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전문가나 학자, 위정자, 정치단체들은 요즘 입만 열었다 하면 북한 김정은 체제의 조기(早期)안정을 거론한다. 안정이 깨질까 봐 안달이 난 모양새다. 여·야 정치인은 말할 것 없고, 심지어 대통령까지 신년사에서 김정일 사후(死後)의 북한체제 안정을 바라는 언급을 할 것으로 보도됐다. 마치 김정은 체제의 안정이 우리의 중대 관심사라도 된 듯하다.
미국과 중국도 연일 한반도의 안정을 내세우고 있다. 특히 중국은 김정일 후계 체제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 공산당 정치국원 전원이 베이징의 김정일 빈소를 찾는 등 큰 제스처를 쓰고 있다. 중국이 그러는 것은 동맹국이니 그렇다 치고 미국마저 김정일 사후 사태와 관련, 한반도의 안정을 최우선시하는 발언을 했다. 적어도 이 점에서는 미국과 중국이 죽이 맞는 것 같다.
이들이 김정은 체제 안정을 내세우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언필칭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평화기조 유지를 위해서란다. 북한의 후계체제에 혼선이 생기거나 권력투쟁 또는 정치불안이 상당기간 계속되는 경우, 그것이 북한 내의 강경파를 자극해 남쪽을 향해 무력행사를 야기할 수도 있다는 일종의 근거 없는 시나리오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 북한의 정치불안이 한국의 대북 강경파에게 어떤 '호기(好機)'로 작용할 경우도 그들 안정 희구 세력이나 안정론자들에게 구실을 제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 밖의 사람들이 한결같이 '안정'을 내세우는 것이 정작 북한 안(內)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비치고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김정일의 퇴장이 북한 체제에 변화를 가져와 김씨(金氏) 세습과 장기독재에 종지부를 찍어주기를 기대하는 대다수 인민들에게 '김정은 체제 안정론'은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일 것이다. 김정은의 세습을 확고히 뒷받침해주고 북한 유일지배체제의 안정을 도모해주려는 한국과 주변국의 발 빠른 움직임은 그들에게 모처럼 찾아온 '가능성'을 앗아가는 처사다.
특히 북한 당국의 엄중한 감시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북한 내에 은밀히 생성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이른바 북한판 민주화세력, 즉 지식인·학생·시장(市場)세력에게 주변국의 '김정은 지지'는 북한 당국의 탄압 못지않은 '배신'일 것이다. 한국 내의 친북·종북 세력이 김씨왕조의 세습과 29살짜리 '대장'의 독재를 지지하는 것은 그렇다 쳐도 민주화세력, 정부당국자, 일부 시민단체들까지 덩달아 김정은 체제의 안정을 떠들어대는 것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의 전통(?) 있는 민주화세력이 북한의 세습독재와 반민주를 옹호하는 이 아이러니는 누구도 설명할 수 없는 한국적 퍼즐이다.
안정론의 배후에 김정일 사후체제에 우리가 우호적 입장을 가지고 있고 그 어떤 기회주의적 접근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표시함으로써 '김정은 체제'가 앞으로 대남관계에서 유화적으로 나오도록 유도하려는 측면이 있다고 치자. 저들은 이미 남쪽의 조문 태도를 봐서 대남관계를 조절하겠다는 협박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의 '선의(善意)'는 먹히지 않는 것 같다. 게다가 김정은이 전략적이고 전향적인 사고력을 가졌다는 징후는 어디에도 없다. 일부 학자들은 정부가 조문 문제에 융통성을 보여 대북관계를 우호적으로 끌고 가는 것이 국가이성(理性)에 부합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대한민국의 전략적 사고와 국가이성의 대상은 일차적으로 5000만 우리 국민의 안전보장이고 그 다음이 2500만 북한동포며 인권, 자유, 인간다운 삶에 있다.
지금 우리에게 적절한 것은 관망하는 자세다. 섣불리 무엇을 예단하거나 어떤 것을 주문할 필요가 없다. 아첨은 더더욱 역겹다. 북한 권력체제가 어느 쪽으로 귀결될지 지켜보면서 우리의 대응 시나리오를 차근차근 준비하면 된다. 김정은 체제의 대남정책, 경제기조, 대외정책 등이 어느 방향으로 가는가를 보고 그 타당성을 검증한 연후에 무슨 주장을 해도 늦지 않다. 북한에 변화가 오더라도 우리가 지레 패배주의로 갈 필요는 없다. 결정적 시기에 남북관계에 돌파구가 생기려면 우리로서도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어느 정도의 '투자'와 '희생'을 감내하는 각오와 용기 없이는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다. 북한의 체제에 변화가 오는 것이 장기적으로 볼 때 한반도의 안정과 안전으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는 안목과 인내가 절실한 때다.
우리가 북(北)의 변화에 의도적으로 개입하지는 못할망정 '안정' 운운하면서 북한 내의 자생적 변화의 움직임과 자유를 향한 인민의 몸부림을 무력화시키는 일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제발 '안정론'이 평화론인 양 위장하지 말 것이며 우리 국민도 그것에 덩달아 춤추지 말았으면 한다.
/김대중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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