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1-21

[세상 읽기] 세계 최초의 혁신적 시민민주정당 / 안병진

역시 매력적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온라인 취임식 말이다. 그는 선거 기간 보여준 오프라인의 따듯한 경청에서 한발 더 나아가 참여의 문턱을 낮춘 온라인으로 '공감과 동행'의 시정을 시작했다. '시민이 시장이다'는 이제 구호가 아니라 현실이다. 다음엔 무엇이 우리를 설레게 할까?

이젠 '시민이 정당이다'라는 전국적 프로젝트를 깨어있는 시민들이 시작했으면 한다. 나는 지난 주말 대구의 시민단체 활동가들에게 특강을 했다. 험난한 조건에서도 빛나는 눈빛을 간직한 채 새 정치의 희망을 묵묵히 실천하는 그들을 보면서 내내 가슴이 아팠다. 박원순·안철수 현상의 빅뱅 속에서도 여전히 후진 행태를 반복하며 새로운 희망을 만들지 못하는 이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왜 이른바 합리적 보수라 하는 이들은 아직도 소수 명사들을 모아 제3당을 추진하면서 그것이 국민의 뜻이라 강변할까? 왜 이른바 진보라 하는 민주노동당은 아직도 활동가들끼리의 정파 지분협상에만 시야가 가 있을까? 진보란 유럽과 미국의 위대한 사회민주주의자 비그포르스나 존 듀이처럼 혁신적일 때만 붙일 수 있는 가슴 뛰는 단어이다. 당장 깨어있는 시민이 주도하는 제도와 문화를 실천하지 않으면서 미래를 말할 수 있을까?

원래 정치란 그런 것이라고? 천만에. 나는 몇 주 전 한 워크숍에서 야권 정당들의 플랫폼을 추구하는 '혁신과 통합'의 새로운 정당 모델을 네트워크 정당 등 10가지 테제로 제시한 바 있다. 하지만 난 시민의 삶에서 괴리된 정치엘리트들이 대부분인 한국에서 이를 실천할 수 있을까 회의를 숨길 수 없었다. 그래도 그 후 난 작은 희망을 보았다. 왜냐하면 '혁신과 통합'이 새로이 만들어질 정당 지도부를 지분협상 방식으로가 아니라 시민주도적 당직선출 방식으로 할 것을 정했기 때문이다.

더 다행인 것은 아예 새 정당의 모델 디자인 자체를 활동가나 명사가 아니라 시민이 주도하고자 하는 고민의 과정이다. 지난 주말 '혁신과 통합'은 시민들의 타운홀 미팅과 온라인 네트워크 토론을 실시간으로 융합한 새 정당의 디자인을 시작했다. 각 토의그룹은 자신들의 논의 결과가 온라인 토론과 함께 대형 스크린에 모아지고 다시 이를 보고 최우선의 어젠다를 결정해 나가며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권효현님을 비롯한 '프런티어 존'이란 멋진 대학생팀과 김수정 국장 등이 사흘간 밤을 새워 설계한 시스템은 여균동 감독의 표현에 따르면 신비로웠고 전세계에 수출할 가치가 있었다. 참석한 박재동 화백은 자기들의 정당이 아니라 우리들의 정당이 시작되는 가슴 떨리는 순간이라고 놀라워했다. 문성근 '혁신과 통합' 상임대표 등이 오래전부터 꿈꾸고 실천해온 미래가 현실로 확인된 순간이었다.

토요일의 작은 실험은 앞으로 만들어야 할 큰 정당의 모델하우스였다. 즉 시민 지지자가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결정하는 정당, 단순 여론이 아니라 심의민주적 공론을 만들어 가는 정당, 시민의 재미있고 일상적인 온·오프 커뮤니티의 이야기가 곧 정당의 정책과 메시지가 되는 정당, 비정규직과 청년 등 사회적 약자들의 정당…. 이 정신만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세계에서 최초로 시도되는 21세기형 시민민주정당이 될 수 있다.

지난 토요일의 맹아적 실험이 앞으로 새로운 정당의 디자인으로 얼마만큼 나타나는지, 혹은 엘리트간 협상 과정에서 그들만의 정치로 변질되어가지는 않는지 우리는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아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국내외의 깨어있는 대한민국 시민, 정보기술(IT) 전문가와 정치활동가들이 함께 만드는 것이다. 이제 시민이 정당이다.

[이동걸 칼럼] 경제학이 실종된 한-미 자유무역협정

그분들이 읽은 경제학 교과서와 내가 읽은 경제학 교과서가 정말 그렇게 다른 걸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우리 경제의 미래를 보장해줄 거라는 그분들의 확신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 글에서 필자는 한-미 에프티에이 찬성론자들의 주장을 비판하려고 한다.

첫째, '경쟁촉진 효과'론과 '역경극복 디엔에이(DNA)'론을 보자. 이 상태로 한-미 에프티에이를 체결하면 우리가 지금 비교열위에 있는 차세대 미래산업을 모두 포기해야 하고, 그러면 우리의 미래 성장동력이 떨어질 것이라는 비판에 대해 그들은 에프티에이가 우리 기업의 "저열한 생산성 제고에 가장 필요한 경쟁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한다. 필자도 경쟁의 긍정적 효과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경쟁의 승자와 패자가 국적을 달리할 때는 문제가 심각해진다. 미국 국적의 승자가 내일 우리의 일자리를 만들어주지는 않을 것이며 우리의 미래산업을 키워주지도 않을 것이다. 통상경제학 교과서도 이 점을 인정한다.

심지어 우리는 어려울 때마다 "당당하게 뒤집기에 성공"했다며 "우리의 자랑스러운 디엔에이를 비하"하지 말라고 꾸짖기까지 한다. 우리 국민은 어려움을 헤치고 성공을 이루어내는 특수한 디엔에이를 가지고 있으므로 비록 지금 비교열위에 있다 하더라도 패자가 되어 도태되는 것이 아니라 경쟁력 있는 산업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필자도 우리 국민의 저력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주장 자체는 매우 위험하다. 한-미 에프티에이로 우리 농업이 위축된다면 그것은 우리 농민의 디엔에이가 열등하기 때문이란 건가. 아니면 우리 농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한-미 에프티에이를 한다는 말인가. 황당하다.

둘째, 일자리 창출론을 보자. 이명박 대통령은 한-미 에프티에이가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줄 거라 한다. 대단한 오판이다. 한-미 에프티에이로 득을 보는 산업은 대부분 우리나라 재벌들의 주력산업들이다. 문제는 재벌계열 대기업들의 일자리 창출 기여도가 매우 낮다는 거다. 일자리 창출 기여도가 큰 중견·중소 미래기업이 성장하면서 더 좋은 일자리를 많이 창출해내야 하는데 한-미 에프티에이로 이들이 어려워지면 이 대통령의 기대와는 반대로 오히려 좋은 일자리가 줄어든다.

셋째, 투자자-국가 소송제(ISD)를 보자. 이것은 자유무역과 직접 관련이 없는 독소조항이다. 외국인 투자를 보호하려면 내국인 대우 원칙만 확실히 보장해주면 된다. 정책과 제도는 단순명료하고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한 보수언론은 "결혼(FTA)하자면서 손(ISD)도 안 잡겠다는 것은 웃기는 논리"라며 투자자-국가 소송제의 불가피성을 우기고 있다. 그러나 이 조항은 손을 잡는 것이 아니라 결혼 후 집안 환경이 변해 부인이 굶더라도 남편은 결혼할 때 기대했던 대로 혼자만 배불리 먹겠다는 것이다.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정당하고 공정한 대우만 보장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 이상은 다른 가족에 대한 불평등 대우다.

넷째, 선비준-후재협상론을 보자. 일단 한-미 에프티에이를 비준하고 나면 재협상에서 우리의 교섭력이 급격히 약해진다. 미국은 시간을 끌기만 하면 된다. 이 대통령은 누구보다도 협상과 교섭의 경험이 많은 이른바 성공한 기업경영자 아닌가. 어찌 이런 오판을 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진정 재협상할 생각이 있다면 선비준을 하면 안 된다. 재협상이 국민을 기만하기 위한 정치적 술수라면 모를까.

한-미 에프티에이는 단순한 자유무역협정이 아니다. 통상전문가들의 말만 듣고 해서는 안 된다. 무지와 편견과 오만으로 가득 찬 일부 통상전문가들은 단지 오늘 좀더 잘살게 되면 내일도 더 잘살게 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는 근거없는 막연한 기대감에 불과하다. 노무현 대통령이 한-미 에프티에이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우는 큰 실수를 한 것도 통상전문가들의 조언만 들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자유무역협정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한-미 에프티에이를 하려면 정확히 알고서 하자는 거다. 우리 경제의 미래에 걸림돌이 될 조항이 많이 있으니 그것을 제거해야 한다는 거다. 한림대 재무금융학과 객원교수

[한겨레 프리즘] 2차 태평양전쟁은 개전됐다 / 정의길

지난 한 주 태평양의 파고는 1941년 12월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 때와 비견된다. 미국과 중국의 대전인 2차 태평양전쟁은 사실상 개전됐다. 역사는 얄궂게도 태평양전쟁 발발 전의 상황을 재변주한다.

태평양전쟁의 배경은 1930년대 대공황이었다. 일본과 독일 등 추축국들은 후발 자본주의 신흥국가로서 시장과 자원 확보에 불을 켰다. 대공황 앞에서 이들은 폭력적인 시장 재편에 나섰다. 전쟁을 택한 거다.

지금은 대공황에 준하는 경제위기이다. 이 경제위기 전에 이미 중국은 자원과 시장 확보에 전방위적으로 나섰다. 미국의 뒷마당이라는 남미는 중국에 대한 원자재 수출로 새로운 중흥기를 구가하고, 중국은 아프리카 국가들의 최대 원조국으로 떠올랐다. 미국의 경제력을 추월한다고 하나, 중국은 여전히 인구 절반이 최저생계비 수준에 허덕인다. 연 10% 안팎의 고도성장을 유지하지 못하면, 1년에 수천만명의 실업자를 양산한다. 지금 중국은 멈추면 자빠지는 자전거일 뿐이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의 직접 원인은 연합국의 대일 원자재 금수였다. 일본의 중일전쟁 확대를 제재하려고 미국·영국·네덜란드는 말레이·인도네시아 지역의 원유 등 원자재의 일본 수출을 금지했다. 일본은 '에이비시디(ABCD: 미국·영국·중국·네덜란드의 첫 글자들) 봉쇄망'이라고 비난하며 전쟁을 시작해 이 지역부터 먼저 점령했다.

말레이·인도네시아 지역은 중국과 주변 국가들이 영유권 분쟁을 벌이는 남중국해 연안이다. 남중국해에는 중국 수출입의 생명선 같은 해로가 있다. 중국이 수입하는 석유의 85%가 이곳을 지난다. 미국은 2010년 아세안지역포럼(ARF)부터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에 동남아 국가들의 손을 들어주며 개입했다. 지난주 미국은 구두 개입에서 실력 개입으로 전환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일본에 공습당했던 하와이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아펙) 정상회의에서 후진타오 중국 주석에게 '규칙을 지키라'고 포문을 열었다. 그리고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일본에 반격을 시작한 오스트레일리아 다윈으로 날아가 미 해병의 주둔을 발표했다. 일본 남방군이 인도를 침공하려다 연합군에게 참패를 당했던 임팔 전투가 벌어졌던 미얀마에는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의 방문을 발표하고 국교 정상화 손짓을 보냈다. 미국은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공세를 저지한 최남단과 최서단 방어선을 다시 단도리한 것이다. 중국은 이를 '중국봉쇄망'이라며 반발한다.

그럴 만도 하다. 닉슨독트린 이후 미국은 처음으로 이 지역에 새로운 병력을 파견했다. 2차대전 직후 존 덜레스 국무장관이 밝혔던 중국 등 사회주의권 봉쇄망인 제1열도선(일본~오키나와~대만~필리핀), 제2열도선(일본~괌~오스트레일리아)이 재정비·강화되고 있다. 태평양전쟁 직전 미군의 극동사령부가 있던 필리핀을 클린턴 국무장관이 방문해 양국 군사동맹을 재확인하고 병력 증파 및 기지 사용의 가능성을 열었다. 지난 8월 미 해군 전함은 중국을 코밑에서 위협하는 베트남의 캄란만 기지를 30년 만에 방문했다. 냉전시대 중국의 최대 우방인 베트남은 이제 중국을 견제하는 미국의 우방으로 변했다. 게다가 미국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등 중국을 배제하고 자신이 주도하는 태평양 자유무역지대를 엮으려고 한다.

지난 한 주 갑자기 중국은 고립됐다. 이런 중국의 고립과 위협감은 이미 지난해 천안함과 연평도 사건 때 불붙었다. 미 항모가 파견된 서해의 한-미 합동훈련에 중국은 격렬히 반발했다. 연평도 사건 1주년이 다가왔다. 한국은 지금 2차 태평양전쟁에서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알고는 있는지 모르겠다. Egil@hani.co.kr



[삶의 창] 민주주의 앞에 붙었던 말 / 황현산

새벽부터 연구실 문을 걸어 잠그고 공부를 하다가 저녁이면 하루도 빠짐없이 술을 마시는 교수가 있다. 가족들이 좋아할 리 없다. 그 교수가 이런 농담을 했다. '아버지를 닮지 말자, 이게 우리 집 가훈이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젊은 교수가 흥을 돋우었다. '아버지를'보다 '아버지는'이라고 해야 더 강력한 표현이 된다는 것이다. 나이 든 국문과 교수가 국문과 교수답게 훈수를 했다. '아버지는'이 더 강할지 모르겠으나 '아버지를'이 정식 표현이라고 지적하고 나서 '그래도 가훈인데'라는 말을 덧붙여 농담을 마무리했다.

그 국문과 교수가 정식 표현이라고 부른 것을 나는 절대적 표현이라고 부른다. '아버지는'이라고 말할 때는 '어머니는'이나 '할아버지는' 같은 다른 비교의 대상을 암암리에 상정한다. 그 표현은 상대적이다. 그러나 '아버지를'은 어떤 비교의 대상도 없이 곧바로 그리고 오로지 아버지를 문제의 중심에 놓는다. 그 표현은 절대적이다. 오랫동안 마음에 두었던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남자도 이 절대적 표현에 의지한다. 그는 '당신을 누구보다도 더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여 자기 마음을 온전하게 전한다. 다른 말이 필요 없는 이 사랑은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 사랑이다. 이 사랑은 어쩌면 그에게 불가능한 것일지 모른다. 삶의 여러 난관이 그의 사랑을 둔하게 만들고, 그의 미숙한 정신이 작은 일도 고깝게 생각한 나머지 사랑 속에 미움이 싹틀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의 그는 완벽한 사랑을 꿈꿀 것이며, 나아가서는 그 떨리던 순간의 추억을 되새겨 삶의 고비마다 무뎌지거나 빗나가는 사랑을 다시 날카롭게 바로잡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다'라는 말에 대해서도 필경 같은 이야기를 하게 된다. 민주주의는 우리 삶의 환경이고, 우리가 저마다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고 저와 이웃의 행복을 가꾸어가는 터전이다. 물론 우리가 완전한 민주주의를 누리고 사는 것은 아니다. 민주적 정의가 올바르게 실현되고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 자신이 정말로 이 나라의 주인이라고 자부할 수 없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살아온 역사도 우리의 민주적 의지를 제약하고, 여러 가지 물질적 조건도 우리를 가로막는다. 우리 개개인의 민주적 자질이 충분히 성숙한 것도 아니며, 서로가 서로를 믿을 수 있을 만큼 우리의 인격이 완성된 것도 아니다. 이 점은 우리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모든 나라가 마찬가지다. 어디에서건 민주주의의 이상이 실현된 적은 없다. 공자가 말한 것처럼, 저마다 제 마음대로 행동해도 옳은 이치에 어긋남이 없는 경지에 도달할 때 비로소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의 조건이 이러저러하니 민주주의를 어느 정도까지만 실현하자는 식으로 민주주의에 선을 긋는 것은 현실의 압제를 인정하자는 것이며, 따라서 민주주의에 대한 배반이다.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라는 말에는 우리가 어떤 난관에 부딪히고 어떤 나쁜 조건에 처하더라도, 민주주의의 이상에 가장 가깝게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가려고 노력한다는 뜻이 포함될 뿐만 아니라, 그 뜻이 거기 들어 있는 다른 모든 뜻보다 앞선다. 민주주의에 다른 수식어를 붙일 수 없는 이유가 그와 같다.

지금 어떤 사람들이 학생들의 교과서에서 민주주의 대신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을 써서 민주주의에 선을 그으려 한다. 자유는 좋은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라는 말이 이 땅에서 자유를 억압한 적은 없지만, 민주주의 앞에 붙었던 말은 민주주의도 자유도 억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