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9-06

미 쇠고기 개방 ‘시나리오’ 있었다

"우리가 미국 방문 때문에 쇠고기 협상을 양보했다고 하는데 그렇게 말하는 것은 너무 정치적인 논리다."

2008년 4월21일 이명박 대통령은 첫 방미 뒤 일본 도쿄에서 열린 수행기자단과의 조찬간담회에서 미국산 쇠고기 전면 개방에 따른 비판론에 맞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내부고발 사이트인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미국 국무부 외교전문을 보면, 이 대통령 쪽은 이미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시절부터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전면 개방의 '시나리오'를 마련해놓고 있었다. 다만 정치적 민감성 때문에 4월9일 총선 이후 공식 발표하는 것으로 일정을 짜맞췄다. 이 대통령 쪽은 그런 내용으로 미국 쪽에 '양해'까지 구했다.

미국산 쇠고기는 2003년 12월 미국에서 광우병에 걸린 소가 발견된 뒤 전면 수입 금지됐다. 당시 우리나라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액은 연간 8억6000만달러로, 미국으로서는 3대 수출국이었다. '황금시장'을 잃은 미국은 세계동물보건기구(OIE)로부터 '광우병 위험 통제국' 지위를 받았다는 이유를 내세워 쇠고기 시장 전면 개방을 끈질기게 요구했다.

이명박 대통령 쪽이 쇠고기 개방을 처음 약속한 것은 취임도 하기 전인 2008년 1월17일이었다. 인수위에서 활동하던 최시중 현 방송통신위원장과 현인택 현 통일부 장관은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와 점심을 먹으며 이 대통령의 방미와 쇠고기 협상을 연계했다. 이 대통령이 4월19일 캠프 데이비드에서 조지 부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기에 앞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재개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당시 캠프 데이비드 회담을 조건으로 쇠고기를 양보했다는 세간의 의혹이 사실로 확인된 셈이다.

버시바우 대사는 2월19일 이경숙 당시 인수위원장, 3월12일 김병국 당시 청와대 외교안보수석과 만난 자리에서도 "이 대통령이 첫 미국 방문에서 환대를 받으려면 한국의 쇠고기 시장 전면 개방에 먼저 동의해야 한다"고 확인했다. 2월21일과 3월25일 버시바우 대사가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에게 보낸 기밀 외교전문을 보면, 이 대통령 쪽이 미국 방문 전까지 쇠고기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정치적으로 민감해 4월9일 총선 전까지는 공식 서명할 수 없다고 밝혔다고 돼 있다. 이에 미국 쪽이 비공식 사전 협상을 제안했고 한국 통상당국과 은밀히 논의중이라고 덧붙였다. 이 또한 사전 '비밀협상'이 없었다는 정부 쪽의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4월9일 제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전체 의석(299석)의 과반수인 153석을 차지했다. 그리고 사흘 뒤인 11일부터 한·미 두 나라는 '시나리오'대로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를 위한 공식 협상에 돌입했다. 불과 일주일 만에 30개월 이상의 뼈를 포함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사실상 완전히 허용하기로 합의했다. 협상 타결 날짜는 이 대통령이 캠프 데이비드에서 부시 대통령을 만난 18일이었다.

축산·농민단체들은 "대통령 방미 선물이 아니냐"고 지적했지만 정운천 당시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은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고 일축했다. 이 대통령도 "미국뿐 아니라 모든 나라에서 들어올 수 있는 건 다 개방하는 게 맞다"며 "그다음은 소비자의 몫"이라고 말했다. 무리한 쇠고기 개방은 결국 대규모 촛불시위가 불붙는 계기가 됐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