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9-11

[논쟁] 새로운 명절문화를 생각한다

추석이다. 한해 농사를 끝내고 오곡을 수확해 조상에게 바치고 가족이 나누어 먹는다는 풍요로운 명절의 의미는 갈수록 퇴색하고, 대신 길고 긴 귀향길, 가부장적인 노동 분배 등 각종 '명절 스트레스'만 부각된 지도 오래다. 시가에 도착한 며느리들이 '노동의 새벽'을 맞으며 절규하면 그 소리에 남편 역시 전전긍긍한다. 이를 겨냥해 기업들은 '명절 스트레스 해소' 상품을 앞다투어 내놓는다. 추석 문화, 어찌할 것인가. 모두가 행복하고 풍요롭게 이 시기를 보낼 순 없을까. 남성과 여성, 양쪽에 물었다.

멋진 아비 되기, 거창하지 않다

이 땅의 모든 아버지들이여
명절에 '밥 차려라' '술상 내와라'
이런 식의 '하드 파워' 탈피하고
조용히 숯불을 피워보심이 어떨지

아마 중추절이 지나면 '연휴 직후, 이혼소송이 크게 늘었다' '음식 차리고 치우느라 또 고부간에 갈등이 불거지는 바람에 기혼여성 상당수가 명절 증후군에 시달렸다'는 전혀 새롭지 않을 팩트가 '뉴스'라는 이름으로 쏟아질 것이다. 기실 사람을 만나 즐겁고 행복해야 할 자리에 가서 도리어 사람 때문에 마음 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명절에 여성, 특히 며느리는 약자다.

그러나 한가위는 본래 여성의 잔칫날이었다. "여성들을 양편으로 나누어 한 달 동안 길쌈, 즉 일종의 경연 대결 비슷한 것을 하게 한 뒤 추석에 이르러 지는 편이 이긴 편에게 음식과 술을 대접했다." 고대 이 땅의 한가위 풍속을 는 이렇게 전한다. 그렇다. '축제'였다.

축제로 말하자면 유럽 기독교의 카니발(Carnival)을 빼놓을 수 없는데 우리네 풍습과 흡사해 보인다. 이때만 되면 여흥을 즐기라며 여성은 물론 모든 사회적 약자에게 술과 고기를 잔뜩 안겼다고 한다. 참고로 카니발은 고기(Caro)와 잔뜩 배불린다(Valens)를 합한 말이다. 곧바로 사순절 40일이 시작돼 금욕을 감내해야 하니 미리 회포를 풀라는 뜻이었다.

이 무렵 도시 전체는 사회적 약자의 해방구가 된다. 질펀한 유희는 물론, 가면 쓰고 권력자와 종교 지도자를 실컷 조롱해도 뭐라 타박하는 이가 없었다. 이름의 영문 약자가 'MB'라 상당히 '친숙'한 러시아 비평가 미하일 바흐친은 카니발을 일컬어 '소통'이라고 단언했고, 현대철학의 상징 니체는 축제를 '구원과 치료의 수단'이라 평가했다.

추석이면 우리 집에서도 작은 축제가 펼쳐졌다. 나의 아버지 김 태자 복자 목사가 집 문을 열어놓고 숯불을 피워 고기를 구운 것이다. 이것이 사실상 명절 식단의 전부였다. 평소에는 설거지하는 모습 한 번 보이지 않던 부친, 이날만은 팔을 걷고 어머니와 누나를 대신해 가사 노동 전면에 나섰다. 우리 가족이 놀란 부분은, 그런데 따로 있었다.

무림의 고수가 묵언수행을 마치고 일격필살이나 흑산포를 구사한다고나 할까. 접시 위에 오른 구운 고기의 맛은 별 몇 개 따위로 형언할 수 없었다. (굳이 별 숫자로 표시하라면,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의 '무상급식 주민투표율 25.7%면 승리한 것'이라는 언사를 빌려 최소 25.7개는 헌정하고 싶다고 말하겠다.) 애초 그것은 하나의 생고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김 목사가 그 살점을 석쇠에 올리고 몇 번의 뒤집음 끝에 그 고기는 우리 가족에게로 와서 감동이 되고 말았다. 절묘하게 남긴 육즙과 감질 날 정도의 숯불의 향내, 게다가 후추 등 천연 양념의 적절한 투입, 김태복표 숯불구이는 식품영양학에서 물리, 화학, 나아가 예술의 경지로 승화됐다.

사람만의 즐거움이 아니다. 지금은 고견(故犬)이 된 바둑이도 생전 아버지의 고기를 기다리느라 불판 주변에서 꼬리를 쌍방향으로 흔들며 혀를 날름거렸다. 인수(人獸)의 차이를 무의미하게 만든 신비의 맛이었다.

나와 식구들은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설교한다는 아버지가 실은 만날 옥상에서 고기 굽기 연습을 한 것 아닌가 하는 의혹의 시선을 갖게 됐다. 아버지의 실력 발휘에 우리 집의 추석 먹거리는 단출하지만 풍성했다.

이후 삼남매는 결혼으로 분가로 독립하고, 또 아버지와 어머니는 4년 전 퇴임 후 불판 펴기가 여의치 않은 아파트에 입주했다. 그 '신공'은 아쉽게도 추억의 한 페이지 저편에 머물고 있다.

이런 작은 섬김으로 표출된 아버지의 '소프트 파워', 즉 따뜻한 권위는 우리 가족 모두에게 지금껏 사랑으로 기억된다. 이 땅의 모든 아버지여, 연휴에 '밥 차려라', '전이나 송편 없느냐', '술상 내와라'는 식의 '하드 파워'를 탈피하고, 조용히 마당에 앉아 숯불을 피워보심이 어떨지. 아내, 여동생, 딸, 조카의 '귀요미 인증'은 이걸로 충분하다. 설혹 맛까지 담보된다면 '훈남 등극'도 가능하다. 아비로 사는 멋, 그거 생각 외로 거창하지 않다. 김용민 시사평론가

일만 힘든 것이 아니랍니다

'평등명절 만들기' 공감한다지만
여성은 여전히 밖에 세워져 있는,
외롭고 낯선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자리가 명절이다

한국여성민우회는 지난 10여년 동안 '명절·제사상의 성차별'을 없애기 위해 거리 캠페인에 나서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 덕일까? 요즘에는 중고령층 남성들조차 여성들의 고충에 공감하며 적극적으로 '평등명절 만들기' 서명에 동참하는 모습을 발견한다.

우리 집의 경우도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남편의 솔선수범으로 명절 설거지는 남자들의 몫이 되었다. 음식상 앞에 길게 앉아 밀린 수다판을 벌이는 것이 가능한 우리 집안 여자들의 여유는 내 남편의 솔선수범과 적극 동참해 준 시동생, 신나게 시시덕거리며 심부름을 하는 조카들 덕분이다. 시숙도 마지못한 듯 쓰레기봉투를 들고 집 밖으로 향하곤 한다.

어쩌다 촌사람과 결혼을 하고 보니, 명절이면 고난에 찬 귀성 행렬에 합류하게 되었다. 물론 주범은 교통정체다. 하지만 결국 시가로 향하는 발걸음을 무겁게 하는 것은 시댁 식구를 만나는 반가움으로도 넘어설 수 없는 명절노동에 대한 심리적 불편함이다. 이 불편함의 정체는 무엇일까?

지인의 어머님 얘기이다.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이제 이 집안에 제사는 없다. 제사 안 지내도 되는 교회에 다닐란다"라고 선언하셨단다. 그리고 명절이면 "여기 예약해라" "이번엔 저기 예약하자"며 가족 나들이를 기획하신단다. 듣는 것만으로도 통쾌한 반란이다. 이런 결정이 어찌 명절의 부엌일 때문만이었을까? 명절과 제사에서 끊임없이 확인되는 여성 역할, 남성을 가계의 중심에 두고 여성을 그의 씨받이로 고정시키고 있는 구도가 우리를 답답하게 옭매는 것이 아닌가.

최근에는 명절과 관련한 또 다른 이야기도 접하게 된다. 한 친구의 경우, 얼마 전 윗동서와 시숙이 부부갈등으로 결국 이혼을 선택하게 되었단다. 그 결과로 집안 명절 준비의 책임이 몽땅 둘째 며느리인 친구에게 돌아오게 됐다고 한다. 아내를 내치고 그 노동을 또 다른 여성에게 전가하고 있는 시숙에게 화가 치밀더란다. 이 친구가 시숙에게 할 수 있는 말은 무엇일 수 있을까? 재혼을 권해야 하는 것일까? 제사를 치워버리자 해야 하는 것일까? 시숙이 직접 해결하라 요구해야 하는 것일까? 가족의 이혼으로 인해 자기 손에 넘겨진 명절노동의 부당함에 대해 이젠 남(?)이 된 윗동서를 향해 비난의 화살을 돌리지 않은 친구가 고마울 뿐이다.

내겐 싱글들의 모임이 있다. 돌싱(돌아온 싱글, 이혼녀)과 모태싱글(비혼), 그리고 나 같은 영혼만 싱글인 친구들로 구성되어 있다. 돌싱이건, 모태싱글이건 모두 명절이면 나만큼이나 곤혹스런 시간들을 보내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이혼한 그녀는 몇년 동안은 아이를 남편에게 딸려 보내고 자기만의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아이가 크니 이마저도 가능치 않아 아이와 명절을 보내야 하는 처지가 되니 난감해졌다. 텔레비전과 라디오, 온갖 매체들이 즐거운 나의 집, 나의 고향을 외치니 그녀는 스스로 어디에도 갈 수 없는 외로운 존재임을 확인할 뿐이다.

모태싱글인 또 한 친구. "결혼해라, 아이는 언제 낳니?" 일가친척의 성화에 괴롭다. 이젠 남편도 자식도 없는 그녀의 노후 문제를 앞서 걱정하시는 부모님 뵙기가 고역이란다. 시집가 아이 낳고 잘사는 옆집 딸과 비교될라치면 명절이 더욱 곤혹스러워진다. 자식 뒷바라지하느라 자신의 노후를 준비하지 못한 부모님이 자신의 노후를 걱정한다니 되레 안타깝단다.

이렇게 저렇게 여성은 여전히 밖에 세워져 있는, 외롭고 낯선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자리가 바로 명절인 셈이다. 누구에게는 실패한 이혼녀라는 낙인을 확인하게 되는 자리, 그리고 누군가에겐 비혼이 사회낙오자가 되는 지름길이란 주장을 들어야 하는, 그야말로 가족주의, 혈연주의, 결혼중심주의, 성별분업 이데올로기가 집약적으로 작동되는 공간인 것이다. 이미 1인 가구, 한부모 가구가 급속히 늘고 있는 이 다양한 시대에 환경의 변화를 담을 수 있는 명절문화가 몹시 아쉬운 때이다. 우리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하는 새로운 고민을 하게 된다.

김인숙 한국여성민우회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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