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거탑(2007년,MBC) - 일본판에 결코 밀리지 않았던 권력관계에 대한 공감대.작성일 : 2009.04.15 15:12
- 방영 : MBC
- 방송기간 : 2007년 1월 6일 ~ 3월 11일
- 방송편수 : 총 20부작
- 극본 : 이기원
- 연출 : 안판석
- 출연 : 김명민, 이선균, 차인표, 이정길, 김창완, 변희봉, 정한용, 송선미, 김보경, 임성언, 양희경, 기태영, 이희도 등
- 마지막회 본 날 : 2009년 2월 22일
이 작품이 처음 리메이크 된다는 소식을 들었을때 걱정부터 밀려오기 시작했던 이유는 그간 일드를 리메이크한 작품들이 원작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꼬꾸라졌던 기억이 너무 강했기 때문일텐데 특히나 "하얀 거탑"은 일드중에서도 명작이라 꼽을 수 있는 작품중에 하나인지라 괜히 좋은 작품 건드렸다가 망치면 우리나라 드라마 수준에 대한 비아냥의 빌미가 될까봐 걱정이 더 가중되었던 것 같다.
거기에 캐스팅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때 김명민과 차인표라는 캐스팅만큼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라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지만 방영전 당시의 네임 밸류로 따지자면 에구치 요스케 역할에 이선균, 구로키 히토미 역할에 김보경, 야다 아키코 역할에 송선미, 이토 히데아키 역할에 기태영이라는 캐스팅은 일본 배우들의 네임 밸류에 비해 상당히 초라하게 느껴지는 라인업이여서 이 작품에 대한 기대감은 진작부터 접어버리게 되었다.
하지만 방영이 시작되고 연일 이 작품에 대한 관심과 찬사의 소리가 들려오면서 내가 가졌던 걱정들이 기우였다는걸 느끼게 해주었지만 그래도 이 작품을 봐야겠다 생각하지 않았던건 역시 앞선 캐스팅에 대한 개인적인 불만과 더불어 아무리 잘만든 작품이라고 해도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을 또 한번 봐준다는게 그다지 내키지가 않았다.
그러나 이후 "베토벤 바이러스"를 통해 김명민의 연기에 다시 한번 감탄을 하며 가장 먼저 머리속을 스치고 가는 작품이 바로 이 작품 "하얀 거탑"이었는데, 김명민이 연기하는 자이젠 고로라면 별다른 이유가 필요없이 충분히 확인해볼만한 가치가 있을거라는 확신이 새록새록 생기면서 방영후 2년이 지나서야 이 작품을 집어들게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작품을 선택한것에 대해 정말 후회가 없다 말하고 싶은데, 일단 김명민이 연기하는 장준혁은 자이젠 고로라는 이름을 뛰어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카라사와 토시아키의 연기보다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원작에 비해 전혀 떨어지지 않은 흥미진진함과 구성은 연출력에 있어서도 결코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근대적 권력의 상징이라고도 볼 수 있는 병원과 법원이라는 장소를 통해 누구나 체험해봤을법한 권력관계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는 점과 장준혁을 통해 내가 처한 현실을 투영해 볼 수 있었는지 액션물이나 시대극이 아님에도 남성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고 있는 점은 기존 우리나라 드라마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부분이었을텐데, 이런 차별성을 질질 끌지 않는 스피디한 전개로 펼쳐가면서 재미적인 측면에서도 더 큰 시너지 효과를 이끌어내고 있다.
자신의 명예와 목표했던 자리를 두고 마지막까지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던 장준혁의 모습은 결코 옳다고 여겨지지 않는, 기존의 선한 주인공들과는 확실히 다른 캐릭터지만 그의 집념과 방법적인 행동에 무턱대고 돌을 던질 수가 없게 한다.
우리 사는 곳은 여전히 권력의 힘과 일명 '줄'이라는 영향력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곳이어서 비양심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목표를 향해 접근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모자라 자기 자신을 속이며 나아가는 장준혁의 모습에 저럴수밖에 없다고 공감하는 이들이 상당수였을텐데, 어머니를 생각하며 흘리던 눈물이나 11화때 잠깐이지만 장준혁의 과거 시절을 보여주던 장면은 부정한 수단을 사용할 수 밖에 없는 장준혁의 처지를 잘 나타내던 장면이어서 그에게 연민을 느낄 수밖에 없게 하는, 짧지만 강한 효과를 남겨주는 장면들이었다.
사실 4화까지는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라 2003년 일본판과 캐스팅만 비교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재미를 느끼지 못했는데 노민국이 수술에 참여하는 5화부터는 마지막회까지 다 알고 있는 내용이면서도 긴장감이 떨어지지 않게 재미나게 볼 수 있었다.
물론 원작 자체가 워낙 좋은 내용이라 이런 선전이 가능했겠지만 같은 내용이면서도 일본판의 정서와는 다른 한국식 메디컬과 법정내용의 해석을 해낸 연출력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고, 김명민을 비롯한 주요 배역들과 특히 자신의 자리를 너무도 굳건히 지켜주고 있던 중년 배우들의 탄탄한 역할 소화가 있었기에 이런 작품이 가능하지 않았나 싶은데, 일본판이 머리속에 워낙 강하게 박혀있는지라 배우들의 면모는 계속해서 일본판에서의 배우들과 비교해가면서 볼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역시 기대대로 김명민이 보여주는 장준혁의 연기는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주고 싶은데 "베토벤 바이러스"를 본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인지라 같은 사람이 저렇게 다른 캐릭터에 완벽하게 몰입해서 보여주는 연기력은 놀랍다는 말 외에는 표현할 말이 없을 듯 하다.
자신의 목표를 향한 집념은 그가 보여주는 표정만으로도 그 느낌이 그대로 전달되고 있고, 어머니를 생각할때 보여주는 눈물 연기나 혼자서 짊어지고 있는 외로움은 자신의 목표를 위해 도의적인 것을 져버리고 뻔뻔함을 내세우는 인물임에도 장준혁만의 인간적인 면모에도 눈길이 가게 한다.
과연 에구치 요스케의 네임 밸류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 걱정했던 이선균은 그 기우를 보란듯이 박살내주고 있었는데, 고집스럽게 자신의 가치관을 꺾지 않고 의사로서의 직분과 인간으로서의 양심을 잃지 않으려 했던 모습은 이선균이라는 배우를 인정하게하는 수준급의 연기력을 느끼게 함과 더불어 각박한 우리 현실에 그래도 한줄기 희망은 있다는 메세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해주고 있다.
차인표라는 캐스팅은 일본판의 사와무라 잇키와 비교했을때 더 비중있는 네임 밸류여서 노민국이라는 역할에 좀 더 무게감이 실렸던 것 같고, 송선미도 일본판의 야다 아키코 못지 않은 활약을 보여주는 만족스러운 모습이었다.
드라마에 있어서 중견 배우들의 구심점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 작품에선 특히 더 잘 느끼게 해준 것 같은데, 이정길, 김창완, 정한용, 이희도, 박영지 등의 모습은 뻔히 보이는 거짓말과 입에 발린 소리를 일삼으며 보여지는 겉모습과 체면을 지키려는 권력의 부정적인 모습과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는 철새같은 모습을 너무도 공감가게 표현하고 있다.
또한 반대편에 서있던 변희봉 선생님의 모습은 그래도 아직 양심은 죽지 않았다는 희망을 연기력으로 확실하게 느끼게 해주셨는데, 일본판과 비교했을때 윗자리에 계신 분들중에선 변희봉 선생님께서 가장 강력한 포스를 보여주셨다 생각한다.
기태영이나 손병호라는 캐스팅은 우려했던 것에 비해 일본판과 비교해 전혀 뒤쳐질게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마담 역으로 나온 김보경은 맡은 역할에 있어선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역시 구로키 히토미라는 네임 밸류와 비교했을때는 떨어지는 존재감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나이차가 많이 나보이지 않을까 우려를 산 임성언은 오히려 이 점이 철없어 보이는 아내의 모습으로 더 좋은 효과를 냈다고 생각이 들며, 부원장의 와이프로 나온 양희경은 일본판때의 그 역할을 했던 아줌마가 워낙 엄청난 얄미움을 보여줘서인지 표독스러움이 너무 무난하지는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배우들의 면모에서 재미난 모습이 있었다면 평생 착한 아저씨 역할만 맡을 것 같은 김창완이 기회주의적인 부원장을 연기하고 있다는 점과 악역전문배우라고 일컬어졌던 손병호가 약자의 편에 서는 변호사로 출연하고 있는 점이었는데, 두분 다 기존의 이미지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이 맡은 캐릭터를 효과적으로 전달해주고 있어 역시 좋은 연기자는 이런데서 표가 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배우들의 연기가 워낙 좋아서 인물들의 미묘한 심리 묘사가 더더욱 잘된 작품이 아니었나 싶은데, 특히 차를 타고 가다가 엄한 대리 기사에게 화풀이를 해대던 이주완 과장의 모습과 엘레베이터에서 아이에게 소리를 치던 장준혁의 모습은 인물들의 심리적인 긴장감을 한방에 잘 분출시켜준 효과적인 장면들이었다.
일본판에서는 독일로 갔던 자이젠이 아우슈비츠 수용소 안의 철로위에 서있던 장면이 상당히 상징적으로 다가오는 장면이어서 우리나라판에서는 이 장면이 없었던게 조금 아쉬웠다는 생각이 들고, 일본판은 시작부터 자이젠이 눈을 감고 수술하는 손동작을 연습하던 모습이 나왔던 것에 반해 우리나라판에서는 상상으로 수술하는 손동작을 20화때 딱 한번만 보여주고 있는데 이 장면은 1번만 나와서인지 우리나라판이 더 감동적으로 느껴졌던 것 같다.
일본판에서의 자이젠은 죽기전에 마담과 짧은 시간을 같이 보내게 되지만 우리나라판에서는 전화 한통화로 두사람의 마지막을 표현해주고 있는데 전화를 끊은뒤에 입을 막고 울던 김보경의 울음소리가 너무 애절해서인지 이 부분도 우리나라판이 더 감동적이었다 얘기하고 싶다.
소송에서 결국 유가족이 이기긴 하지만 3천만원이라는 손해배상금은 한사람의 죽음에 대한 금액으로는 너무 작은 금액이 아니었나하는 생각을 해보며, 일본판이 워낙 좋은 작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이미 한번 겪었던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장준혁의 모습에서 다시 한번 눈시울이 뜨거워질만큼 또 한번의 감동과 생각할거리를 제대로 전달해주고 있는 작품이어서 걱정과는 달리 상당히 만족스러운 작품이었다.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리메이크판치고 괜찮은 작품을 찾기가 힘들만큼 리메이크라는게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닌지라 더더욱 높이 살만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노희경이나 김수현 작품처럼 많은 양의 대사가 등장하진 않지만 인물들의 특징과 현재의 상황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인상적인 대사들도 많았던 작품이어서 개인적으로 인상깊었던 대사들을 몇개 추려보는 걸로 이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별 ★★★★
#1.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대사들
- 2화에서
이주완 과장 : "누가 보더라도 좋은 기회였었는데..."
부원장 : "하하... 누가 봐도 좋은 기회란건 말입니다, 말 그대로 누가 봤기때문에 절대 좋은 기회가 아닙니다.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 6화에서
민충식 : "우리 우용길이 유필상이... 매달리는게 아니야. 이용하는거지. 걔들도 우리 이용하는거고..."
- 7화에서
유과장 : "아니 그럼... 그게 모두 계산된... 야~ 아니 이과장님의 그 구구절절한 호소가 계산된 명연기라는 건 누구도 생각치 못했을겁니다. 하하하하하"
이주완 과장 : "아 계산된 연기니 대사니 그렇게 생각하면 안되요. 난 오직 내 진심이 운좋게 감동표가 되지 않았을까 그렇게 짐작할뿐인데 아니 유과장마저 날 그렇게 오해하면 내가 권모술수나 쓰는 사람 같잖아."
- 9화에서
장준혁 : "명인대학병원 외과에 계속 남고 싶지 않아?"
- 14화에서
희재 : "누가 이름을 불러준다는거 흔한일 같지만 잘 안그런다. 자기도 잘생각해봐 누가 준혁아 해주는지. 그 사람이 바로 자기 있는 그대로 봐주는 사람일거야 왜냐면 타이틀이 생기면 그 타이틀이 내가 되잖아 무슨무슨 사장님 무슨 회장님 장준혁 과장님. 물론 자긴 그 타이틀때문에 이렇게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지만 말이야."
- 17화에서
의국장 : "너 등신이다. 왜 주는 밥 먹고 체할려고 그러냐? 그냥 꿀꺽 삼켜. 그러면 끝이야. 동일아 형은 삼킬거다. 목구녕이 찢어질거 같아도 삼킬거다... (중략) ... 우리 욕 먹자. 욕 먹고 배부르게 살자."
#2. 반가운 얼굴들
카메오로 출연했던 홍경민, 박희진, 김현철.
홍경민과 박희진은 "뉴하트"에서도 카메오로 출연했다대. 의학드라마와 연관이 깊은 듯.
그리고 이제는 볼 수 없는 故박광정 선생님.
#3. 흡연 장면
우리나라 드라마에서는 흡연 장면이 등장할 수 없건만 이 작품 아주 과감하게 담배 연기 내뿜는 모습을 보여주신다.
재미난건 일본판 "하얀 거탑"에서 자이젠은 담배를 즐기는 인물이었고 폐암으로 죽는다는 설정이었는데...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장준혁은 담배를 피지 않는 설정이라 굳이 폐암으로 할 것 없이 담관암으로 설정한거라 하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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