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훈 서울시장 사퇴로 밀어닥친 '안철수 쓰나미'가 추석 연휴를 앞둔 정가를 초토화시켰다. 안철수 원장은 대학으로 돌아가고 서울시장에 출마하려는 박원순 변호사가 가장 많은 이득을 보고 있다. 그러나 바닷물이 빠지고 잔해가 드러나듯, 이번 사태로 인한 주요 정치인들의 피해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최근 사석에서 만난 정치인들은 "정치인으로서 굴욕감을 느낀다"거나 "무섭다. 세상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자주 한다. 안철수 쓰나미의 여파로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한나라당 후보 대 범야권 단일후보'의 맞대결로 치러질 가능성이 커졌다. 10·26 재보선 결과는 여야 지도부의 거취까지 흔들 수 있다. 연말 야권통합이나 연대에도 직접 영향을 미칠 것이다. 2012년 4·11 국회의원 총선, 12·19 대통령 선거 국면이 갑자기 확 앞당겨진 형국이다.
박근혜 대세론 최대타격
정몽준·김문수도 찰과상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2012 총선과 대선의 향배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정치판에는 분석에 능한 '달인'들이 꽤 있다. 정당에 소속된 전략 참모들이나, 고참 당직자들이다. 이들은 특정 정치인과 상하관계를 맺고 있는 경우가 많아 좀처럼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런 '숨은 고수' 몇 사람의 도움을 받아 이번 안철수 쓰나미와 그 이후의 정국을 진단해 보았다.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는 안철수 현상을 '반짝 거품'이라고 했다. 김기현 한나라당 대변인은 안철수-박원순 회동에 대해 '좌파들의 정치쇼'라고 했다. 단견이거나, 의도적인 폄하다.
어쨌든 안철수 원장이 대선주자 '반열'에 올랐다는 것은 정치적 현실이다. 안 원장이 일부러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바람처럼 나타났다가 바람처럼 사라졌고, 결과적으로 더욱더 갈채를 받았다.
'반한나라당'을 선언했다가 박근혜 전 대표를 치켜세우는 등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한 것도 특이했다. 정파나 이념을 초월한 사람으로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려는 것 같다. 그런데 최근 각종 여론조사에서 그에 대한 지지계층은 20~30대 진보적 성향의 유권자들인 것으로 확인된다. 안 원장이 취하고 있는 정치적 스탠스와 지지계층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불일치'가 당장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는 정가에서 사라졌다. 청춘 콘서트도 9일로 끝났다. 그렇지만 언젠가 정치를 시작하려면 이 문제를 해소해야 한다.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안철수 원장이 정치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는 서울시장을 '행정직'으로 잘못 알고 있었고 정치 경험이 전혀 없으면서도 가장 정치적인 자리에 도전하려는 '무모함'을 보였다. 안 원장에게 가끔 조언을 하는 사람 중에 김종인 전 의원이 있다. 최근 발언을 간추리면 이렇다.
손학규 리더십 허약 노출
정동영·천정배 신뢰 추락
"언론에서 안철수 원장을 대선후보로 자꾸 띄우는 것은 적절치 않다. 대선후보를 하려면 일단 정치인으로 직업을 바꿔야 한다. 안 원장도 정치를 하려면 내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서 국회의원이 돼야 한다. 먼저, 정치인으로서 훈련을 쌓고 국민의 검증을 받아야 한다."
안철수 원장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 달리 처음에는 서울시장에 강한 집착을 보였다고 한다. 그런 안철수 원장이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김종인 전 의원의 조언대로 총선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 뒤 차차기를 노릴 수도 있고, 아니면 2012 대선에서 '한판승'을 노릴 수도 있다. 어쨌든 당분간 그가 국민의 관심권에서 사라질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이명박 대통령은 "올 것이 왔다"고 말해, 이번 일을 '남의 일'로 여겼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기존 정치와 정치인들에 대한 유권자들의 거부감이 폭발한 것이다. 정치를 '아날로그'로 만든 장본인이 바로 이명박 대통령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취한 태도는 '이승만-박정희 프레임'에 바탕을 두고 있다. 과거 독재자들은 "부패하고 무능한 기존 정치인들은 국회에 모여서 싸움이나 하고, 대통령인 나는 국민을 위해 열심히 일한다"는 상징 조작을 했다. 이 프레임은 전두환, 노태우는 물론이고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시대에도 부분적으로 작동했다. 정권에 대한 국민의 비난을 여야 국회의원들에게 떠밀면 대통령은 욕을 덜 먹게 된다.
이명박 대통령은 차기 대선주자가 아니기 때문에 각종 여론조사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안철수 쓰나미에서 그가 아무런 상처를 입지 않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 정치 개혁, 새로운 인물에 대한 국민의 욕구가 강해질수록, 이 대통령의 레임덕은 앞당겨질 수밖에 없다. 남의 일이 아닌 것이다.
문재인·유시민 건재속
범야권통합에 촉매제
박근혜 전 대표는 깊은 내상을 입었다. 치명상이라는 분석도 있다. 아무튼, 경상은 아니다. 친박 진영에는 비상이 걸렸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 이후 단 한 차례도 흔들리지 않던 압도적 지지율이 처음으로 추월당했기 때문이다. 친박계인 구상찬 의원이 '김황식 총리 차출론'을 들고 나온 배경에는 '박근혜 대세론'을 지키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
안철수 파동에 대해 박근혜 전 대표는 현장 정치 강화를 들고 나왔다. 안철수 원장과 '진정성 대 진정성', '현장 대 현장', '이미지 대 이미지'로 정면대응하겠다는 것이다. 옳은 선택일까?
박근혜 전 대표가 2007년 대선에서 실패한 것은 '박근혜 시대의 대한민국'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안철수 쓰나미는 외부에서 밀려온 것이다. 외부로 나가면 해답이 나오지 않는다. 정치인의 주 활동 무대는 정당과 국회다. 제도권 안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 정치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불러온 시스템을 본질적으로 개혁해야 할 텐데, 박 전 대표가 아직 그런 부분에 눈길을 돌리는 것 같지는 않다. 위기 극복이 쉽지 않을 것으로 보는 이가 많다.
박 전 대표로서는 다행히 종전 지지층이 와해하지는 않았다. 복구할 밑천은 있는 셈이다. 하지만, 고정 지지층 30%를 제외한 나머지 70%가 결집해 '박근혜가 아닌 다른 사람'을 대통령으로 만들 수 있다는 '가설'이 일정부분 확인됐다. 박 전 대표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돌파할 수 있을까?
'박근혜 흠집내기'에 몰두하고 있는 정몽준 의원, 중앙무대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는 김문수 경기지사는 결정적 상처를 입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도 한나라당 사람들이다. 쓰나미와 함께 밀려온 쓰레기 더미에 의해 상당히 많은 찰과상을 입었다고 볼 수 있겠다.
민주당 대선주자들이 입은 피해도 만만치 않다. 특히 손학규 대표가 가장 많은 상처를 입었다. 우선, 리더십이 취약하다는 약점을 고스란히 노출했다. 연일 정동영, 천정배 최고위원에게 치받혔지만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는 모습을 보여 대표 권위에 치명상을 입었다.
손 대표는 서울시 주민투표가 끝난 뒤 상황관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손 대표와 민주당이 '보편적 복지냐, 선택적 복지냐'라는 논쟁을 1주일만 끌고 갔어도, 안철수, 박원순은 치고 들어오지 못했을 것이란 분석이 많다. 천정배 최고위원 등 10여명이 일제히 출마 의사를 밝히면서, '무상급식' 국면은 '인물론' 국면으로 급속히 바뀌었고, 외부의 참신한 인물들이 나서자 민주당 내부 인사들은 힘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총선·대선 국면 조기화로
주자들 입지 재설정 예고
한명숙-박원순 회동을 주선한 이도 손학규 대표가 아니라 문재인 '노무현 재단' 이사장이었다. 현재 야권통합을 실질적으로 이끌어가는 세력은 민주당, 그리고 친노무현 성향 정치인들과 시민단체가 결합한 '혁신과 통합'인데, 민주당이 주도권을 '혁신과 통합'에 빼앗기고 있는 모양새다. 민주당 안에서도 손 대표가 대선주자로서 '존망의 위기'에 처했다는 분석이 있다.
정동영, 천정배 최고위원은 그동안 진보 색채를 강하게 띠면서 당 전체의 균형추 역할을 해 왔지만, 이번 사태로 당 안팎의 '신망'을 몽땅 잃었다.
문재인 이사장은 별 상처를 받지 않았다. 그 자신이 안철수 원장, 박원순 변호사처럼 '비정치인' 이미지를 갖고 있는 덕이다. 중앙무대에서 거리를 두고 있는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 김두관 경남지사도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 이들이 안철수 현상에 대해 대체로 호의적인 반응을 내놓고 있는 것은 '흐름'을 거역하면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민의 시선으로 보면 '혁신과 통합'에 참여하고 있는 친노무현 성향 인사들 상당수가 구정치인이다. 말 그대로 '혁신과 통합'을 제대로 이루어내지 못하면 이들이라고 해서 마냥 안전지대에 있다고 볼 수가 없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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