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2-25

달동네 깜짝방문한 ‘박원순 산타’

"오늘 우리 집에 경사났네"

"진짜 경사가 나게 해야 하는데, 그냥 왔다가는 게 무슨 경삽니까"

지난 23일 늦은 오후 박원순 서울시장이 찾아 오자 지생금 할머니(80)는 대화 중 잠시 주변을 돌아보며 머쓱해했다. 박 시장과 유덕열 동대문구 구청장, 수행원들, 취재진으로 가득한 자신의 방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할머니는 조건부 수급자다.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에서 지능이 낮고 장애가 있는 손자와 함께 살고 있다. 50대인 아들이 둘이나 있어 온전한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경제력이 있다고 '판정된' 둘째 아들은 폐지 수집을 위해 아예 인근 건물의 주차장에서 생활하고 있다.

뇌졸중과 자궁적출 수술로 최근 건강이 악화된 할머니는 거동마저 힘들다. 살고 있는 집이 하필 국유지여서 떠안게 된 토지변상금에 각종 공과금까지 수백만원이 밀려 있다. 난방을 할 기름이 없어 요즘 같은 한 겨울에도 보일러를 거의 틀지 않는다. 이날 박 시장이 무박2일 일정의 '희망온돌 프로젝트' 점검을 위해 할머니 집을 찾았을 때도 방바닥은 차갑기만 했다.

지 할머니는 동대문 지역 시민단체 '푸른시민연대'가 찾아낸 긴급구호 대상이다. 공공복지의 사각지대에 내몰린 지 할머니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사람은 구청 복지과 직원이 아닌 인근 부동산 중개업자 이정주씨였다. 그 자신이 한부모가족수급권자이기도 한 이씨는 푸른시민연대가 임명한 1호 '나눔반장'. 어느 날 한 이주여성의 집을 구해주다 푸른시민연대와 인연을 맺었다. 직업 덕에 지역의 마당발이 된 이씨는 지 할머니 같은 소외된 이웃을 찾아 푸른시민연대에 소개하는 일을 자청했다. 푸른시민연대는 케이블티비 연결원, 가스 검침원 등 이씨처럼 '합법적으로' 남의 집을 드나드는 이들을 중심으로 지역의 나눔반장을 폭넓게 양성, '이웃이 이웃을 돌보는' 민간 차원의 복지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다.

지 할머니 집 방문에 앞서 푸른시민연대 사무실을 찾은 박 시장은 현황을 보고받고 "나눔반장을 본 것 하나만으로도 오늘 큰 수확을 했다"면서 "행정이 할 일은 이런 분들에게 '귄위'를 드리고 홍보와 네트워킹을 돕는 것이다. 나눔반장을 서울시 전역으로 확대하는 프로그램을 해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 시장이 지난 23일부터 성탄 전날인 24일까지 무박2일 일정으로 총 32시간 동안 서울의 대표적 달동네인 노원구의 백사(104)마을을 비롯해 성북구의 다솔 지역아동센터, 영등포 고시원, 서울역 노숙인지원센터, 신림종합사회복지관, 동대문구의 다일공동체, 서대문구 한부모복지시설 등을 찾는다. 모두 서울의 소외계층들과 관련된 곳이다. 주변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웃을 찾아내 희망을 나누자는 서울시의 '희망온돌 프로젝트'의 현장이기도 하다. 박 시장은 이런 현장을 돌며 시설 관계자들의 의견을 듣고 여러 새로운 제안을 내놨다.

지난 23일 다솔 지역아동센터를 찾은 박 시장은 "아이들에게 밥을 주는 것뿐만 아니라 영혼의 양식을 주는 것도 중요하다"면서 "청소년 캠프처럼 각종 강의를 들을 수 있는 바우처 제도를 활용하거나 국악 등 지역에 있는 각종 문화단체를 통해 아이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서울시가 등록금 대출 이자를 지원해주는 서울시립대 학생들에게 "학습이 뒤처진 지역아동센터 아이들을 위한 대학생 멘토로서 자원봉사를 요구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아이디어를 내놓기도 했다.

박 시장은 이날 각종 시설 말고도 서울종합방재센터, 119 안전센터 등을 찾아 심야 방재현황을 점검하는가 하면, 형편이 어려운 어린이(10)의 집을 방문해 '몰래산타'가 되는 깜짝 이벤트를 벌이기도 했다. 산타 복장을 갈아입고 총총 바쁜 걸음을 재촉하는 박 시장과 수행원들의 머리 위로 오랜만에 선물 같은 눈발이 흩날렸다.

박기용 기자 xe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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