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착오적 상고이유서가 나오고 동문회보 글까지 검열하는 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김정일 위원장 사망 정국이 모든 이슈를 뒤덮고 있다. 그래서 더욱 이 문제만큼은 짚고 넘어가야겠다.
한 검사가 민청학련 사건 재심 공판 항소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데 반발해 상고이유서를 대법원에 냈다. 그런데 그 내용이 가관이다.
"대통령 긴급조치는 비교적 단기간에 걸쳐 시행되었다가 … 즉시 해제된 점, 당시 대통령은 위기상황 극복을 위해 불가피하게 기본권을 제한한다고 인식하면서 긴급조치를 발령했던 점 등을 고려할 때 … 긴급조치가 유신헌법에 의하더라도 위헌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여기까지는 당시 시대상황을 강조하다 논리가 비약했을 수도 있겠거니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피고인 내지는 민청학련 관련자들에 대한 가혹행위는 … 사법경찰관 단계의 조사 내지는 검찰관 단계에서의 조사 과정에서 이뤄졌지 공판 과정에서도 이뤄졌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느 자료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없다"며 설명까지 덧붙였다.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이 수사기관에서 가혹행위를 당했다는 내용의 문건은 존재하지만 … 피고인의 법정진술 내용을 듣고 수사관들이 피고인을 끌고 중앙정보부로 가 그 진술 내용을 번복하라고 시켰다거나 그 공판기일 전 피고인에 대해 가혹행위를 하여 조서를 부인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는 취지의 조사내용이 전혀 없"으므로 당시의 유죄판결이 잘못된 게 아니라고 했다.
30여년 전 유신시대 검사들이나 했을 법한 주장이다. 고문으로 조작된 사건들에 대한 역사적 단죄와 함께 재심 법정에서 무죄에 이은 국가의 배상 판결까지 줄줄이 내려지는 상황에서 이 무슨 황당한 주장인가. 어찌된 영문인지 알고 싶어 상고이유서를 쓴 서울고검 검사에게 전화했더니 "할 말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동안 검찰은 유사 사건에서 항소를 포기해오다 한상대 전 서울중앙지검장 때 처음 항소했다고 한다. 현직 검찰총장이니 그의 의중이 반영됐다고 볼 수밖에 없겠다. 독재정권에 부역해온 과거사를 한번도 사과하지 않은 검찰답게 과거의 치부까지도 절대 자기 입으로는 인정할 수 없다는 오만함이 느껴진다.
최근 동문회보의 청탁을 받고 짧은 글을 하나 썼다. 검찰 비리가 터져나오는 현실을 언급하며 얼마 전 읽은 책 얘기를 일부 소개했다. "스폰서가 마련한 룸살롱 술자리에서, 그야말로 중인환시리에 돈을 걸고 접대부와 낯뜨거운 성행위를 벌인 사람이 당시 현직 검사였다니 놀랄 일이었다. 아는 검사에게 물었더니 책 내용을 믿기 어렵고 설사 사실이라도 요즘엔 그런 스폰서 문화 자체가 없다고 했다. 믿고 싶었다. 그래서 얼마 뒤 출판사에 전화를 걸어봤다. 그런데 아무도 책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는 이유로 민형사상의 문제제기를 해온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
대충 이런 내용이다. '색검' 얘기까지 나오는 판에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데 실리지 못했다. 법무장관 출신 동문회장이 동문회보에 부적절하다고 빼라고 했단다. 검사 출신 동문들이 불편해할 수 있다는 판단도 있었겠지만 혹시 '불멸의 신성가족'이 돼버린 '검찰 패밀리'끼리의 보호본능이 작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몇년 전 스폰서 의혹으로 검찰총장 후보자가 낙마하더니 최근엔 직전 검찰총장이 재임중 업자와 만난 사실이 드러났다. 기자들을 만나서는 "내가 열 받아서 (총장 때 일을) 다 까버리면 국정운영이 안 된다"고 협박성 발언까지 했다고 한다. 아마도 전 법무장관이 보여줬던 것처럼 현직 검찰의 '패밀리' 정신을 기대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들의 이런 정신세계에 비춰보면 시대착오적 상고이유서가 나오는 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김이택 논설위원 ri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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