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7-28

[한겨레 기사돌려보기]‘정치 중독’에서 탈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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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섹션 : 강준만의 세상읽기 등록 2005.06.28(화) 제566호


[강준만칼럼] '정치 중독'에서 탈출하자

상업적 마인드의 부재로 위기에 빠진 <월간 말>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경제 공부 제대로 해서 경제적 담론의 세계에 제대로 된 개입을 해야

▣ 강준만/ 전북대 교수·신문방송학과

지난해 8월 <오마이뉴스> 대표기자 오연호가 <대한민국 특산품 오마이뉴스>라는 책을 냈을 때, 나는 한 가지 흥미로운 현상을 발견했다. 그 책의 발간을 계기 삼아 오연호와 <오마이뉴스>가 화제가 되었는데, 내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점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오마이뉴스>의 '정치학'과 '사회학'에만 주목할 뿐 '경제학'은 완전히 외면했다.

'반미 저널리즘' 선구자 오연호의 변신

내가 오연호의 책을 읽으면서 가장 감동받았던 건 그가 직접 대기업 광고주들을 찾아나선 장면이었다. 2002년 봄 그가 한 대기업 홍보실을 방문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약속을 하고 오전 10시경에 찾아갔지만 담당 차장은 자리에 없었다. 오연호는 신문을 뒤적거리면서 마냥 기다려야 했다. 그사이 대형 언론사의 광고담당 직원들이 시끌벅적하게 인사를 하면서 들어왔는데, 그들은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상무급 간부들의 안내를 받고 별도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오연호는 완전히 무시됐다. 그는 그렇게 40여분을 기다려야 했다.

드디어 담당 차장이 나타났다. 그러나 그는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도 안 했다. 오연호가 용건을 꺼내려고 했더니 그는 듣는 척도 않고 옆에 있는 여직원을 보고 이렇게 외쳤다. "어이, 김 대리 이분 이야기 좀 들어봐줘요." 오연호는 20대 후반의 여자 대리에게 <오마이뉴스>의 광고 효과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다. 그러나 그 대리는 오연호가 말을 하고 있는 도중에도 다른 서류를 뒤적거리는 등 딴청을 피웠다.

2002년 대선을 기점으로 <오마이뉴스>가 뜨기 전까지 오연호는 1년 내내 그렇게 박대받는 광고 영업을 열심히 하고 다녔던 모양이다. 이게 도대체 가능한 이야기인가? 한국 '반미(反美) 저널리즘'의 선구자라 할 천하의 오연호가 미국 한번 다녀오더니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었던 걸까? 그의 기자로서의 자존심은 조·중·동 기자들 한 트럭분을 합산해도 그걸 능가할 정도로 하늘을 찔렀을 텐데 말이다.

나는 <오마이뉴스>의 성공 이유를 정치학적·사회학적으로 설명하는 지식인들의 진단과 평가를 전혀 믿지 않는다. 그런 진단과 평가가 잘못됐다는 게 아니다. 하나마나 한 거대담론이라는 것이다. <오마이뉴스>라는 매체의 발상에서부터 성공에 이르기까지 그건 오연호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또 오연호가 '반미 저널리즘'의 선구자에서 미국 유학을 통해 자본주의의 세례를 듬뿍 받고 돌아와 '상업적 인터넷 저널리즘'의 선구자로 변신했다는 점도 반드시 지적되어야 한다.

혹자는 '상업적 인터넷 저널리즘'이라는 표현에 거부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게 바로 이 글의 주된 논점이기도 하다. 나는 그 거부감에 대해 '상업적'에 대한 위선과 자기기만이라는 딱지를 붙여주고 싶다. 시장에서 자력으로 운영되는 매체는 모두 상업적인 매체다. 아닌가?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사회다. 아닌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지식인의 담론마저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정신에 충실한 대학의 '철밥통'이라는 안전장치에 근거해 생산되며 천민자본주의적 정신에 충실한 조·중·동의 '상품화 전략'의 일환으로 소비되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 현실이 아름답다는 게 아니라 그 현실에 대해 고개를 돌리면서 딴청을 피우는 건 곤란하다는 것이다.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서 말이다.

<오마이뉴스>와 <한겨레>에 헷갈린다

오연호가 '반미 저널리즘'의 선구자로서 명성을 쌓은 무대였던 <월간 말>은 지금 죽느냐 사느냐 하는 심각한 위기 상황에 봉착해 있다. 나는 사석에선 '농반 진반'으로 <월간 말>을 그렇게 만든 주범은 오연호, 조유식, 천호영 등이라고 주장하곤 한다. 이들은 모두 <월간 말> 기자 출신으로 인터넷 업계쪽에선 알아주는 인터넷 전문가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디지털 마인드를 <월간 말>에 심어주면서 그곳에서 구현하려 하기보다는 <월간 말>을 뛰쳐나와 독자적인 살림을 차렸다. 오연호는 <월간 말> 기자들을 <오마이뉴스>로 빼내오기까지 했으니 주범 중의 주범이다.

그래서 그들이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말인가? 아니다. 큰일날 소리다. 오히려 정반대의 메시지를 던지고자 하는 것이다. <월간 말>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최근의 위기 상황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좀 도발적으로 표현해보고자 하는 것뿐이다. <월간 말>은 오연호의 창의성과 모험성을 발휘하기 힘든 무대였다. <월간 말>은 80년대 운동권식 집단체제로 운영돼왔기 때문이다. <월간 말>의 콘텐츠가 시대에 안 맞거나 뒤떨어진 게 아니다. '상업적' 마인드의 부재가 위기의 핵심 원인이다.

지금이야 <오마이뉴스>가 확 떴으니, 사람들은 <오마이뉴스>의 성공은 시대사적 필연이었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그런 거짓말은 삼가는 게 좋다. 인터넷 신문의 성공은 시대사적 필연일 수 있어도 그게 꼭 <오마이뉴스>였어야 한다는 보장은 없다. <월간 말>도 마찬가지다. 종이 월간지의 퇴조는 시대사적 필연일 수 있어도 꼭 <월간 말>이 그 필연의 희생양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는 것이다.

<오마이뉴스>는 상업적 마인드에 투철했다. 나는 <오마이뉴스>가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 사업에까지 뛰어든 걸 보고 깜짝 놀랐다. 한나라당 의원 김영선이 특혜 의혹을 제기하자, <오마이뉴스>는 "공식 사과를 요구하며, 사과하지 않으면 법적 대응할 것임을 명백히 해둔다"고 밝힌 바 있다. 그 뒤론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이 건이 제대로 논의된 것 같지는 않다.

마찬가지로 흥미로운 건 <한겨레>도 DMB 사업에 뛰어들었다는 사실이다. 언론학자 전규찬이 <한겨레> 지면에 대고 간접적으로나마 <한겨레>를 혹독하게 비판한 걸 제외하곤, 이것 역시 슬그머니 의제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오마이뉴스>와 <한겨레>의 DMB 사업 참여는 정당한가? 나는 판단을 못 내리겠다. 나는 그간 늘 '상업적 마인드'를 역설해왔지만, 내가 말하는 '상업적 마인드'는 그런 종류의 것은 아니며 본업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좀 헷갈린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큼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우리 모두 이제 경제에 대해 정직해지자는 것이다. 이건 내 경험담이기도 하다. 나는 그간 상업주의를 옹호하면서 이른바 '상도덕 이론'을 주창해왔다. 그 요점은 파렴치한 상술 행위에까지 '상업주의'라는 딱지를 붙이는 건 어리석으며, 우리가 정작 따져야 할 것은 상도덕과 공정거래의 원칙이라는 것이다.

전문직 종사자, 정치산업의 로비스트?

그러나 그런 주장은 먹혀들지 않게 돼 있다. 사실 사람들이 그걸 모르는 게 아니다. 지금 우리는 모든 걸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일종의 '냉소 게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게임은 상당 부분 '음모'의 산물이지만, 모두가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음모라 하더라도 개의치 않는 '국민 게임'이 되었다. '카트라이더' 같은 게임이다. 그 게임의 이름은 '정치 과잉' 게임이다.

"디즈니랜드는 '실제의' 나라, '실제의' 미국 전체가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거기 있다"는 장 보드리야르의 어법을 뒤집는 식으로 원용해 말하자면, 한국의 '정치 과잉'은 한국 사회가 더 이상 정치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사회라는 걸 숨기기 위해 존재하며 반드시 존재해야만 한다고 말할 수 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에너지를 분출하는 집단은 누구인가? 대부분 '사모'들이다. 노사모건 박사모건 대부분 정치지향적 사모들이다. 이들은 꿈을 꾼다. 정치의, 정치에 의한, 정치를 위한 꿈을 꾼다. 꿈의 실현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꿈의 마력은 꿈을 꾸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왜 경제는 극소수 전문가들의 영역인가

현재 한국의 모든 언론매체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크게 다루는 주제는 무엇인가? 정치다. '정치 중독'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벌써부터 '대권 게임'에 푹 빠져들었다. 무슨 조사에서건 수용자들의 정치 기사 선호도는 낮게 나오지만, 언론은 개의치 않는다. 그런 조사 결과를 믿기도 어렵다. 정치란 한국인들이 늘 욕하면서 즐기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 평범한 보통 엘리트가 더 큰 출세를 원하거나 '인정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할 때에 그들에게 열려 있는 유일한 출구는 무엇인가? 정치다. 정치 외엔 없다. 변호사로 아무리 돈 모아봐야 수십억대가 상한선이며, 또 그 정도 벌려면 '양심'은 잠시 보류해야 한다. 평생 먹고살 돈 벌어놓고 나면 자꾸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기자의 황금기는 30대다. 40대 접어들면 다른 분야에 종사하는 대학 동창들에 비해 뒤처지기 시작한다. 교수의 황금기는 30~40대다. 이들 역시 50대에 가까워지면 10년 전이나 20년 전이나 똑같이 반복되는 강의·채점·논문쓰기에 환멸을 느끼게 된다. 잘나가는 친구들은 세월 가면서 기사 딸린 자가용도 타고 비서도 거느리지만, 대학교수 팔자엔 그런 게 없다.

이 전문직 종사자들이 정치쪽을 힐끔거리면서 진심을 토로할 순 없다. '국가와 민족'을 팔아야 한다. 이들은 '정치 과잉'을 부추기는 이론적 전도사들이 된다. 자기 정당화 논리가 '정치 과잉'의 미화 논리로 변질되는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한국의 비대한 정치산업의 홍보 담당 로비스트라 할 수 있다.

물론 제도와 법을 바꾸기 위해선 꼭 정치가 필요하기 때문에 이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 자체를 '정치 과잉'이라고 보는 건 부당하다. 지금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건 '정치'와는 달리 '경제'에 대해선 그 중요성에 상응하는 관심이 돌려지고 있지 않으며 '경제'마저 '정치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치는 모든 사람들이 전문가 행세를 하는 반면, 경제는 극소수 전문가들의 영역으로만 여겨지고 있다는 것도 그 점을 말해준다.

'경제의 정치화'는 성공하기도 어렵다. 예컨대, 부동산 투기 문제를 뜨거운 분노만으로 잡을 수 있을까? 어림도 없다. 그건 노무현 정권이 온몸으로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사실 노 정권의 마인드와 행태야말로 한국 사회가 얼마나 '정치 과잉 경제 과소'인가를 웅변해준다. 재벌들에게 투자 좀 해달라고 사정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경제 헤게모니'는 실질적인 권력과 더불어 지식까지 재벌들에게 넘어가 있다.

문화평론가 이재현이 날카로운 지적을 한 바 있다. 그는 한국의 "인문계 지식인과 예술가들의 비판적 분파가 현실적으로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바의 경제 차원에의 담론적 무지 내지는 지적 게으름은 한국 사회 발전에서 치명적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가 경제학을 다른 사람의 손에만 맡겨둔다면, 당연히 경제학은 우리에게 사기를 치게 된다. 여기에 대해 나는 경제학의 복수 내지는 보복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다. 경제(학) 전문가들로부터 사기당하지 않도록 또 보복당하지 않도록 우리는 경제적 담론의 세계에 개입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역설했다.

다만 나는 경제학이 우리에게 사기를 친다기보다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사기를 치고 있는 현실에 무게를 두고 싶다. 한국의 보통 엘리트들이 정말 경제를 무시하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그들은 '가정 경제'엔 도사들이다. 재테크에 탁월한 사람들이 아주 많다. 여기엔 보수·진보 구분이 없다.

이건희는 상시적 화두여야 한다

한국 경제의 대외의존도는 70%가 넘는다. 이는 '국내 정치'만으로 '세계화된 경제'를 다룰 수 없는 핵심적인 이유가 되고 있다. 대외의존도가 한국보다 훨씬 낮은 미국(19.5%)이나 일본(21.8%), 또는 유럽 사회에서 생성된 사회과학 이론을 한국 사회에 적용할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신자유주의 타도'를 정녕 원한다면 '한국적 타도 이론'을 내놓아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회과학자들이 수입된 '타도 이론'만 알 뿐 '한국적 이론'은 아는 바 없다. 모두 코즈모폴리터니즘의 화신이다. 과거 '한국적 민주주의'에 워낙 덴 경험 때문에 그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삼성 회장 이건희의 고대 사건은 벌써 잊혀져가고 있다. 그래선 안 된다. 노무현 못지않게 이건희도 늘 상시적 화두가 되어야 한다. 일방적인 비판을 하자는 게 아니다. 비판적 지식인들이 아무리 이건희를 비판해도 그는 '존경받는 기업인' 1위의 자리를 확실하게 고수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사회과학은 그 괴리를 설명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작업이어야지 언제까지 운동권 선언문의 수준에만 머무를 수는 없지 않은가. 내 입맛에 맞으면 민중은 위대하다고 예찬하다가도 내 입맛에 맞지 않으면 민중은 없는 듯 내 주장만 해대는 식으론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정치 중독'에서 탈출해 경제 공부도 열심히 해서 제대로 된 개입을 해야 한다. 물론 나 자신에게 하는 소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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