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9-04

[한겨레 프리즘] 너무 많이 바라는 거 아냐? / 김진철

'베이글녀'가 뭐야? 한참 전 후배한테 물었다가 핀잔만 들어먹었다. esc팀장이 그런 것도 몰라요? '베이'비 얼굴에 '글'래머 몸매를 지닌 '여'성이란다. 포털 사이트에 바로 물어봤다. 3박4일을 봐도 다 못 볼 만큼 검색 결과가 셀 수 없다. 너도나도 베이글녀라고 자랑하고 누군 베이글녀다 아니다 갑론을박이 오간다. 민망한(!) 사진들도 빼곡히 뜬다. 연예인 신아무개가 베이글녀의 표본이고 아역배우 출신 노아무개는 베이글녀로 너무 잘 자라났단다. 장사치들도 따라붙기 마련. 베이글녀로 만들어드립니다! 탄력 동안을 만들어주는 화장품에 그것도 안 되면 양악수술로 해결 볼 수 있다고 한다. 가슴성형은 줄기세포 이용 수술이 최신 비법이란다. 그럼 그렇지, 돈만으론 안 되는 일일 테지. 뼈와 살을 깎고 피와 땀을 쏟는 아픔 없이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극소수일지언정 왜 타고난 베이글녀가 없겠는가. 그러나 베이글녀가 대세라는 건 뭔가 심상찮다. 아이와 어른이 한 몸에서 구현되길 바란다니, 그건 모순적 기호 아닌가. 정신분열적 시대의 방증은 아닐까.

베이글녀 따위 꿈꿀 짬도 없는 아줌마들도 비현실을 요구받는다. 육아의 짐을 지고 살림도 잘해내라는 사회적 명령. 음식도 맛있게 깔끔하게 준비해야 하고 빨래며 청소까지 떠맡아야 하는 현실. 전업주부 아니라면 멋진 커리어우먼이라는 가면극까지 완수해야 하니, 지칠 시간도 없을 것이다. 아이 잘 키우며 살림 잘하고 직장생활까지 멋지게 해낸다는 건 비현실적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닐까 하는. 고교 동창들과 오랜만에 함께한 자리에서였다. 이미 어엿한 기성세대로 자리잡은 아저씨들. 결혼 10년 안쪽에 아이 한둘씩을 키우는 대기업 과장, 대학교수, 의사 등등. 적당히 사회물 먹고 세상을 알 만큼은 안다고 생각하고들 있는. 불행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도 않는 30대 후반의 남자들.

ㄱ이 먼저 우스개 섞어 말했다. "뭐 이렇게 해야 할 게 많은 거냐. 새벽같이 출근하고 별 보며 퇴근하는데 집에서 해야 할 일도 적지 않고…." ㄴ이 말을 끊었다. "퇴근한다고? 그게 무슨 퇴근이냐. 집으로 출근하는 거지." 폭소가 터져나왔다. 열심히 일하는 직장인, 자상한 남편이자 아빠에서만 끝나는 게 아니란다. 외모도 적당히 가꿔야 한다고. 날로 줄어드는 머리숱 신경 써야지, 촌스러운 아저씨 소리 안 들으려면 패션 감각도 갖춰야 한다며 소주잔을 비웠다. 그것뿐인가. 과로사를 피하려면 적당히 운동에도 관심을 가져야 할 나이가 됐다. 일하고 자기관리하고 가정 잘 꾸리는 일들이, 과연 몸뚱이 하나로 할 수 있는 일이냐고 투덜대는 ㄷ이 소주잔을 채웠다. 소주잔을 부딪치며 ㄹ도 한마디 거들었다. "정신도 바로 박혀 있어야지. 근육질 몸 만들면 뭐하냐. 요즘 마초짓 하다간 한 방에 골로 갈 수도 있어. 정치적 균형감각을 바탕으로 순수한 마음과 실용적 마인드, 능력도 갖춰야 하는 거야." 이쯤 되면 농담이라 해도 웃음이 안 나온다.

최근 홍상수 영화는, 이런 아저씨들에게 판타지다. 지질하면 지질한 대로 치졸하면 치졸한 대로 내면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군상들이 아저씨들의 마음을 편하게 한다. 속내를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마음 한편이 불편해질 수 있지만 잠시뿐이다. 장면이 흘러가고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마음은 도리어 편해진다. 베이글녀라는, 혹은 돈 잘 벌고 자상하고 자기 관리도 완벽하게 하라는, 모순된 요구에서 자유로운 민낯을 만나면 급기야 그 안에서 진솔한 인생을 발견할 수도 있다. 홍상수의 12번째 장편 이 이번주 개봉한다. 꼭 보고 싶다. 과연 극장에서 내리기 전까지 시간이 날까? nowher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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