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마저 반색하는 반기문 ‘리더십’ |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연임이 확정되었다. 취임 초기 혹독한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반 총장은 지구온난화와 아랍 민주화 문제 등에 적극 뛰어들면서 리더십을 인정받았다. | | | [198호] 2011년 06월 27일 (월) 11:33:09 | 김동석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소장) | | | | 6월21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연임이 확정됐다. 이날 오후 3시(현지 시간), 유엔 192개 회원국은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반 총장의 연임을 공식 승인했다. 총회에 제출된 연임 추천 결의안은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이사국 15개국, 유엔 전체를 대표하는 5개 지역그룹 의장 등 20개국의 공동 제안으로 이루어졌다. 마틴 네시르키 유엔 대변인은 “안보리 이사국과 지역그룹 의장단이 추천 결의안에 동시 서명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라면서, 이는 사실상 192개 회원국 전체의 추천을 받은 셈이라고 말했다. 이날 총회를 참관한 필자는 연임이 확정된 직후 회원국 대표들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회의장으로 들어서는 반기문 총장을 뿌듯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유엔본부 근처에 사는 한국인으로서 이날만큼 행복한 날도 없었던 듯하다. 기립박수를 받으며 입장한 반 총장이 의장 옆 좌석에 앉자 5개 지역그룹 대표가 차례로 발언에 나섰다. 먼저 아프리카를 대표한 세네갈 대사는 “아프리카는 반 총장 연임을 지지한다”라고 했고, 아시아를 대표한 쿠웨이트 대사는 “반 총장이 연임을 맡아주어 고맙다”라고 했다. 유럽·남미 대표에 이어 마지막 지지 연설자는 개최국 대표로 나선 수전 라이스 미국 대사였다. 그녀는 “반 총장만큼 유엔 사무총장 자리를 잘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 미국 정부는 반 총장의 리더십에 적극 지지를 보낸다”라고 말했다.
| | | ⓒXinhua 연임에 성공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앞줄 오른쪽)이 6월21일 선서를 하고 있다. |
돌이켜보면 2006년 한국 외교부 장관이 유엔의 수장이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라크 전쟁과 노무현 정부가 자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9·11 테러 이후 ‘대테러 전쟁’이라는 명분 아래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미국 조지 부시 정부는 이 전쟁에 대한 유엔 동의를 얻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안보리 상임이사국 중 영국을 제외한 중국·러시아·프랑스가 한목소리로 전쟁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당시 부시 행정부 내 외교·안보 실세인 네오콘들은 이라크 공격에 대한 미국의 의지를 유엔에 전달하라고 콜린 파월 국무장관을 압박했다. 전쟁 개시를 하루라도 앞당겨야 한다고 밀어붙이는 딕 체니 부통령의 등살에 외교라는 개념은 통하지 않았다. 2003년 1월27일, 미국 정부는 유엔 안보리 입구에 걸린 대형 그림을 푸른색 커튼으로 막으라고 지시했다. 그것은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복제한 그림이었다. 민간인을 학살한 잔학 행위를 묘사한 이 그림 앞에서 미국이 전쟁을 선포하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2003년 2월25일, 유엔에 출석한 파월 장군은 조지 테닛 중앙정보국(CIA) 국장을 왼쪽에, 유엔 주재 미국 대사이자 훗날 국가정보국 국장이 된 존 네그로폰테를 반대편에 세운 채 이라크 전쟁이 불가피함을 설명했다. 그해 3월20일 미국은 이라크를 공격했다.
유엔 내부에 반미 기운 만연한 가운데 사무총장 당선
이 과정에서 미국이 보인 태도는 철저하게 ‘유엔 무시’였다. 전 세계 절반 이상이 전쟁 반대를 외치는데도 미국은 오불관언이었다. 코피 아난 당시 유엔 사무총장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미국에 대한 유엔 회원국들의 불신과 원망은 커져만 갔다. 미국 네오콘은 유엔 무용론을 제기하고 나섰다. 네오콘의 나팔수나 다름없던 존 볼턴 국무부 차관보도 ‘미국을 반대하는 조직에 왜 돈을 쏟아붓느냐’며, 유엔을 손보겠다고 유엔 대사를 자청하고 나섰다. 당연히 유엔 내부에 반미 분위기가 만연했다. 이랬던 시기에 한국에서는 미국을 한 번도 방문한 일이 없다는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노무현 대통령이 등장한 것이다. 당시 세계 언론은 미국의 패권 논리에 용감하게 도전한 인물이 대통령에 당선됐다며 한국을 주목했다. 특히 제3세계 나라들은 과거는 어쨌든 ‘미국에 대해 할 말은 하는 권력’으로 노무현 정부를 평가하는 분위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반기문 외교부 장관이 유엔 제8대 사무총장에 도전장을 내어 당선된 것이다. 곧 2006년 한국인 유엔 사무총장이 나올 수 있었던 데는 반기문이라는 국제 리더십을 갖춘 외교관이 있었다는 점, 한국의 국력이 한창 상승세였다는 점, 평화를 위한 분쟁 조정력이라는 측면에서 분단국가 출신임이 강점으로 작용한 것 등이 두루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2007년 취임 이후 초기 2년간 반 총장은 정말로 많은 구설에 시달렸다. 당시 유엔 개혁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조직 내 저항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 유엔 내에서 미디어 홍보를 관리하며 오랫동안 영향력을 행사해오던 사무처 관리를 내보내는 과정에서 반 총장은 특히 혹독한 홍역을 치렀다. 한국 또한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취임 직후 그를 면담하고 싶어하는 한국인은 매우 많았다. 뉴욕을 방문하는 한국의 고위급 인사는 말할 것도 없고 현지 동포 사회에서도 단체마다 반 총장을 모시는 것이 목표일 정도였다. 그 바람에 “유엔 총장인지, 한국 총장인지?”라는 부정적인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한동안은 중국의 인권 문제에 소극적이라는 비판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반 총장은 서서히 전략적인 리더십을 발휘했다. 내부 개혁에도 분명한 어젠다와 순서를 정해 성과를 낼 수 있는 일에 먼저 매달렸고, 재난이나 분쟁 지역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해 현장주의를 지켰다. 이를테면 반 총장이 이룬 빛나는 성과가 지구온난화 문제를 지구촌의 가장 다급한 이슈로 끌어올린 일인데, 이를 위해 그는 취임 초기 남극을 직접 찾는 접근 방식을 취했다. 덕분에 당시 뉴욕 주재 한국 특파원들이 남극을 여행할 기회를 갖기도 했다. 올해 초 잇달아 불었던 아랍 민주화 바람도 그의 연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이집트 무바라크 독재 권력으로부터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의 안전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했다. 뉴스에서는 늘 튀니지·시리아·예멘 등 현장을 찾아 나선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로써 그는 인권 문제에 소극적이라는 비판을 순식간에 잠재웠다. ‘신중하되 단호하게’라는 표현이야말로 그의 스타일을 가장 잘 설명하는 용어일 듯하다. 수전 라이스 미국 대사는 “그(반기문)의 리더십은 성품과 인격에서 나온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결과 그는 회원국 정상들과 신뢰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지난 6월21일 사무총장 연임을 수락하는 연설에서 그는 “우리는 4년6개월 전에 이미 새로운 정신으로 신(新)다자주의를 주장했다”라고 말했다. 회원국의 절대다수인 제3세계 나라들이 미국에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지만, 유엔은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국제사회에 공정한 기준을 적용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중국·러시아·북한도 반 총장의 ‘공정함’ 인정
실제로 중국이나 러시아, 심지어 북한까지도 반 총장의 리더십을 이루는 원칙이 공정함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북한 대표는 사석에서 필자가 던진 질문에 대해 “공개적으로 찬양을 하지는 않겠지만 공화국(북한)도 그의 연임을 전폭 지지한다”라고 말했다. 6월21일 총회장에서도 필자는 북한 대표가 반 총장에게 힘차게 박수를 보내는 것을 목격했다. 이날 총회가 끝난 뒤 한국 특파원들과 한 간담회에서 반 총장은 자신은 유엔 사무총장이기 이전에 분단국가인 한국인임을 강조했다. 사무총장으로서 북한을 꼭 방문할 것이며 이를 순리대로 준비하는 중이라고 밝혔다. 유엔의 제2기 반기문 체제는 더욱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을 비롯한 유엔 안보리 이사국 또한 유엔을 강화하려는 반 총장의 의지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함께하면 불가능이란 없다”라는 반 총장의 의지가 앞으로 5년간 관철될지 주목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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