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8-18

흔들리는 미국, 오바마의 딜레마- 정원식// 주간경향 939호, 2011-08-23



흔들리는 미국, 오바마의 딜레마
2011 08/23주간경향 939호
2011년 8월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생애 최악의 한 달로 기록될 게 분명하다. 미국 국가신용등급이 70년 만에 하락하면서 전 세계 금융시장이 요동치고 있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있는 오바마에게 더욱 치명적인 것은 미국의 정치적 지도력에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지난 8월 2일 백악관에서 연설을 한 후 집무실로 돌아가고 있다. 미국 상원은 이날 부채한도 증액 합의안을 통과시켰다. / AP연합뉴스
증시 대폭락의 직접적인 방아쇠는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의 미국 신용등급 강등 결정이다. 그러나 화약은 이미 7월 30일 타결된 부채한도 증액협상에 내장돼 있었다. 수개월 동안 지지부진했던 협상은 결국 실효성 없는 타협으로 끝났다.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서는 정부 지출을 줄이면서 동시에 정부 수입(조세)을 늘려야 하는데, 합의안에는 지출 삭감 방안만 포함됐고 증세안은 빠졌다. S&P가 미국 신용등급을 강등한 첫 번째 이유다. 이 신용평가사는 미국 신용등급을 강등한 또 하나의 이유를 제시했다. 부채한도 증액협상 과정에서 “미국의 정치적 의사결정 능력의 효율성, 안정성, 예측성이 약화됐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S&P의 지적을 2008년 금융위기 당시 무능력을 입증한 일개 신용평가사의 주장이라고 일축하기는 어렵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부채한도 증액협상 이후 커버스토리에서 “의회는 미국 재정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점을 입증했다. 그 결과는 의회가 세계의 신뢰를 잃었다는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기사를 쓴 타임 편집장 파리드 자카리아는 “부채한도 협상안의 가장 강력한 충격은 정치적인 것이 될 것”이라며 “명성을 잃은(2008년 금융위기 당시 신용평가사들의 오판을 지적한 표현) 신용평가사들이 미국 신용등급을 낮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미국인들이 스스로 낮추는 것”이라고 말했다. 신용등급 강등이 왜 미국의 자중지란이라는 것일까.

미국 재정적자 문제의 씨앗은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에서 뿌려졌다. 미국인들은 세금은 덜 내는 대신 큰 정부를 원했고, 레이건 행정부는 이 요구에 충실했다. 그러나 세금은 줄이면서도 지출을 늘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부채다. 1988년 2조 달러(약 2240조원)이던 정부 부채는 레이건 집권기에 3배로 증가했다. 부채 증가에 제동이 걸린 것은 조지 H W 부시와 클린턴 행정부 시기다. 클린턴 집권 후반부에는 재정흑자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들 부시 정권이 추진한 감세와 두 차례 전쟁은 5조8000억 달러의 부채를 낳았다. 2008년 금융위기는 여기에 결정타를 날렸다. 감세 기조를 유지하면서 경기부양을 하기 위해 정부 지출을 늘리며 부채규모가 14조 달러로 증가한 것이다. 14조 달러는 원화로 약 1경5170조원에 이르는 천문학적 액수다.

“미국 의회는 재정문제 해결능력 없다”이처럼 심각한 재정적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민주당과 공화당의 초당적 협력이 필요하다. 문제는 미국 의회가 심각하게 양분돼 초당적 협력이라는 미국 의회의 전통적 미덕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는 것이다. 자카리아는 “부채위기가 극명하게 드러낸 사실은 의회가 완벽하고 철저하게 망가졌다는 것”이라고 썼다. 타임에 따르면, ‘내셔널 저널’의 조사 결과 미국 공화당에서 가장 좌파 성향이 강한 의원들이 미국 민주당에서 가장 우파 성향이 강한 의원들보다 더 우파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양당 간의 이념적 간극이 극단적으로 벌어진 것이다. 반면 양당의 갈등을 중재하는 역할을 했던 중도성향 의원들은 사라졌다. 그 결과는 의회 기능의 마비다. 오바마 대통령 집권 2년 동안 행정부의 주요 보직이 공석인 상태다. 상원의 인준동의안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경제위기를 헤쳐나가는 데 조타수 역할을 해야 할 재무성의 10여개 보직도 공석이다. 자카리아는 “미국인들은 미국인 스스로에게, 그리고 전 세계와 글로벌 시장을 향해 미국의 정치 시스템이 망가졌고, 합리적인 공공정책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입증해 보였다”고 썼다.

자카리아의 기사는 S&P가 미국 신용등급을 강등하기 전에 쓰였다. 미국 신용등급 하락으로 전 세계 주가가 출렁인 이후에 나오는 비판은 더욱 매섭다.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이그나티어스는 8월 10일자 칼럼에서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거론했다. 그는 정부 재정정책과 민주적 정치 시스템에 대한 신뢰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및 1989년 구 소련 붕괴 이후 미국 민주주의의 가치를 전 세계에 퍼뜨린 힘인데, 현재는 그 힘이 크게 약해졌다고 본다. 시장의 실패를 해결할 수 있는 민주적 합의 과정이 이번 위기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그나티어스는 이런 맥락에서 지금의 위기를 “정치·경제적 위기”라고 규정하고 “현재 상황에서 가장 소름끼치는 대목은 이것이 민주적 통치에 대한 믿음을 시험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이 칼럼의 제목을 ‘민주주의, 도전받다’로 뽑았다.

오바마에 대한 진보진영의 실망과 비판미국 진보진영은 공화당이 대변하는 미국 우파의 극단주의를 비판한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이 대표적이다. 크루그먼은 지난 5일 뉴욕타임스 홈페이지에 개설돼 있는 자신의 블로그에 “우파의 광기가 미국을 근본적으로 건전하지 못한 국가로 만들어버렸다”고 썼다. “그래 맞다. 우파의 광기다. 세금에 반대하는 공화당원들의 극단주의만 아니었다면 우리는 장기적인 지불능력을 보장하는 합의를 끌어내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지난 2008년 당시 대선에서 승리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가족들과 함께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그러나 이번 국가신용등급 하락으로 그의 2012년 대선 전망에 빨간불이 켜졌다. / AP연합뉴스

실제로 티파티(미국의 풀뿌리 보수유권자 단체) 계열 공화당 강경파 의원들은 부채한도 증액협상 과정에서 번번이 합의안 도출에 딴죽을 걸었다. 타임에 따르면 “티파티 회원들을 움직이는 힘은 미국 정부는 지나치게 크고 비용을 많이 잡아먹고 있어서 헌법과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믿음”이다. 티파티 회원들은 정부 재정지출에 의한 경제회복을 믿지 않는다. 이들은 2008년 금융위기 당시 금융권에 수혈된 긴급 구제금융을 납세자의 혈세를 은행가들에게 가져다 바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뉴욕타임스와 CBS가 공동으로 행한 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 티파티 회원들의 14%만이 기후온난화가 지구환경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봤다.

타임은 오바마 대통령이 워싱턴에서 초당적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지만 “소수 미국인들이 공적 담론의 장에서 그처럼 과장된 역할을 맡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데이비드 액셀로드 백악관 전 고문은 미국 신용등급 강등에 대해 “문제의 핵심은 이것이 티파티에 의한 신용등급 강등이라는 것”이라며 “티파티가 우리를 디폴트 직전으로 몰고 갔다”고 말했다.

미국 진보진영의 정서가 공화당의 강경우파에 대한 분노로만 일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번 위기의 충격파는 오바마 대통령에 대한 진보진영의 실망과 비판으로도 터져나오고 있다.

공화당은 미국의 문제가 대통령과 그가 이끄는 정부의 과도한 재정지출이라고 비판한다. 민주당은 감세만을 주장하는 공화당과 티파티가 문제라고 비판한다. 오바마 대통령은 그 어느 쪽에 대해서도 명확한 입장을 취하지 않고 중도적인 입장을 취해 왔다. 미국 진보진영의 실망과 비판은 바로 오바마의 이 같은 중도노선을 겨냥한다.

드루 웨스틴 에모리대학 심리학과 교수가 지난 6일자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은 그 중에서도 가장 격정적인 어조를 띠고 있다. 웨스틴은 이렇게 묻는다. “오바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웨스틴은 오바마 대통령이 2008년 금융위기라는 비상한 국면에 대통령이 됐으면서도 미국인들을 향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던진 적이 없다고 비판한다. 그가 보기에 국민들이 오바마에게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는 이런 것이다.

“여러분은 직업을 잃고, 집을 잃고, 희망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재앙을 맞았지만 이것은 자연적인 재앙은 아닙니다. 이 재앙은 여러분의 생명과 미래를 담보로 한 월스트리트의 도박사들이 만든 것입니다. 이 재앙은 우리가 규제를 풀고 자신들의 탐욕을 채워주기만 하면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라고 말해온 극단적 보수주의자들이 만든 것입니다.(후략)”

웨스틴이 생각하는 모범적인 대통령은 “행정부의 힘을 국민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 사용하겠다고 약속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다. 그가 보기에 루스벨트는 뉴딜정책에 대한 비판자들의 공격에 단호하게 대처했지만, 오바마는 위기를 직시하는 대신 “자신들의 무절제함으로 경제를 망가뜨린 이들을 기소하기는커녕 그들을 책임있는 자리에 앉혀 놓았다.”

웨스틴은 오바마가 ‘균형잡힌 접근’을 강조하며 공화당의 감세 노선을 수용하는 어정쩡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 재선을 위해 중도성향 표를 모으기 위한 것이 아니냐며 “그러나 중도성향 유권자들은 (중도적 정치인이 아니라) 정직한 정치인을 원한다”고 말했다.

오바마 대국민 연설 시장서 힘 못써오바마 대통령은 S&P의 신용등급 강등 결정 직후 대국민 연설을 했다. 그는 “누가 뭐라건 우리는 항상 AAA 국가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오바마의 말은 시장에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대통령이 연설을 하는 동안 주가는 9개월 만에 최저를 기록했다. 다우존스 지수는 그날 하루에만 635포인트가 빠져나갔다. 2008년 이후 최악이었다.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데이나 밀리반크는 지난 9일자 칼럼에서 “오바마를 비판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문제는 시장이 그를 무시했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남자가 이상하게 무력해 보이는 가운데 거대한 힘이 미국과 대통령을 거꾸러뜨리고 있다”고 썼다.

밀리반크가 이 칼럼에서 전하는 연설 직후 기자회견장의 풍경이 이채롭다. 기자들은 오바마 대통령의 대응방안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했지만 제니 카니 백악관 대변인은 즉답을 하지 않았다. 대변인은 “(대통령은) 위기 해결과정에 기여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도하거나 지시하진 않을 겁니다”라고만 말했다. “왜죠?” 정치전문지 폴리티코의 한 기자가 물었다. “그는 자유세계의 지도자예요. 왜 그가 위기해결 과정은 주도하지 않는 겁니까?”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 경제 에디터 숀 오그라디는 “미국 금융이 위기라고 생각하는 것은 S&P 하나만이 아니다”라며 “오바마는 S&P를 비난하는 대신 자신의 경제적 과제에 대해 말해야 했다. 나는 여전히 ‘그래, 그는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고 썼다.

오바마 대통령의 2012년 재선을 위한 선거캠프는 이미 가동 중이다. 그는 재선에 성공할 수 있을까? 이번 위기로 재선 행보에 빨간불이 켜졌다고 보는 이도 있지만 재선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보는 이도 있다. 문제는 경제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해 ABC뉴스 앵커 다이앤 소여와의 인터뷰에서 평범한 재선 대통령보다는 재선하지 못하더라도 좋은 대통령으로 남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현재 미국에서 나오는 평가는 그의 소망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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