부 폴리캅이 예수를 부인하지 않으면 화형 시키겠다고 협박당했을 때, '그 분이 내 평생에 예수가 나를 배신한 적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예수를 배신하겠느냐'고 화형길로 가지 않았나. 내 평생에 배신하지 않았던 그분이었기 때문에 그분이 내가 불타 죽은 이후를 책임져주지 않겠냐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참가자 / 목회를 하다보면 여러 가지 유혹을 만나게 되는데, 그런 것들을 극복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이재철 목사 / 신학교를 가기 전에 사람이 누려볼 수 있는 것들을 누려볼 수 있었다. 20대 때 벌써 한국에서 가장 큰 아파트에서 살고 벤츠 탔다. 내가 주님을 만났을 때 그것이 얼마나 어이없고 허망한 일인지 잘 알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는 티끌만큼도 미련이 없다.

여러분들의 교회가 커지면 여러분을 사랑하는 장로나 교회의 교인들이 여러 가지 제의를 할 것이다. "목사님, 우리 교회 규모면 기사도 있어야하고 차도 있어야 합니다." 나는 다 해봤고 그것이 주님의 몸된 종으로서는 취할 길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기 때문에 유혹이 전혀 없다.

주님의교회가 상담 전화를 개설했을 때 지금은 큰 교회들이 많이 하지만 그땐 교회로는 처음이었다. 소문이 나면서 전국에서 상담 전화가 왔는데 그 상담원들이 자기들이 할 수 없는 내용은 나한테 넘겨줬다. 대부분은 목회자의 사모들이었다. 목사 사모 고민의 대부분은 부부 관계다. 남편이 사랑하지 않는 것이었다. 남편이 여자 교인들과 불륜을 저지르거나 하는 경우다. 이런 전화를 부지기수로 받았다.

내가 이렇게 말했다. "사모님은 목사님이 들어오실 때 여성으로서 남편을 맞는가, 자기 자신을 한 남자의 아내로서 가꾸어 가는가. 내가 가꾸지 않고 내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빠지는가, 목사는 하루 종일 여자들 속에서 살기 때문이다. "

내 처가 집에서 단순히 목사의 아내의 역할만 할 뿐 한 남자의 아내로 여성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죄성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여자한테 시선이 가지 않겠는가. 그런데 내 처가 나한테 참 잘해준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볼 필요도 없고, 내 처보다 더 나은 다른 사람을 볼 수도 없다. 그래서 난 내 처와 영촌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이 문제도 나한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 김영봉 목사와 이재철 목사. 
 
김영봉 목사 / 책에서도 읽을 수 없는 속 이야기였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상처 이야기, 아픈 이야기를 들을 때 더 큰 감동을 받게 되는 것 같다. 더군다나 이렇게 우리가 겉모습만 보고, '어떤 사람은 저렇게 귀족처럼 생기게 만드시고 어떤 사람은 머슴처럼 만들어 놓으셨나' 하고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투덜거릴 일이 아니다(웃음).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분의 아픔의 이야기가 훨씬 더 강하게 우리에게 와 닿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참가자 / 여성 사역자로서 부르심에 따라 살기에 이 현실이 척박하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성경에 보면 여성은 가르치지 못한다고 나와 있다고 말하는 목회자들이 있다. 그러면 여자 전도사들 교육부에서 아이들 가르치는 전도사들이 애들에게 설교하는 것은 괜찮고 공식 석상에서는 왜 안 되나.

각 개인에게 주신 부르심, 소명에 대한 반응을 했을 때 여자와 남자로 구분 짓는 현실이 답답하다. 교회 안에서 머물 수 없으니 여성 사역자들은 선교사로 다른 단체로 간다. 왜 이재철, 김영봉 목사 자리에 여성 사역자는 없을까.

이재철 목사 /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당신의 형상을 따라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 하나님 형상이 남자면 남자만 만들었을 것이고 여성이면 여자만 만들었을 텐데 당신의 형상을 따라서 여자와 남자를 만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에는 여성성과 남성성이 다 있다고 본다. 교회에도 여성의 역할은 굉장히 중요하다. 목회자도 있어야하고 장로도 있어야 한다. 우리 교단에서 여성 안수가 통과됐을 때 그 해에 여전도사를 안수 받게 했다. 그러나 여성 교역자들이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남자들도 마찬가지지만 난 늘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목회를 해야한다는 점이다.

여성 교역자들이 생각해야 할 것은 현실적으로 결혼하면 애 낳고 키워야하는데 남성 교역자처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똑같이 할 수 있는가? 그것 할 수 없다면 여성 교역자들의 일은 결국 제약적이지 않은가. 우리 교회의 여성 목사는 독신이다. 그 분은 다른 남자 교역자들과 조금도 구별하지 않는다. 그 목사는 우리 교회에 두 번째로 빨리 들어와서 봉급도 두 번째로 많이 받고 있다. 일을 맡기거나 역할에 전혀 차이가 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결혼하고, 아이 키우고 이런 것들을 다 하면서 "남자 교역자 같은 자리를 다오"라고 하는 것은 남자가 그 자리에 있을 때 더 하나님의 유익이 있지 않겠는가. 이 부분을 여성 목회자들이 꼭 생각해야 될 부분이다.
참가자 / 목회자로서 비전에 대해 말해 달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야망이나 꿈을 비전이라고 포장한다. 어떤 가시적인 결과는 나오지만 후유증이 남을 때가 더 많다. 내가 <비전의 사람>에서 말했듯 비전은 나의 비전이 아니고, 가령 나를 예로 든다면 수렁에 빠져있던 불쌍한 이재철이라는 한 인간을 정애주라는 한 여인을 통해서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나를 구원하셨다면, 나를 통해서 이루실 그 분의 비전을 따져야 하는 것이다.

비전은 나를 통해서 이루실 그분의 비전에 내가 동참하는 것이다. 그럼 그 비전을 어떻게 아는가? 이것은 기도원에서 아는 것도 아니고 책상 앞에서 아는 것도 아니고 나의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아는 것이다. 그래서 비전의 사람들의 인생은 모자이크 판과 같은 것이다. 내가 내일 무엇이 될 지 모르지만 오늘 주어진 현실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받고 열심히 한 장씩 색종이를 붙이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다마섹에서 주님을 만난 다음에 13년 동안 다소에서 칩거하고 1년 동안 안디옥에서 목회하다가 선교사로 파송된 뒤 근 20여 년이 지났을 때, 에베소에서 열심히 살아온 자기 인생의 모자이크 판을 보고 "아! 로마구나, 내 생을 던질 곳이 로마구나"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청년 집회에 가면 로마의 비전을 받은 바울처럼 아프리카 비전 받을래, 남미 비전 받을래 하고 말한다. 그러니까 선교지마다 문제투성이다. 그건 내 비전이지 하나님의 비전이라는 보장이 없다. 그래서 열심히 모자이크 판을 붙이다 보면 어느 날 그것이 보이는 것이다.

어제 말했던 것처럼 아무도 안 부르는 주님의교회와 제네바한인교회를 간 것도 주님의 비전이었기 때문이다. 그저 열심히 매일 매일 살았다. 그랬더니 20년 동안 자립되지 못했던 교회가 이제 자립을 해서 지금은 다른 교회를 돕는 교회가 됐다. 내가 떠난 지 10년 됐는데 아직도 그렇게 잘 하고 있다. 비전은 내가 내 것을 찾아서 이루려고 하며 꼭 인간적인 방법을 강구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비전을 단 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내 생을 던지면 하나님의 역사는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다.
참가자 / 목사의 가정, 사모의 역할에 대해 말해달라.

이재철 목사 / 목사의 가정은 모든 사람이 들여다보는 투명한 유리가 끼워져 있는 쇼윈도가 되어야한다. 내 자식들은 목사가 아니기 때문에 내 자식은 세상대로 키우겠다고 하면 구도의 길을 우리가 걸을 수 없다. 두 말할 것도 없이 목사는 아내에게 좋은 남편이어야 하고 자식에게 좋은 아버지여야 한다.
첫 째는 부부는 영촌이라고 했다. 영촌의 거리를 존중하라. 남편은 아내의 여성성을 지켜줘야 한다. 아내는 남성성을 지켜줘야 한다. 많은 남자들이 결혼하고 나서 아내의 여성성을 황폐화시킨다. 이렇게 하면 좋은 수족은 될 수 있어도 좋은 아내나 엄마가 될 수는 없다. 좋은 아내가 될 때 남편이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있다. 
제네바 있을 때 아들 넷을 데리고 온 아내가 왔는데 이건 흡사 투사의 모습이었다.(웃음) 아들 넷을 혼자 키우며 아내가 힘들어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렵게 사신 권사님 댁에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아 가는 길에 아내가 귀걸이를 하고 나왔길래 내가 귀걸이를 빼라고 했다. 어렵게 혼자 살아오신 권사님께 목사 사모가 귀걸이를 하고 찾아뵙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했었다. 아내는 두말없이 귀걸이를 뺐다.
아내는 여성성을 잃어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귀걸이 어렵게 사서 달은 것이었는데 내가 몰랐다. 나중에 말을 들으니 아내는 그 말을 들을 때 흡사 거세되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아내에게 목사 사모의 틀을 강요하는 나를 발견한 것이다. 그 다음 올 때를 기다려 내가 속죄하는 마음으로 귀걸이를 샀다. 귀걸이를 보고 좋아하는 아내가 나에게 귀 뚫어도 되냐고 물었다. 귀를 뚫어야 하는 귀걸이었는데 그런 것도 몰랐던 것이다. (웃음) 그래서 내가 제네바에서 귀 뚫는 데까지 가서 귀를 뚫어줬다.

그리곤 내가 아내에게 당신 나이 정도 되면 옷 입을 때 무슨 색깔 입을까 묻지 마라. 당신이 충분히 절제하니 당신 여성성을 지키기 위해서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바로 이런 노력이 있을 때 신뢰가 가는 것이다. 자식들 역시 그런 부모를 보면서 같은 가치관을 키워가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같은 가치관으로 살아가기때문에 내가 목사라고 해서 내 처가 후회를 한다거나 하는 일은 내가 아는 한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내가 같이 왔으니 확인해 보시기 바란다.(웃음)


김영봉 목사 / 두 개의 질문이 남았는데 시간이 많지 않아 대신 읽겠다. 이재철 목사는 함께 사역하고 있는 부교역자를 어떻게 대우하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이재철 목사 / 교역자들을 부목사님이라고 부르는데 나는 그냥 목사님이라고 부른다. 다 같은 목사요 동역자인데 다만 역할이 다를 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교인들 중에서도 부목사라고 부르는 분들이 많이 계시지만 부 자를 빼고 부르는 분들도 계신다. 내 목회 철학은 내가 열심히 헌신해서 나로 인해 부목사들이 조금 더 나아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주님의교회 때부터 선임 부목사와 내 월급의 차이는 10만 원이었다. 재정 담당하시는 분들에게 "내 봉급을 올려줄 생각하지 말고 동역자들 월급 올려드려라. 그러면 나도 10만 원 올라간다"고 말했다.

어떤 분들은 나를 배우겠다고 지원을 해서 삼수 끝에 들어온 분들도 있다. 나는 그 분들에게 "나를 배워서는 안 된다. 나를 넘어 서야 된다. 나는 얼마든지 여러분들의 디딤돌이 되겠다. 나를 밟고 서라. 나는 이미 예순이 넘은 사람이고 구시대의 사람이다. 그러니 내가 하는 대로 해선 안 된다. 나를 밟고 서면 내가 여러분들을 버텨 줄테니 여러분들로 인해 한국 교회의 한 부분이 새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고 했다.

우리 교회는 나를 포함해서 교역자들에게 사택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택만은 본인이 책임져야 한다. 이유가 있다.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세상살이를 한 사람이다. 교인 석에 앉아서 목회자들을 지켜 본 기간이 있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목회자들 가운데에서 학부부터 신학교를 가고 졸업한 사람들은 세상을 모른다. 세상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모른다.

돈 버는 것 절대 쉽지 않다. 내 자식의 학비를 대기 위해서 상사로부터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지 모른다. 여러분 목회하는 교회의 장로, 집사들 다 주일에는 웃고 앉아 있지만 그 분들 하루에도 열 번씩 사표 생각할 것이다. 못 죽어서 그 직장 다니는 것이다.

그런데 젊은 교역자들은 졸업해서 용케 한 교회의 전임 교역자만 되면 한국 상황에서는 집 주고, 차 주고 전부 다 준다. 그러니 세상살이를 모르니 아무리 책을 많이 보고 아름다운 설교를 해도 현실 속에서 뼈 빠지게 살면서 온 사람들에게 목사의 설교는 뜬 구름 잡는 소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목사들에게 보수는 나하고 별 차이 없이 많이 드리되, 적어도 집만은 사글세를 내더라도 본인이 책임지자고 했다. 세상도 알고 가장으로 내 집안 식구들을 내가 사는 집은 사글세 돈이라도 내가 내고 살겠다는 결단이 서 있는 목회자만 이재철이의 사병이 안 될 것이다. 내가 잘 못하면 "목사님 틀렸습니다.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라고 말할 수 있지 않나. 그리고 이 목사가 변질됐다 생각하면 교회를 박차고 나갈 수 있어야 한다. 박차고 나갈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뭔가 장치를 스스로 만들어둬야 한다.

그러나 교회가 모든 것 다해 주는 것, 그 안락한 삶에 젊은 나이부터 적응해버리면 결국 그 교회 담임목사와 재정 장로의 사병이 되어버린다. 한국 교회에서 우스꽝스러운 일들이 일어나는데 그 교회 교역자들이 다 목사 시키는 대로만 하지 않나. 왜 그러겠나. 여기 나가면 내 자식들 살 데가 없기 때문이다. 사글세방에서 살 결심이 안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교역자들에게 "백주년기념교회가 여러분들에게 사택을 안 주는 것은 돈을 아끼려는 것이 아니다. 다른 이유 아니다. 여러분을 사랑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목회자의 정신을 지켜주는 한 방편이다. 그래서 그런 목회자를 뽑을 때부터 단서조항이 붙어있기 때문에 편안한 길을 가시려는 분들, 굉장한 학력을 가지신 분들은 아예 지원하지 않는다. 사명감을 가진 사람만 한다. 목사답게 살아보겠다는 사람만 지원한다. 매년 뽑는 숫자가 제한되어 있다 보니 재수, 삼수하는 사람도 있다.
김영봉 목사 / 마지막 질문도 대신 읽겠다. 백주년기념교회의 교인의 참여율이 얼마나 되는지 묻고 싶다.

곽선희 목사가 내가 신학교 다닐 때 강연에 와서 교인들 중 10%만 헌신을 해도 대단한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내가 지금 주님의교회에서나 백주년기념교회에서나 헌신적으로 하는 교인들이 10%를 훨씬 넘는다고 생각한다. 묘지 참배객들을 위한 봉사자가 주중에만 연 500명이 넘는다. 그리고 토요일에는 구역들이 돌아가며 관리부 집사들 수십 명이 나와 예배당을 청소한다. 그래서 양화진 묘역이 있기 때문에 그 묘역을 청소하는 관리인들은 있지만 건물 안을 청소하는 청소부는 없다. 교역자 사무실은 교역자가 한다.

목회자의 권위는 목회자가 자기의 것을 포기하면 세워진다고 말했는데, 내가 한때 영적으로 방황할 때 내가 스님들도 친구로 삼고 신부들과도 교분을 쌓으면서 그분들을 보면 구도의 정신, 가는 길은 다르지만 배워야 할 것이 참 많았다. 주님의교회를 개척하고 새벽기도가 끝나면 동역자들과 함께 사무실 책상을 내가 걸레질하고 사무실 쓸었다.

스님이 되기 위해서 출발하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청소다. 궂은일부터 구도의 삶이 시작된다. 내가 신학교 입학하자마자 서점에 가니 누가 나를 전도사라고 불렀다. 나는 내가 전도사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니 서점 주인 대답이 "입학하면 다 전도사지 않나"고 했다. 신학교는 가면서부터 전도사이고 아버지 같은 교인들 회의하는 데 가서도 상석에 앉는다. 그렇게 해가지고는 구도의 삶을 살기 힘들다.
스님이나 신부님들은 전부 자기 손으로 한다. 그렇게 교역자들이 청소하는 모습을 보고 교인들이 한 두 사람씩 참여하기 시작했다. 새벽 기도가 끝나면 강남 YMCA 건물 전체를 교인들이 매일 다 쓸었다.

교인들의 참여율을 어떻게 올리는가. 다른 방법이 없다. 목회자가 앞장서면 된다. 교인들은 따라오게 되어 있다. 백주년기념교회가 세워질 때 내가 58살이었는데 지하실에 사무실을 줘서 3명이서 닦고 준비하며 사무실을 마련했다. 그런 것이 교인들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김영봉 목사 / 준비한 강의 대신 즉각 질문을 가지고 그 자리에서 정리해서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에너지를 많이 필요로 했다. 두 시간 동안 흐트러짐 없이 강의해주신 목사님께 감사드린다.
*후속 기사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