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도쿄의 반원전 할아버지들
후쿠시마 재앙에 "원전을 멈춰라"
일 경제산업성 옆 대형텐트
107일째 '반원전' 점령시위
2011년 전세계는 전대미문의 상황을 동시에 맞았다. 원전신화의 허구성을 깬 후쿠시마 원전 사고, 침묵하는 다수를 깨운 월가점령 시위와 아랍의 봄 등 올 한해 벌어진 사건을 관통하는 열쇳말은 '각성'(Awakening)이라 할 것이다. 깨어난 사람들부터 불편한 진실을 일깨운 사람들까지, 지구촌에 각성의 계기를 던진 10대 사건 속 사람들 이야기로 올해를 되돌아본다.
3·11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사고가 일어난 지 6개월을 맞은 지난 9월11일, 한 무리의 노인들이 일본 관청가인 도쿄 가스미가세키 경제산업성 청사 옆 길가 빈터에 대형 텐트를 치기 시작했다.
"원자력발전 추진 정책을 이끌어온 경제산업성을 점령해, 반원전의 의지를 보여주자는 뜻이었죠."
이날 회원들과 함께 '경산성 점령'을 주도한 에다 다다오(73) '9조 개헌 저지회' 공동대표는 이른바 '안보투쟁'(1960년과 1970년 미-일 안보조약 개정을 계기로 일어난 전후 최대 규모의 반정부·반미운동) 1세대다. 그는 "핵무기와 원전은 사실상 하나"라는 말로, 자신들이 나선 이유를 설명했다. 그들은 '원전을 멈춰세우라'고, '다시는 방사능 오염을 되풀이하지 말라'고 쓴 깃발을 내걸었다.
그렇게 시작한 점령시위가 26일로 107일째를 맞았다. 텐트촌은 이제 일본 반원전 운동의 상징적인 장소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지난 10월 후쿠시마의 여성 100여명이 이곳에 와서 사흘간 농성을 하자, 700여명이 응원 농성에 참가했다. 이후 이곳을 찾는 여성들을 위해 옆에 텐트 하나가 더 세워졌다.
방문객을 안내하는 다니 소노코(61)는 "전국 각지에서 하루 100명 안팎이 찾아온다"며 "외국인들도 응원차 많이 방문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바현 이치카와시에서 찾아왔다는 우네오 미치코는 "응원하려고 먹을 것을 싸가지고 두번째 왔다"고 말했다. 텐트촌 앞에서는 얼마 전 가수 박오(재일동포)와 야마모토 다로가 찾아와 공연을 하는 등 반원전 문화행사도 자주 벌어진다. 1월4일에는 떡만들기 행사도 할 예정이다.
점령시위가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일본 정부는 철거를 계속 요구했다. 우익단체들이 선전차를 몰고와 소란을 피우기도 했다. 지난 14일 '서울 일본대사관 앞 1000번째 수요시위'를 맞아 일본 시민단체들이 벌인 외무성 포위 시위 때도 우익단체 회원 몇명이 찾아와 철거를 요구하다 경찰의 제지를 받고 1시간 반 만에 물러갔다. 안보투쟁 2세대라는 요시다 시로(63)는 "갑작스런 철거 시도에 대비해 밤에도 교대로 당번을 정해 7~8명이 텐트를 지키고 있다"고 설명했다.
에다 공동대표는 "원전의 재가동을 막아 모든 원전을 세우는 게 일차적인 목표"라고 말했다. 여론의 강한 반대로 점검을 끝낸 원전의 재가동이 이뤄지지 않고 가동중이던 원전들은 속속 점검에 들어가면서, 26일 현재 53기의 일본 원전 가운데 가동중인 것은 6기로 줄어 있다. 이대로 가면 4월이면 모든 원전이 멈춰선다.
도쿄/글·사진 정남구 특파원 jeje@hani.co.kr
② 뉴욕 월가 등 전세계 시위대
1% 탐욕에 맞서 깨어난 99% "새해에도 점령하라"
지난 9월17일 미국 뉴욕 주코티 공원에 30여명의 젊은 시위대가 모여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천문학적인 공적자금을 수혈받아 회생한 금융기관 직원들이 해마다 비상식적으로 높은 연봉과 보너스 잔치를 벌이는 것에 대한 분노가 발단이었다. 또 반소비지상주의 잡지인 는 이에 대한 항의로 월가 점령 시위를 호소했고, 이는 트위터 등을 통해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앞서 스페인 마드리드 광장에서 청년들이 벌인 '텐트촌 시위'는 이들의 전범이 됐다.
'1%의 탐욕'에 대한 '99%의 분노'로 표현된 월가 시위는 실업과 경기침체로 고통받는 평범한 미국인들을 일깨워 주코티 공원에는 수천명의 시민들이 몰렸고, 주말마다 수만명이 행진을 벌였다. 뉴욕뿐 아니라, 미국 100여개 도시로 확산됐고, 전세계 80여개국 1500여개 도시에서 일제히 점령 시위가 열릴 정도로 전세계적 흐름이 되었다.
주코티 공원은 해방구가 되어 날마다 자유토론과 문화축제가 열렸다. 리더가 없는 독특한 시스템으로 운영된 시위대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지지자들을 끊임없이 끌어들였다.
그러나 '오큐파이 시위'는 장기화로 인해 동력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경찰의 강제진압과 추위가 닥치면서 수면 아래로 내려갔다. 뉴욕 시위대는 주코티 공원 인근에 사무실을 얻어 온라인 활동을 벌이는 등 일종의 '동면'에 들어갔다.
그러나 1%의 탐욕이 사라지지 않는 한, 99%의 분노가 꺼지지 않을 것이고 '오큐파이 시위'는 언제 어떤 형태로든 다시 일어날 것으로 보인다. 시위대들은 내년 봄 주코티 공원에 또다시 모일 것을 약속하고 있다. 뉴욕/권태호 특파원 ho@hani.co.kr
③ 아랍의 봄
수십년 독재의 침묵을 깨다
꼭 1년 전인 지난해 12월, 독재정권의 횡포에 항거해 제 몸을 불사른 튀니지 청년 모하메드 부아지지의 죽음은 올 초부터 아랍 전역의 민중 봉기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중동을 둘러싼 국제정치 지형까지 바꾼 지각변동이었다. 수십년간 독재의 '대상'이기만 하던 이들이 '주체'로 나서는 순간이었다.
튀니지발 불길은 모로코·알제리·리비아 등 북아프리카에서 단숨에 시나이 반도와 홍해를 건너 요르단·시리아·예멘·바레인 등 중동 전역으로 확산됐다. 세계는 이 사건에 '아랍의 봄'이란 칭호를 붙였지만, 아랍민중은 '혁명'이라 불렀다. 지난 1월 튀니지에 이어 2월엔 이집트에서 독재정권이 종말을 맞았다. 리비아에선 지난 10월 서방의 무력 개입과 내전 끝에 무아마르 카다피가 처참한 죽음을 맞았다. 11월엔 예멘의 알리 압둘라 살레 정권이 권력이양 중재안에 서명했다. 아랍 민중의 열망은 사회·경제 전반의 민주화와 인권 향상으로 확대되는 추세다. 그러나 대다수 아랍국가에서 권위주의 체제와 정파·종파·부족 갈등이 깊어, 아랍 민중혁명은 해를 넘길 전망이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④ 빈라덴 피살
10년 테러와 반테러의 종말
21세기 지구촌의 첫 10년은 오사마 빈라덴(1957~2011·사진)으로 시작하고 저물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알카에다의 창시자인 그가 기획한 2001년 9·11 동시테러는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를 '테러와의 전쟁'으로 몰아넣었다.
빈라덴의 와하비즘(이슬람 원리주의)은 '참된 이슬람 세계의 구현'을 위해선 폭력투쟁과 살인도 정당하다는 믿음으로 비뚤어졌고, 이는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기독교 보수주의와 네오콘의 대외전략과 정면충돌했다. 세계 곳곳에서 테러와 보복의 악순환이 계속됐다.
빈라덴은 9·11테러 이후 10년이나 건재를 과시하며 '지하드'(이슬람 성전)를 지휘했지만 미국의 끈질긴 추적을 피하진 못했다. 지난 5월2일 새벽 미군 특수부대가 파키스탄의 은신처를 급습해 빈라덴을 사살하면서 기나긴 '테러와의 전쟁'도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동시에 그의 사살을 둘러싼 논란은 10년 테러와의 전쟁의 추악한 면을 드러내는 계기가 됐다. 조일준 기자
⑤ 브레이비크 테러
유럽극우 '불편한 진실' 들춰
노르웨이 오슬로는 오래도록 '노벨평화상'의 도시였다. 지난 10일에도 평화·양성평등을 지킨 여성 세 명이 오슬로에서 노벨상 메달을 목에 걸었다.
하지만 평화의 도시 오슬로에도 부지불식간에 '증오의 싹'은 자랐다. 지금으로부터 다섯달 남짓 전인 7월22일 극우 민족주의에 빠진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32·사진 왼쪽)의 폭탄테러와 무차별 총기난사는 유럽 극우의 불편한 진실을 일깨웠다. 브레이비크는 무슬림 이민자들을 혐오했으며, 다문화주의에 반대했다. 결국 이런 정치적 신념을 알리려고 10대 청소년 등 76명을 살해했다. 그는 자신의 범행에 대해 "잔혹했지만 필요했던 것"이라고 논평했다. 이민자에 대한 뒤틀린 증오가 괴물을 만들어냈던 셈이다.
노르웨이 사회는 이런 증오에 맞서 장미꽃을 들었다. 시민 15만명은 장미를 들고 평화와 관용,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행진을 벌였다. 장미꽃이 증오를 누를 수 있을지는 노르웨이뿐 아니라 유럽 전체의 숙제로 남아 있다. 정세라 기자 seraj@hani.co.kr
⑥워런 버핏의 호소
부자들 '부자 증세' 외치다
많은 이들이 불황과 불평등 심화, 실업난 가중으로 고통받은 올해 '부자 증세'라는 말이 유행했다. 맨 앞에서 깃발을 들고 나선 사람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억만장자라는 사실은 이 운동의 흥행에 아주 효과적이었다. 바로 워런 버핏(81·사진 가운데) 미국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이다. 이미 통 큰 기부로 이름을 날린 버핏은 지난 8월 기고에서 "나는 지난해 소득의 17.4%를 연방 세금으로 냈는데, 내 사무실 직원 20명의 세율은 33~41%였다"며 왜 부자들의 세율이 더 낮냐고 따졌다. 마침 극소수 부자들이 경제난의 주범이라는 지탄을 받기 시작한 터여서 버핏의 항의는 공명이 더 컸다. 일부 독일과 프랑스 부자들도 자신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해달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부자 증세는 대세가 된 듯했다.
하지만 이들 '극소수 부자 가운데 극소수'에 대한 대중적 지지와 일부 정치인들의 공언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은 아직 미완성으로 진행형이다. 이본영 기자
⑦ 잡스의 죽음
"스테이 헝그리" 혁신의 영감
"스테이 헝그리, 스테이 풀리시"(언제나 갈망하고, 언제나 우직하게)
스티브 잡스(사진)는 오랜 세월 뭔가 '새로운 것'을 찾는 사람들에게 항상 해답을 주는 사람이었다. 개인용컴퓨터(PC), 컴퓨터 그래픽 영화, 아이폰, 아이패드까지 전에 없던 것을 만들어냈고 그 기기들은 사람들의 생활을 바꿔놓았다.
하지만 그가 지난 10월5일 56살의 나이로 타계한 이후 더욱 기억되고 추앙받는 것은 이런 제품들 때문이 아니라, 일상에 찌든 사람들에게 새삼 다가온 그의 신념 때문일 것이다. 그는 때로는 제멋대로였고 때로는 실패했지만 언제나 남의 눈으로 살기를 거부했다.
더는 그가 내놓는 '오섬'(멋진·잡스가 자주 쓰던 감탄사) 제품은 볼 수 없지만 그의 인생과 그의 말은 영원히 많은 이들의 영감의 원천이 될 것이다. "당신의 시간은 한정돼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삶을 살며 낭비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마음과 직관을 따를 용기를 가지십시오." 이형섭 기자 sublee@hani.co.kr
⑧ 파판드레우 퇴장
위기의 유로존 수면위로
"국가적 단합에 걸림돌이 되지는 않겠다."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59·사진) 그리스 총리는 지난달 9일 퇴임 연설에서 이렇게 쓸쓸한 말을 남기고 정치무대 전면에서 퇴장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집권한 지 2년여 만이다. 파판드레우의 총리 취임은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또한 다섯 차례에 걸쳐 그리스 총리를 역임했다는 점에서 유럽 정치사에서도 주목을 받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파판드레우 정부는 곧 그리스 정부가 재정 통계를 조작해 막대한 부실을 숨겨왔다는 사실을 자백할 수밖에 없었고, 그리스 채무 위기는 유로존 경제까지 뒤흔들고 있다.
파판드레우는 임기 내내 편할 날이 없었다. 1980~90년대에 그의 아버지가 재임할 때에도 재정 문제가 잉태되고 있었다는 비판은 그를 더욱 곤란하게 만들었다. 압박에 시달리던 파판드레우는 유로존의 그리스 구제안을 국민투표에 부치겠다며 도박을 벌였지만 안팎의 격렬한 반발에 고단했던 총리 생활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이본영 기자 ebon@hani.co.kr
⑨우칸촌의 승리
부정부패 꺾은 중 농민 '해방구'
중국 남부의 더위가 가시지 않은 지난 9월21일 광둥성 우칸촌 주민 수백명이 정부 청사 앞에서 "우리 농토를 돌려달라"며 연좌 시위를 시작했을 때, 그것은 중국 농촌에서 흔히 벌어지는 시위 중 하나로 보였다. 하지만 지난 21일 촌민들이 민주선거로 뽑은 마을 대표 린쭈롄이 광둥성 권력 서열 3위인 주밍궈 부서기와 마주앉아 담판을 벌이고, 정부가 결국 촌민들의 요구를 모두 수용하기로 했을 때, 우칸촌 사람들은 '깨어나는 중국 농민'의 승리를 전세계에 알렸다.
중국 고속성장의 주요한 축인 부동산 개발과 도시화의 화려함 뒤에서 땅을 빼앗겨온 농민들이 일어섰다. 우칸촌 농민들은 수십년간 마을의 권력을 독점한 당 간부들이 집단 소유 토지를 마음대로 팔아넘기며 호화 생활을 해온 부정부패와 빈부격차의 현실을 고발했다. 민주선거로 대표를 선출하고 당과 공안조직을 모두 몰아낸 이들의 해방구 경험은 이제 중국 곳곳에서 농민들의 침묵을 깨게 하고 있다.
베이징/박민희 특파원 minggu@hani.co.kr
⑩ 머독의 몰락
미디어 황제의 추악한 진실
전세계 700곳, 연매출 35조원…. '미디어 제국'의 황제 루퍼트 머독(80·사진)은 올해 7월 영국 하원 청문회에 출석해 "인생에서 가장 부끄러운 날"이라며 고개를 떨궜다. 스포츠, 섹스 등 선정 보도로 여론을 쥐고 흔들다 '불법 전화 해킹 사건'에 덜미를 잡힌 것이다.
머독 소유의 영국 타블로이드 등은 유명인사와 일반인의 휴대전화를 해킹하는 '특수 취재 기법'으로 최대 7000여명의 사생활을 훔쳐봤다. 몇년간 끌던 이 사건은 2002년 살해된 소녀의 전화를 해킹한 사실이 올해 알려지며 폭발했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이 신문사 출신을 측근으로 기용한 것까지 문제 돼 권언유착 논쟁으로 번졌다. 시민들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같은 뉴미디어를 무기로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머독의 올드미디어에 맞섰다. 결국 머독은 168년 전통의 를 폐간했고, 위성방송 인수마저 포기했다.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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