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부쩍 '인문학이 왜 필요한가', 또는 '교양이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그 질문이 내게는 '당신은 도대체 왜 사는가'처럼 대답하기 어려운 화두로 다가온다. 이런 상황에서 인문학은 교양과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는 것 같다. 아무런 실용적 이점을 찾을 수 없는 인문학이 도대체 비전공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어려운 질문 앞에서 매번 쩔쩔매던 나는 최근 마음 깊은 곳에서 저절로 떠오르는 소박한 대답을 찾았다.
인문학, 또는 교양이 진정 누구에게나 필요하다면, 그것은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기술'을 터득하기 위해서라고. 내가 타인으로부터 '교양의 향기'를 느끼는 순간은 바로 그가 자신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을 때조차도 타인을 극진히 배려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다. 최고의 엘리트들이 타인에게 최상급의 고통을 선사할 때도 많고, 별다른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이들이 누구보다도 타인을 행복하게 해줄 때도 많다. 상식퀴즈로도 학벌로도 독서량으로도 교양의 정확한 분량을 측정할 수 없다. 교양은 교육수준과는 전혀 상관없는 인식의 기쁨이다.
현대인은 교양 자체로부터 자연스레 샘솟는 기쁨을 느끼기보다는 '교양 없는 사람'이라는 평판을 피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곤 한다. 토마스 만의 소설 <토니오 크뢰거>는 교양 자체가 곧 스트레스가 되는 상황을 탁월하게 묘사한다. 주인공 토니오는 사교계 데뷔를 위한 춤동작을 배우면서 엄청난 중압감을 느낀다. 춤 하나 배우는데 왜 이렇게 배울 것이 많은지. 생소한 프랑스어는 물론 화려한 에티켓을 선보여야 하며 뭇사람들의 부담스런 시선까지 견뎌내야 한다. 그러느라 정작 '춤의 기쁨'은 전혀 느끼지 못한다. 자신이 남몰래 짝사랑하고 있는 소녀의 시선에 당황한 나머지 남성의 춤동작이 아닌 여성의 춤동작을 선보인 토니오의 실수 앞에서 좌중은 포복절도한다.
이렇듯 타인의 시선에 봉사하는 교양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토니오는 수많은 문화적 충돌의 접경지대에서 매번 흔들린다.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기에 최고급 엘리트들과의 교제 기회가 활짝 열려 있지만, 그는 그런 집단적 교양의 인프라에 사육당하는 것보다는 혼자만의 내면 탐구에 빠져 글쓰기와 글읽기에 탐닉하는 것을 좋아한다. 타인의 시선에 의존해야만 그 가치를 인정받는 허영의 교양시장에서 토니오는 탈출하고 싶다. 그는 소설책을 읽으며 혼자만의 슬픔에 빠지는 것이, 여러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가공해낸 기쁨으로 가득한 사교계에 있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느낀다. 이렇듯 진정한 교양은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자기 내부의 기쁨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
교양은 이렇듯 학교나 사교계 같은 집단의 요구가 아닌 자기 내부의 열망으로부터 시작되는 마음속의 셀프 아카데미를 필요로 한다. '무엇을 암기할 것인가'가 아니라 그 방면의 지식이 '왜 필요한가'를 깨닫는 순간이 우리 안의 셀프 아카데미가 활짝 문을 여는 순간이다. 소개팅이나 면접시험에서 '쪽팔리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이 학문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여야 할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 중요하다. 학창시절 역사 과목의 높은 점수보다 중요한 것은 역사공부가 '도대체 왜' 필요한지를 스스로 깨닫는 순간의 희열이다. 음악시험에서 만점을 받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소중한 사람이 슬픔에 빠졌을 때 마음을 어루만지는 시디 한 장을 내밀 줄 아는 센스가 아닐까.
우리들의 셀프 아카데미에서 또 하나의 필수 과목은 바로 '자아탐구'다. 심리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은 이렇게 속삭인다. "당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찾아라. 진정한 성장은 그 순간부터 시작된다." 자신의 치명적인 콤플렉스나 아킬레스건을 마음 깊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타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길도 함께 열린다. 살아가면서 반드시 필요한 기술이지만, 학교에서는 쉽게 배울 수 없는 것들을 찾아보자.
예를 들면 실연당했을 때 슬픔을 견디는 법, 누군가를 증오할 때 그 분노를 극복하는 법,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함께 울어줄 이를 찾는 법,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진정 마음으로 울어줄 사람을 찾는 법. 이런 것들이 진짜 우리에게 필요한 교양이 아닐까. 교양은 액세서리도, 양념도, 인테리어 소품도 아니다. 교양이란 차라리 효모나 이스트를 닮은 것이 아닐까. 요리법에 따라 어떤 빵이나 과자가 될지 모르지만, 효모나 이스트가 없다면 향기로운 빵과 과자를 만들 수 없는 것처럼. 교양은 아직 완성된 요리가 아니지만, 우리의 삶이라는 소중한 빵을 구워내는 데 반드시 필요한 인식의 재료다. 교양의 마지노선이 '타인의 마음을 아프지 않게 하는 기술'이라면 교양의 클라이맥스는 '자신의 기쁨을 곧 타인의 기쁨으로 만드는 기술'이 아닐까.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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