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2-26

북한식 ‘정치공학’의 힘은 어디서 나올까?


B.R. 마이어스 지음고명희, 권오열 옮김, 시그마북스

일본은 영악했다. 그들은 되레 조선의 민족감정을 부추겼다. 역사를 들춰대며 '옛 영토'인 만주 땅을 다시 찾으라고 바람 넣는 식이다. 왜 그랬을까? 만주를 관리하기 위해서는 '일본제국의 이등국민'이던 조선인들을 만주에 많이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이뿐 아니다. 그들은 일본과 조선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민족'이라고 외쳐댔다. 일본 쪽 주장에 따르면, 조선과 일본의 조상은 하나다. 조선은 일본 대제국의 일부가 되었다는 점을 감사해야 한다. 조선은 오랫동안 중국의 지배 아래 비실대지 않았던가. 일본은 조선을 중국으로부터 해방시켰다. 게다가 일본과 하나가 되어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는 영광을 누리게 하였다.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 이데올로기'다.

물론, 우리 지식인들은 일본 쪽 억지에 맞섰다. 하지만 이들이 내세운 주장은 묘하게 일본과 닮은꼴이었다. 예를 들어보자. 백두산은 언제부터 '민족의 영산(靈山)'이었을까? 백두산은 그냥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일 뿐이었다. 일본은 후지 산을 자신들의 상징으로 여겼다. 이에 맞서 육당 최남선은 백두산을 내세웠다.

단군은 또 어떤가? 단군은 우리 역사에서도 무게 있게 다루어지지 않았나 보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단군은 '민족의 조상'으로 우러름 받는다. 이는 일본의 국조(國祖)인 진무(神武)천황에 맞서기 위해서였단다. 이상은 북한 전문가인 B. R. 마이어스의 설명이다.

마이어스에 따르면, 북한은 일본이 만든 '친일 민족주의(?)'를 아직도 따르고 있다. 앞서의 설명에서 '일본'만 모두 빼보자. 그러면 북한 쪽 주장이 고스란히 드러날 테다. 조선은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깨끗한 민족이다. 우리 민족은 어린아이같이 착하고 순진한 성품을 갖고 있다. 이런 착한 민족을 주변 나라들은 끊임없이 괴롭혀 댔다. 우리의 역사는 침략과 아픔으로 가득하다.

어떻게 해야 우리 민족이 고통에서 벗어날까? 우리에게는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 이 지도자는 단군의 후예다. 단군처럼 백두산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분이다.(사실, 단군이 백두산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의 사명은 민족의 자존심과 순수함을 지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조선 민족은 위대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야 한다!

마이어스는 지금의 북한에서 옛 일본제국의 모습을 고스란히 찾아낸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로히토 천황은 자애롭고 따뜻한 어머니처럼 그려졌다. 김일성도 다르지 않다. 김일성은 '아바이(아버지) 수령'이 아니라 '어버이 수령'이다.

김일성을 다룬 그림이나 사진을 주의 깊게 살펴보라. 수령은 대개 따뜻하게 웃고 있다. 자기주장을 힘차게 내세우기보다, 병사나 주민들을 감싸고 보듬고 있는 모양새가 많다. 김정일의 이미지도 다르지 않다. 히틀러나 무솔리니는 지도자의 강철 같은 의지를 앞세웠다. 반면, 김일성과 김정일은 자애롭고 따뜻한 어머니의 느낌을 더 강조한다. 마이어스는 그 까닭을 '유아증'(infantilism)에서 찾는다. 세상 살기가 신산스러울 때 인간은 푸근하게 자신을 감싸주는 어머니 같은 존재를 찾기 마련이다.

김일성, 김정일의 모습은 하나같이 뚱뚱하다. 우리 눈에 이들의 육덕진 몸매는 혐오스럽다. 하지만 북한식 논리로 보면 의미가 달라진다. 삐쩍 마른 어머니와 살집 있고 기골 잡힌 어머니, 둘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정감 있게 다가오는가? 그들의 뚱뚱함은 조선적인 순수함과 푸근함을 나타낸다.

북한은 자신들을 '어린이같이 순수하고 깨끗한 민족'으로 내세운다. 이 민족을 지켜줄 사람은 누구인가? 북한의 논리는 '대일본제국'의 주장과 똑같다. 보호자가 일본제국에서 '위대한 지도자 동지'로 바뀌었을 뿐이다.

'국방위원장'이라는 김정일의 호칭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2009년 4월 북한은 헌법도 바꾸었다. 북한의 헌법에는 더 이상 공산주의라는 낱말이 나오지 않는다. '선군(先軍) 사회주의'를 앞세울 뿐이다. 군대를 그 무엇보다 앞세운다는 의미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세습왕조'가 필요한 이유는 이로써 분명해졌다. 북쪽 논리대로라면 '경제 살리기'는 큰 문제가 아니다. 정말 중요한 문제는 승냥이 같은 외세(外勢)에 맞서 민족을 지켜내는 일이다.

때문에 북한으로서는 미국과 남한은 더없이 소중한 존재다. 그들은 끊임없이 미국과 남쪽을 침략자로 몰아세운다. 미국과 남쪽이 진심으로 화해와 평화를 바라면 어떨까? 이는 북한 권력자들에게 가장 두려운 일이다. '김씨 왕조'는 무엇 때문에 있어야 하는가? 남쪽의 지도자들은 '경제 살리기'에 목을 맨다. 반면, 그들의 지도자들은 '민족을 수호할 수 있어야' 체면이 산다. 만약 북쪽을 위협하는 적이 없다면 어떨까? 그런데도 '백두산 혈통'을 이어받은 김씨 왕조가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할 까닭이 있을까?

지난 1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했다. 김정은은 장의(葬儀)위원회에 1번으로 이름을 올렸다. 김정은이 김씨 왕조의 후계자임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김정은의 북한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김일성이나 김정일 같은 '어버이'의 이미지가 없다. 그의 굳은 표정에는, 권위를 찾고 싶어 하는 20대 젊은이 특유의 치기(稚氣)마저 엿보인다.

북한은 '정치공학' 면에서 매우 뛰어난 나라다. 지도자의 권위를 키우고 권력을 지키는 기술에서만큼은 세계 1위인 듯싶다. 조국을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게 만들고, 인권을 심하게 짓밟으면서도 3대 세습을 이뤄낸 그들의 '기술력'이 놀랍다. 문제는 이런 모습이 전혀 정의롭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점이다. '수령복', '장군복'에 이어 '대장복'을 누리게 된 북한의 현실이 서글프고 창피하다.

>>시사브리핑: 미국, 김정은 체제 인정미국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사망 발표 나흘 만에 '김정은 후계 구도'를 인정했다. 미국 백악관 제이 카니 대변인은 지난 21일(현지시간), 정례 브리핑에서 "김정일은 김정은을 공식 후계자로 지명했고, 현시점에서 변화가 있다는 어떤 증거도 없다"고 말했다. 백악관이 김정은을 직접 거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카니 대변인은 "북한의 새 리더십이 평화와 번영, 북한 주민들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필요한 조치와 비핵화 약속 이행에 나설 것을 희망한다"고 말함으로써 김정은 체제를 인정함을 내비쳤다.

안광복 철학박사, 중동고 철학교사 timas@joongdong.org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