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7-27

이정희와 유시민, 이렇게 같고 또 다르다-시사인 196호- 이숙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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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와 유시민, 이렇게 같고 또 다르다
[196호] 2011년 06월 13일 (월) 11:16:36이숙이 기자  sook@sisain.co.kr
이정희 민노당·유시민 참여당 대표의 대담집 <미래의 진보>가 6월15일 출간된다. <민중의 소리> 이정무 편집국장의 사회로, 우리 사회의 핵심 쟁점에 대해 두 사람이 의견을 나누는 형식이다. 이번 대담집을 위해 두 사람은 세 차례에 걸쳐 10시간가량 얼굴을 맞댔고, 못 다한 대목은 사회자와 두 대표 간의 개별 인터뷰로 보완했다. <시사IN>은 원고를 미리 입수해, 한·미 FTA, 재벌, 북한 문제 등 통합의 최대 걸림돌이 될 것으로 보이는 3대 핵심 쟁점에 대한 내용 일부를 발췌해 소개한다.


   
ⓒ뉴시스
쟁점 1:한·미 FTA

한·미 FTA는 유시민 대표의 아킬레스건이다. 유 대표는 참여정부 시절 “한국·미국 FTA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라는 견해를 고수해 진보 진영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 그런가 하면 지난 4·27 보궐선거를 앞둔 시점에서는 한·미 FTA 비준을 사실상 반대하는 야 4당 정책합의문을 채택해 ‘말을 바꿨다’는 비난을 받았다. 반면 민주노동당은 한·미 FTA를 일관되게 반대해왔다. 유 대표는 이번 대담에서 자신의 견해가 바뀌게 된 배경을 자세히 설명하는 한편 진보 진영에 대한 섭섭함을 가볍게 드러내기도 했다.

유시민:
(한·미 FTA에 대한 주장이) 바뀌었다고 할 수도 있을 텐데, 저는 아니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기본적으로 저는 통상 개방에 대해 찬성하는 입장입니다. 이 통상 개방이라는 것이 도덕적으로 선하다거나, 또는 보편적으로 옳다거나 이런 문제를 넘어서서 이미 한국은 이른바 ‘스몰 오픈 이코노미(small open economy)’, 그러니까 소규모 개방 경제로 와 있고 국민경제의 모든 구조가 개방 체제에 적응된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2006년의 그 시점에서 미국과 FTA를 추진해야 하느냐? 그 문제에 대해 자신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FTA에 대해서는 원론적으로 찬성하지만 그 시점에, 하필이면 미국이라는 나라와 FTA를 체결하는 것, 더구나 협상의 주요 내용이 어떻게 될지 불확실했기 때문에, 만약 제가 대통령이었다면 한·미 FTA를 하자는 결정은 못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제가 보건복지부 장관 임명을 받아서 청문회를 준비하고 있던 2006년 초에 한·미 양국에서 전격적인 협상 개시 선언이 나왔단 말이지요. 대통령이 의지를 가지고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가 당시에 정무적으로 판단해볼 때 돕는 것이 합당했습니다. (중략) 시계를 2011년으로 돌리면 그 사이에 이명박 정부의 재협상이 있었습니다. 자동차 부문을 비롯해서 몇 군데 심각한 양보, 또는 미국 측 요구의 일방적 수용으로 협정문이 바뀌었지요. FTA는 사실상 국제 비즈니스의 성격을 띠는 협정이라고 했을 때 이것은 양국 간의 이익이 심각하게 일방으로 기울어진 것입니다. 찬성하기 어렵습니다.

사회
(이정무):유 대표께서는 당시에 대통령이었다면 안 했을 것이라는 말씀인가요?

유시민
:(중략) 노 대통령께서 이렇게 생각하신 면이 있습니다. 길게 내다볼 때 잘 개방된 작은 국민경제를 가진 한국이 이 흐름을 타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다고 본다면 결국 어느 시점엔가 하게 될 거라는 판단, 어차피 하게 될 것이라면 좀 선제적으로 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판단, 기왕 선제적으로 할 것이라면 자본주의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과 해버리는 게 아예 낫지 않겠느냐고 판단했던 겁니다. 이 판단이 옳은지 그렇지 않은지는 다툴 여지가 있어요.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그렇게 판단하셨습니다. ‘기왕 할 거라면 내가 집권하고 있을 때 협상을 하는 것이 그 결과가 조금이라도 낫지 않을까’ 하는. 일종의 자신감이라고 할까요? 사명감을 가지고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제 스타일로는 못했을 것 같아요. 

사회:민주노동당이나 진보 진영이 FTA를 무조건 반대한다는 선입견도 꽤 퍼져 있는 것 같습니다. FTA를 바라보는 이정희 대표의 견해는 어떤 것입니까?

이정희
:일단 FTA라는 형식 자체가 문제는 아니겠죠. 어떤 FTA냐, 내용이 무엇이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한국·칠레 FTA부터 시작해서 여러 FTA를 체결해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특히 국회의 비준 동의 과정에서 늘 문제가 되었던 것이 있습니다. 먼저 식량 안보 문제. 대단히 큰 문제지요. 국제사회에서 곡물 가격이 폭등하는 위기가 왔을 때 이것에 대처할 수 있는 ‘안보’ 차원에서라도 식량자급률을 높이고 농민들이 생존하고 생활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공공정책에서 입법 권한들이 보장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가장 좋고 가까운 예가 SSM 규제법인데, 간신히 지식경제부를 설득해서 SSM 규제법을 만들어놓았더니, 이 법과 한·EU FTA 협정문이 정면으로 대립하는 양상이 되었습니다. 다음으로는 사법주권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우리 헌법에 따르면 국제조약은 헌법 아래에 있습니다. 그런데 국가의 공공정책이 이른바 ISD(투자자-국가 간 소송제)를 통해 내국 법원이 아닌 국제 분쟁에서 최종으로 심판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유시민:이 대표께서 말씀하신 원칙에 대해서는 저도 공감을 합니다. 한 가지 덧붙여두고 싶은 것이 진보 진영의 ‘최대주의’입니다. 한 열 가지가 있다고 치고, 이 중에서 서너 가지는 정말 마음에 안 들어요. 그런데 이게 다 적이 됐습니다. 다 같아야 같은 편이 되고, 한두 개라도 다르면 적이 되는 문화가 진보 진영에 있었다고 생각해요. 노무현 대통령도 그렇고, 저도 이걸 잘 몰랐어요. 솔직히 잘 알았다면 그런 일들을 안 할 수도 있었을 것 같아요.


쟁점 2:삼성과 재벌
과거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대기업과 재벌에 휘둘리면서 결국 양극화가 심화되고 경제적 약자의 인권이 유린됐다고 진보 진영은 비판해왔다. 참여정부는 특히 삼성과의 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이러한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인다는 유시민 대표는 재벌의 일탈적 행위에 대해 좀 더 강한 규율이 필요하다는 이정희 대표의 지적에 100% 동의했다. 단 방법론에서 두 사람은 약간의 차이를 보였다.


유시민
:‘참여정부가 삼성이랑 친하다.’ 그런 이야기를 저도 많이 들었습니다. 구체적인 사건은 모르지만, 총체적으로 보면 재벌들이 헌법 위에 있는 것은 맞아요. 제가 보궐선거 때 울산에 민주노동당 구청장 후보 지원 유세를 갔습니다. 한 번은 현대중공업 문 앞에서 했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아무 반응이 없어요. 보통 웃고 손 흔들고 하는데 아무도 안 그래요. 그래서 주위 분들에게 이상하다고 했더니 관리자들이 보고 있을까봐 손을 못 흔든다는 겁니다. 노동자들이 주권자인데, 어떻게 관리 직원들을 동원해 공장 앞에서 정치적 표현을 못하게 합니까? 이게 왕국이지 뭐가 왕국이에요? 국가의 일반 의지가, 돈 많은 재벌이 사유물로 하고 있는 공장 안에도 적용되어야 공화국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공화국이라는 말이 부끄럽지요. 그런 면에서 참여정부는 비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랬을까? 우선 삼성 돈을 받으면 안 됩니다. 삼성뿐만 아니라 어떤 재벌 그룹으로부터도 돈을 받으면 안 돼요. 국가 권력을 장악해서 정의·자유·평등을 실현하려는 의지를 가졌다면 유착해선 안 돼요. 재벌들이 장래성이 보이는 법조인·정치인들에게 ‘스폰서’를 한다고 하지요. 유망주라도 자신의 스폰서 위에 올라설 수는 없거든요. 그런 면에서 보면 진보와 보수를 불문하고 정치적 자위, 그러니까 자기 보호 차원에서 공화국의 정신을 지켜야 합니다.


  
ⓒ뉴시스
참여정부 시절 추진한 한·미 FTA에 대해 민노당은 반대했고(위) 유시민 당시 장관은 찬성했다.


사회
:그런데 두 분은 모두 유망한 정치인이거나 변호사셨는데 (재벌이) 왜 접근을 안 했을까요?

이정희:둘 다 별로 유망하지 않았나보죠.(웃음)

사회:노무현 대통령은 “이제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유시민:노 대통령의 말은 좌절감의 산물입니다. 그 당시의 텍스트를 보면 다르게 해보려고 애를 쓰는데 되지는 않고, 국민은 원망하고, 그럼 고용이라도 늘려야겠다, 그래서 재벌에 머리를 숙이고 도와달라고 한 것이거든요. 그런데 도와주지는 않고. 좌절을 느꼈을 겁니다. 

이정희:그럴 때 쓰라고 헌법 119조 2항(일명 경제민주화 조항)이 있긴 한데요, 한편으로는 만약 개헌이 된다면 가장 위태로운 조항이 119조 2항이라고 생각해요. 그 동안 헌법재판소는 사유재산권을 대단히 옹호하는 방식으로, 흘러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정부에 충분히 경제를 규제하고 조정할 권한이 있는데도, 경제 주체들로서는 사유재산권 문제를 절대로 양보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해졌습니다. 참여정부 시절을 포함해서 민주 정부 10년을 보면, 초법적으로 할 수는 없으니까 헌법과 법률의 테두리에서 해야 하는데, 사법부에 의해 번번이 가로막힌 거지요.

유시민
:말씀하시는 걸 듣다보니 역시 이 대표님은 법률가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저는 꼭 그렇게만 생각지 않습니다. 헌법과 법률에 따라야 하고, 초법적인 건 안 되는 게 맞습니다. 그러나 법률에 다른 건 하지 말라고 되어 있는 건 아니거든요. 예를 들어 삼성전자에서 백혈병 사망자가 나왔다고 하면요, 정상 국가라면 국립보건원이나 노동부에서 조사가 들어가야 맞습니다. 조사해서 사용자 책임이 있으면 행정 조처도 하고 피해자들이 소송해서 보상을 받고 할 수 있습니다. 그걸 국가가 안 하면서 약자들에게 알아서 소송해라, 소송에서 이겨도 소송 낸 사람에게만 적용이 되는 게 정상이 아니거든요. 그동안 국가 권력의 사용에서 리버럴(자유주의자)들이 너무 소극적이었다는 반성을 합니다. 합법적 절차에 따른 개입에 너무 집중하지 않았나. 숨이 넘어가는데 언제 그런 것들을 기다리겠습니까?

사회:유 대표께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자유주의자인데, 지금 말씀은 다소 과격하게 들립니다. 

유시민:저는 자유주의 정치제도의 기본 틀을 지지합니다. 그러나 경제적인 면에서의 무제한의 자유라는 것은 결국 경제적 강자의 약자에 대한 수탈로 이어집니다. 경제적 강자가 약자를 수탈하면 결국 약자의 자유가 유린됩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볼 때 자유주의적 정치 제도를 채택한 모든 나라는 정치적 자유주의가 성숙함에 따라서 경제적 자유를 제약하는 쪽으로 움직여왔습니다. 물론 경제적 자유를 어떤 방식으로, 어디까지 제약하는 것이 정당한가에 대해 진보와 보수 사이에 차이가 있지요. 이 점에 관해서는 저는 우리 헌법에 이미 일정한 합의가 있다고 봅니다. 

이정희:진보적 대기업 정책이 경제성장을 둔화시킨다는 것도 미신입니다. 이게 사실이려면 반대의 논리, 즉 대기업을 밀어주면 경제성장이 잘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의 재벌 대기업들은 약탈적인 경제구조 속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보다 더 많은 과실을 챙겨왔습니다. 재벌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는 건 시급한 현안이 됐지요. 이명박 정부조차 초과이익 공유제나 동반 성장, 이런 말을 하고 있으니까요. 지금 단계에서 재벌 대기업의 약탈적 경제구조를 바꾸지 않고는 우리 경제가 조화는 물론 더 이상의 성장도 어렵다는 것을 이미 그들도 깨닫고 있습니다. 

사회:진보 세력이 집권할 경우 재벌 정책이 어떤 모습으로 바뀌게 될지 말씀해주십시오. 

유시민:돈을 버는 과정에서 법과 윤리를 잘 지켰고, 돈을 번 만큼 세금을 내면 국가가 개입할 문제가 전혀 없습니다. 다만 재벌이 법 위에 있는 것만은 안 된다는 것이죠. 그 다음에 ‘재벌을 해체할 거냐?’ 하는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해체하고 싶어도 해체할 합법적 수단이 정부에는 없습니다. 다만 재벌 총수도 자식이 여럿이고, 경영권을 상속하는 과정에서 합당한 상속세를 납부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이 재벌 총수 일가의 소유 지분은 줄어들게 됩니다. 그러면 현대그룹처럼 자식이 너무 많아서 계열 분리가 저절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문제는 불법 상속, 편법 상속, 탈법 상속을 통해서 대물림을 하는 경우입니다. 경영 능력은 유전된다는 증거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2세, 3세에게 회사를 물려줌으로써 그 회사도 멍들고 국민경제도 멍이 듭니다. 그런 점에서 우회 상속이라든가 편법·불법 증여라든가 이런 것을 막을 수 있게 법 제도를 정비하고, 세법을 엄격하게 적용해야 합니다. 

이정희:재벌 대기업들에 대해서 해야 할 중요한 일은 첫 번째로 세금을 제대로 걷는 것입니다. 전체 법인세 감면 혜택에서 50% 이상을 이른바 재벌 대기업이 받고 있거든요. 두 번째는 중소기업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이고요, 세 번째는 노동자들의 노동권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저는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시절 정리해고의 요건이 굉장히 완화됐다는 것에 주목합니다. 재벌 대기업은 많은 조세 감면과 국가의 정책적인 직접 지원, 그리고 환율과 금리 정책에 따른 간접 지원을 받은 결과로 성장해왔습니다. 따라서 설사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하더라도 헤쳐나갈 수 있는 위기라면, 자기 책임에 맞게 일자리를 만들고 유지해야 합니다. 그런 만큼 정리해고의 요건은 매우 까다로워야 정상입니다. 그동안 완화되어왔던 해고의 요건은 다시 엄격했던 때로 돌아가야 합니다.



쟁점 3:북한과 한반도 문제
한국에서 진보·보수를 가르는 또 다른 중요한 기준이 미국과 북한을 보는 태도이다. 참여정부는 대북 송금 특검과 이라크 파병 결정 등으로 진보 진영으로부터 비판을 많이 받았다. 그런가 하면 북한 문제는 진보 진영 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는 예민한 쟁점이다. 대담에서도 이들 문제에 대한 두 사람의 견해 차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이정희 대표는 ‘정의’를, 유시민 대표는 ‘유연함’을 서로에게 주문했다. 


이정희:2003년이었지요? 파병 문제가 불거진 게. 그 소식을 듣자마자 파병은 위헌이라는 취지로 헌법소원 청구서를 썼어요. 굉장히 심각한 문제라고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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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민주노동당 방북단이 귀국하자 보수 단체 인사들이 공항에서 ‘친북좌파 척결’을 외치고 있다.


유시민
:저는 그 당시 집권당 국회의원이었는데요, 파병이 옳으냐? 옳지 않으냐? 이렇게 묻는다면 옳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 나라의 대통령의 선택에 대해서 오로지 그 잣대만 가지고 평가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의문스럽습니다. 다른 자리에서도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참여정부에서 달라이 라마의 방한이 끝내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도덕적 잣대로는 옳지 않았지요. 그런데 어쩔 수가 없었어요. 이라크 파병도 도덕적 잣대로는 옳지 않았지만,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남북 관계나 네오콘 문제, 전통적인 역사의 문제까지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생각해요.

이정희:1990년대 나토의 개입에서 2003년 이라크 전쟁을 지나면서 정리되고 있는 것이 ‘아무리 정의를 위한 것이라도 타국에 대한 개입은 인정될 수 없다’는 쪽입니다. 당시에 만약 다른 선택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면 앞으로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만들어내야지요. 

사회:이정희 대표는 지난해 10월에 북한의 권력 승계 문제에 대해 ‘말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혀서 홍역을 겪었습니다. 

이정희:당시 입장을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배경이라는 차원에서 말씀을 드릴게요. 일단 저는 이런 이분법이 싫어요. 늘 남북 관계, 한·미 관계에서는 방어막을 치는 게 일반적인 수사입니다. 정치권에서는 특히 더하지요. 나는 북한을 비판하지만 무엇은 정부가 잘못했다, 나는 반미는 아니지만 이것은 미국이 문제다. 딱 전제를 하고 들어가요. 국가보안법 사건을 다루는 법정에서도 늘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게 속상해요. 그 이분법을 깨고 싶은 것이 많아요. 

유시민:예전에 보안사에 끌려가면 실컷 패고 나서 물어요. ‘너 마르크스 레닌주의자지?’ ‘너 간첩이지, 주사파지?’ ‘무슨 주의자 아니면 아니라고 하면 되잖아’ 그러거든요. 이때 ‘저 아닌데요’라고 말하고 나면 양심의 자유를 침해당하는 것을 인정한 듯해서 굉장한 인간적 모멸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말을 안 하고 있는데 ‘말 못하니 종북이다’고 하면 등에 칼을 꽂는 느낌을 받을 것 같습니다. 이해가 돼요. 그래도 이 문제에 대한 대응을 두 가지 차원으로 나눠서 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저쪽은 좀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나는 쟤하고 대화를 해야 해.’ 이건 가능한 논법이라고 봅니다. (지금은) 북한 체제에 대한 ‘고백’을 강요하지 말라는 것과 남북 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가,라는 것이 뒤범벅되어 있어요. 저는 첫 번째 문제는 가볍게, 두 번째 문제는 아주 진지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봅니다. 민주노동당이 두 문제를 모두 진지하게 접근하다보니 분당도 겪었고 정치적 공격을 받았습니다. 민주노동당은 정말 귀한 정당인데, 그 귀한 정당이 모함을 당하고, 공격을 받고 고립되고 하는 것은 민주노동당의 입장에서뿐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불행한 일입니다. 한번쯤 지혜롭게 그 올가미를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요? 어떤 의미에선 국민에게 져주는 일이라고 봅니다. 저도 지지 않으려 한다고 욕을 많이 먹는데, 이런 건 져줘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이 대표께서 너무 진지하셔서 어떨 때는 안타깝기도 합니다. 

이정희
:진지함이라고 하면 이분법에 대해서 진지한 것이고요. 북한의 권력 승계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판단을 갖고 있습니다. 이미 6·15 선언에서 남북은 서로의 체제를 존중하기로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북한의 권력 승계 문제를 보는 원칙은 6·15 선언 이하도 이상도 될 것이 없어요. 체제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 이를테면 민주주의·공화정 같은 주제들이 있지만 남북 상호 간에 이에 대해 옳고 그름을 평가하지 않겠다는 것이 6·15 선언이라고 봅니다. 공존의 선언이거든요. 따라서 정치의 차원에서는 논쟁이 될 것이 없습니다. 

유시민
:문제는 이런 진지함, 흑백논리를 거절하는 철학적 성찰이 정치적으로 악용되고, 또 오해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좀 더 연구를 해서 유권자들이 가진 오해를 풀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정희:실제 지난해 10월에 악용된 것보다, 더 크게 악용된 건 2008년 분당이었지요. 엄청난 손실을 입혔습니다. 저는 작년에 이 일을 겪으면서 진지하게 이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분당을 성찰하게 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어요. 지금 진보신당과 통합 논의를 하고 있는데, 통합 논의가 있다는 것만 봐도 이 문제가 진보의 기준이라거나, 분당의 이유가 될 수 없었다는 게 분명해졌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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