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7-28

[뉴스룸에서-김호경] 손학규의 정체성- 국민일보 김호경- 2011.07.13 21:36

 
업데이트 : 2011.07.13 21:36
[뉴스룸에서-김호경] 손학규의 정체성

1993년 3월 어느 날,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손학규 교수는 ‘한국정치학’ 수업 도중 학생들 앞에서 굵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제가 정계를 가게 됐습니다. 수업을 끝까지 책임지지 못해 미안합니다. 가서 우리 정치를 바꿔보겠습니다. 내가 무엇이 되는지를 보지 말고 어떤 일을 하는지 지켜봐 주기 바랍니다.”

학생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스승에게 존경과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그때 현장에 있었던 서강대 정외과의 한 졸업생은 노무현 대통령 시절 청와대 비서관으로 일했는데, 그는 기자를 만나 당시 ‘기립 박수’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학생들은 손 교수에게 믿음을 갖고 있었어요. 눈물을 뚝뚝 흘리는 손 교수를 보면서 그가 정치권에 가서 정말 뭔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 마지막 수업을 뒤로 하고 손 교수는 학교를 떠나 정치권에 투신했다. 그러나 그는 운동권 출신임에도 일반적인 예상과 달리 여당인 민주자유당에 입당해 대변인까지 지냈다. 민주당 대표를 지내고 있는 현재까지도 그를 따라다니는 정체성 논란은 그때부터 잉태됐다고 할 수 있다. 신한국당, 한나라당으로 이어지는 손 대표 행적에 대해서는 여러 평가가 있지만 그중 비우호적이거나 매우 혹독한 시각도 적지 않게 존재해 왔다.

그의 대변인 시절 언행을 놓고 ‘여당 돌격대’라고 표현한 기사도 있었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월간 ‘인물과 사상’ 2000년 5월호에 기고한 ‘손학규와 최영희-정실주의는 안 된다’는 제목의 글에서 이렇게 평가했다. “과거 대학교수 시절 ‘진보’는 혼자 전세 낸 양 떠들어대던 사람이 어쩌면 저렇게 달라질 수 있나 하고 인간에 대한 회의를 느꼈던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손 대표는 2007년 3월 한나라당을 탈당한 뒤 민주당에 입당했다. 하지만 손 대표를 둘러싼 정체성 논란은 오히려 그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만발했다. 비판의 선봉에 선 인물이 다름 아닌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노 전 대통령이 재임 말기에 유독 손 대표를 가혹할 정도로 공격한 이유에 대해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는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라는 책에서 이렇게 정리했다.

“정치인 노무현에게 2007년의 손학규는 2002년의 이인제였던 것이다. 노 대통령은 인터뷰에서 손학규의 선택과 함께 그를 따르는 ‘기회주의적 현상’을 비판했다. ‘YS의 3당 합당을 그렇게 입에 거품을 물고 비판하던 사람들이 지금 손학규 뒤에 가 줄 서 있는 거 보면 나는 이제 속이 타는 거지요.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노 전 대통령의 이런 인식은 지금도 친노(親盧) 그룹이나 진보진영 인사 상당수에게 강한 ‘정서’로 남아 있다. 그러다 보니 잊을만하면 “역사의 족보와 줄기는 정통성에 있다. 가지가 줄기 역할을 하면 그 나무가 자빠진다”(안희정 충남도지사)와 같은 식의 직간접적 비판이 당 안팎에서 제기돼 손 대표 측을 곤혹스럽게 한다.

손 대표는 가급적 일일이 대응하지 않는 자세를 견지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오랜 연원을 내포하고 있는 정체성 문제에 대해 정면돌파 과정을 치열하게 밞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최근 그의 ‘원칙 있는 포용정책’ 발언이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매도한 것처럼 증폭되는 광경을 보며 거듭 드는 생각이다. 요즘 손 대표의 브레인으로 인정받는 김헌태 민주당 전략기획위원장은 2009년 발간한 자신의 저서 ‘분노한 대중의 사회’에서 2007년 17대 대선을 앞둔 여론의 추이를 이렇게 분석한 바 있다. “당시 손학규 전 경기지사의 합류는 그렇지 않아도 열린우리당의 정체성이 모호해 회의적 태도가 강했던 진보성향 유권자층의 이탈을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손 대표가 지금과 같은 상황을 방치하면 또 다시 ‘모호한 정체성’을 이유로 내년 대선 때까지 당 안팎의 반복되는 태클에 시달릴지 모른다.

김호경 정치부 차장 hk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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