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로 철학하기, 출판으로 철학하기
김현미|<동아일보> 미디어출판팀 차장 khmzip@donga.com
“철학은 취업에 유리한 학문을 우선적으로 택하는 시대 풍조와 맞지 않아 인기가 없다. 철학 교수들은 실업자가 될 위험에 직면하고, 후진은 취직자리가 없다. 이 기회에 대변신을 해야 먹고살 수 있다. … 철학은 학문의 종가라고 하나 빈껍데기만 남았다. 자기들만 아는 용어로 못 알아들을 소리만 하니까…”
2004년 11월 7일 가톨릭대학에서 열린 학술발표회의 기조발제를 맡은 조동일 계명대 석좌교수의 목소리가 한껏 고조되고 있었다. 대학 교양교육의 방향을 모색하는 자리에서 철학은 위상에 걸맞은 소임을 다하지 못해 고개를 조아린 패장이었다. 조 교수의 지적에 머리를 끄덕이다 문득 며칠 전 이제이북스 전응주 사장이 한 말이 떠올랐다.
“철학책도 다 인간이 쓴 것이니까 꼼꼼히, 차분하게 생각하면서 읽으면 어느 정도 지적 역량만 있으면 다 이해할 수 있어요. 이게 뭐 소수의 몇몇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특이한 말로 된 것도 아니고. 철학자도 다 인간인데요. 그런데 번역이 문제에요. 독자들이 읽고서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게 해놓았잖아요. 철학을 쉽게 풀어주고 독해가 가능하게 했다면 철학이 이렇게 멀리 느껴지지는 않았을 텐데…. 그들만이 이해하는 용어로, 그들만의 언어게임을 해온 것이죠. 출판사를 하는 입장에서 부실한 번역이 독자들을 떠나가게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국문학 전공 교수나, 철학을 전공한 출판사 사장이나, 벼랑 끝에 내몰린 철학이 사는 길은 변신이라는 데 뜻을 같이 한다. 조동일 교수는 철학이란 원래 모든 학문을 관장하는 포괄적인 학문인 만큼 철학과를 학문학과로 개편할 것을 제안했고, 전응주 사장은 제대로 된 원전 번역이 출판사의 소명이라 믿고 그 길을 자청했다.
세월을 쏟아 붓는 책들
“신생 출판사의 첫 책이 10권짜리 시리즈라는 게 놀랍군요. 저, 사장님이 어떤 분이신지 궁금하네요.”
2년 전쯤 출판 담당 기자 시절, 이제이북스 직원이 찾아와 ‘아이콘북스’ 시리즈를 펼쳐보였을 때 나의 첫마디가 대략 그랬던 것 같다. 비트겐슈타인과 정신분석, 토마스 쿤과 과학전쟁, 니체와 포스트모더니즘, 호킹과 신의 마음, 촘스키와 세계화, 도킨스와 이기적인 유전자, 데리다와 역사의 종말, 다윈과 근본주의, 라캉과 포스트페미니즘, 마셜 맥루언과 가상성. ‘아이콘북스’ 시리즈 1차분 10권의 제목만 훑어보아도 100쪽 안팎의 손바닥만한 이 책의 내용이 그리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더욱이 출판 등록은 2001년 6월에 해놓고 첫 책이 나오기까지(2002년 9월) 1년이 넘게 걸렸다는 사실이나, 출간이 늦어진 이유가 정확한 번역을 위해 일일이 주제별 전공자를 찾아 번역을 맡기고, 철저한 원문 대조를 통해 한 문장이라도 탈락한 부분이 없는지 재검토하는 까다로운 편집 과정 때문이었다는 이야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사장이 철학 전공자라 해도 본전 못 찾을 장사라는 게 불 보듯 뻔한데 그 세월을 쏟아 붓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인가.
다시 책을 펼쳐 보았다. 소사전 형태의 핵심개념 코너, 꼼꼼한 각주, 참고문헌 등 갖출 건 다 갖춘 책이다. 아이콘 시리즈는 그 이후 아인슈타인, 에코, 리오타르, 에드워드 사이드, 하이데거 등을 더했다. 또한 공포증·나르시시즘·에로스 등 심리학적 개념을 다룬 ‘사이코북스’ 시리즈도 이미 출간되었거나 준비중에 있다고 한다. 이 출판사 사장이 세상 물정을 모르거나, 돈이 많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 후 전응주 사장은 다니엘 하버가 쓴 『지성인을 위한 무신론』이라는 책을 가지고 직접 나타났다. 자그마한 키에 하얗고 맑은 얼굴, 고운 손이 영락없는 ‘백면서생’이었다. 철학 전공서적만 들여다보다 뜻한 바 있어 한동안 옷장사도 하고, 피자·스파게티 장사도 했다는 것은 최근에야 알았다.
어쨌든 전 사장은 새 책이 나올 때마다 직접 보따리를 들고 찾아왔다. 신간이 나오면 으레 펼치는 홍보활동이 아니라 이 녀석(책)이 얼마나 난산 끝에 태어났는지, 남들 눈에 부족해보여도 얼마나 소중한 녀석인지 가득 이야기를 담고 왔다. 신간 들고 왔다가 담당 기자가 자리에 없다며 책을 도로 가져갈 정도니 오죽했을까.
덕분에 나는 전 사장이 직접 번역원고를 들고 하나하나 원문대조를 하며 한두 줄 또는 한 단락씩 뭉텅 빠져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열 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며, 그 꼼꼼함에 질려 이제이북스 책 번역이라면 고개를 가로젓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힘없는 신생 출판사에게만 공급가를 더 낮추라고 요구하는 대형 서점에는 아예 책을 주지 않았다는 배짱이 걱정스럽기도 했고, 부분 코팅된 『꽃의 유혹』 표지를 보여주며 새로운 시도를 해봤다고 즐거워하는 모습에 속으로 ‘몇 권이나 팔릴까’를 따져보기도 했다.
2004년에 이제이북스는 『니체 그의 삶과 철학』(레지날드 J. 홀링데일), 『헤겔 또는 스피노자』(피에르 마슈레),『고통과의 화해』(스펜서 내들러), 『기계 속의 생명』(클라우스 에메케), 『자연이라는 개념』(R.G. 콜링우드),『서양철학사』(앤서니 케니)를 펴냈다. 3년 사이 전 사장이 품은 출판의 소명에 점점 더 다가가고 있는 듯하다. 아니, 이제는 달아날 수 없는 늪에 빠져버린 것은 아닐까.
지하철 2호선 합정역을 빠져나와 골목을 걷다보니 멀찍이 1층짜리 가정집을 개조한 이제이북스 건물이 보인다.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한창 6층짜리 대형 건물이 신축 중이어서 주위가 어수선했다. 얄궂게도 실용서 분야에서 수위를 달리고 있는 넥서스 신사옥이란다.
김현미(이하 김) 3년 반 동안 참 부지런히 책을 내셨죠?
전응주(이하 전) 지금까지 이제이북스 이름으로 나온 책이 60종인데 아이콘 시리즈가 24권으로 완간됐고, 사이코 시리즈 14권을 빼면 22권이네요. 저를 포함해 편집자가 3명이고 저는 편집자 반 사람 몫은 하죠.
김 제가 2년 전 처음 만났을 때 드린 질문이기도 한데, 신생 출판사가 24권짜리 시리즈로 출발을 선언한 것은 무모한 일 아니었나요?
전 출판사 등록이 2001년 6월 26일이고, 2002년 9월 아이콘 시리즈 1차분 10권을 낸 것이 첫 책이었죠. 그 전에 이미 2년 가까이 작업을 해왔어요. 제가 출판에 대해 문외한이어서 시간이 더 걸린 측면이 있고, 번역 작업이 끝난 것을 다시 원문 대조해서 뜯어고치느라고 시간이 걸렸고, 한두 권이 아니라 시리즈를 한꺼번에 내고 싶은 욕심 때문에 원고를 쌓아두다 보니 출간이 계속 늦어졌어요. 다 출판을 몰랐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일이죠.
1000부를 넘기기 어려워
김 3년 동안 출판 수업을 받은 소감은?
전 이제이북스가 나름대로 전문분야라고 생각하는 인문학, 철학, 과학의 전문적인 책들은 워낙 수요가 적어서 내는 것 자체가 적자죠. 아이콘 시리즈 초판 1000부 찍으면 600-700부 정도 나가요. 아이콘이나 사이코 시리즈만 해도 철학을 모르는 사람들이 부담 없이 철학의 개념에 접근할 수 있게 하려는 의도였는데 실패했다고 봐요. 제가 생각했던 것과 현실은 전혀 달랐죠. 1000부 넘기는 책이 없으니. 출판을 하기 전에 공부할 때는 왜 이런 좋은 책들이 번역되지 않을까 안타까웠는데, 요즘은 왜 출판사들이 이런 책을 내지 않는지 충분히 이해합니다.
김 이제이북스에서 2쇄 찍은 책이 있어요?
전 지난 여름에 펴낸 존 윌슨의 『논리내공』이 2쇄 찍었어요. 그 전에 『꽃의 유혹』(샤먼 앱트 러셀)은 초기 판매가 괜찮아서 2쇄 찍었는데 1000부 더 찍어 놓으니까 안 팔려서 800부가 고스란히 창고에….
사실 질문이 너무 노골적이다 싶었다. 소신껏 책 만드는 사람한테 몇 부 팔았냐고 묻는 것은 잔인하다. 그런데 왜 꼭 출판사 사람을 만나면 그 책 몇 부나 나갔느냐는 질문부터 하게 되는지. 다행히 전 사장의 대답은 경쾌했다. 인문분야 학술서들이 초판 1000부도 소화하기 어려운 현실이 뭐 어제, 오늘 일이냐는 식이다. 대학 교재 채택을 염두에 두고 내는 책이라면 모를까(아니 이조차도 요즘은 ‘개강 대목’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이제이북스처럼 맨땅에서 출발한 출판사들은 오히려 불황에 의연하다. 다만 “철학책 내면서 시장성을 생각하면 신경질 날 때가 많다”는 말에서 답답한 속을 읽을 수 있었다.
김 내년 출간 예정인 책을 소개해주세요.
전 내년 초『비트겐슈타인 평전』이 나오고 여름쯤에는 헤겔 책이 나올 겁니다. 준비 중인 것이 몇 가지 있는데 워낙 번역에만 2-3년씩 걸리니까 언제 책이 나온다고 장담할 수 없어요. 아리스토텔레스의『오르가논』은 12월쯤 내려고 했는데 제가 두 달째 끌어안고 낑낑대고 있어서 내년 초로 넘어갈 가능성이 있어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과『자연학』『시학』 『영혼에 관하여』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번역이 됐는데 대표작이라고 할 『오르가논』이 빠져있는 것이 부끄럽죠. 또 이미 다른 출판사에서 냈다고 해도 이제이북스에서 내놓으면 여러 가지 번역본으로 비교해서 볼 수 있기 때문에 도움이 되겠죠. 미국 수학자 위너가 쓴『사이버네틱스』도 이 분야를 개척한 책인데 아직 번역이 안 돼 있어서 작업에 들어갔죠. 1년 반이 지났는데 아직도 안 나오고 있네요.
김 철학이야 사장님의 전공 분야니까 그렇다 치고 과학(역시 팔리는 것과는 거리가 먼) 분야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뭡니까?
전 철학과 과학은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과학이지만 초기에는 다 철학에 속했어요. 아리스토텔레스만 해도 과학저술이 더 많아요. 근대의 철학자들이 과학에 대해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까. 로크, 데카르트 같은 철학자들을 보세요. 독일철학의 관념론에서 그런 구분이 생겼고 독일철학이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구분 짓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됐죠. 실제 현상에 대해 과학만큼 부지런히 설명한 영역이 어디 있습니까. 철학자들도 부지런히 그것을 연구해야 해요. 철학이 뭔가요. 인간이 하는 모든 짓거리에 대해 다시 한 번 따져보는 학문 아닙니까. 인간의 짓거리 가운데 과학의 비중이 점점 커지고 있는데 철학이 외면해서는 안 되죠.
올바른 번역사가 나와야 우리말이 학문 언어로 자리 잡을 수 있어
김 이제이북스의 아이콘 시리즈는 라캉에서 프로이트로, 프로이트에서 비트겐슈타인으로 거미줄 같은 지식의 연결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얇지만 깊은 책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사이코 시리즈 역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나 나르시시즘, 에로스 등 대중화된 정신분석학의 개념들이 일상생활과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 설명했다는 점에서 지성인으로서 출발선에 있는 대학 신입생들이 읽으면 참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죠. 『사라져 가는 목소리들』 『기계 속의 생명』 등 이제이북스의 책들이 다 그래요. 도움이 되겠다 싶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읽어야 할 절박함은 부족하고 읽는 부담은 큰 책들이 아닌가요. 좀 다른 방식으로, 예를 들어 ‘리라이팅 클래식’처럼 우리 눈높이에 맞춰 고전을 재해석한다든가, 번역물이 아닌 국내 저자를 발굴한 생각은 없으세요?
전 이제이북스가 번역서를 고집하는 이유는, 이미 국내 저작을 내는 출판사는 많고 이 분야 출판사는 거의 없기 때문이죠. 철학의 고전이라고 말하지만 번역이 안 된 것이 훨씬 더 많고 믿을 만한 번역서가 없지 않습니까. 아무리 어렵고 딱딱하다 해도 원전 번역을 고집하는 출판사가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나, 그래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충실하게 번역해줄 사람이 있다면 우리 출판사에서 제 이름을 걸고(EJ는 응주의 이니셜이다) 내겠다는 것인데 막상 번역을 하겠다는 사람이 없어요. 철학을 전공한 후배들에게 데카르트나 라이프니치 해보겠느냐고 물으면 ‘끔찍해요’ ‘그걸 어떻게 해요’라는 말부터 나오니까요. 이렇게 계속 미루다보면 인문학이나 전문 영역에서 우리말로 작업하는 것이 불가능해지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학술어로서 한국어는 기능을 잃어버릴지도 몰라요. 지금 우리는 중국식 일본식 번역어를 그대로 가져다 쓰고 있는데 이것은 곤란해요. 한자를 쓰더라도 우리식 한자어로 바꿔줘야 합니다. 저희 출판사뿐만 아니라 출판과 인문학 분야의 전문가들이 다 같이 고민해서 지금부터 하나하나 바꿔야겠죠. 처음부터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고, 먼저 여러 가지 대안이 나와 주고 세월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최선의 것이 채택되는 방식이 필요해요. 그런 의미에서도 자꾸 고전이 번역돼야 합니다. 우리나라 고등학생 수준에서도 알아듣게끔 번역돼야 해요. 그래야 우리말이 학문하는 언어로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11월 6일자 ‘한겨레’에 전 사장이 쓴 칼럼이 생각났다. ‘우리 출판사의 아깝다 이 책’이란 코너인데 그는 다니엘 네틀과 수잔 로메인이 쓴 『사라져 가는 목소리들』을 골랐다. 언론 서평에서는 주목받고 시장에서는 철저히 외면당한 책이다. 그는 왜 이 책을 이야기해야만 했을까. 다음은 칼럼의 일부다.
왜 우리는 일본이나 중국과 비교해 볼 때, 번역의 문제를 끌어안고서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을까? 왜 지금이라도 기존 번역이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번역어를 고안하고 선정하는 작업을 신중하게 추진하지 않는 걸까? 한국어의 미래는 어떻게 전개될지, 이런 추세라면 한국어는 최소한 학술어로서는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는 날이 오지 않을지, 그렇게 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같이 고민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런 주제에 관한 책을 찾게 되었으며, 그때 내 눈앞에 나타난 책이 바로 『사라져 가는 목소리들』이었다.
아, 그러나 독자들은 이 책을 반겨주지 않았다. 이 대목은 좀 신파조로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번역원고를 일일이 원문대조하고 신경이 바싹 타들어가는 교정·교열 작업을 거쳐 책이 나왔건만 『사라져가는 목소리들』은 초판조차 수북이 창고에 쌓여 있다. 책의 내용이 낯설기 때문이라고 위안을 삼을까, 번역에 부족함이 많았다고 자책할까,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전 사장은 시장의 벽을 실감하고 있었다.
김 학술어로서 한국어의 존립 문제는 일개 출판사가 끌어안기에는 너무 버거운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또 믿을 만한 번역이 나오고, 누구나 독해가 가능하게 씌어지면 독자들이 다시 철학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으세요? 한 마디로 독자들을 너무 믿으시는 것 아니냐고요.
전 저희 책이 이렇게 안 팔리는 것으로 봐서는 좀더 시간이 걸리겠죠. 요즘 경기가 워낙 안 좋아서 실용서다 경제경영서다 이런 쪽으로만 관심을 가지는데, 여전히 철학이나 인문학 쪽에 관심은 있지만 읽을 만한 책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봐요. 그런 독자들이 한 명 두 명 늘어나지 않겠느냐 생각하죠. 그 동안의 철학책들은 수십 년 전 번역된 것으로 문체가 너무 낡았거나 논리의 비약이 심해서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으니까요. 그리고 전공자들은 원서나 영문 번역으로 읽으면 된다고 하는데, 고대철학 전공자가 현대철학을 알고 싶다고 할 때 믿을 만한 번역이 나와 있으면 굳이 원서에 도전할 필요가 있나요? 현대철학 하는 사람이 희랍어 라틴어까지 공부해서 원서를 읽는다는 것은 시간 낭비죠.
우리 철학자들이 원서로 공부하니까 우리말로 철학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겁니다. 이 말을 우리말로 어떻게 옮길까 고민하는 사람들이 없어요. 그러다 보니 철학은 보통사람들과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지고 그들(전공자)만의 언어게임이 되어버린 것이죠. 출판사를 하면서 이 문제가 더 심각하게 다가옵니다. 저는 학문의 전공자뿐만 아니라 전문 출판사가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편집자도 공부를 많이 하고 특정분야의 전문가가 돼야 합니다. 그래서 저자나 번역자의 문장이 논리의 비약이 심하다고 지적할 수 있어야 하고, 고치게 만들어야 합니다.
적자경영에도 ‘팔리는 책’보다 ‘좋은 책’을
김 전 사장님이 출판사를 하고, 직접 교정 원고를 들고 밤낮으로 씨름하는 이유도 그것이군요.
전 전에는 제가 직접 끌어안고 몇 개월씩 원문대조를 했는데 요즘은 노안인지 눈도 침침하고 체력이 달려서 분야별 전공자들에게 원문대조를 맡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충실한 번역이 나오려면 원고 감리 이전에 번역자를 선정하는 작업부터 신중해야 합니다. 당연히 그 분야의 전공자여야 하고, 번역을 해본 사람이면 더욱 좋고, 일단 1-2장 번역 샘플을 보고 결정합니다. 그렇게 나온 원고라도 다시 원문대조 하는데 몇 개월씩 걸려요. 심지어 6개월이 걸린 적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재촉하지 않고 ‘소신껏 봐라’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읽어 달라’고 해요. 그러니 이제이북스 책은 제작 기간이 최소 1년 이상, 3년 넘게 걸리죠.
말은 이렇게 하지만 전 사장은 여전히 직접 원고를 끌어안고 몇 개월씩 ‘낑낑거리는’ 경우가 많다. 이제이북스 책의 3분의 2 가량은 전 사장의 손을 거쳤다. 직원들 사이에서 사장의 별명이 ‘블랙홀’인 이유도 이해가 간다. 여기서 또 잔인한 질문을 던졌다.
김 그렇게 힘든 작업인데 번역료를 어떻게 주세요?
전 아이콘 시리즈처럼 얇은 책은 매절로 했고, 두꺼운 책은 인세 5-6퍼센트와 원고료를 병행하는데, 인세라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1000부면 ‘땡’이니 아무리 책값을 비싸게 매긴다고 해도 역자나 출판사나 이런 책은 번역돼야 한다는 데 의미를 두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작업이죠. 뜻을 펼치려는 것이니 같이 고생하자고 해요. 몇 달 간격으로 출판사를 하겠다는 사람 두 명이 찾아와서 제게 묻더군요. ‘이런 책을 내면서 어떻게 출판사를 유지하느냐’기에 ‘적자다’라는 한 마디만 해줬어요.
김 지난 3년 사이 출판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으세요?
전 며칠 전 에이전시를 찾아가서 ‘좋은 책 있으면 달라’고 했더니 직원이 ‘요즘은 좋은 책이라고 안하고 많이 팔릴 책 찾는데’라며 웃더라고요. 서가에 꽂힌 책을 이리저리 둘러보다 맨 꼭대기 칸에서 몇 권이 눈에 띄는 거예요. 직원에게 ‘저 책 좀 보자’고 했죠. ‘그 칸에 있는 책은 이미 계약이 돼서 치워놓았거나 너무너무 안 팔려서 올려놓은 것’이라면서 정리가 안돼서 곤란하다는 겁니다. 제 눈에 띈 책은 후자(안 팔린 책)였겠죠. 제게는 내고 싶은 ‘좋은 책’이 아직도 너무 많아요. 출판사 경영이 어렵다고 해도 제게는 작년보다 올해가 나았어요. 그것이 큰 힘이 되죠. 아, 얼마 전 교도소에서 온 편지를 보여드릴게요. 이제이북스 책 중에 『우주가 지금과 다르게 생성될 수 있었을까』(마틴 리스), 『헤겔 또는 스피노자』(린즐리 캐머런)를 보내달라는 요청이었는데 이 편지 받고 정말 놀랐습니다. 그래서 사이코 시리즈 중 몇 권, 『니체 그의 삶과 철학』 『빛의 음악』(린즐리 캐머런)을 보태서 보냈죠.
전응주 사장과 두 시간 넘게 수다를 떨면서도 나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이 출판사 사장이 세상 물정을 모르는 건지 아주 돈이 많은 건지….
기사게재 : <기획회의> 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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