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평화 기회는 1990년대 이후 20년 동안 쳇바퀴를 돌고 있다. 한 번의 장례식과 세 번의 레임덕을 거치며 목전의 해피엔딩을 번번이 날려버렸다.
남북한이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채택하고 얼마 되지 않은 1992년 1월22일 뉴욕에서 김용순 북한 노동당 대외담당 비서와 아널드 캔터 미국 국무차관 사이에 사상 첫 북-미 고위회담이 열렸다. 한국의 중국 및 소련과의 수교에 발맞춰, 북한도 미국과 수교하는 4대국의 남북한 교차승인이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북한은 오히려 미국으로부터 핵시설 특별사찰만 압박받는 등 싸늘한 푸대접을 받았다.
한반도 배치 전술핵무기 철수를 발표하면서 한반도 비핵화 선언의 자락을 깔았던 당시 아버지 조지 부시 미 행정부는 북-미 수교까지 염두에 뒀으나, 보수파로부터 '속도위반'이라는 반대에 부딪혔다. 한·미 양국 내에서도 대북화해의 동력은 떨어졌다. 북방정책을 추진하던 노태우 정부와 아버지 부시 행정부가 임기 말년의 레임덕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첫번째 레임덕이다.
북한은 한·미 양국에서 김영삼 정부와 빌 클린턴 정부가 들어선 직후인 93년 3월 준전시상태를 선포하며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라는 강수를 던졌다. 94년 6월 한반도는 미국의 영변 핵시설 폭격 불사 등 전쟁 위기까지 돌입했다가,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으로 남북정상회담과 제네바협상 추진 합의로 극적인 전환을 한다. 그러자 곧 김일성 당시 북한 주석이 죽었다. 남북정상회담은 고사하고 한국 내의 조문파동 등으로 남북관계는 최악으로 반전했다. 석달 뒤 타결된 제네바 북-미 기본합의마저 3주 뒤인 11월 초 미국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40년 만에 다수당으로 등극하면서 사실상 사문화됐다. 첫번째 장례식이다.
2000년 6월15일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됐다. 두 차례 임기 내내 대북문제에서 허송세월하던 클린턴 행정부도 조명록 북한인민군 차수의 방미를 받아들이고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방북을 결행했다.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을 통한 북-미 수교 합의라는 거대 이벤트를 예약했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늦었다. 11월 대통령에 당선된 조지 부시는 차기 행정부의 발목을 잡지 말라며 클린턴의 방북 계획을 없던 일로 했다. 두번째 레임덕이다.
북한을 '악의 축'이라며 임기 내내 몰아붙이던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전 실패 등으로 만신창이가 되자 막판에 외교적 성과를 위해 대북 유화 자세로 전환했다. 2007년 10월4일 남북정상회담 뒤 부시는 한반도 종전선언을 통한 한반도 평화체제 정착까지 밝혔다. 이때도 시간이 모자랐다. 종전선언을 추진하려는 노무현에 대해 이명박은 자리를 비키라고 재촉했다. 부시의 공화당 정부는 이미 힘이 빠진 상태였다. 세번째 레임덕이다.
북한에 대해 전략적 무시로 일관하던 이명박 정부와 오바마 정부도 임기 말년인 지난 7월부터 대북 접촉을 재개했다. 북-미가 식량지원 재개와 우라늄 농축 중단에 합의했다는 보도까지 나올 정도로 북-미 접촉이 무르익은 순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사망이 발표됐다. 이제 두번째 장례식과 네번째 레임덕이 겹쳤다.
영화 에서 남녀 주인공은 결혼식과 장례식에서 번번이 조우하지만 서로의 관심과 사랑을 열매 맺지 못한다. 그들에게 결혼식과 장례식은 기회이자 위기였고, 결국 열매를 맺는다. 남북한과 미국도 이제 '두 번의 장례식과 네 번의 레임덕'을 거치며 해피엔딩으로 나아가야 한다. 무엇보다 이명박 정부의 기회이며, 대승적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다.
정의길 국제부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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