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8-18

인맥과 정보를 휘두르는 ‘비주류’ [뉴스인물 다시보기] 2004 굵직한 뉴스의 중심인물이었던 최재천 의원- 신승근// 한겨레21 541호, 2004-12-30

인맥과 정보를 휘두르는 ‘비주류’

[뉴스인물 다시보기]
2004 굵직한 뉴스의 중심인물이었던 최재천 의원… 어린 시절부터 정계 진출을 치밀하게 준비

▣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최재천 의원(서울 성동갑)은 초선이지만, 17대 국회에서 벌어진 대표적 이슈에서 이름이 빠지지 않는다. ‘가나무역 김선일씨 참수 사건’으로 온 국민이 절망에 빠진 2004년 7월 “주이라크 대사관이 가나무역 사장에게 1만5천달러를 빌렸다”는 정확한 폭로로 ‘제대로 한건’ 하는 초선이 됐다. 국가보안법 폐지안 법사위 기습 상정 주도, 군 검찰의 장성급 진급비리 수사에 대한 군 수뇌부의 방해 중단, 군사법원제도 개혁 요구…. 12월 들어 언론의 조명발을 받은 굵직한 뉴스에서 그는 항상 중심 인물이었다.

‘비주류의 열등감’ 극복 위해

그런 형실에서 대다수 초선들은 당내 역학 관계와 정치 관행에 발목이 잡히거나, 부족한 정치 경험 때문에 혼돈을 겪는다. 소신을 지키려다 지도부와 마찰도 빚는다.
초·재선 소장파들은 물론 이부영 당의장, 천정배 원내대표 등 열린우리당 지도부까지 법사위 간사에 불과한 그의 뉴스 생산력과 정확한 정보력, 원내 정치력을 호평한다. 특정 인물에 대한 칭찬에 인색하기로 소문난 천정배 원내대표조차 “최재천은 정말 훌륭한 의원”이라고 여러 차례 극찬했다.
그는 17대 국회에 진출한 다른 초선들과 어떤 차별성이 있으며, 뛰어난 정치적 생존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 “초등학교 때부터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진로를 정했다.” 최재천 의원은 초선답지 않은 정보력으로 주목받았다. (사진/ 김진수 기자)



그 역시 동료 의원들처럼 전형적인 정치지향형 인간이다. 그는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톡 까놓고’ 얘기했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진로를 정했고, 평생 마음속으로 연상하고 훈련하고 치밀하게 준비해왔다.”
평생 휠체어에 기대 살며 꿈을 펼치지 못했던 작은아버지 최삼현씨가 양자로 들어간 그에게 “남자는 큰 뜻을 세우려면 정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고, 최 의원은 별 고민 없이 “남자가 할 수 있는 가장 바른 직업은 정치”라고 체화했다. 광주제일고등학교 재학 때는 해남에서 출마할 것이라며 향우회 조직에 나서기도 했다.
최 의원은 “남들이 욕하겠지만, 중학교 2학년 때인 77년에 쓴 일기장에 ‘변호사, 의사, 육사 등 국회의원이 되는 3가지 방법’까지 써놓았다”며 “단 한번도 그 생각을 버린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중학생 때 책상머리에 ‘미래의 대한민국 대통령’이라고 써붙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처럼 그도 어려서부터 자기 최면을 거듭해온 것이다.
어린 시절 누구나 그럴듯한 꿈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고, 모두 그 꿈을 이루는 것도 아니다. 최 의원을 현재 위치에 올려놓은 숨은 동력은 ‘비주류의 열등감’과 ‘이를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일을 벌이는 지칠 줄 모르는 몸부림’이다.
해남 출신인 그는 광주·전남의 명문고인 광주제일고에 입학했지만, 명문대 진학에 실패했다. 1982년 전남대학 법학과를 갔고, 지방대는 그의 정치적 야심을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원초적 한계로 자리 잡았다. 학생운동에 발을 담갔던 그는 고시공부로 방향을 틀었고, 졸업 다음해인 1987년 제29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성적은 9등. 우수한 성적표지만, 지방대 출신이라는 열등의식을 완전히 극복시켜주지 못했다.

사소한 정보도 놓치지 않는 강박증

고심하던 그는 한계 극복을 위해 치밀하게 계획했고, 집요하게 실천했다.
첫째, 광범한 인맥 구축을 통한 기반 조성에 주력했다. 1963년생, 82학번인 그는 ‘386의원’이다. 그러나 그의 인간관계는 김상현 의원 등 과거 거물 정치인들의 주특기인 ‘마당발’에 가깝다. 광주제일고 동문, 사시 동기생은 물론, 군 복무 시절 사귄 법무관과 군의관, 기자, 정치권 유력 인사 등 그의 사람 사귐은 제한이 없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도 상당히 가깝다. 연말을 맞아 김 전 대통령이 보낸 난 화문이 의원회관 538호에 놓여 있고, 함께 찍은 사진이 떡하니 걸려 있다.
최 의원과 오랫동안 교분을 가져온 한 일간지 기자는 “최 의원은 기자들을 통해 술자리에서 소개받은 사람에게까지 먼저 연락을 취하는 ‘새끼치기 방식’으로 인맥을 넓힐 정도로 인맥 확대에 힘을 쏟았다”면서 “언론이 주목하는 정확한 정보의 원천은 이런 폭넓은 인맥”이라고 말했다.
최 의원도 “나에게는 일정한 열등감이 있다. 가난한 시골에 지방대 출신이라 나를 끌어줄 변변한 인맥도 없었고, 기본점수를 먹고 들어갈 간판이나 친척도 없었다. 때문에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만났다”고 말했다. 그는 “내성적 성격, 열등감 때문에 처음에는 사람 만나기를 주저했지만 내 약점을 커버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내가 먼저 연락하고 관심을 표명하고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고 덧붙였다.
‘인맥의 힘’은 실제 그를 국회의원으로 만드는 데 상당히 공헌했다. 지난 2000년 16대 총선 때 해남에서 두달 동안 바닥을 다지던 그는 자금력, 조직력의 한계를 절감하고 상경했다. 그의 꿈을 살린 것은 2004년 대선에서 다시 불거진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 후보 아들의 병역비리 사건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나름의 역할을 했고, 그를 눈여겨본 여권 유력 정치인의 천거로 열린우리당 후보가 됐다는 것이다.
성동구에 안착한 것도 ‘인맥 힘’이 작용했다. 광주일고, 전남대 선배인 고재득씨가 성동구청장에 출마하자 그를 위해 뛰었고, 구청장에 당선된 고씨는 최 의원을 97년 성동구청 법률고문에 임명해 터를 닦을 기회를 줬다.
정보에 대한 집착과 강박증은 그를 뉴스메이커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그는 요즘도 10개의 중앙일간 신문을 모두 읽고, 차 안에서 신문을 스크랩하고 재가공한다. 자신을 “깊이나 학식, 창조성이 없는 가벼운 인간”으로 규정한 그는 “어떤 사소한 정보나 첩보라도 놓치면 차칫 나에게 큰 불이익이 닥친다는 강박증 속에서 끊임없이 안테나를 세우고 정보를 수집·가공하다 보니 걸려드는 게 많은 것”이라고 말했다.
의료변호사의 길에 들어선 것도 한계 극복을 위한 치밀한 계산의 결과이다. 93년 개인 사무실을 연 최 의원은 고심했다. 당시 사법연수원에서 서클 활동을 함께했던 동료들은 대부분 노동사건, 국가보안법 사건 등 시국사건 전문 변호사로 나섰다. 하지만 그는 환경·지적재산권·증권·의료 등 새롭게 뜰 만한 몇몇 분야를 선정해 대법원 통계, 외국 법원의 각종 사례 등을 놓고 오랫동안 계산했고, 의료전문 변호사를 선택했다. 최 의원은 “나는 정치를 하기 위해 변호사로 성공하고 돈도 벌고, 약자도 보호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권력의 생리를 잘 아는 노회함?

그는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치밀하게 움직였다. 수간호사 출신들을 공개 채용했고, 친분 있는 기자들을 상대로 기형아 출산에 대한 의사의 책임 논쟁 등 ‘거리’ 되는 소송을 직접 홍보했다. 97년 7월 <고시계>에 ‘의료과오로 인한 손해배상책임’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이래 2003년까지 31건의 의료 관련 연구논문을 쏟아냈다. 집요한 노력 끝에 연 2억원의 매출을 올리던 개인 변호사는 10년 만에 연 매출 20억원을 올리는 법무법인 ‘한강’의 대표 변호사로 성공했다. 자신의 성공과 재력을 바탕으로 그는 정치, 사회, 언론 등 각 분야에 인맥을 확대재생산하며 의원에 도전했다. 열등감 극복을 위한 ‘마당발 인맥’에서 나온 풍부한 정보와 강박증적인 정보 수집·가공, 성공한 변호사의 경제력은 정보와 돈줄 찾기에 허덕이는 다른 초선 의원들과 그를 구별짓는 경쟁력의 핵심인 셈이다.
그에 대한 당내 평가도 “초선답지 않는 치밀한 준비, 열정과 노력, 적절하고 정확한 각종 정보를 제때 파악해 당 지도부에 제공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게 주류다. 그러나 당 일각에서는 “당 지도부와 원내대표단의 심리를 잘 파악하고, 권력의 생리를 잘 아는 노회함”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 2004년 12월10일 한나라당 의원들이 점거한 법사위 회의실에 들어가기 위해 문을 두드리는 최재천 의원. 권력의 생리를 잘 아는 그의 노회함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사진/ 한겨레 황석주 기자)



그는 12월6일 국가보안법 폐지 법안을 법사위에서 기습 상정했고, 12월18일 보안법 폐지 반대 광화문 촛불 시위에서는 연사로 등장해 보안법 폐지를 역설했다. 그는 당시 “299명 국회의원 중 161명이 동의한 법안 상정과 심의조차 거부한 한나라당의 행동이 진정한 민주주의냐”며 “악법을 폐지하는 것이 국회의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당 지도부가 법사위 기습 상정 다음날 연내 처리 백지화를 선언했지만 전혀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그는 기자에게 “당 지도부가 그 정도의 전술적 선택권은 가질 수 있어야 한다”며 “개인의 이미지가 실추되더라도 열린우리당의 공천을 받아 당선된 사람으로서 그 정도의 희생은 감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최근 지도부가 한나라당과 보안법에 대한 정치적 타협을 시도하자 다른 386 의원들은 농성을 벌이며 항의한다.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 강행 처리를 통해 폐지안을 관철할 수 있다고 생각해 과감하게 행동했는데, 당 안에서 그 가능성을 인정하는 사람이 적어지는 현실 속에서 포기하고 훗날을 기약할 것인지, 협상을 통해 절반의 성과라도 얻을 것인지 고민하고 있다”며 “이제 나의 딜레마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그는 진정성을 강조한다. “늘 5년, 10년 뒤를 생각하고 뭔가를 끊임없이 준비했고, 그런 노력과 운이 맞아떨어져 세속적 좌절을 별로 맛보지 않은 행복한 인생이었다”면서 “얻을 것 다 얻고, 충분히 경험한 홀가분한 마음으로 부조리한 현실 개조에 일조하겠다”는 것이다. 그 진정성이 제대로 발휘될지 좀더 지켜봐야 한다.


2004-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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