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2008년 총선에서 대구에 출마했다가 2010년에는 경기지사로 출마한 것을 문제 삼았다. 또 한-미 FTA에 찬성했다가 입장을 바꾼 뒤 전농과 민주노총을 찾아다니며 사과한 일을 들었다.
유시민 통합진보당 공동대표는 최근 표정이 무척 밝아졌다. 정치적 재기의 기회를 잡은 때문일 것이다. 그는 15일 아침 통합진보당 대표단 회의에서 이런 말을 했다.
"통합진보당에 대한 국민의 기대가 점차 높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 당이 내부적인 통합, 총선 준비, 문화적 혁신 과정을 힘있게 밟아야 한다. 합쳐서 세력만 커진 것이 아니라 내용도 나날이 발전하는구나 하는 믿음을 국민께 드려야 한다."
지난해와 올해 유시민 대표는 수많은 정치적 좌절을 겪었다. 하지만 야권의 유력한 대선주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전히 살아 남았다.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그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유시민 대표는 본래 눈물이 많은 사람이다. 어릴 때는 누나나 형보다 너무 작은 생선토막을 줬다고 울었다. 서울대 학생 시절 구로동에서 야학을 할 때는 나이 어린 여성 노동자들의 처지가 불쌍해서 울었다. 정치인이 된 뒤로는 좌절이 찾아올 때마다 울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도 펑펑 울었다.
그는 승부사다. 당구와 포커, 낚시를 좋아한다. 동시에 매우 감성적인 사람이다. 1985년 옥중에서 작성한 항소이유서는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러시아 시인 네크라소프의 시구로 끝난다. 오늘의 유시민이라는 정치인을 만든 것도 슬픔과 분노라고 보면 과히 틀리지 않는다.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한나라당 의원은 싫어하는 자기 당 여성 의원을 지칭하면서 "우리 당에도 여자 유시민이 있다"고 표현하곤 했다. 참여정부 시절 한나라당 사람들끼리 골프를 치면서 상대방의 실수를 유도하기 위해 "다음 대통령은 유시민"이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민주당 사람들도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 김영춘 최고위원이 했던 "저렇게 옳은 소리를 저토록 싸가지 없이 하는 재주"라는 표현은 지금도 유시민 대표에게 굴레처럼 씌워져 있다.
왜 싫어할까? 정치인들에게 물어 보았다. 두 가지를 지적했다.
첫째, 예의가 없다고 했다. 예의를 속된 표현으로 바꾸면 '싸가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논쟁을 할 때 지나치게 직설적인 표현을 사용하거나 상대를 무시하는 듯한 말로 상처를 준다는 것이다. 열린우리당에서 의원총회를 할 때 나이 많은 의원이 앞으로 나가 발언했다. 그 발언에 동의하지 않았던 유시민 의원이 뒤에서 "밥먹고 합시다"라고 야유를 보냈다. 또 있다. 2003년 4·24 재보선으로 처음 국회의원에 당선돼 본회의장에 들어설 때 그는 '빽바지'를 입었다. 한나라당 의원 20~30명이 퇴장했다.
둘째, 일관성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교묘한 논리로 포장하는 데 능하다고 했다. 사례로는 100년 가는 정당을 만들겠다며 2002년 개혁국민정당(개혁당)을 창당해 놓고 바로 그 다음해에 당을 해산하고 열린우리당으로 들어간 일을 들었다. 2008년 총선에서 대구에 출마했다가 2010년에는 경기지사로 출마한 것도 문제를 삼았다. 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찬성했다가 입장을 바꾼 뒤 전농과 민주노총을 찾아다니며 사과한 일을 들었다. 과거 민주노동당 등 진보정당을 호되게 비판해놓고 지금은 통합진보당에 들어가 있는 것도 지적했다.
그러나 유시민 대표가 맞닥뜨리고 있는 가장 큰 장벽은 '호남'이다. 야권의 유력 정치인으로서 호남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치명적 한계일 수 있다. 호남 사람들의 유시민 대표에 대한 감정은 매우 복잡하다. 애증과 오해가 단단히 얽혀있는 모양새다.
영남 사람인 유시민 대표는 1987년 야권이 김영삼-김대중으로 갈려졌을 때, 김대중 편에 섰다. 그는 구로 지역 '서울지역 민주노동자회 준비위원회'라는 단체에 몸담고 있었다. 당시 김대중 후보는 그 단체가 낸 '비판적 지지 선언문'을 첫 방송 연설에 들고 가서 인용했다. 유시민 대표는 '보라매 집회'에 참석하고, 시청 앞까지 행진하는 대열의 선두에도 섰다.
그는 1997년 펴낸 책에서 호남에 대해 이렇게 적어 놓았다.
"나는 대구를 떠난 이후에는 경상도 출신치고는 전라도 사람들을 많이 겪어본 편이다. 대학 기숙사 식당 주방 아주머니들에서 봉천동 고개 꼭대기 달동네 자취방 주인 아주머니, 단골로 다니던 봉천 중앙시장 순대집 아저씨가 그랬고, 신산스러웠던 80년대를 헤쳐 나갔던 동지들 중에도 유난히 그 동네 출신이 많았다. 당원들이 거의 백 퍼센트 전라도 출신이었던 평민당에 들어가 관악을 지구당(신림동) 교육부장으로 일한 기간에 사귄 사람들도 많다. 나는 전라도 사람들을 좋아한다. 그들은, 내가 겪은 바로는, 다른 지방 사람들에 비해 싹싹하고 정이 많으며, 기회가 생기면 적극적으로 재미있게 잘 논다."
"이렇게 보면 '전라도 혐오증'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특히 경상도 사람에게는 치료하기가 매우 어려운 정신적인 '질병'이다. 경상도 사람들은 (물론 다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니다) 자기네가 30년 동안 대통령을 배출했다고 자랑하면서도, 그 대통령들의 잘못된 정책 때문에 피해를 본 전라도 사람들에 대해서 미안해 하기는 커녕 그들을 싫어하고 업신여긴다."
그랬던 유시민 대표가 호남 유권자들에게 거부당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가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한 배를 타고 정치에 몸을 담으면서부터다. 특히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을 앞두고 새천년민주당 안에서 이른바 '난닝구'-'빽바지' 논쟁이 벌어지면서 호남 사람들에게 유시민이란 이름은 '반호남'으로 각인됐다. 그는 지역을 팔아 사리사욕을 챙기는 '구태 정치인'을 싫어했다. 그가 만난 호남 출신 정치인들 중에 바로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 호남 출신 정치인들의 유시민 대표에 대한 혹평은 호남 사람들에게 확산됐다.
"마니아층을 가진 유일한 정치인이다. 아주 짧은 기간에 국회의원이 됐고 대선주자로 올라섰다. 그 또래 누구도 그런 정치 기획은 하지 못한다. 대선은 3개월~6개월 싸움이다. 기회는 있다고 본다."
그가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썼던 '97년 대선 게임의 법칙'도 뒤늦게 문제가 됐다. 그는 이 책에서 "디제이로는 안 된다"고 썼다. 그런데 '디제이'는 대통령이 됐다. 대선 승리감에 도취한 사람들은 당시에는 그냥 넘어갔다. 그러나 지역 문제가 나올 때마다 이 책은 두고두고 시빗거리가 됐다.
유시민 대표가 대선후보 지지율에서 한계를 보이는 것은 이렇게 정치인들과 유권자들에게 비호감 정서가 광범위하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 경기지사에 출마했다가 낙선하고, 올 4·27 김해을 선거에서 국민참여당 이봉수 후보가 낙선하면서 기세가 꺾였다. 최근에는 대선후보 지지율이 3~4%에 머물고 있다.
유시민 대표 본인은 자신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그는 '나는 꼼수다'에 출연해 이렇게 말한 일이 있다.
"복합적 원인이 있습니다. 인격의 미성숙이죠. 지역 선정에도 미스가 있었습니다. 하필이면 왜 대구를 나가서. (중략) 별로 진지하게 정치를 안한거죠. 그게 제일 중요합니다. 삶을 걸고 책임성 있게,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서 안 한거죠. 그런 정치인을 사람들이 좋아하겠습니까?"
반성이 너무 처절하다. 유시민 대표는 자신이 대통령이 될 가능성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전망한다. 그는 "이런 정도로 무슨 대통령이 되겠느냐. 후보도 못될 것 같다. 문재인 이사장에게 '형님이 하시라'고 말하고 있다"고 털어 놓은 적도 있다. 그를 추종하는 팬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참여정부에서 같이 일을 한 사람들의 생각은 좀 달랐다. 청와대 고위직에서 일했던 사람들에게 그에 대한 평가를 들어 보았다.
"마니아층을 가진 유일한 정치인이다. 아주 짧은 기간에 국회의원이 됐고 대선주자로 올라섰다. 그 또래 누구도 그런 정치 기획은 하지 못한다. 대선은 3개월~6개월 싸움이다. 기회는 있다고 본다."
"스토리가 있는 정치인이다. 머리가 너무 좋아서 문제지 재능은 뛰어난 사람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유시민 대표를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발탁할 때 한명숙 총리와 열린우리당의 반대를 무릅썼다. "장관직은 잘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게 이유였다. "나도 좋아하지는 않는다"고 단서를 붙였다. 유시민 대표는 장관을 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보건복지부 고위 관계자의 회고다.
"처음엔 걱정을 했다. 너무 튀는 사람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다. 그런데 장관으로서 철학과 정책 능력에서 손색이 없었다. 판단이 빠르고 방향을 정확히 제시했다. 정치적으로 해결할 부분은 자신이 나서서 정리했다. 직원들을 잘 다독이며 끌고 나갔다. 뛰어난 장관이었다."
유시민 대표는 대통령 꿈을 접은 것일까? 아닌 것 같다. 그와 가까운 인사는 "선거연대로 내년 총선에서 성적을 잘 내면 유시민 대표의 진로에도 영향을 줄 것"이라며 "정치적 도전의 기회가 반드시 다시 올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진보정당 당원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유시민에 대한 비호감' 정서는 통합 과정을 통해 많이 해소되었다. 유시민 대표가 그 나름의 진정성을 갖고 열심히 노력한 덕이다. 앞으로도 그가 이런 식의 '진정성 행보'를 계속할 수 있을까? 지켜 볼 일이다. shy99@hani.co.kr
"책으로 국민과 소통"…저서 15권 펴내
선거철이 다가오면 국회 기자실에는 정치인들이 쓴 새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인다. 대부분 자신의 인생역정을 정리한 에세이집으로, 출마를 위한 홍보 책자인 경우가 많다. 출판기념회를 열면 기업과 기관에서 '보험' 성격으로 책을 사주는 경우가 많아 '수익'을 내기도 하지만, 어지간히 영향력 있는 정치인이 아니면 '큰돈'은 못 번다. 정치인의 이런 일반적인 책 쓰기 패턴에서 벗어난 대표적인 이가 유시민 통합진보당 공동대표다. 현역 정치인 가운데 저서가 가장 많다. 프리랜서 시절뿐 아니라 정치인으로 변신한 뒤에도 꾸준히 책을 썼다. 선거에 맞춰 책을 급하게 쓴 게 아니라서 공짜로 뿌리지도 않는다.
유 대표는 '저서의 정확한 규모와 판매량'을 묻는 질문에 "글쎄요, 저도 제가 몇 권을 썼는지, 그 책들이 얼마나 팔렸는지 정확히는 모르겠네요"라고 멋쩍게 답했다. 그러면서 "책을 많이 쓴 건 솔직히 생계에 보탬이 좀 되려 했던 동기가 많았다"고 말했다. 20만부 정도 팔린 는 유 대표가 재정적인 어려움에 처했을 때 출판사에서 선금을 받아 생활한 뒤 뒤늦게 원고를 전달한 경우다.
유 대표가 쓴 책을 찾아보니, 개인 저서가 등 모두 15권이었고, 공동 저자로 참여한 책이 등 4권, 편역본인 시리즈도 12권이었다.
그가 쓴 첫 책은 '서울대 프락치 사건'을 다룬 (1986년)이지만, 대중에게 자신의 이름을 처음 알린 책은 (1988년)다. 유 대표가 수배를 받을 때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쓴 이 책은 한때 대학 새내기의 필독서로 꼽혔고, 출간 뒤 지금껏 73만부가 팔렸다.
이밖에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주기를 맞아 "가장 아픈 마음으로 정리했다"는 (2010년)는 20만부가 팔렸다. (2002년)가 13만부, 그가 쓴 책 중에 "가장 애정을 갖고 있다"는 (2009년)는 12만5천부가 팔렸다. 광주청문회 때 수집된 자료를 정리한 (1990년)는 2004년에 영문판(Memories of May 1980)으로 번역되기도 했다.
그가 가장 최근에 낸 책은 로, 지난 4월 출간됐다. 4월 재보선을 앞두고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시기였다. 그는 이 책의 말미에 자신이 책쓰기를 놓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정치인이 국민의 의지를 결집하고 대표하려면, 국민과 소통하고 교감해야 한다. 소통과 교감은 대중매체의 단편적 보도에 제한될 수 없으며, 제한되어서도 안 된다. 정치인의 글쓰기는 시민과 직접 소통하고 교감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유 대표의 지지자들은 대체로 '충성도'가 매우 높은 편인데, 이들 중엔 대중매체가 아니라 책을 통해 그를 '깊게 오래' 만난 이들이 꽤 많다. 석진환 기자 soulfa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