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전 대법관이 대법원장 후보자로 지명되기까지의 과정은 사뭇 극적이다. 지난 8월, 그는 친구들과 함께 '걷는 이의 꿈'이라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산악 도보여행길 '존 뮤어 트레일'을 걷고 있었다. 출국 전, 그는 청와대의 인사검증 동의 요청에 불응했다. 대법원장에 뜻이 없다는 말도 했다. 8월11일 요세미티 계곡에서 시작된 산행은 358㎞를 걸어 9월1일 휘트니산에서 끝날 예정이었다. 산행 닷새째인 8월15일 오전, 일행은 투올러미 평원에 있었다.
청와대와의 통화는 중간 보급 통로인 이곳에서 이뤄졌다고 한다. 지나온 길과 앞으로 갈 길은 휴대전화가 제대로 통하지 않는 지역이었다. 청와대는 다른 후보들을 놓고 고심하다 도저히 안 되겠다며 다시 그와의 접촉을 시도하던 참이었다. 어렵게 이뤄진 통화는 청와대 쪽이 매달리는 양상이었다고 한다. 청와대 쪽의 확언에 그는 산행을 접었다. 그러고선 마침 중도에 빠져나가기 위해 미리 주차해뒀던 친구의 차로 공항으로 향했다. 그는 8월18일 지명 발표 직전에 귀국했다.
사연대로라면 삼고초려라고 할 만하다. 은퇴 뒤 산이나 다니며 자유롭게 살겠다는 이를 간곡하게 부탁해 모셔온 모양새다. 사법부로선 이런 상황이 다행일 수 있다. 자리를 차지하려 아쉬운 소리 하지 않은 이가 수장이 된다면 권력에 크게 빚진 게 없게 된다. 모셔온 사람이니 발언권도 커질 것이다. 적어도 정치권력과의 관계에서 독립성이 훼손될 우려는 줄어든다. 하지만 그만큼 양 후보자 개인의 개성과 생각이 더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가뜩이나 대법원장은 전국 법관 2600여명의 인사·보직권과 대법관 제청권 등 제왕적 권한을 지닌 자리다. 주변 사람들은 양 후보자가 그런 권한을 활용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평한다. 그렇게 출범할 '양승태 사법부'는 어떤 모습일까.
그는 생래적으로 안정지향적인 법원 안에서도 보수로 꼽힌다. 판결 성향이 그렇다. 대법원에서 그는 정연하고 무게 있는 논리로 보수 성향의 논의를 주도했다고 한다. 어제 국회 인사청문회에서도 그는 "근본적으로 사법부의 급격한 변화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런 그를 두고, 후배 법관 등 지인들은 그가 그냥 보수가 아니라 원칙을 지키는 보수, 합리적인 보수라고 변호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그를 지명한 것은 그의 뚜렷한 보수 성향 때문이겠지만 꼭 그런 기대대로 되진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긴, 1953년 미국 공화당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공화당 부통령 후보를 지낸 얼 워런을 대법원장으로 지명한 것은 그가 굳건한 보수주의자라고 믿었기 때문이지만, 정작 워런 대법원장은 16년 재임기간 동안 인권과 민권 향상에 기여한 여러 진보적 판결로 사법사에 빛나는 '절차 혁명의 시대'를 이끌었다.
양승태 사법부가 그리할 수 있을지, 혹은 역사의 전진으로 꼽히는 판결에 끊임없이 제동을 걸려 한 워런의 후임자들과 같은 구실을 할지는 장담하기 이르다. 그가 지키려는 원칙이 낡은 관행이나 제도, 시대에 뒤처진 해묵은 판례 이상의 무엇인지도 아직은 분명치 않다.
가늠자는 오는 11월과 내년 7월 퇴임하는 대법관들의 후임 인선이 될 것이다. 퇴임하는 대법관의 상당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과 공정한 절차를 강조한 법리로 법원 내의 활발한 논의와 변화를 이끌었다. 그런 이들 대신 비슷한 사람들 일색으로 법원이 채워진다면 그나마 이룬 변화의 싹이 시들게 된다. 사회의 다양한 의견이 반영되지 않는 법원이 공정성을 인정받기는 어렵다. 규범 해석자로서의 기능도 의심받게 된다. 이제 장정의 한 구간을 맡을 양승태 사법부가 나침반의 구실을 잃지 말기 바란다.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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