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강왕'으로 불리던 박태준씨가 세상을 떠났다. 포스코(포항제철)가 오늘날 세계 굴지의 철강회사로 자리잡은 역사는 그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애초 영일만의 허허벌판에 종합제철소를 세우려던 계획은 1960년대 후반 미국·영국·독일·이탈리아 철강회사들로 구성된 국제차관단을 통해 자본과 설비 도입을 하는 쪽으로 추진됐다. 하지만 채산성이 불투명하다는 이유로 구미의 회사들이 투자를 망설이는 바람에 제철소 건설은 무산될 위기에 놓였다.
이 무렵 40대 초반의 박태준이 도움의 손길을 요청한 사람은 일본 정·재계의 정신적 지도자로 군림하고 있던 야스오카 마사히로였다. 양명학에 정통한 동양사상학자로 일제 때 우익운동이나 군부에 영향을 끼쳤던 야스오카는 일본의 패망 이후 한동안 공직 추방 조처를 당했지만, 바로 예전의 위상을 회복했다. 요즘 유행어로 하면 자민당 유력 정치가나 재계인들의 막후 '멘토'였다. 현재 아키히토 일왕의 연호인 헤이세이(평성)는 그가 생전에 고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나이가 거의 30살 차이가 나는 박태준이 찾아와 고충을 토로하자 야스오카가 그 자리에서 전화를 걸어 연결해준 사람이 이나야마 요시히로다. 이나야마는 우리의 전경련에 해당하는 경단련의 회장을 지낸 재계의 거물인데, 당시는 야하타제철의 사장이었다. 그는 1970년에는 후지제철과 합병해 세계적 철강회사인 신닛테쓰(신일본제철)를 설립해 3년간 사장으로 재직했고 다시 회장으로 9년을 지냈다. 그가 일본의 다른 철강회사들을 모아 박태준의 구상을 지원해주었다.
야하타제철의 전신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해 식민지로 만드는 전초전이 되는 청일전쟁의 배상금으로 지은 것이다. 일본은 늙은 제국 청을 제압한 뒤 거액의 배상금을 뜯어냈는데 이자까지 합치면 총액이 당시 일본 연간 예산의 2배가 넘었다고 한다. 그 돈으로 육군과 해군의 상비군 규모를 대폭 늘리고 병기·군함의 자급조달을 위해 규슈 야하타에 관영 제철소를 지었다. 1901년부터 조업을 시작한 이 제철소는 일제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을 지탱하는 원동력이 됐다. 군비확충이나 산업건설뿐만 아니다. 명문대학의 하나인 교토대학의 전신 교토제국대학도 청일전쟁의 배상금으로 지어졌다. 이러니 근대 일본은 조선을 전쟁터로 유린하고 무참하게 살해된 조선인들의 희생 위에 세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제 일본대사관 앞에서 군대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수요시위가 열렸다. 1992년 1월 미야자와 기이치 당시 총리의 방한을 앞두고 시작한 이래 무려 1000회째다. 단일 주제로 모이는 시민집회로는 오래전에 세계기록을 경신했다. 당시 미야자와 총리의 방한 결과에 대해서는 일본에서 불평이 많았다. 총리 취임 이후 첫 방문지로 한국을 선택해 새로운 한-일 관계를 열려고 했는데 위안부 문제가 돌출하는 바람에 곳곳에서 사죄발언을 하느라 망신만 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는 평지 돌출한 것이 아니다. 식민지배의 악행에다 전시 강간, 여성차별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피해자들이 공개적으로 나서기가 대단히 어려웠던 사정이 있었다. 위안부 문제가 본격적으로 공론화된 데는 윤정옥 교수가 1990년 1월 에 연재한 답사기가 큰 구실을 했다. 이후 김학순 할머니가 이름을 밝히고 일본 법정에 제소를 하자 필리핀·대만·타이·네덜란드 등의 피해여성들이 증언에 나섰다. 이 문제는 유엔 등 국제무대로 번져 전시 성노예를 강요했던 만행으로 규탄됐고 2000년 12월에는 도쿄에서 일본군 성노예를 심판하는 여성국제법정이 열렸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요지부동이다. 진지하게 대응하기는커녕 우익들의 반발로 교과서 기술에서조차 지워버리는 뒷걸음질을 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기대는 전가의 보도는 1965년의 한-일 협정으로 식민지지배의 모든 문제가 완전히 영구히 해결됐다는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 일각에서 협정 재개정을 요구하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으나 반응은 미적지근하다. 한쪽에서는 뉴라이트가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우리 사회의 벌거벗은 모습이다.
김효순 대기자 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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