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서울 종로구 그의 사무실 책상 위에는 미 코넬대학교 경제학 교수인 로버트 H. 프랭크 교수가 쓴 'The Darwin Economy(다윈 경제학)'가 읽다만 채로 놓여 있었다. 적자생존의 정글 경쟁으로 치닫고 있는 세계 경제를 비판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는 내용이다. 한나라당 비대위원이 된 김종인 전 의원의 생각의 일단을 짐작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시장경제만으로는 안 된다"며 "한나라당이 이런 인식을 분명히 하는 데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당내 문제에 대해서는 한나라당의 "창조적 파괴"가 필요하다면서 "한나라당 깃발을 내려서 안 될 이유가 뭐냐"고 반문했다. 그는 특히 "(박근혜 비대위원장이)우리같은 사람을 불러들였으면 어떻게 해야겠다는 인식을 했다고 본다"며 한나라당의 근본적인 변화를 자신했다.
-비대위 참여를 놓고 고심이 많았을 것 같은데?
"박근혜 위원장과 최근에 만난 적은 없고 전화 통화만 몇 번 했다. 현 상황을 봤을 때 한국사회가 그동안 성과를 제대로 유지·발전시켜 조화롭고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려면 그래도 한나라당 자체가 변모를 해서 박 위원장이 다음 대선에서 승리하는 것이 나라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좋지 않겠나 하는 게 나의 생각이다.
특히 다음 5년은 동북아 정세변화와 세계 경제 변화에 중요한 시기다. 이때 나라가 안정적이고 조화를 갖추지 않으면 발전하기 힘들지 않겠나 생각한다. 내가 어느 정도 기여할지는 몰라도 한나라당의 근본적 변화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봤는데 (박 위원장이) 그걸 하겠다고 하니 조력할 생각이다."
-비대위원으로서 한나라당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나.
"한나라당은 지금 생존의 기로에서 있다. 지난해 6·2 지방선거와 올해 8·24 서울시 무상급식 주민투표,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이 국민으로부터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를 잘 보여줬다. 어느 측면에서는 늦은 감도 있지만, 이걸 뼈저리게 느끼면 지금부터 뭘 해야 할지에 대한 인식을 철저히 해야 한다. 창조적인 파괴를 해야 한다."
-근본적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뜻인데 그 내용은 뭔가?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존재가치를 상실했다. 이걸 체험하고도 아무런 반성 없이 가면 정당이 존립하기 어렵다. 어떻게 변화하느냐? 최근 통계자료를 보고 깜짝 놀랐다. '내가 하층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45%, '미래에 희망이 안 보인다'는 응답이 58%였다. 이것이 정부의 통계다. 이러한 국민 의식을 정치가 제대로 인식 못하면 나라가 정상적으로 갈 수 없다.
우리가 가진 체제가 자유주의 시장경제인데 시장경제로만은 해결 못 한다. 시장경제로 보완할 수 없는 영역은 정부차원에서 해결해줘야 하는데 한나라당은 그 인식이 결여돼 왔다. 그런 측면에서 변화하지 않으면 국민 신뢰를 얻을 수 없고, 국민이 따라오지 않는다."
-한나라당의 '창조적 파괴'라는 게 무슨 뜻인가. 인식의 변화 뿐 아니라 조직 변화도 있어야 한다는 의미인가?
"조직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유권자는 소비자다. 소비자가 한나라당이 내세우는 상품에 반응을 안 보이면 바꿀 수밖에 없는 거다. 기업이 창조적 파괴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변화하는 시장 상황에 맞게 변화해야 한다. 정당은 국민의 변화와 욕구에 따라가야 한다."
-당 인물 교체는 어떻게 보나?
"창조적 파괴는 기본적인 것을 다 바꿔야 한다는 거다. 상품을 바꾼다면 인물도 상품 속에 포함된다. 국민이 원하는 인물로 갈 수밖에 없는 거다."
-당내 쇄신파는 당명 개정 등 창당을 주장하는데.
"창조적 파괴와 그런 것이 괴리되지 않는다."
-박근혜 위원장은 재창당이나 당명 개명에 부정적이지 않나?
"재창당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얘기를 했으니 박 위원장도 국민이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인식이 돼 있다고 본다. 한나라당은 정상적인 정당이 어떻게 비대위까지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 왔는지에 대해 철저히 반성부터 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쿵저러쿵하면 희망이 없다."
-박 위원장이 복지 등을 많이 강조하고 있는데 방향이 맞나?
"박 위원장은 지금까지 개념적 복지만 강조했다. 실제로 나온 것은 없다. 아직은 박 위원장이 맘대로 하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민에게 자신이 어디로 갈지를 정확하게 얘기해 줘야 한다. 지난 4년간 정부가 국민과는 괴리된 정책을 내놔서 지금의 상황이 초래됐다. 그걸 뼈저리게 반성하면 답이 나온다."
-현 정부와 차별화해야 한다는 얘기인가.
"당연한 얘기다. 지금은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는 거다. 야당도 새롭게, 한나라당도 새롭게 시작하는 순간에 있다. 갈등구조의 사회를 제대로 수습해서 조화를 이루면서 민주주의를 심화시키고 경제를 안정시키는 희망을 국민에게 투영시킬 때 정당으로서 존립이 가능하다고 본다."
-한나라당내에는 당의 변화에 대해 '당을 흔든다, 깃발 내리는 것은 안 된다'는 의견도 있는데?
"신한국당에서 한나라당으로 깃발을 내렸는데 (또 내려서)안 될 이유가 뭐냐. 우리나라 정당 역사를 보면 당명을 얼마나 바꿨나. 그것(반대 의견)은 그들이 기득권을 가지고 생존하려는 생각 때문이다. 지금 기득권을 버릴 생각이 없으면 비상대책위를 할 필요도 없다."
-박근혜 위원장에게 그런 생각을 확인했나?
"박 위원장도 지난번 서울시장 선거 후 초기에는 안이한 생각을 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현실이 용납하지 않기에 자신이 전면에 서고, 비대위를 꾸려 외부인사까지 끌어들인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분명한 사람이다. 나는 한국사회 흐름을 50년 가까이 관찰해온 사람이다. 예측하면 그렇게 꼭 갔다. 그러니 우리같은 사람을 불러들였으면 어떻게 해야겠다는 인식을 했다고 본다. 그러지 않으면 내가 뭐하러 참여 하겠나. 나는 이 나이에 자리를 탐하는 사람이 아니다."
-내년 대선에서 박근혜 위원장이 당선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나?
"박 위원장도 여기에 모든 것을 걸 수밖에 없다. 현재 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하면 국가 통치능력이 확인된다. 따라서 지금이 시험대다. 박 위원장도 안이하게 하면 안 된다. 긴장 속에서 조화롭게 끌고나갈 수 있다고 봤기에 나도 (비대위원을) 승낙한 것이다."
-여러 대선주자들 가운데 하필 박근혜 위원장을 돕기로 한 이유는 뭔가?
"박 위원장의 기본적 장점은 일관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는 지난번 (2007년 대선 후보) 경선 때의 태도와는 지금 많이 달라졌다. 전에는 전세계가 다 신자유주의에 매몰됐지만 2008년 금융위기로 신자유주의가 통용 안 되는 시기가 됐다. 거기에 박 위원장 본인이 적응하려고 노력하고 적응해 나가고 있다.
또, 박 위원장은 어느 기득권 세력과 연결돼 있지 않고 자유스럽다. 상황 인식만 정확히 해서 그 방향으로 가면 한국사회를 조화롭고 안정적인 사회로 갈 수 있다고 본다."
-그동안 야권에도 몸담은 적이 있고, 지금도 여야 모두의 영입 대상인데 왜 한나라당을 택했나?
"나는 나라를 끌고 갈 수 있는 사람들이 과연 어떠한 자세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본다. 나라를 잘 끌고 갈 수 있는 판단이 있는 사람을 미력하나마 돕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런 점에서는 이것저것 구애 받지 않는다."
-재벌들이 '김종인 비대위원'에 긴장한다는 얘기도 있다.
"긴장할 필요 없다. 내가 힘이 있는 것도 아닌데. 우리나라 현실로 보면 재벌도 하나의 현실로 돼 있다. 그들 영향력이 큰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도 바꿔야 할 것이, 무한한 탐욕만 부려서 안 된다. 그랬다가는 그 사람들 존재 자체도 언젠가는 위협받을 수 있다는 것을 느껴야 한다. 정책 조율에서 자기들 입장만 내세우지 말고 협조적 자세를 보이는 게 본인들이나 나라를 위해서 바람직하다."
-양극화 해소 방안으로 증세 필요성이 거론되고 있지만, 박근혜 위원장은 증세에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는데.
"박 위원장이 세제에 확고한 인식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양극화 문제에 세제가 일부 효과를 가져올 수 있으나, 기본적으로 양극화 해소를 위해서는 경제 정책이 잘 돼야 한다. 정부가 하는 것이다. 정부는 클 필요는 없지만 나름대로 작지만 강해야 한다. 모든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우위에 있어야 한다. 경제권력이나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우위에 서야 한다. 세제 문제는 전반적으로 논의하면 박 위원장과 다 해결할 수 있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에 대해서는?
"정치인으로 안 나왔으니 그에 대해 언급하거나 평가할 게 없다. 다만 안철수 현상은 개인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제도권 정당이 국민이 느끼는 상황을 외면하고 자기들의 기득권을 옹호하니까 나온 것이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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