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3일 미국 워싱턴에서 지진이 일어났을 때, 시민들은 건물 바깥으로 뛰쳐나와 "또 테러"라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우왕좌왕했다. 9·11 테러가 끝난 지 10년이 지났지만 미국인들이 일상적인 테러 위협 속에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
9·11이 바꿔놓은 미국의 풍경 가운데 하나는 자신들의 '안전, 즉 '안보'를 위해 '자유'를 포기한 일이다. 이제 공항에서 허리띠를 풀고 신발을 벗는 일에 익숙하다. 검색대 앞에서 지문을 찍을 때 '인권' '프라이버시' 등을 주장하는 이도 없다. 과거 5년이던 운전면허증 갱신기간은 1년으로 줄었다.
안전을 위해서라면 인권 침해도 받아들인다. 테러 직후, 조지 부시 행정부가 테러 혐의를 받는 외국인을 영장 없이 체포하고, 수사기관의 감청 권한을 확대하는 등의 이른바 '애국법'을 채택할 때도 미국인들은 예전처럼 저항하지 않았다. 9·11 직후, 부시 대통령의 지지율은 역대 최고인 88%였고, 월드시리즈 등 큰 행사 전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군가였던 '갓 블레스 아메리카'가 불려졌다. 9·11 테러에 충격을 받은 사람들은 교회를 찾았고, 성조기를 보며 눈물을 흘릴 정도로 애국심이 고취됐다. 이는 사회적 보수화로 이어졌다. 부시 행정부가 뚜렷한 증거도 없이 이라크 전쟁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분위기가 뒷받침됐다.
1960년대 베트남 전쟁 당시에는 젊은이들의 '반전운동'이 거대한 바람처럼 휘몰아쳤지만, 뉴욕 한복판에서 세계무역센터(WTC)가 무너지는 장면을 목도한 미국인들에게서 이라크 전쟁 반대 분위기는 미미했다. 오히려 청소년기에 9·11 테러를 목격한 이들은 '인권보다 안전' '국제 사회보다 미국'을 우선시하는 '9·11 세대'로 성장하고 있다. 무슬림에 대한 사회적 반감도 그 연장선이다. 퓨리서치센터의 설문조사를 보면, 미국 내 무슬림 40%가 '조롱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경기침체와 맞물려 무슬림을 넘어 전 사회적인 반이민 분위기도 확산됐다. '자유, 인권, 희망' 등으로 상징되던 미국의 가치는 더이상 기대하기 힘든 사회가 됐다.
9·11 이후 10년간 미국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과 늘 '전쟁중'이었다. 는 지난 5일 "9·11 테러 10주년이 지났지만, 미국인들은 여전히 끝없는 전쟁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보도했다. 9·11 테러에서 3000여명이 숨졌는데, 이라크·아프간 전쟁에선 그 2배인 6000여명의 미군이 숨졌다. 이라크·아프가니스탄 등 민간인들의 희생은 어린이를 포함해 15만명에 이른다. 지난 6월 여론조사에서 미국인 47%가 '최근 10년이 지난 100년 역사에서 최악의 기간'이라고 답했고, 52%는 '아이들이 겪을 미래의 미국은 더 나빠질 것'이라고 답했다.
미국인들은 이제 '테러와의 전쟁'에 '피로증'을 호소한다. 최근 브루킹스연구소의 여론조사를 보면, 73%가 아프간의 미군 감축을 지지했고, 55%는 이라크전에 미국이 너무 많은 것을 쏟아부었다고 평가했다. 또 8년 전, 전 사회적인 지지를 받은 이라크 전쟁에 대해 이번 조사에선 49%가 '이라크 전쟁은 잘못'이라는 답변이 나왔다. 온라인 뉴스매체인 는 "9·11이 만든 이념인 '네오콘'(극우 신보수주의)이 9·11 테러 10년을 맞은 지금, 스스로 몰락했다"고 분석했다.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로 테러 세력을 압박한다는 네오콘의 주장은 이제 재정지출 반대와 감세를 주장하는 공화당 지지층으로부터도 외면받고 있다. '테러 근절을 위해선 시민권의 일부를 포기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10년 전 63%였던 '그렇다'라는 답은 올 9월 33%로 대폭 줄었다.
이런 기운이 미국 자유와 인권의 '회복'으로 이어질 수 있까? 아직 답은 불투명하다. 워싱턴/권태호 특파원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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