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7-28

<사상계> 33호 유진오의「다독과 정독」

<사상계> 33호 유진오의「다독과 정독」

12월 25, 2009 by 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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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김삼웅 역사학자, 전 독립기념관장 | 잡지 속 생명력 있는 글

<사상계> 33호 유진오의「다독과 정독」

 

  예나 지금이나 글 읽는 사람들에게, 또 독서를 장려하는 사람들에게 ‘다독’과 ‘정독’은 선택의 갈림길이다. 이 주제는 인간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항상 따라붙을 선택지가 될 것이다. 이것 저것 많이 읽을 것인가, 한 권이라도 착실하게 읽을 것인가. 19세기 실학자 최한기는‘공부론’에서 세대별로 공부의 방법론을 아래와 제시하였다.

20대 – 무엇이든지 탐색하고
30대 –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고
40대 – 세계에서 얻은 것을 자아화하고 다시 세계화하고
50대 – 새롭게 개척하지 말고 이미 이룬 바를 종합하라.

  최한기는 당시 평균 연령이 50대에 머물러서 60~70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기준에 따르면 20대에는 다독, 30대 이후에는 정독을 권하는 것 같다.

  <사상계> 1956년 4월호(통권 33호)에는 당시 유진오 고려대학총장의「다독과 정독」이 게재되어 있다. 이 글은 뒷날 독서방법론을 언급할 때는 어김없이 인용되고, 요즘에도 종종 인용됨을 볼 수 있다.

 

  <다독이 좋으냐 정독이 좋으냐 하는 문제는 한창 연구기에 있는 청년이나 학생이 번뇌하는 문제다. 다독에는 다독으로써의 장점이 있고 정독에는 정독으로써의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은 그리 깊이 번뇌해가면서 생각할 필요가 없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다독과 정독의 어느 편이 좋으냐 하는 것을 추상적으로 논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필요에 따라 다독을 요하는 때에는 자연 다독하게 되고, 정독을 요하는 때에는 자연 정독하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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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오는 서두에서 이렇게 상식적인‘정답’을 제시하고, 자신의 경험담을 털어놓는다.

  <나 자신의 경험으로 보면 나의 일생을 통해서 가장 책을 다독ㆍ남독한 것은 20세 전후의 수삼 년이 아니었던가 한다. 그 때에는 지식에 대한 욕심도 불길같이 일어나고 체력도 하루 몇 시간의 독서라도 감당할 수 있는 처지였으므로, 호기심이 움직이는 대로 아무 책이나 불철주야하고 읽어제친 것이 사실이다. 주로 문학서를 읽었지만, 철학ㆍ종교ㆍ정치학ㆍ경제학ㆍ자연과학 등 아무 것이나 닥치는 대로 읽었다. 모르면 몰라도 그 수삼 년 동안에 읽은 책의 분량은 누만 페이지에 달하였을 것이다. 다독이라 함은 많이 읽는다는 뜻이므로 같은 계층의 책을 많이 읽든, 계층 없이 아무 책이나 마구 읽든 (이 경우에는 남독이 될 것이다) 간에 다독의 경우에는 자연 책의 내용을 연구 검토하지 않고 건등건등 읽어 넘어가는 결과가 된다. 그러한 독서로 얻은 지식이 정일치 못하고 또 기억에서 쉬이 사라지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사실 30여 년 전에 내가 다독 남독하던 읽은 책의 내용으로서 지금도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다독을 시간의 낭비라고 배척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젊었을 시절에 다독한 것은 기억에서는 사라졌을지 몰라도, 역시 나의 교양과 인격의 밑바닥에 깔리어 있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유진오는 젊은 시절 다독(남독)을 하였지만 뒷날 기억에 남는 것이 별로 없다고 토로한다. 그러나 후회하지 않는 것은 이것이 자신의 교양과 인격의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짧은 일생에서 전문 이외의 학문에 조감적인 지식이라도 갖추기 위해서는 다독으로 섭취할 수밖에 없다는 뜻을 부연한다.

  <나의 지나간 날을 회고하면 나는 그러한 다독ㆍ남독의 수년 후에 세계와 인생에 대한 시야가 먼동이 터오르는 것 같이 훤하게 터오르던 것을 기억한다. 그렇게 다독하기 전에는 가령 괴테의《베르테르의 설음》을 읽으면 그것은 그것대로 좋고, 체홉의 단편을 읽으면 그것은 그것대로 좋기는 하나, 어떤 것이 가르치는 인생이 정말 인생인지 도무지 분간과 선택을 할 수 없었는데, 그러한 폭풍노도적 다독의 시대를 겪고 나니 마치 높은 산에 올라 세상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인류정신사상에 있어서의 괴테나 체홉의 위치를 알 수 있게 되어 그들에게서 배울 것을 배우고 배우지 아니할 것을 배우지 아니할 수 있는 능력이 형성된 것으로 느꼈다. 이러한 정도의 능력이면 요새 우리나라 각 대학에서 필수과목으로 가르치고 있는 문학사개론을 공부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 것이나, 문화사개론으로 인류의 문화발달을 공부하는 것은 지도를 펴놓고 세계지리를 배우는 것과 다름이 없지만, 다독으로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저서를 독파해나가는 것은 여러 나라의 도시와 농촌을 몸소 답사하는 것에도 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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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오는 전공인 헌법학뿐만 아니라 소설 등 문학에도 상당한 조예를 갖춘 지식인이었다. 한때 야당 총재를 역임하는 등 정치일선에 나서기도 하였다. 유진오는 당연한 귀결이지만 글의 후반에서는 정독을 장려한다.

  <각자의 전문에 관한 독서라면 나는 정독주의를 장려하고 싶다. 세상에는 책이 많을 것 같으나, 각자의 전문에 정말 피가 되고 살이 될 책이란 그리 많은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전문서적에 관한 한 나는 첫째로 권위 있는 책을 신중하게 선택할 것을 권하고 싶고, 다음에는 그 책을 책장이 뚫어지도록 정독할 것을 권하고 싶다. 요사이 미국에서는 책을 빨리 읽는 적극 권려되고 있다 하는 데 나는 그 진의를 이해할 수 없다.

  하루에 다섯 페이지라도 좋으니, 그곳에 쓰인 내용을 하나 빼놓지 말고 이해하고 음미하고 비판하고 필요하면 참고서적을 펴놓고, 정 알 수 없는 곳이 있으면 표를 해 두었다가 뒤에 그것이 이해될 때 까지 몇 번이고 되풀이해 읽고 생각하고 하는 방법이 가장 좋은 독서법으로 확신한다.

  이러한 방법은 비능률적인 일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이러한 방법으로 독서를 하면, 나중에 그 책을 다 읽고 나서 보면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곳을 가지고 공연히 머리를 썩히는 일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래도 나는 이러한 정독법을 취하고 싶다. 그것은 이렇게 해서 얻은 지식만이 확실한 지식이고 확실한 지식만이 기억에 오래 남을 뿐 아니라 실지에 임하여 활용할 수 있는 지식이기 때문이다.>

  유진오는 당대 지식인으로 독서를 많이 하기로 알려져 있었다. 대한민국 제헌헌법의 초안도 그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일제 강점기에는 친일 작품을 여러 편 남겨서‘친일문인’이라는 부끄러운 전과를 갖게 되었다. 앞서 기술한 대로 그가 문학 등 다분야에 걸쳐 능력을 발휘했던 것은 다독을 거쳐 정독의 결실이라 해야 할 것이다.

  다음은 유진오가 이 글의 마무리에서 다독과 정독의 결론으로 쓴 내용이다.

  <정독주의를 택한다면 정독할 책을 선택하는 문제가 등장되는데, 몇 번이고 되풀이해 읽을 만한 책을 선택한다는 것은 그 자체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책이 좋고 나쁘고 한 것을 가릴 줄 아는 사람이면 벌써 그 방면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학기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우선 일반적으로 정평이 있는 책이나, 선생 또는 선배가 추천하는 책을 택하는 것이 무난한 방법일 것이다. 그리하는 동안에 일생의 반려로 삶을 책을 스스로 선택하는 능력이 자신에게도 갖추어질 것이다.>

 

<출판저널 20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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