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11 테러의 표적은 미국 경제·군사 패권의 상징인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와 워싱턴의 국방부 청사 펜타곤이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와서 보면 9·11 테러는 미국 패권의 상징만을 '상징적으로' 무너뜨린 것만이 아니라 패권 자체를 무너뜨리는 신호탄이었다.
9·11 직전 미국은 1970~80년대의 재정적자를 털고 재정흑자를 내고 있었고, 경제 역시 '닷컴버블'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정보통신 분야의 신기술과 금융력을 바탕으로 신경제를 이끌고 있었다. 소련 붕괴 이후 압도적 군사력까지 더해 미국은 '단일 슈퍼파워 시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미국은 한해 재정적자 1조5800억달러에, 국내총생산보다 많은 15조5000억달러의 국가 총부채에 허덕이며, 신용평가사로부터 최우량 신용등급에서 강등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경제는 2008년 금융위기에서 아직 허우적거리며, 실업률은 9~10%로 고공행진하고 있다.
미국은 동쪽의 아프가니스탄에서부터 서쪽의 리비아까지 펼쳐진 전장에서 군사력을 과도하게 전개하며 천문학적인 군사비를 탕진하고 있다. 9·11에 대한 응징으로 미국이 기획한 이라크와 아프간 침공 비용과 대테러 비용은 인플레를 고려하면 베트남전 전비의 갑절인 3조달러 이상이 된다. 베트남전이 60~70년대 미국의 국력을 소진해 전후 현대 경제체제였던 브레턴우즈 체제 붕괴의 원인이 됐던 것을 고려하면, 미국은 9·11 이후 그 두 배의 후폭풍을 맞고 있는 셈이다.
2003년 5월1일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은 태평양을 항해하던 에이브러햄 링컨 항모에 전투기를 타고 착륙해 이라크전 종전을 선언하는 이벤트를 벌였다. 9·11 테러에 대한 보복 군사작전의 종료를 선언한 이벤트였지만, 9·11의 후폭풍은 사실 그때부터 시작됐다.
바그다드 함락과 함께 사담 후세인 정권은 타도됐지만, 시아·수니·쿠르드로 나뉜 이라크 내전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아프간전은 파키스탄으로까지 번져 아프팍(아프간-파키스탄)전으로 확전되는 등 미 군사력은 이슬람권 전역으로 펼쳐지면서 수렁에 빠져들었다.
경제 분야에서 9·11의 저주 또한 이미 잉태하고 있었다. 그해 3분기 미국 경제는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7%에 가까웠고 미국 경제는 다시 활황을 구가했다. 하지만 이는 9·11로 인한 경기침체를 막으려는 미 연방준비제도(연준)의 인위적 개입에 의한 '거품'이었음이 5년 뒤 드러난다.
연준은 2000년 닷컴버블 붕괴로 인한 경기침체를 막으려고 수차례 금리인하를 단행해 6% 이자율을 2% 초반대까지 낮춰온 상태였다. 9·11 직전에는 금리를 정상화할 시점이었지만 9·11이 터지자 오히려 이자율을 2.0%로 낮췄고 2004년 중반에는 사실상 제로금리인 1.0%로 접근시킨다. 미국인들은 싼 돈을 빌려 흥청망청하며 주택 거품을 키웠고, 이는 2008년 금융위기의 폭탄이 됐다.
9·11 이후 미국의 '파티'는 중국의 싼 수출품과 돈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중국은 저임노동력으로 만든 제품들을 미국에 수출해 돈을 벌고, 이 돈으로 미국 국채를 매입해 미국의 수지를 메워줬다.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의 구매력은 1980년 8%에서 지난해 24%로 늘었고, 증시 비중은 31%로 유럽의 25%를 추월해 미국의 32% 바로 밑으로 추격했다. 2008년 금융위기 수습의 역할도 미국이 아니라 중국이 대규모 경기부양을 통해 맡았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지도력은 급전직하했다. 우격다짐식 이라크전 개전 등 일방주의적 외교정책으로 인한 나토 동맹국들과의 불화와 도덕성 추락, 미국 거대은행의 도덕적 해이로 빚어진 금융위기 등은 미국을 세계 위기의 공적으로 만들었다.
물론 테러와의 전쟁 10년 만에 9·11 기획자 오사마 빈라덴은 사살됐고, 알카에다도 위축됐다. 미국이 애초 이라크전 개전 때 지향했던 '중동민주화 변형'도 올해 초부터 촉발된 아랍의 봄으로 진행됐다. 하지만 아랍의 봄이 중동에서 미국의 입지를 넓힌다는 보장은 없는 상태에서 미국은 '상처뿐인 영광', 아니 '상처뿐인 위기'만 거머쥐고 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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