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정동에 있는 미국대사관저에는 딱 한번 들어가 봤다. 서울시립미술관 어름에서 체크포인트를 거쳐 한참 덕수궁 옆을 따라 오르면 왼쪽으로 근사한 한옥이 보인다. 정·재계나 언론계의 높으신 분들 틈에 끼어 어색하게 국악 공연을 보고 밥을 먹은 걸로 기억하는데, 미국 대사가 참가자들 사이를 돌며 세심하게 이야기를 건네는 모습만큼은 참 인상적이고 따뜻했다. 몇차례 종로의 미 대사관에 아침부터 줄을 서서 방탄유리벽 너머로 비자 인터뷰를 받던 때의 불편한 마음과는 사뭇 달랐다.
그들도 너무 편했던 걸까?
최근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주한 미국대사관발 전문들을 들추면 들춰볼수록 우리 사회의 높은 분들은 너무나 솔직했다. 어느 전직 장관은 2008년 9월 미 대사관 정무관리들을 만나 당신 나이가 72살인데 골프 등을 규제하는 공무원윤리규정에 발목 잡히기 싫어 공직 제안을 여러차례 거절했다고 말했다. 물론 당신이 대통령을 볼 때마다 개인적 혜택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가장 솔직한' 대통령 자문인이라고 불린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이 항목의 제목은 '자유로운, 그러나 골프 치기 자유로운?'(Free, But Bogey-free?)이다. 같은 해 6월, 당시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의 방한이 쇠고기 시위로 연기된 데 대해 '이는 수치다'라 말한 것으로 요약돼 있다. 미 대사관은 그를 "숙련된 외교관으로서 모든 미국적인 것을 편히 여긴다"고 평가했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일반인들도 외국인을 만나면 되도록 그 나라에 대한 좋은 추억과 좋은 말만 하게 되는 법이다. 솔직한 대화가 관계를 돈독히 할 수 있고, 극진한 대우를 받다 보면 '오버'가 나올 수도 있다. 워낙 그런 모임이 잦은 분들이니 "기억 없다"는 대답에 어느 정도 진실이 포함됐을 수도 있겠다 싶다. '친미파'면 어떤가? 미국은 어둠만큼 빛도 많은 나라다.
단, 이건 개인일 때 얘기다.
적잖게 '월간 만남' 같은 표현이 전문에 등장하듯, 미 대사관은 이른바 우리 사회 오피니언 리더들과 정기적인 만남을 갖는다. 미국에 우호적인 한국 여론을 형성하는 통로이자, 거꾸로 하나하나씩 쌓인 보고들은 미국의 대한국 전략을 수립하는 데 필요한 정보가 될 수 있다.
하물며 대통령이나 정부, 여권 인사들의 발언은 미국의 전략 수립에 바로미터가 될 터.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 미 대사와 의원들 앞에서 "기자들이 없어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데 미국산 쇠고기가 좋고 싸다"고 말한 게 나름 친근감을 표현한 건지는 몰라도, 협상을 앞둔 국가 수장의 발언으로선 '하수'다. (하긴 "한국이 미 쇠고기 수출업계에 더 큰 잠재시장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데 이르면 어느 나라 대통령의 말인지 헷갈릴 정도지만.)
하다못해 포커를 칠 때도 '포커페이스'라는 게 있는 법이다. 하지만 한국 쪽은 쇠고기 협상을 두고 미국에 패를 다 내보이는 건 물론, 판돈 계산을 미뤄달라고 사정까지 했다. 쇠고기 재개방 방침은 다 결정됐지만 2008년 4월9일 총선 전에는 공식 타결을 밝힐 수 없다고 하거나, 그해 6·29 보궐선거 전엔 수입 재개를 시작할 수 없다고 미국 쪽에 설명하는 게 바로 그 꼴이다.
친미 성향을 탓하자는 게 아니다. 일반인들은 '여러분이 민간 외교관입니다' 같은 표어에 외국에 나가 침 뱉는 것도 어려워한다. 고위층의 '친미'에도 품격은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것이 주권국가의 최소한의 국격이다. 적어도 ×팔리지는 말자. (아쉽지만 나도 품격을 지키기 위해서 ×로 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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