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7-28

[한겨레 기사돌려보기]삶과 이념의 별거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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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섹션 : 강준만의 세상읽기 등록 2005.09.01(목) 제575호


[강준만의 세상읽기] 삶과 이념의 별거시대

사회적으로는 진보를 향하면서도 개인적 일상에선 전혀 다른 문법 작동
한국인들도 잘 모르는 복잡한 양상과 이유, 우리사회 혼란 짚는 키워드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얼마 전 한 언론에 디시인사이드의 중국 진출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가 디시인사이드 내에 게시물로 올라오자 한 이용자가 '유식이가 돈독이 올랐군'이라는 리플을 달아놓았다. 좀 씁쓸했다."

4·15 총선의 민심을 착각하다

지난해 9월에 출간된 디시인사이드 대표 김유식의 <인터넷 스타 개죽아, 대한민국을 지켜라!>에 나오는 이야기다. 김유식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그 대목을 읽다가 슬그머니 웃었다. 그 리플을 달아놓은 사람이 한국인의 어떤 특성을 대변해주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김유식은 그 리플을 단 사람의 심리 상태에 대해 이런 해석을 내놓았다.

"우리나라 국민들의 반기업정서는 세계 1위다. 외국에서는 돈이 많거나 큰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들이 존경받지만 우리나라에서 사장은 죄다 도둑놈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워낙 우리 민족성이 콩 한쪽도 반쪽씩 갈라먹고 혼자 뭐 먹을라치면 치사하다는 소리를 듣기는 하지만, 남 잘되는 꼴 못 보는 것에는 챔피언감이 아닐까?"

얼른 생각하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이 문제는 좀더 깊이 있는 분석이 필요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디시인사이드의 중국 진출에 격려를 보내기보다는 그것을 '돈독'으로 해석하는 심리의 저변엔 반기업정서나 시기심보다는 '삶과 이념의 괴리'를 당연시하는 이중성이 작용했을 법하다. 디시인사이드가 보여준 일정 부분의 진보성을 감안컨대, 더욱 그렇다. 공적 영역을 향해선 '이념'을, 사적 영역에선 '삶'을 절대적으로 우선시하다 보면, '돈'은 늘 은밀하게 다뤄야 할 무엇이 된다.

흥미로운 건 '삶과 이념의 괴리'가 부부관계에 비유하자면 '이혼'은 아니고 '별거'라는 데에 있다. 이혼하기 전에 양쪽 모두 차분한 성찰의 시간을 가져보자는 뜻에서 별거를 해보는 건 바람직하다. 그러나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들 때문에 차마 이혼을 할 수 없어서 택하는 별거라면?

한국인의 '삶과 이념의 별거'는 그 양상이나 이유 모두 대단히 복잡하다. 한국인 자신들도 잘 모른다. 그래서 한국인의 겉모습만 보고 헷가닥 속아 넘어가거나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노무현 정권 사람들도 그런 경우다. 이들은 대통령 선거, 탄핵 사태, 4·15 총선에서 나타난 민심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했다. 자기들이 갖고 있는 이념·기질·행태에 지지를 보내준 것으로 생각했다는 뜻이다. 엄청난 착각이었다.

개혁·진보파 중에서도 신문만큼은 악착같이 보수 신문을 구독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거야말로 한국인의 '삶과 이념의 별거'를 말해주는 드라마틱한 증거지만, 이건 사소한 경우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굵직한 증거들이 우리 주변에 숱하게 널려 있다. 보수파들은 한국의 지식·문화계가 좌파에 장악됐다고 호들갑을 떠는데, 이들의 무지를 탓할 일은 아니다. 이들도 속아 넘어간데다 충격을 받은 나머지 뻥튀기 발언을 한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이 또한 '삶과 이념의 별거'와 관련된 것이다.

촘스키도 껴안아주는 보수신문들

쉽진 않겠지만, 자신을 낯선 이방인으로 여기면서 한국 사회를 정색을 하고 다시 보기 바란다. 역설 같지만, 한국처럼 활짝 열려 있는 사회도 드물다. 당장 떠오르는 사례로 노엄 촘스키라는 미국 지식인을 생각해보자. 촘스키의 이념적 위상은 복잡하지만 미국의 주류 매체가 아예 언급조차 꺼리는 좌파 중의 좌파라는 건 분명하다. 그러나 한국에선 보수 신문도 촘스키를 껴안으면서 대서특필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그건 '사대주의' '미국 비판의 상품성' '보수 물타기 전술' 때문이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서구에서 수입된 사회과학적 잣대로 한국 사회의 이념을 평가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지만 좀더 생각해보면 그건 '지식 폭력'일 수 있다. 서구와 한국의 상황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이념적 딱지는 서구적인 것인데, 바로 이게 '삶과 이념의 별거'를 악화시킨 한 요인이다.

남북 분단, 지역주의, 서울공화국 체제 등과 같은 문제는 서구적 이념 그물에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스스로 '좌파'라고 주장하는데도 그 문제들에선 보수파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수입 좌파'이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오랫동안 온몸으로 투쟁해온 투사일지라도 의식화의 교재로 애초부터 서양 수입품을 써왔고 그걸 맹종한다면 그런 함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여기서 '수입 좌파'는 가상 개념에 가깝다. 그런 사람들이 따로 있다기보다는 그런 성향을 누구나 조금씩은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한국적 특수성만을 강조하는 '국산품 애용자'도 마찬가지다.

'수입 좌파 이데올로기'가 현실적으로 먹혀들기 힘든 또 하나의 이유는 그것이 국제관계를 크게 고려하지 않아도 될 토양에서 생성됐다는 점이다. 한국처럼 경제·에너지의 해외 의존도가 높은 나라는 드물다. 게다가 그럭저럭 조용히 살았으면 모르겠는데 한맺힌 건 많아서 잘살아보겠다고 어찌나 발버둥쳤던지 돈은 좀 벌었지만 그 의존도를 극한으로 몰고 갔다. 그건 이미 굳어진 경로가 되어 그걸 바꾸기가 이만저만 어려운 게 아니다. 게다가 이미 국민 다수가 돈맛을 봤는데, 그런 경로 수정에 동의할 리도 없다.

세계화 시대에 해외 의존도가 높은 건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타고난 낙관론자'들도 있지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건 그 높은 해외 의존도가 국내의 이념 지평에 미치는 영향이다. '삼성 공화국'은 국내에서 돈질만 잘했다고 이루어진 게 아니다. '삼성 공화국'의 최대의 방패가 바로 그 높은 해외 의존도다.

한국 사회가 경제의 과도한 지배를 받고 있다고 개탄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게 '붉은 악마'가 자랑스럽게 외쳐대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인 걸 어찌하랴. 그 정체성은 국민적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이중적이다. 안팎을 보는 시선이 각기 다르다. 밖에서 '경제대국' 대한민국은 자랑스럽지만, 안에서 내 삶을 도모하는 데 '경제대국'이라는 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형평의식이 DJ 정권 탄생에 일조

그런 공간적 문제와 더불어 시간적 문제도 있다. 역사에 대한 채무감이다. 일부 한국인의 진보성은 다분히 역사에 대한 부채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대의를 위해 고생한 사람들에 대한 보상이 필요하다는 형평 의식이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탄생과 민주노동당의 약진에 일조했다. 그런 형평 의식은 이념 지향성과는 좀 다른 성격의 것이다. 그 괴리를 인식하지 못하면 크게 실수하는 거다.

또 여기에 평등주의까지 가세해 더욱 헷갈리게 만든다. 한국인이 평등주의가 강한 민족이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보수 신문들이 외쳐대는 "평등주의가 나라 망친다"는 선동은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경제대국' 대한민국의 토대가 된 개발독재는 그 어떤 장점에도 불구하고 '절차의 폭력' 때문에 두고두고 큰 후유증을 남길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권위와 부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건 평등주의라기보다는 형평 의식이다.

개발독재가 끝났다고 해서 '절차의 폭력'까지 사라진 건 아니다. 한번 세워진 틀은 하루아침에 허물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는 부동산 문제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오랜 세월 뼈빠지게 노동해도 자기 집 한칸 마련할 수 없는 노동자가 여전히 부동산값 폭등으로 떼돈 버는 사람들이 양산되고 있는 현실을 어찌 수긍할 수 있겠는가.

'절차의 폭력'은 아직도 곳곳에 만연해 있다. 유전무죄는 국민의 70%가 믿는 상식으로 통용되고 있으며, 전·현직 대통령 친인척, 청와대 직원, 검찰, 경찰 등의 행세를 하며 돈을 챙기려는 '사칭 범죄' 사건이 2001년 470건에서 2003년 646건, 2004년 1~10월 567건이나 발생한 것으로 집계됐다. 민주화? 그건 '절차의 폭력'과 별 관계없는 이야기다.

사람들은 '민주주의' 하면 곧장 '선거'를 연상하지만 선거에선 고약한 냄새가 진동한다. 정치판 선거만 그런 게 아니다. 여러 노동운동가들이 "선거가 노조를 죽인다"고 증언하고 있다. 대학총장 선거는 아예 교육부가 개입을 선언하고 나섰다. 선거는 정치·노동·대학뿐만 아니라 종교·봉사단체마저 타락시키는 괴물이다.

이 모든 게 개발독재 탓이라고 말하는 건 말이 안 되지만, 박정희에게 '절차의 폭력'을 창궐하게 만든 책임을 물을 생각은 하지 않고 그를 일방적으로 예찬하는 건 더욱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박정희와 싸우면서 닮아간 사람들이 아직 '개혁'과 '진보'의 깃발을 내걸고 사회 곳곳에서 맹활약하고 있는바, '절차의 폭력'은 당분간 우리의 숙명일 것이다.

'절차의 폭력'을 비난하는 게 아니다. 겪어본 사람은 잘 알겠지만 '절차의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선 무슨 일을 해내기가 매우 힘들다. 그래서 그게 필요하다고 수긍하는 것도 아니다. 좋건 나쁘건 그게 우리가 처해 있는 삶의 조건이라는 걸 말하려는 것이다.

"너 보수지?"는 어떻게 쓰이는가

그건 보통 사람들에게도 '삶과 이념의 별거'를 불가피하게 만드는 조건이다. 사회적 수준에서의 이념은 진보를 향하지만, 개인적 수준에서의 삶은 현실 순응을 요구한다. 이 두개의 서로 다른 조합은 매우 혼란스러운 결과를 낳는다. 민주화 투쟁 시절도 아닌데 여전히 '바람 정치'가 맹위를 떨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개인적 일상으로 돌아와선 전혀 다른 문법의 지배를 받는다.

그 문법의 실체는 이기심으로 환원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다. 예컨대, 어떤 정치세력이 세상을 화끈하게 바꾸는 진보적 경제정책을 내놓았을 때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건 이기심이나 탐욕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 서민들조차 지지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을 무지몽매한 사람들이라고 깔보는 것도 금물이다.

이번 삼성 사건에 대한 반응도 그렇게 보아야 할 것이다. 딴지일보 총수 김어준은 최근 <한겨레>에 기고한 글에서 "삼성, 이번에 처음 알았다. 마지못한 종범인 줄 알았더니, 적극적 기획자인 거"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실 이해 안 가는 건 사람들 반응이다. 별반 분해하지 않는다. 이상하다. 우린 불합리한 건 참아도 불평등한 건 못 참는 사람들인데. …잡소리 다 빼면 이거, 노예근성이다. 강자의 우산 아래 덕 보는 대신 내 권리는 내주고 그로 인한 불평등은 끌어안는, 노예근성."

이 글은 김어준의 탁월한 풍자로 이해하면 무난할 것이다. 그러나 만에 하나 일부 독자들이 정말 사람들이 노예 근성 때문에 삼성에 대해 분노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그건 큰 오해일 것이다. 물론 그런 점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대중의 그런 이중성에 대해 '노예 근성'이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해버리면 대한민국과 전체 한국인에 대한 평가에서 불행한 사태가 벌어진다. 그런 식으로 따지기 시작하면 일부 한국인들이 높게 평가하는 선진국 사람들은 전부 "약한 나라 등쳐먹은 걸로 번영을 이룬 날강도 국민"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진실을 말하자면, 한국 사회에서 개인의 이념 지향성은 '인정투쟁'의 요소가 강하다. 개혁·진보 진영 내 논쟁에서 "너 보수지?"라는 말이 어떻게 쓰이는지를 생각해보라. 이념의 보여주기 용도가 크다 보니, 자신의 삶과 이념이 따로 놀아도 그것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거나 약하다. 많은 한국인들이 성장 과정에서 또 상황 변화에 따라 이념 지향성이 급변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동거하든가 이혼하든가…

인정투쟁으로서의 이념 지향성은 사회적으로 좋지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애초부터 실천에 별 뜻이 없으므로 현실과 동떨어진 순수를 과시할 때에 인정투쟁에선 유리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이념 인플레이션'이 발생해 삶과의 괴리가 더욱 커지게 되고, 이념은 카타르시스의 영역으로 편입돼 접점 없는 갈등과 분열에 자양분을 공급하게 된다.

삶과 이념은 동거하거나 아니면 이혼하는 게 좋다. 야망 예찬론자들은 야망을 품다 보면 그 근처에라도 갈 수 있기 때문에 야망이 꼭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이념을 야망처럼 볼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나는 생태주의에 대해 거리를 두면서도 골프에 대해선 환경적인 이유로 적대적이지만, 생태주의를 예찬하면서 골프 열심히 치는 사람들을 볼 때엔 그래도 되는지 헷갈리곤 한다. 그런 게 하나둘이 아니다. 그런데 그런 종류의 사안에 대한 '여론'을 들어보면 늘 내가 소수파다. 당연하다. 지금 우리는 삶과 이념의 별거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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