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2-24

길 잃은 민주당…새판짜기냐 독자쇄신이냐 ‘백가쟁명’

대선 패배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민주통합당의 진로를 두고 당 안팎에서 백가쟁명의 논쟁이 일고 있다. 당의 구조와 연합정치 노선, 정책 등 여러 층위로 논쟁이 진행될 조짐이다.

문재인 대표대행은 대선 국면에서 세운 '국민연대'를 통해 민주당을 '국민정당'으로 재구성하는 방안을 추진했으나 이를 재검토중이다. 문 대표의 한 측근은 "국민연대를 통한 국민정당을 유력한 대안으로 검토했지만 이번 기회에 진영 전체의 미래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아 새로운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 안경환 교수나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 비상대책위원장 카드를 접은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문재인 캠프에 참여했던 한 의원은 "지금 민주당 구조로는 문재인 후보가 받았던 지지율을 온전히 받아내기가 쉽지 않다. 새로운 틀을 구성해 지지기반을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민연대를 통한 국민정당 건설에는 몇 가지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심상정·노회찬 의원 등이 이끄는 진보정의당의 합류 문제와 안철수 세력의 결합 문제가 대표적이다. 수도권의 한 중진 의원은 "이번 대선에서 중도세력에 대한 견인을 오로지 안철수 전 후보에게 맡기고 중도파에 대한 정책이나 카드를 내놓지 않았다는 게 주요한 패인 중 하나였다. 진보정의당의 합류는 진보당을 위해서도, 민주당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21일 의총에 앞서 열린 중진의원 조찬에선 안철수 세력과의 결합 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고 한다. 서울 지역의 한 중진 의원은 '이번 기회에 확실히 선을 긋고 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 반면, 서울 지역의 다른 3선 의원은 '안철수 세력을 끌어안아야 2014년 지방선거 때부터 답을 찾을 수 있다'는 정반대 의견을 내놓았다고 한다.

특히 비주류 쪽에선 '국민연대가 주류의 기득권 구조를 유지하려는 토대 아니냐'고 의심해 왔다. 비주류 쪽 한 중진 의원은 "당내 주류들은 '이-박 담합'으로 총선 패배의 책임론을 정면돌파한 바 있는데, 이번에는 국민연대로 대선 패배 책임론을 돌파하려는 것이 아닐까 의심된다"고 말했다. 국민연대를 통한 국민정당론을 재검토하는 것은 이런 면들을 종합적으로 재검토한 결과인 것으로 보인다.

이 의원은 "현재는 당의 구조를 바꾸는 문제보다 당의 정체성을 다시 세우는 일이 중요하다. 대선 패배의 원인과 이유를 분석하는 일이 우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수도권의 한 3선 의원도 "지금은 당의 체질을 바꿔야 할 때지, 사람을 더 늘릴 때가 아니다"라며 "민주당은 그간 하드웨어를 확장하는 데만 몰두하다 정작 정책 마련과 대안 제시라는 소프트웨어는 경시해 왔다. 지금은 소프트웨어에 주목해야 할 때"라고 의견을 냈다.

당내의 공개적인 의견 개진도 이어지고 있다. 손학규 상임고문은 22일 저녁 자신의 싱크탱크인 '동아시아미래재단' 송년회에서 "정권교체를 위해 단일화하면 된다는 진영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한 것으로 전해졌다. 손 고문은 "시대정신을 제대로 읽지 못했고 국민의 눈높이에 우리를 맞추겠다고 말했으나 실제로는 자신들의 눈높이에 국민을 끼워 맞추려 했다. 국민은 맹목적인 정권교체, 야권 단일화를 원한 게 아니었다"고 지적했다고 참석자들은 전했다.

진보 쪽의 정책통으로 통하는 민주당 최병천 보좌관(민병두 의원실)은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민주당이 그동안 추진해 왔던 '야권연대-단일화 노선'을 실패로 규정하고 독자 집권이 가능한 정당으로 거듭나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 최 보좌관은 "문재인 캠프가 출마 선언 직후부터 과도하게 '야권 단일화' 의제에 매달리면서" 자신들의 가치, 노선과 비전을 알리지 못했다고 분석했다. 최 보좌관은 "군부독재 시절에 만들어진 '선명 야당'의 노선을 버리고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는 '대안 야당'으로 거듭나야 한다"며 "반값등록금이나 무상급식과 같은 정책적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밝혔다.

앞서 박명림 교수와 최태욱 교수는 대담(21일치 1·4·5면)에서 민주당의 단독 집권이 불가능하다고 진단한 뒤, 안철수 세력을 중심으로 한 중도보수 정당이 나오면 민주당, 진보정당 등 3대 세력이 결선투표를 고리로 연대하는 '연합정치 강화론'을 제시한 바 있다.

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

'기존 순환출자 해소' 이한구-김종인 또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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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김종인…외부 강봉균·박상증 등 물망
[화보] 표창원 교수 "광주시민들, 힐링하세요~!"

2012-11-30

‘야신’이 기업 운영한다면? “30㎝ 경영”

"사소한 실수가 경기를 망친다. 30㎝ 수비로 세밀하게 운영하라."

'야신' 김성근(사진) 고양 원더스 감독이 기업 임원·팀장들에게 '승리의 한 수'를 전했다. 철저한 승리 야구로 한국시리즈를 3차례나 제패한 김성근 감독은 "수비 폭을 30㎝ 단위로 설정해 세밀하게 연습을 하면 절대 실수가 없다. 작은 실수를 줄이고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게 끊임없이 연습해야 실패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29일 오전 서울 공덕동 효성 본사 1층 대강당에서였다.

임원과 팀장 등 160여명의 효성 직원들은 김 감독의 강연에 귀를 기울였다. 김 감독은 '프로야구에서 배우는 책임지고 일하는 자세'를 주제로 먼저 "조직의 리더라면 자신만 출세하겠다는 사리사욕을 버리고 자신이 조금 희생되더라도 조직을 우선시해야 되며 순수함, 우직함, 열정을 갖춰야 한다"고 주문했다. 또 그는 "천직은 하늘이 내려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이라며 프로정신도 갖출 것을 당부했다. 김 감독은 매 경기 9명의 야구 라인업을 짜고, 쓸만한 2군 선수를 발탁해 내야하는 감독 답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인재육성"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김 감독은 승부사 다운 평소 지론으로 강연을 마무리 했다. "강하니까 이기는 것이 아니고 이길 때까지 그만두지 않으니까 강해지는 것이다." 김 감독은 "벌써 속에 아직이, 아직 속에 벌써가 있으므로 급할 때는 여유를 찾고, 여유로울 때 일수록 급하게 움직이자"며 1시간30분에 걸친 강연을 큰 박수 속에서 끝냈다. 이완 기자 wani@hani.co.kr

[논쟁] 홍성담 화백의 '유신풍자화', 어떻게 봐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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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 정권교체 위해 단식 기도 돌입
발사 16분전 상단로켓 이상…'2012년 우주여행' 사실상 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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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 떠나다…박찬호 "은퇴하겠다"
[화보] ′성추문 검사′ 얼굴 가린 채…

2012-11-21

총리까지 기업으로 달려가는 독일 정계

[Special Report] 공직 발판으로 돈벌이 나선 정치인들

독일 정치인들은 공직을 그만두기 전부터 돈을 많이 주는 기업으로 갈 준비를 한다. 공복으로서 민의를 반영하는 것은 뒷전이고 로비스트 역할에 더 열심이다. 기업으로 자리를 옮길 때도 신속하기 이를 데 없다. 이미 준비가 다 돼 있었다는 듯이 며칠, 몇 주 만에 해치운다. 정부나 의회는 뒷짐을 지고 있다. 좌파 의원들도 예외가 아니다. 과거 정치인들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아마 자신들의 정치 인생이 모욕당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_편집자

콜·슈뢰더 전 총리 비롯해 장차관들 잇달아 기업행… 정부와 정당은 뒷짐지고 수수방관

처음에는 정치를 하고, 나중에는 자신의 이름과 주소록을 이용해 돈을 벌 수 있는 회사에 입사한다. 그리고 베를린 정계는 민망할 정도로 이 도덕성의 타락이 중단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랄프 베스테 Ralf Beste 위르겐 달캄프 Jürgen Dahlkamp 기자

독일 베를린 시프바우어담에 있는 한 콘크리트 빌딩 2층에 자리잡은 12m²의, 안내 데스크도 없이 그저 얼룩진 천연 벽지로 도배된 작은 방. 난방비를 포함해 240유로의 월세를 내는 이곳이 바로 베를린의 로비컨트롤(LobbyControl) 사무소다. 국제투명성기구와 함께 독일 정계의 청렴도를 감시하는 곳으로 잘 알려진 단체다.

이 작은 방에서 한달 월급이 세금을 포함해 2604유로인 정치학자 티모 랑게(30)가 정치인들이 해도 되는 일이 무엇이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무엇인지를 점검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한 가지, 누군가 또다시 지켜야 할 올바른 태도를 무시할 때 세심하게 그것을 기록하는 것뿐이다.

몇 년 동안 각 부처 장관이나 국회의원이었던 인물이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순식간에 민간 기업체로 간 사례. 정계 은퇴자가 체면 유지를 위한 휴지 기간을 두지 않고 얼마 전까지 자신이 관여하던 분야에서 이득을 얻기 위해 즉시 재계로 가버린 사례. 자신이 공직에서 지냈던 세월 그리고 자신의 이름과 인맥, 국민이 그에게 보여주었던 신뢰, 정부의 일 처리와 의사결정 경로에 대한 내부자로서의 지식을 돈으로 바꾸는 사례. 이 모든 것을 과거 공직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으면서 저지르는 것이다. 이런 일들이 최근 몇 년간 연방과 각 주에서 반복적으로 벌어졌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차츰 당연한 일이 돼가고 있다.

은 1969∼1982년에 재직한 모든 전임 연방 장관들의 경력을 2000년 이후 재직한 장관들의 경력과 비교해보았다. 모든 정당들에 최근 5년간 이런 형태의 자리 이동을 막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 이를 위해 법 제정을 계획하고 있는지 물어보았다. 결과는 다음과 같다.

△재계로 바로 자리를 옮기는 일은 과거보다 오늘날 훨씬 자주 일어나고 있다. △장관과 국회의원들에게는 아무런 제한이 없고, 고위직 공무원들에 대한 규정은 실제 상황에서는 지켜지지 않는다. 전임 정치가와 전임 공무원들이 누구를 위해 로비 작업을 하는지 확실하게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독일은 국제적으로 비교하면 상당히 뒤처져 있다. △그럼에도 두 거대 정당은 이에 대한 조치를 취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정치인, 공직자 거리낌 없이 기업행

그 와중에 새로운 이름들이 계속 나타나고 있다. 2012년 시즌의 이름은 에른스트 우어라우다. 2011년 말까지 연방정보국 국장으로 재직한 그는 지난 2월부터 도이체방크의 리스크 자문위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2011년 11월까지 바이에른주의 재무장관직을 맡다가 지난 5월부터 독일 저축은행 및 지로 연합회 회장이 된 게오르크 파렌숀도 있다. 2011년의 리스트에는 현재 JP모건체이스에서 일하는 전 연방 경제부 차관 베른트 파펜바흐, 현재 DKV 의료보험의 최고경영자(CEO)가 된 전 헤센주 소비자보호부 장관 질케 라우텐슐레거, 지금은 독일연방 산업협의회의 총괄본부장이 된 전 연방 재무부 수석 이코노미스트 마르쿠스 케르버가 있다.

도덕 수호자와 도덕 파괴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불공정하다. "재계에서는 그들의 이익 실현을 위해 이런 사람들을 돈으로 사들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인식이 커지고 있기 때문에 유혹이 더욱 강해지고 있다"고 티모 랑게는 그의 관찰 결과를 이야기했다. 사회민주당(SPD) 의원 마르코 뷜로프 역시 같은 생각이다. 그는 연방의회 안에서 이런 민망한 자리 이동을 비판하는 몇 안되는 사람이다.

과거에 빌리 브란트(제4대 총리·SPD) 같은 정치가가 노르트스트림을 위해 일하는 게르하르트 슈뢰더(제7대 총리·SPD)처럼 가스 파이프라인 회사를 위해 로비스트로 일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제3대 총리·기독교민주연합(CDU))나 헬무트 슈미트(제5대 총리·SPD)가 현대 정치인과 같은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당시에도 개별적인 타락 사례는 있었다. 반대로 보자면 오늘날에도 앙겔라 메르켈 총리(CDU)나 빈프리트 크레츠만 연방 상원 의장(녹색당)이 언젠가 가장 돈을 많이 제시하는 곳에 자신을 팔아넘길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많은 정부 공직자들에게 이런 종류의 은퇴는 여전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사이 민망한 한계선을 넘은 사례가 많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이를 단지 세상이 원래 그런 것이라고 그냥 받아들여야 할까?

물론 취업 금지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누구도 정치인들이 은퇴한 뒤 그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라거나, 그냥 공기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낫다고 요구하지 않는다. 정치는 기한이 있는 직업이다. 따라서 임기가 끝난 뒤 품위 있게 퇴장할 방법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말하는 것은 정말 모든 것이 허용돼야 하느냐, 그리고 무엇보다 얼마나 빠르게 허용돼야 하느냐에 대한 규정과 질문에 관한 것이다. 퇴임자가 정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그가 정계에서 일했던 바로 그 분야와 관련된 일을 해도 되는지에 대한 얘기다. 이 사안에 대한 방침, 법, 행동 규정에서 영국·캐나다·미국 같은 나라들은 물론 심지어 유럽연합(EU)마저 독일보다 훨씬 앞서 있다.

댐은 언제 무너졌는가? 아마 헬무트 콜(제6대 총리·CDU) 때부터일 것이다. 1999년 그는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 자신의 집권기간 동안 상업방송 육성 정책으로 큰 이득을 얻은 영화·방송계의 거물 레오 키르히의 고문이 되었다. 키르히는 콜에게 자문 대가로 연봉 60만마르크 이상의 고용계약을 제시했다. 당시 콜이 늙고 돈이 필요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 뒤 새로운 SPD-녹색당 연정은 콜 정부에서 하던 것과 모든 것을 다르게 하려 했다. 하지만 막상 정치가들은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 2003년 베르너 뮐러 사건에서 밝혀졌다. 뮐러는 정계에 입문하기 전에 기업 경영자로 일했다. 그는 4년간 경제부 장관으로 일한 뒤 루르석탄AG의 최고경영자가 되었다. 이런 사례는 연이어 발생했다. 슈뢰더 정부에서 총리실 장관이던 한스 마르틴 부리는 리먼브러더스로 자리를 옮겼고, 은행 감독 분야 재무차관이던 카이오 코흐 베저는 도이체방크의 고문이 됐다.

하지만 가장 냉정하고 대담하게 진영을 바꾼 사람은 슈뢰더였다. 2005년 9월 연방의회 총선 패배 10일 뒤 가스프롬, E.ON 그리고 BASF가 발트해를 통과하는 가스 파이프라인 건설 계약이 서명됐다. 그 자리에는 슈뢰더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함께 있었다. 둘은 함께 노르트스트림 프로젝트를 이뤄냈다. 그리고 100일도 지나지 않아 슈뢰더는 파이프라인협회 감독이사회 의장 자리를 받아들였다. 슈뢰더는 파이프라인이 독일에 이득이 된다고 말했다. 폴란드가 새 파이프라인 계획에서 무시당하고 한 독일 총리에게 배신당했다고 느껴 독일-폴란드 관계에 긴장이 감돌았던 것은 슈뢰더에게 단지 감당할 만한 부수적인 피해로 여겨지는 것 같았다.

이후에도 이 사업에 대한 평가는 계속 양면적이다. 슈뢰더는 열정적으로 의심스러운 임무를 수행하고, 그의 친구 푸틴과 러시아를 비판으로부터 보호했다. 이런 그의 행동은 푸틴의 무제한적인 신뢰로 보답받았다. 그래서 푸틴의 제국에서 독일의 이권을 위해 나설 수 있는 독일인이 있다면 그건 바로 슈뢰더다. 이는 독일 경제에 상당히 좋은 일이다. 슈뢰더 자신에게도 나쁘지 않은 일이다. 노르트스트림 감독위원회 의장직으로만 그는 연간 25만유로를 받는다. 그는 경제잡지 과의 인터뷰에서 "내 지식을 하노버의 지방법원보다, 정치와 경제가 만나는 지점에서 더 잘 활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여론의 비난은 짧고 기쁨은 길다

이것만 해도 뻔뻔스러움의 정도가 아주 높지만 마티아스 베링거는 이마저도 넘어섰다. 2006년 2월 녹색당 의원이던 그는 연방의회에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와 연방을 상대로 한 분쟁에서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죄책감 없이 루르석탄에 자문을 해주는 슈뢰더를 심하게 비난했다. "나는 이와 같은 행동을 심히 불쾌하게 생각한다"고 베링거는 분노했다. 하지만 슈뢰더의 행위만큼이나 분노를 살 만한 일이 바로 1년 뒤 그가 정치계에서 은퇴한 방식이었다. 슈뢰더 정부에서 정무차관으로 건강한 식생활이란 주제를 담당하던 그는 어디에 취직했는가? 초콜릿 제조업체인 마르스였다.

비난은 짧고 즐거움은 길다. 대담하고 빠르게 더러운 도약을 해내는 사람은 그 행위에 대한 타인의 분노가 길지 않다는 사실에 마음을 놓아도 된다. 벌써 다음 사람이 나타났다. 힐데가르트 뮐러는 앙겔라 메르켈 총리실 장관에서 독일연방 에너지·수자원 관리협회로 자리를 옮겼고, 전 교통부 장관 마티아스 비스만은 연방의원 임기가 끝나자마자 즉시 자동차산업협회에 고용됐다.

ⓒ Der Spiegel 2012년 37호

Silberfüchse

번역 황수경 위원

2012-10-26

성경말씀 정리

성경말씀 정리

20121022부터 시작

에스겔 9-13

9 우상숭배자의 살육

10 주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남

11 이스라엘 지도자들에 대한 심판

포로된 이스라엘에 대한 소망

12 포로로 잡혀갈 것에 대한 상징

이스라엘을 위한 새로운 속담

13 그릇된 선지자에 대한 심판

그릇된 여선지자들에 대한 심판

 

11:20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11:21 그러나 미운 것과 가증한 것을 마음으로 좇는 자는 내가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갚으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14장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우상숭배 The Idolatry of Israel's Leaders

주의 심판에 대한 확신 The Certainty of the LORD's Judgment

15장 예루살렘- 쓸모없는 포도나무 Jerusalem- a Useless Vine

16장 예루살렘- 신실하지 못한 아내 Jerusalem- an Unfaithful Wife

예루살렘의 매춘에 대한 심판 Judgment on Jerusalem's Prostitution

17장 두 마리 독수리의 비유 A Story of Two Eagles

수수께끼의 해석 The Riddle Explained

18장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 The Justice of a Righteous God

18:22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 행한 의로 인하여 살리라

18:23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18:24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하고 악인의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죽으리라

18:25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들을찌어다 내 길이 어찌 공평치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치 않은 것이 아니냐

18:30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국문할찌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죄악이 너희를 패망케 아니하리라

 

18:22 All their past sins will be forgotten,and they will live because of the righteous things they have done.

18:23 "Do you think, asks the Sovereign Lord, that I like to see wicked people die? Of course not! I only want them to turn from their wicked ways and live.

18:24 However, if righteous people turn to sinful ways and start acting like other sinners, should they be allowed to live? No, of course not! All their previous goodness will be forgotten, and they will die for their sins.

18:25 "Yet you say, 'The Lord isn't being just!' Listen to me, O people of Israel. Am I the one who is unjust, or is it you?

18:30 "Therefore, I will judge each of you, O people of Israel, according to your actions, says the Sovereign Lord. Turn from your sins! Don't let them destroy you!

 

19장 이스라엘 왕을 위한 애가 A Funeral Song for Israel's Kings

20장 이스라엘의 반역 The Rebellion of Israel

심판과 회복 Judgment and Restoration

21장 주님의 심판의 칼 The Lord's Sword of Judgment

바벨론 왕을 위한 지시표 A Signpost for Babylon's King

암몬에 대한 예언 A Message for the Ammonites

22 예루살렘의 The Sins of Jerusalem

주님의 정제하는 풀무 The Lord's Refining Furnace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The Sins of Israel's Leaders

23 자매의 간음 The Adultery of Two Sisters

오홀리바에 대한 주의 심판 The Lord's Judgment of Oholibah

자매에 대한 주의 심판 The Lord's Judgment on Both Sisters

2012-05-15

서버 차단·전자투표 방해… 사무총국 ‘쿠데타 시도’ 의혹<세계일보>

서버 차단·전자투표 방해… 사무총국 ‘쿠데타 시도’ 의혹<세계일보>

통합진보 당권파 최후까지 ‘꼼수’

5·12 통합진보당 폭력 사태로 코너에 몰린 통합진보당 당권파의 마지막 저항선은 장원섭 전 사무총장이었다.

장 전 총장은 14일 공동대표단 회의에서 해임됐다. 그는 이 결정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듯 “정치적 책임을 지고 사무총장직을 공식 사퇴한다”는 ‘퇴임의 변’을 남겼다.

그는 중앙위 의장인 심상정 공동대표와 부의장 유시민 공동대표의 온라인 토론회 서버를 차단한 데 이어 중앙위 전자투표를 불허해 ‘하극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를 두고 당 안팎에선 “당권파가 쿠데타를 시도했던 것 아니냐”는 의혹이 나오고 있다.

장 전 총장은 전날 당 공동대표의 인터넷 토론회를 차단하면서 “사무총국에 공식적인 통보나 협조 요청 없이 진행되고 있는 사적행위”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중앙위 의장인 심 대표에 대해선 “의장으로서 지위 다툼의 여지가 있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당권파의 논리를 사무총장이 그대로 주장한 것이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이날 ‘당권파의 5·13 쿠데타’라는 글을 블로그에 올렸다. “당권파의 속셈은 지속적 회의 방해로 당 중앙위를 무산시킨 뒤 지도부 공백 사태가 발생하면 당권파인 장 총장 체제로 임시지도부를 구성하고, 다음달 1일 국회가 개원하면 원내대표를 선출해 원내대표가 사실상 당을 운영하는 체제로 가져가겠다는 것”이라는 내용이다.

이러한 시나리오는 장 전 총장이 전격 사퇴하면서 일단락됐지만 당내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얘기라는 분석이 나온다.

사무총장이 지휘하는 총무실은 당 회계·재정·당원 관리을 맡은 핵심부서다. 2008년 경기동부연합을 중심으로 한 당권파가 다른 정파의 진입을 허용하지 않은 곳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국민참여당, 진보신당 탈당파가 지분을 나눠 통합할 때에도 사무부총장 자리는 정파별로 배분했지만, 총무실 회계·재정 부문은 그대로 유지됐다.

비당권파에서는 혁신의 대상으로 총무실을 지목하고 있다. 경기동부의 브레인으로 알려진 이석기 당선자가 대표로 있던 기획사 CNP전략그룹이 당의 홍보 관련 사업을 사실상 독점할 수 있었던 것도 당권파가 총무실을 장악했기 때문이라는 인식이다.

총무실은 또 온라인 투표 시스템 개발 경험이 없었던 A사와 수의계약으로 시스템을 구축해 부실경선을 초래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장 전 총장은 사퇴했지만 여전히 총무실은 당권파에 맡겨 있다.

일각에서는 경기동부 출신으로 알려진 백승우 사무부총장이 총무실의 실세라는 분석이 나온다. 백 사무부총장의 부인은 경기동부 출신의 김미희 당선자다.

김 당선자는 이날 김선동, 오병윤, 이상규 당선자 등과 함께 중앙위 전자회의 효력과 공동대표단 권한을 부정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김달중 기자 dal@segye.com
입력 2012.05.14 18:53:07, 수정 2012.05.14 23:21:05
 

2012-05-14

친노 미운 오리새끼서 진보개혁 선봉… 유시민 다시 뜬다

통합진보당 당권파 내에서는 국민참여당 유시민 전 공동대표와 손을 잡은 게 결정적 패착이었다는 자성이 흘러 나온다. 유 전 대표를 얕잡아 보다 정파의 정치적 몰락까지 초래하고 말았다는 뒤늦은 후회도 있다. 당권파는 당초 국민참여당계 경선 후보의 부정선거 의혹이 당권파 비례대표 후보로 불똥이 튄 데 대해서도 '유시민의 기획 쿠데타'로 인식하는 경향이 짙다.

▲ 비당권파 회견
통합진보당 유시민(오른쪽부터)·심상정·조준호 전 공동대표가 퇴진에 앞서 14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전자투표를 비롯한 중앙위 결과를 발표한 뒤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조 전 공동대표는 지난 12일 중앙위에서 벌어진 폭력사태 때 입은 부상으로 목에 깁스를 했다.
김명국기자 daunso@seoul.co.kr

지난해 12월 통합진보당 창당으로 통합 주체들의 지분 배정에 따라 2대 주주였던 유시민 공동대표는 창당 5개월 만인 14일 대표직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유 전 대표는 통진당의 총선비례 대표 부정선거를 통해 주목받는 '정치인'으로 재부각되고 있다. 진보 진영의 아이콘이었던 이정희 전 공동대표가 비례대표 경선 부정과 당권파 폭력 사태로 인해 정치적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것과 대비된다.

유 전 대표는 이날 당권파를 작심하고 공격했다. 그는 MBC 라디오 인터뷰에서 "당의 권력을 쥐고 있던 분들이 대선 후보든 당 대표든 하고 싶다면 같이 해 주겠다는 의사를 수차례 전해 왔었다."고 폭로했다. 이어 "서로 변하기로 약속하고 통합을 해서 합법적이고 대중적인 정당으로 가기로 합의했지만 그분들을 지켜본 결과 이분들과 힘을 합쳐 파당을 짓게 되면 큰일 나겠다고 생각해 거절했다."고 설명했다.

당권파의 실세이자 당권거래설의 당사자로 지목된 이석기 비례대표 당선자도 비판했다. 유 전 대표는 "단순히 정치적인 욕심이든 이권이든 뭐든 있는 것 같다."며 "어떤 일이 있어도 당권은 못 놓겠다, 또 어떤 일이 있어도 이석기 당선자는 꼭 국회에 보내야 되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의 의사결정기관의 결정을 다 막아야 된다, 국회의원 임기가 시작될 때까지는. 이렇게 판단하고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유 전 대표는 한때 미운 오리새끼였다. 2003년 열린우리당 분당 때 민주당 당권파로부터 분열주의자로 낙인찍혔고 친노 진영의 분열이라는 비판 속에 지난해 1월 국민참여당을 창당했다. 그가 정계 입문 후 갈아탄 당적도 개혁국민당-열린우리당-대통합민주신당-무소속-국민참여당에 이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적 경호실장'이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분열주의자 이미지가 강해 민주당 등 기성 야권의 비토가 적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의 고향인 경남 김해을에서 치러진 지난해 4·27 보궐선거에서 패배했고, 앞서 2010년에는 야권 단일후보가 되고도 경기도지사 선거에서 떨어졌다. 적어도 대선후보군에서는 멀어졌다는 평가가 뒤따랐다.

그런 그가 강성 운동권 세력이 득세해 온 '호랑이 굴'을 쇄신하는 모습으로 정치적 재기를 이뤘다는 평가이다. 머릿수만 앞세우며 패권주의라는 자가당착에 빠진 당권파가 유 전 대표를 얕본 게 자충수라는 지적도 있다. 유 전 대표 역시 경기동부연합의 자주파(NL) 운동권 못지않은 강성이다. 강준만 전북대 신방과 교수는 '인물과 사상'에서 정치인 유시민에 대해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마키아벨리스트"라고 규정한 바 있다. 자신의 '개혁 열망'을 잣대로 '속도'의 문제를 '본질'의 문제로 탈바꿈시켜 낙인 정치와 선동 정치를 구사한다고 평가했었다. 유 전 대표 스스로도 이정희 전 공동대표와의 대담집인 '미래의 진보'에서 "이정희보다 훨씬 마키아벨리적인 사람"이라고 자평한 바 있다.

이번 통합진보당 사태를 진보적 자유주의자이자 대중 정치를 지향하는 '정치인 유시민'이 정파 프레임에 갇힌 '무능'한 NL 운동권을 쳐낸 '정치적 사화'로 보는 분석은 그래서 나온다.

통진당은 민노당 자주파와 국민참여당(유시민), 민중민주(PD)계의 진보신당 탈당파(심상정·노회찬)가 55대30대15의 지분으로 한 살림을 꾸린 정치적 연합체다. 정치 철학과 문화가 다른 세 정파는 4·11 총선을 통한 세력 확장이라는 정치적 실리가 유일한 결합 명분이었다.

통진당 사태의 이면에 담긴 최대의 아이러니는 유 전 대표와 연합해 당권파 숙청에 나선 심상정 전 공동대표가 당초 유 전 대표와의 통합을 강력하게 반대했던 인물이라는 점, 그리고 참여당과의 통합을 강하게 그리고 간절하게 원했던 세력이 다름아닌 지금의 당권파였다는 점이다.

유·심 두 전 공동대표는 1959년생 동갑내기이자 서울대 78학번 동기다. 정통 PD로 NL에 대한 이해가 깊은 심 전 대표는 유 전 대표가 NL 당권파와 절대 공존할 수 없다는 점을 예견하고 있었다. '유시민과 당권파의 전쟁'은 어느 한쪽의 백기 투항이나 당이 쪼개지지 않는 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안동환기자 ipsofacto@seoul.co.kr

[지지대] 봉변당하면 부쩍 크는 유시민

[지지대] 봉변당하면 부쩍 크는 유시민
2012년 05월 15일 (화) 김종구 논설실장 kimjg@ekgib.com

2004년 3월 12일 오전 11시 4분.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한 야당 연합이 국회 본회의장으로 들어선다. 11시 5분, 박관용 의장이 경호를 받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단상을 점거한 열린우리당 의원들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잠시 후 한나라당 의원들이 단상에 올라섰고 국회경비들이 진입했다. 한명숙 의원이 들려나가고, 임채정 의원이 끌려나가고…. 11시 22분 대통령 탄핵안은 가결됐다. 국회 로비에 내동댕이 처진 유시민 의원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머리가 헝클어지고 허리띠는 끊어졌고 속옷이 삐져나와 있었다. ▶시

사프로그램에 출연한 유시민의 입이 불을 뿜었다. "욕 들어가면서 4년 국회의원 하고 두 달 남은 의원들이 4년 남은 대통령을 쫓아낸다는 건 총 칼 없는 쿠데타입니다. 이재오 의원께서는 '이대로 가면 한나라당이 총선에서 진다. 탄핵안 반드시 가결시켜야 한다'고 하셨고, 최병렬 대표께서는 '탄핵안이 가결되면 국민의 뜻을 모아 대통령 선거를 할지 개헌을 할지가 결정 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권력찬탈 음모입니다.". 유시민의 독설은 탄핵 역풍의 논리가 됐고 그의 큰 정치를 알리는 신호탄이 됐다. ▶8년이 흐른 2012년 5월 12일 오후 9시 41분 킨텍스 회의장. 통합진보당 심상정 대표가 "강령 개정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됐다"고 선언했다. 그 순간 100여 명이 단상으로 난입했다. 당권파 당원과 대학생들이었다. 조준호 공동대표는 머리채를 잡힌 채 얻어맞고 옷이 찢어졌다. 심 대표는 구둣발에 짓밟혔고, 이를 말리던 유 대표도 여러 차례 얻어맞고 안경까지 날아갔다. 9시 45분, 현장을 빠져나가는 유 대표의 모습은 8년 전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이틀 뒤인 14일. 역시 시사프로그램에 출연한 유시민의 입이 다시 불을 뿜었다. "(당권파들이) 매우 잘 준비하고 현장에서 아주 조직적으로 지휘해서 폭력사태를 일으켰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석기 당선자는 국회에 보내야겠고 그러기 위해서는 임기가 시작될 때까지 당의 모든 의사결정기관의 의사결정을 다 막아야 한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당원들의 주장처럼)악착같이 이 당에서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끝까지 싸울 생각입니다". 8년 만에 다시 보는 데자뷰다. 봉변당할 때마다 불을 뿜는 유시민의 입. 그 입이 또다시 폭력 정국 뒤의 주도권을 틀어쥐는 쪽으로 가는 듯하다.

김종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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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8

'인간 이순신' 연구 40년 헌법재판소 김종대 판사

[Why] [김윤덕의 사람人] '인간 이순신' 연구 40년 헌법재판소 김종대 판사

 

입력 : 2012.04.27 14:12

둔재에 왕따… 청년 이순신은 '거북이'였다

오늘 충무공 탄신 467주년 - 서울 광화문의 이순신 동상. 맹장(猛將)으로 묘사한 조각가 김세중의 작품이다. / 조선일보DB

37년간 '성웅(聖雄)'이순신과 함께 살았다. 그냥 이순신이 좋았고 그래서 이순신과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았다. 1975년 공군 법무관 시절 서점에서 우연히 집어든 이은상의 책 '충무공의 생애와 사상'을 읽고부터다. "초임 판사 때 출장비 2만원 중 몇천원이 남아 총무팀에 돌려준 것도 이순신처럼 청렴한 공직자가 되고 싶어서였는데 총무과장에게 되레 혼만 났다"며 64세의 베테랑 재판관은 아이처럼 웃었다.

헌법재판소 김종대(64) 수석재판관이 일생의 업으로 여기고 매진했던 이순신 연구를 세상에 내놨다. '이순신, 신(臣)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시루)는 충무공의 생애와 리더십을 집대성한 그의 역작이다. 2002년 첫 책을 출간한 뒤 세 차례 개정하고 증보했다. 그는 "짧고 좁은 안목으로 성웅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 쓰고 또 쓰고 고치고 또 고치기를 반복했다"고 했다.

충무공 탄신 467주년을 닷새 앞둔 23일, 서울 재동 헌법재판소에서 그를 만났다. 김 재판관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갈등, 물질중심주의, 극단의 이기주의로 병든 대한민국을 치료할 약재는 충무공 정신밖에 없다"고 했다. 12월 대선에 관해서도 "진정 나라와 국민을 사랑하는 지도자를 선택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법고시 동기이자 '8인회' 멤버로, 노 대통령에게 이순신 리더십에 대한 영감을 심어준 사람이기도 하다. 노 대통령에 대해서는, "국민을 사랑한 대통령이었으나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했다.

서울 세종문화회관에 자리한‘충무공 이야기’전시관은‘이순신맨’인 김종대 재판관이 강연차 종종 찾는 곳이다. 그는“거북선의 우수성, 뛰어난 전략전술보다 위대했던 것은 이순신의 인격이었다”고 말했다. /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늦깎이 사회생활 -33세에 武科 재수로 합격… 그나마도 중간 이하 성적
밤낮 상사들에 직언하다 40대, 종6품 겨우 오른 분

병든 사회, 이순신이 名藥 -
맡은 일 목숨걸고 전심전력, 결과는 괘념치 않는 초연함 '충무공 정신' 주사 만들어 공직자들에 놔주고 싶다

이순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책 제목이 독특합니다.

"헌재 후배 판사들이 정해줬어요. 이순신 장군이 출전을 앞두고 임금에게 마지막으로 하는 인사였지요.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자신감이 담겨 있습니다. 실제로 유비무환(有備無患)이 이순신 리더십의 핵심 중 하나지요. 새 지도자 선출을 앞둔 올해 꼭 필요한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이·순·신' 하면 식상한 느낌이 듭니다.

"김 기자는 이순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 국민의 70%가 이순신을 가장 존경하는 위인으로 꼽지만 그에 대해 말해보라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됩니다. 나도 '거북선으로 왜적을 물리치고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영웅'이라고만 알았지요. 한데 이은상의 책을 보니 이순신에 대해 알고 있는 게 100의 1도 안 됩디다. 아, 세상에 무슨 이런 사람이 있나 싶었어요. 정신이 몽롱해지는 게 그때 든 상사병이 지금까지 온 겁니다.(웃음)"

―어디에 감동을 받으셨나요?

"전혀 몰랐던 일화들 때문이죠. 초급장교 이순신을 어려서부터 알고 지냈던 유성룡이 권합니다. 같은 덕수 이씨 문중인 이이를 한번 만나보라고. 이이는 병조판서를 지냈으니까요. 이순신은 고개를 젓습니다. 인사문제로 집안 어른을 만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거죠. 이건 전해오는 이야기입니다만 정언신이라는 정승이 '정여립의 난'에 연루돼 감옥에 갇혔는데 당시 전라도 정읍현감이던 이순신이 그 소식을 듣고 당장 면회를 갑니다. 자칫 본인의 신상에 위험이 닥칠 수 있는데도 이순신은 기어코 찾아가지요. 아, 이 사람 지독히 올곧으면서도 의리가 있는 사람이구나, 융통성 없고 기이한 사람이구나 싶데요. 성웅이기 전에 인격자로 보였습니다."

―어떤 자료들을 수집하고 연구하셨나요? 우리 사회에 프로·아마 이순신 전문가들이 많은데요.

"나는 학익진 전법이 뭔지 자세히 모릅니다.(웃음) 나는 다만 이순신의 내면세계를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걸 위해서는 충무공전서, 난중일기, 임진장초 등 몇 가지 사료만으로 충분했지요. 나의 지력(智力)을 탓해도 자료를 탓할 순 없습니다."

이순신은 관료사회 부적응자였다

―왜 고치고 또 고치기를 반복하십니까.

"동료 재판관이 똑같은 질문을 하데요. 무슨 사료가 바뀌었길래 다시 책을 고쳐 쓰느냐고. 법(法) 하는 사람들은 법이 개정돼야 새 책을 내지 않습니까.(웃음) 그때 다른 동료가 나를 두둔합디다. 시인이 똑같은 대상을 두고 시를 한번 읊었다고 해서 두 번 다시 그 대상을 두고 읊지 말라는 법 있느냐면서요. 돌아보니 이순신에 대한 나의 관심은 참공직자의 사표에서 성공하는 리더의 모델로, 그리고 '인격자' 이순신으로 옮겨갔더군요. 이순신 리더십의 본질은 그의 인격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순신은 무관에 뜻을 품었던 22세부터 미관말직에 나아가는 32세에 이르는 동안 치열한 자기 수양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선비 같은 장군'의 풍모를 보여주는 영정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이순신은 논어, 중용 등을 읽으며 정신 수양에 열성을 다하지요."

―책에 보니 이순신 장군은 천재도 아니었고, 관료사회에도 적응하지 못한 공직자였더군요.

“28세 때 처음 응시한 무관시험에 떨어지고 32세에 합격합니다. 그것도 중간 이하의 성적으로요. 조직 적응 능력도 상당히 떨어졌지요. 유성룡 같은 이가 오죽하면 이순신은 밀고 당겨주는 이가 없어서 출세가 늦었다고 했을까요. 남들 뒷방노인 될 나이인 40대에 정읍현감(종6품)에 겨우 오릅니다. 밤낮 상사들한테 직언을 해대는데 누가 밀어주겠어요? 고흥 발포만호성에서 근무하던 시절 상관이 거문고를 만들기 위해 만호영 뜰에 있던 오동나무를 베어가려 하니 ‘공물을 사사로이 처분할 수 없다’며 이를 막아섭니다. 훈련원에서 봉사직으로 있을 때는 직속상관 서익의 인사가 법과 원칙에 어긋난다며 이의를 제기하지요. 그날의 앙심으로 나중에 서익이 이순신을 파면하는데 앞장서게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종6품 현감에서 정3품인 전라좌수사로 발탁됐을까요?

“나라가 급하니까, 전쟁상황이니까요. 유성룡은 이순신을 너무나 잘 알았어요. 저건 장재(將材)다 하고 선조에게 적극 추천했지요. 나는 이순신의 이런 면모가 요즘 청년세대에 위로와 희망을 준다고 생각해요. 취직하기 어렵다고 아우성인데, 이순신으로 치면 33세에 직장을 구한 셈이지요. 출발이 늦은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문제는 들어가서 얼마나 열정을 가지고 바르게 자기 책임을 완성하느냐는 거지요.”

이순신 리더십의 원천은 그의 어머니

―새롭게 고친 부분이 많다고 하셨는데요.

“그 중 하나가 이순신 장군 모친에 관한 부분입니다. 이순신이 극진한 효자였다는 건 널리 알려져 있지요. 전쟁 중 다른 가족은 다 아산에 두고도 어머니만은 자신의 진지 옆에 모셔와 언제나 문안을 드린 효자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거북선 만들던 여수 진남을 답사해보니 그게 아니에요. 어머니 계시던 곳은 배 만들던 선소에서 4㎞, 본부에서는 9㎞나 떨어진 곳으로 매일 아침 이순신 장군이 문안을 드리러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지요. 문안이 아니라면 왜 이순신은 그 위험천만한 최전방에 어머니를 모시고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데요. 내가 내린 답은 전방에 와 있겠다고 한 건 어머니 자신이었다는 겁니다.”

―어머니는 왜 전쟁터로 오셨을까요.

“이순신은 서울 사람입니다. 명보극장 있는 마른내(근천동)에서 태어났죠. 그런데 집안이 가난하니 어머니가 친정인 충남 아산으로 식솔을 모두 끌고 내려갑니다. 강한 여인이었죠. 이순신은 그런 어머니를 ‘천지(天只)’라고 표현할 만큼 따르고 존경했는데, 아들의 그런 성품을 잘 아는 어머니가 전쟁 중에도 자식이 나랏일을 실수없이 하도록 스스로 전쟁터로 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순신 일대기를 두고 이런저런 말들이 많더군요. 그중에 노량해전에서의 이순신 자살설도 있습니다.

“‘불멸’의 한 방법으로 자살을 택했다더군요. 소설이라고는 해도 그건 이순신의 인생을 완전히 왜곡하는 겁니다. 이순신에게 왜적은 불의와 탐욕의 집단이자 죄 없는 백성을 죽이는 범죄집단이었어요. 명량해전에서 대패한 왜적은 보복 차원에서 아산에 있는 장군의 막내아들을 죽입니다. 이순신으로서는 응징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죽기 전날 이순신은 ‘이 탐욕의 무리를 다 죽이고 내가 죽을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는 기도를 합니다. 자살할 사람이 이런 기도를 하겠습니까?”

―정유년 초 왕명을 어긴 죄로 투옥되었다 풀려나 백의종군하다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 명량해전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기까지의 기간을 이순신 생애의 핵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순신 인격의 정점을 보여주는 시기죠. 자신에게 사형까지 명했던 왕이 다시 초토화된 전쟁터로 나가라고 하는데, 나 같으면 그 명령 안 받습니다. (웃음) 거느릴 군사와 배와 총포도 없는 상황에서 그건 죽으라는 얘기와 다르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이순신은 받아들입니다. 이순신의 눈에는 자신이 지켜야 할 국토와 백성만 있지, 정치권력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12척의 배와 찌꺼기 병력으로 400척의 왜적을 무찌르는 명량대첩을 이뤄냅니다. 연구자들은 판옥선의 우수성, 학인진 전법 같은 것을 승리요인으로 얘기하지만, 내 생각은 다릅니다. 도망쳤던 병사들이 ‘이순신이 왔으니 우리는 이길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모여든 것, 장수와 병사들 간의 굳은 신뢰와 소통이 승리의 결정적인 요인이 된 거죠.”

―이순신은 약점이라고는 없는 사람이었습니까?

“나도 그 약점을 찾아서 얼마나 헤맸는지 몰라요.(웃음) 이순신이 장수답지 않게 감성적이고 과장적인 표현을 즐겨 쓴다는 것밖엔 없더군요. 위로 두 형이 죽어 장자 역할을 했던 이순신이 조카들과 헤어지는 장면에서 슬픔을 애절하게 표현하는 대목을 보면 이 사람이 장수가 맞나 할 만큼 연약하게 느껴집니다. 그렇다고 비난할 일도 아니지요. 그래서 포기했습니다. 있는 허물을 감추는 것도 안 되지만 없는 허물을 들춰내는 것도 옳지 않다는 게 나의 변명입니다.”

어진 선비의 풍모로 묘사된 이순신 영정. 김종대 재판관은“12월 대선에서는 이순신처럼 나라와 국민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지도자가 뽑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친구였던 노무현 前대통령 - 부정과 불의에 대한 분노, 구국으로 발전시키지 못해
이순신처럼 국민 아꼈지만 자기와의 싸움에서 졌다

막말 판사들에게 고함 -
양심 위에 법률 있고 법률 위에 헌법 있는데
개인 양심으로 法을 깬다?… 그럼 법복 벗어야지

강자의 약자 억압엔 철퇴 - 여성·어린이·장애인 해코지 합의됐다 해도 실형 선고
힘없는 국민 압박해 저지른 공무원 부정도 중대 범죄다

이순신처럼 살고싶다 - 초임 시절 출장비 2만원 중 몇천원 돌려줬다 혼나기도
이순신 팬들 많아지면 대한민국 훨씬 건강해질 것

삼성자동차, 그리고 지율 스님

경남 창녕 출신의 김종대 재판관은 1979년 부산지법 판사를 시작으로 2006년 헌법재판소 재판관으로 임명되기까지 부산·울산·경남 지역에서 활동해온 대표적인 ‘향판(鄕判)’이다. 법조계에서는 ‘조정의 달인’으로 통한다. 삼성자동차 조정 사건은 유명하다. 파산 위기의 삼성자동차를 기사회생시켜 부산 경제는 물론 국가 경제의 손실을 최소화했다. 공직자 비리와 여성·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범죄는 엄벌하는 것으로도 이름이 높다. 그는 “강자가 약자를 힘으로 밀어붙이는 범죄를 가장 경멸한다”고 말했다.

―삼성자동차 사건으로 ‘조정의 달인’이란 별명을 얻으셨지요.

“삼성자동차가 르노에 인수되지 않으면 파산하게 돼 있는 상황이었어요. 르노는 5500억원 이상은 안 주겠다고 하고, 르노가 삼성을 인수하면 국부 유출이라는 비난도 있었고요. 문제는 삼성자동차가 파산하면 대한민국 경제가 5년간 20조원의 적자를 본다는 사실이었어요. 당장 1만명의 종업원이 쫓겨나고 지역경제가 파탄납니다. 그래서 국민들을 설득하고 채권자인 삼성물산과 은행권을 설득했지요. 당신들이 손해를 보고 국가를 살리자 했습니다. 채권단의 거센 저항이 있었지만 내가 이 일로 옷을 벗어도 좋다는 각오로 임했습니다.”

―천성산 도롱뇽 사건의 항소심 재판장도 맡으셨었지요?

“아쉽게도 조정에 실패한 사건입니다. 나는 천성산 터널 문제가 서울 사패산 터널처럼 국가와 환경단체가 서로 양보하고 이해해서 잘 해결되기를 바랐어요. 타협이 되자 터널 공사할 때 스님들이 나와 목탁도 두드려주셨으니까요.(웃음). 그런데 천성산은 안 됐어요. 터널을 뚫었을 때 생태계에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를 입증하는 실험을 해보자는 중재안을 갖고 계속 설득했는데 말을 안 듣더군요. 더 이상 기다렸다간 나라 꼴이 엉망이 되니 공사를 재개해도 좋다는 판결을 내렸지요.”

―그 판결을 주제로 어느 월간지와 인터뷰를 하셨다가 지율 스님으로부터 ‘소송과정을 왜곡하고 사실을 호도했다’며 손해배상 소송을 받게 됩니다. 1심, 2심 모두 원고 패소 판결이 났습니다만.

“많이 반성했습니다. 모두 내 인격 탓이지요. 나는 지율 스님을 원망하지 않아요. 자기 욕심으로 일하는 분이 아니어서 좋더군요. 충분히 타협해서 지혜롭게 공사를 진행할 수 있었던 일이 그렇게 어그러져 아쉬울 뿐입니다. 천성산 물의 흐름이 바뀌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니 더더욱…. 나는 일도양단의 명판결을 내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능하면 양쪽이 조금씩 양보해서 중도적 결론을 내리는 것이 정의의 가치에 부합한다고 봅니다.”

―공직자 비리에 굉장히 엄격한 판결을 내리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범죄가 강자가 약자를 힘으로 밀어붙이는 겁니다. 여성과 어린이, 장애인을 해코지하는 범죄와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 부정하게 식품을 만들어 파는 사건은 설령 합의가 되었다 해도 실형을 선고합니다. 공무원의 부정도 그 공무원이 힘없는 국민을 압박해서 저지른 범행이라면 중대범죄로 다스려야 합니다.”

―최근 사법부에 국민들의 비판적 관심이 급증했었지요.

“나도 영화 ‘부러진 화살’은 봤어요. 많은 법관이 왜 우리를 이렇게 묘사했느냐며 반발했지요. 하지만 변명 이전에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국민들이 왜 그렇게 우리를 바라보는지 반성하고 오해를 사지 않을 방법을 이제부터라도 찾아나가는 게 중요하지요. 그래야 100가지 불만이 10가지로 줄어들고 우리 사법부도 발전합니다.”

―서기호 판사 등 일선 판사들의 정치적 발언과 막말이 비난을 받았습니다.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해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재판하는 사람입니다. 양심보다 더 위에 있는 게 법률이고, 법률보다 더 위에 있는 게 헌법입니다. 내 개인적 양심으로 헌법도 깨고 법률도 깬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헌법을 모른다? 그럼 법복을 벗어야지요.”

대통령은 모두의 대통령

―다시 이순신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이승만, 박정희, 노무현 등 역대 권력들이 이순신 리더십을 강조해왔습니다.

“권력자라면 누구나 이순신을 활용하고 싶을 겁니다. 정치인들이 이순신을 너무 좋아하는 바람에 학자들은 외려 이순신 교육을 회피할 정도지요. 권력에 아부한다는 오해를 살까봐.(웃음) 중요한 건 그 지도자가 진정 이순신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 변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 중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정말 이순신을 좋아했고 그 길을 가고 싶어했던 것 같습니다.”

―노무현 대통령과는 사이가 각별하셨지요. 노 대통령이 어느 날 이순신을 들고 나온 것도 재판관님 영향을 받은 걸까요?

“2002년 첫 책이 나왔을 때 읽어보라고 주긴 했는데 내 책은 안 읽고 ‘칼의 노래’만 읽은 것 같습니다.(웃음)”

―친구이기도 한 노 대통령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이 바탕이 된 지도자였던 건 맞아요. ‘사람 사는 세상’을 구현하고 싶었던 것도 결국 그 마음이 바탕이 됐겠지요. 그런데 그 마음을 한 차원 승화시키진 못했어요. 부정과 불의에 분노하는 마음은 대단했으나 그걸 진정한 구국으로 발전시키지는 못했지요. 자기와의 싸움에서 진 게 아닌가 싶어요. 반대자들과 소통하지 못하고 화합을 이루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자주 만나셨습니까.

“재임 시절 대여섯 장의 편지를 써서 건넨 적이 있어요. ‘대통령은 모두의 대통령이니 마음에 안 드는 집단이 있다고 해도 다 안고 가야 한다’는 내용으로요. 받기는 받았는데 읽었는지는 모르겠어요.(웃음) 이순신 장군이 숱한 모함과 고초 속에서도 평상심을 유지했던 것은 자기를 통제하는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이길 힘을 기르지 못한 게 노무현의 가장 큰 패인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이 시대에 이순신 정신은 왜 필요합니까.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배운 자와 못 배운 자, 이념적으로는 남과 북, 물질중심주의, 극단의 이기주의로 우리 사회는 병들어 있어요. 이걸 치료할 약재로 충무공 정신만 한 게 없습니다. 매사 원칙에 따라 정의의 외길을 간 것, 일을 당하면 목숨을 걸고 전심전력한 것, 결과에 괘념하지 않는 것, 선공후사(先公後私)에 철저했던 것 등등 할 수만 있다면 그 정신을 주사약으로든, 당의정으로든 만들어서 공급하고 싶어요.(웃음) 특히 자라나는 아이들과 젊은이들에게 이순신을 제대로 공부시켜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한국은행 총재 하셨던 이성태 선생이 그러시데요. 70이 다 된 지금도 이순신의 한마디가 머리에 박혀 있다고.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벼슬을 얻게 되면 나가 충성을 다하고 벼슬을 얻지 못하면 농사지으면 되지 헛되이 명예를 구해서 기웃거리는 것은 장부가 할 일이 아니다’는 그 말을 듣는 순간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내일이 선고인데도 내가 만사를 젖혀놓고 인터뷰를 하는 것도 그 때문이에요. 이순신 팬을 많이 만들고 싶어서, 그를 닮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우리 사회는 훨씬 건강해질 겁니다. 이순신, 정말 괜찮은 사람이에요.”

2012-04-21

고난주간 설교말씀, 이재철 목사님, 2012.04.04. 4월3일자.

의-

절제-

심판-
14296단어.
하나님은 평등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우리는 같은 인간으로 태어났다. 그것은 평등.
그러나 우리 삶에 대한 하나님의 대응은 다 다르다.
하나님은 공평의 하나님이시다.
심판의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왜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히게 하셨겠나.
마20장 달란트 비유처럼, 우리에게 주신 가능성에 대한 우리의 노력을 보시고 상을 주신다.

이신칭의.
성화.
하나님의 셈하심.

벨릭스는 심판에 대해 듣지 못했으니 놀랐다.
그러나 믿지는 않았다.
두려움을 느끼는 것과 믿는 것은 별개이다.
이 어리석은 벨리스가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토록 말씀 많이 듣지만... 그걸 내 삶에 적용하지 않는다.

믿음의 진행은 역순임을 모르기에.
내가 하나님의 심판을 먼저 믿을 때 자기부인도 할 수 있고, 그럴 때 의...

시험을 의식하는 학생만 공부한다.
심은대로 거두는 것을 아는 학생만 열심히 하게 된다.
하나님의 심판을 먼저 믿기 전에는 자기부인

고전7:1,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6:18- 우리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자신을 깨끗이 하자...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운데가 아니다.

왜 두려워하나? 그 아버지는 심판의 하나님이시요, 내 삶의 결과에 따라 상주시는 분이시기에.
그래서 심판을 믿음으로 자기부인의 거룩한 삶을 살자....

그 기준은 말씀.
그럴 때 의와 절제의 삶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오늘날 교회가 욕먹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상주심을 믿지 않기 때문에... 이 상은 이 땅이 아닌, 저
천국에서 주시는 것인데... 그걸 잊으니 교회가 교회다움을 상실했다.

심판의, 상주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가 변화될 수 있다.
그 하나님을 믿는다면 어려워도 소망을 가질 수 있다.

바울처럼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해도 저 천국에서 상급을 받을 수 있기에...

그러나 그걸 믿지 않으면 이 세상 떠날 때 후회할 수밖에 없다.

이 고난주간이 새로운 행진하는 귀한 시간이 되자.

2012-04-02

[NEWS & VIEW] '민간사찰 정국' 반전, 그리고 혼전

지난 29일 KBS 새노조의 사찰 문건 폭로로 시작된 '사찰 정국'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고 있다.
정국이 사찰 문제로 본격 요동을 치게 된 것은 지난 29일 저녁 파업 중인 KBS 새노조가 "총리실의 3년치 사찰 내부 문건 2619건을 단독 입수했다"며 보도자료를 돌린 게 계기다.
여야가 일제히 이명박 정부를 비난하던 상황이 31일, 청와대 최금락 홍보수석이 민주통합당과 전국언론노조 KBS본부가 폭로한 문건 2619건에 대해 "그중 80%가 넘는 2200여건은 현 정부가 아니라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가 총리로 재직하던 노무현 정부에서 이뤄진 사찰 문건"이라고 말하면서 1차 반전이 이뤄졌다. 최 수석은 "이 정부에서 작성한 문건은 공직자 비리와 관련한 진정, 제보, 투서, 언론 보도 등을 토대로 조사한 400여건으로 대체로 제목과 개요 정도만 있고, 실제 문서 형태로 된 문건은 120건 정도"라고 했다.
그러자 1일 노무현 정부 때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문재인씨는 기자회견에서 "노무현 정부 때 것은 적법 절차를 따른 공직 감찰"이라고 말했다. 그는 전날 트위터에 "참여정부에선 불법 사찰 민간인 사찰, 상상도 못했습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이에 청와대는 물론 총리실까지 나서 "DJ·노무현 정권 때도 정치인·민간인을 사찰했다"면서 그 사례를 공개했다. 최금락 수석은 "노무현 정부 시절 국무총리실 조사심의관실(공직윤리지원관실의 전신)이 2003년엔 김영환 의원(당시 민주당)과 윤덕선 인천 농구협회장, 2004년엔 허성식 민주당 인권위원장, 2007년엔 전국전세버스운송사업연합회 김의협 회장 등 다수의 민간인 등을 사찰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최 수석은 "노무현 정부 시절 국정원 직원이 이명박 대통령(당시 서울시장) 주변 인물 131명을 불법 사찰해 작년 4월 유죄 판결을 받았고, 노무현 정부 때도 정부 내 사정기관에서 'BH(청와대) 하명사건'을 처리했다"며 "이 역시 정당한 사찰이었는지 궁금하다"고도 했다. 그러자 민주통합당은 최근 공개된 공직윤리지원관실 점검 1팀의 '사찰 문건'은 전체 민간인 사찰 규모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이며, 전체 7개 팀인 지원관실의 활동 내역이 모두 공개되면 실제 불법행위는 더 있을 수 있다고 맞섰다.
이같은 양 진영의 폭로전(暴露戰)에 대해 법조계의 한 원로는 "아무리 선거가 급하다지만 민정수석실·총리실 등의 정당한 활동까지 불법 사찰로 몰아붙이고, 명예훼손이 분명한 내사 대상자의 신분까지 까발린다면 국정 운영의 메커니즘까지 무너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영호 前비서관 구속 영장
한편 '민간인 사찰'을 재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은 지난 31일 조사한 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에 대해 1일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원문기사: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4/02/2012040200133.html

2012-03-31

일본 ‘전자책 시장 키우기’ 나섰다

일본 정부가 전자책 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해 출판업계와 손을 잡기로 했다. 출판업계가 추진하고 있는 전자책 제작과 유통망 확충에 정부가 출자한 펀드 등이 거액을 투자하기로 한 것이다.

29일 보도를 보면, 일본 정부가 90%의 지분을 가진 관-민 합동 펀드인 산업혁신기구는 내년 2월에 출판업계가 연합해 설립하는 출판디지털 기구에 150억엔을 투자한다. 출판디지털기구는 고단샤 등 3개 대형 출판사와 인쇄회사 등이 중심이 되어 설립하는 회사로 100만권의 책을 전자책으로 만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산업혁신기구는 이 회사의 자본금 170억엔 가운데 90%를 출자해 최대주주가 될 예정이다. 일본 정부가 100% 출자한 정책금융기관인 일본정책투자은행은 미쓰이물산과 도시바, 엔이시 등과 함께 전자책 배신 서비스회사인 '북 라이브'와 자본제휴를 하겠다고 발표했다.

정부 투자기구들의 이런 움직임은 전자책 시장을 키우기 위한 것이다. 일본의 전자책 시장은 현재 연간 600억엔(약 8000억원) 규모인데, 2015년에는 2000억~3000억엔 규모로 성장할 것이라고 미쓰이물산은 내다보고 있다.

도쿄/정남구 특파원 jeje@hani.co.kr

박근혜 대 문재인…사활건 '대선 전초전' 개막
현직 부장검사 회식자리서 여기자 2명 몸 더듬고 성추행
날 감시하는 누군가가 자막을 띄웠다
김윤옥 국립중앙박물관 만찬, 어떻게 봐야 하나?
'라면의 남성성' 과학분석으로 밝힌다?

그는 자살하지 않았다...경찰은 왜 속였나


'운동권' 학생이었던 1992년, 나는 직업적인 운동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내가 선택한 분야는 '인권 운동'이었다. 거칠게 표현해서 1970~80년대가 '노동운동'이 대세였다면 87년 6월 항쟁 이후 1990년대 초까지 대세는 분명 '통일운동'이었다.

하지만 나는 '인권 운동'을 선택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1990년 3월, 학생운동을 함께하던 동료의 억울한 의문사를 밝히고자 싸우던 중 겪었던 경험 때문이었다. 너무나 힘들고 무섭고 고통스러웠던 그때, 누구라도 좋으니 절박한 호소를 들어줄 누군가가 정말 그리웠다.

그러다가 집시법 위반으로 영장이 발부된 1991년 3월, 수갑과 포승줄로 묶인 채 호송되는 버스 안에서 '직업적인 인권운동가'가 되겠다고 처음으로 결심했다. 나 같은 처지의 누군가에게 작은 힘이 되어 주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간절함이 이후 인권운동가의 길로 접어든 계기가 되었다.

'유서대필 강기훈 사건'이란?1991년 4월 26일. 당시 명지대생 강경대(20)씨가 경찰의 쇠파이프에 머리를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총학생회장 석방 요구 시위에 처음 참여한 새내기였던 강씨를 경찰이 쇠파이프로 때려죽였다는 충격적인 사실과 이에 따른 반발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 울분을 참지 못한 학생과 시민들이 정권 퇴진을 요구했고 시위는 확산 일로를 거듭했다. 노태우 군사정권의 분명한 위기였다. 그러던 1991년 5월 8일 아침, 한 재야 활동가가 정권 퇴진 요구 유서를 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이었다. 그런데 경찰·검찰·안기부(현 국정원) 등으로 구성된 소위 '관계기관 대책회의'에서는 잇따른 분신 사건 배후에 이를 조종하는 세력이 있다는 '분신 배후설'을 제기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사건이 이른바 '유서대필 강기훈 사건'이었다. 당시 검찰은 김기설에게 유서를 대신 써 준 사람을 검거한다면서 여러 명을 거론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유서 대필범으로 '정해진' 이가 김기설의 동료였던 강기훈씨였다.  그것은 진실과는 상관없었다. 정권의 위기 탈출을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유서 대필범'이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 어처구니없는 '거짓말'을 매일 매일 조중동이 써대니 처음엔 믿지 않던 국민도 이내 혼란으로 빠졌다. 진짠가? 아닌가? 마치 지금 천안함의 진실을 두고 벌어지는 현상처럼 말이다.


생각해보면 인권운동가의 숙명은 '세상의 거짓'과 싸우는 것이 아닐까 싶다. 처음 활동한 단체가 '유서대필사건 강기훈 무죄석방 공대위'였다(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나는 그곳에서 간사로 일했다.

결론적으로 '유서대필 사건은 조작'이었다. 2007년 11월 13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이하 '진실위')의 발표였다. 진실은 역시 단순했다. '유서는 김기설의 필체가 맞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강기훈씨가 '유서 대필범'이라는 '거짓말'이 공식적인 거짓으로 밝혀지기까지 16년의 허망한 세월이 필요했다. 그리고 강씨는 3년 2개월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했다. 그와 그 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정신적 고통과 상처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가혹했다. 다시 한번 그에게 위로를 전한다.

이처럼 내가 해온 인권 운동은 '거짓과의 싸움'이었다. 대부분 경찰·검찰 등 국가 권력의 피해를 호소하는 이들을 만나 그들의 사연에 귀 기울여주는 일이었다. 예를 들어, 19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사망사건이라든가 전남 완도 존속살인 여 무기수 사건이 그랬다.

또한, 서울 모 여고 재산관리인으로 일하다가 청부 살해된 이 역시 아픈 상처로 남아 있고 살인범으로 15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어떤 청년의 불행한 사건 역시 내가 관여한 사건 중 하나였다.

억울한 죽음, 신호수를 아시나요?



그 가운데 1994년 내가 두 번째 인권단체 활동가로 일한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에서 만난 분들의 사연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처음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벽면을 빼곡하게 채웠던 영정 사진 앞에서 나는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너무나 많은 이들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던 야만적인 시대가 있었다. 박종철, 이한열, 김성수, 이철규, 이내창, 박창수, 김귀정 등등등. 낯익은 이름과 얼굴들 속에 유독 내 관심을 끌었던 이는 낯선 이름 '신호수'씨였다. 사건 당시 23살(1963년생)이었던 신씨가 불행한 사건에 연루된 것은 전두환 독재정권이 마지막으로 발악하던 1986년이었다.

1986년 6월 11일, 신호수는 직장인 인천에서 서울 서부경찰서 대공과 소속 경찰관에게 체포된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였다. 공안사건과 상관없는 그가 이같은 혐의로 체포된 이유는 자신의 자취방 장판 밑에 숨겨둔 북한 삐라 34장 때문이었다. 경위는 이랬다. 1985년 전남 장흥에서 방위 복무를 했던 신호수는 소집 해제 후 이사를 했다. 그런데 방 주인이 방바닥에 깔려있던 삐라를 발견했고 이를 경찰에 신고하면서 그의 운명은 꼬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신호수는 왜 이처럼 많은 삐라를 보관했던 것일까? 조사 결과 이는 군 포상휴가를 받기 위한 것으로 밝혀졌다. 실제로 신호수가 복무하던 부대에서는 상당량의 삐라를 가져오면 포상 휴가를 줘 왔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그의 삐라 관련 의혹은 해소되었다. 하지만 신호수는 가족들에게 돌아가지 못했다. 가족들에게 들려온 소식은 신호수의 사망이었다.

경찰에 연행된 지 8일이 지난 6월 19일, 신호수는 엉뚱하게도 자신의 고향인 여수 돌산읍 대미산의 한 동굴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되었다. 경찰은 사인을 '자살'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일반적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발표를 믿을 수 없었다.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신호수의 사망 경위였다.

당시 경찰은 "신호수가 입고 있던 옷을 벗어 그 끝을 묶은 후 동굴 천장 부근의 바위틈에 끼워 빠지지 않게 하고 목을 매 자살했다"고 결론 내렸다. 하지만 경찰의 이러한 주장은 억지에 불과했다. 신호수의 사체를 처음 목격한 유아무개씨가 2001년 의문사위에 출석하여 진술한 내용이다.

"(사건 직후) 현장 검증에 참석하라고 하여 경찰들과 함께 동굴에 갔다. 그러면서 경찰이 나에게 발견 당시 상황을 설명하라고 했다. 이후 경찰들은 내가 목격한 것처럼 신호수의 자살 자세를 재현하고자 시도했으나 끝내 실패했다."

경찰의 뻔한 거짓말이 밝혀지기까지 23년 세월 흘러



그렇다면 경찰은 왜 신호수의 자살 경로를 재현하지 못했을까. 애초부터 자살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경찰의 주장처럼 신호수가 자살하려면 약 2.5미터나 되는 동굴의 천장까지 올라가 그 틈에 옷의 뭉치를 걸어야 했다. 그러나 이렇게 하려면 제3의 누군가가 도와주거나 또는 사다리 등 도구가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경찰의 실패는 당연했다.

그런데 불가능은 이것 말고도 또 있었다. 신호수의 자세였다. 사체 발견 당시 신호수는 묘하게도 양팔과 몸통이 허리띠로 묶여 있었다. 그래서 가정한다면 신호수는 먼저 자신의 양팔과 몸통을 허리띠로 묶어야 한다. 그런 후 자신의 키인 165cm보다 높은 250cm 위치에 형태상 접근이 불가능한 바위까지 올라가서 목을 매야 자살이 가능한 일이었다. 이처럼 2중, 3중으로 불가능한 조건이었으니 당시 경찰의 '이상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살 입증에 실패하게 된 것이었다.

타살 의혹이 제기되었고 그 의혹의 끝은 당연히 신호수를 연행한 경찰을 향했다. 물론 경찰은 강력 부인했다. 특히 신호수를 연행한 경찰 차아무개씨는 "확인해보니 포상 휴가를 위해 삐라를 모아둔 것으로 밝혀져 3시간 만에 훈방 처리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같은 차씨의 주장만 있을 뿐 석방된 신호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더구나 진실위 조사 과정에서 차씨의 주장과 배치되는 진술이 잇따랐다. 차씨와 같이 근무했던 그 당시 경찰관 4명의 진술이었다. 그들은 신호수가 연행된 후 적어도 3일 이상 서부경찰서에 있는 것을 봤다고 진술했다. 즉, 3시간 만에 신호수를 석방했다는 차씨의 말은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거짓말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경찰은 신호수를 연행한 이유가 삐라 신고를 받고 착수한 통상적인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역시 사실과 달랐다.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경찰은 신호수를 연행하기 9개월 전부터 이른바 '장흥 공작'이라는 이름까지 붙여 이 사건을 준비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놀랍게도 신호수의 혐의는 '간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신호수에게 해명 몇 마디 듣고 경찰이 석방했다니 믿을 수 있을까.

이 뻔한 경찰의 거짓말이 '거짓말'로 밝혀지기까지 23년의 세월이 흘렀다. 2009년 11월 10일, 진실위는 "서부경찰서 수사관 차씨 등이 '장흥 공작'을 통해 신호수를 간첩으로 조작하는 과정에서 사망하자 이를 자살로 위장했던 것으로 판단한다"며 공권력의 부당한 행사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거짓과 싸우는 숙명, '인권운동가'

여기서 끝났어야 할 신호수의 불행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2011년 8월 29일, 진실위를 통해 밝혀진 결과를 가지고 신호수의 아버지 신정학씨가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위자료 청구 소송을 제기했는데 이에 대해 서울고등법원 재판부는 다음과 같이 판결했다.

"피고 대한민국의 불법 구속으로 인한 신호수의 위자료 청구는 인정하나 경찰의 가혹행위는 증거 불충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진실위의 발표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다시 말해 경찰의 거짓말에 대한민국 법원이 다시 한번 생명을 불어넣어 준 '부끄러운 판결'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날 일흔이 넘은 아버지 신정학씨는 법정을 나와 말없이 담배를 물었다.

인권운동가인 내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말 중 하나가 "다수를 위해 소수가 희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소수에게 부당한 처우를 강요할 때마다 즐겨 동원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다 같이 살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국가가 이같은 논리로 거짓말을 정당화하고 국민을 속인다.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사태가 그렇고 4대강 사업, 또한 김훈 중위 사건으로 대표되는 군 의문사를 비롯하여 남북 관계에서도 거짓말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정부의 정직하지 못한 태도 때문에 요즘 '애매하면 북한측 소행'이라는 우스갯말이 세인들 속에 떠도는 것 아닐까. 

나는 인권운동가로서 이러한 거짓과 싸울 것이다. 이것이 인권운동가인 내가 가진 '올바른 숙명'이라고 생각한다. 그 길에서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알 수 없으나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진실은 반드시 승리함을 나는 역사 속에서 확인했다. 그 길에서 많이 이들이 함께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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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 도대체 뭔 짓을 한 건가?
'범죄조직' 청와대...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총리실의 민간인 불법사찰 및 증거인멸 사건이 관계자의 연이은 폭로로 갈수록 파문을 확산시키고 있다.

이 사건은 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이 민간인 사찰을 자행하면서 시작되었고, 2010년 6월 21일 한 국회의원이 국회에서 이 사실을 폭로하고 같은 달 29일 MBC < PD수첩 >이 그 피해자 사례를 보도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총리실의 민간인 사찰은 한마디로 말해, 암행어사 박문수가 탐관오리는 제쳐두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말하는 백성들을 색출해 인생을 망가뜨린 사건이다.

KBS의 새 노조가 만든 <리셋KBS뉴스9>이 30일 새벽 폭로한 바에 따르면 총리실의 민간인 사찰은 대단히 광범위하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사찰 대상자의 은밀한 사생활까지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어 충격을 더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KBS 등 방송사 내부동향과 노조의 성향, 주요인물 평가까지 다루고 있어 정권 차원의 사찰을 통한 언론장악 실체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총리실의 민간인 사찰만 놓고 봐도 이것은 국가기관이 주권자인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행위로서 대단히 심각한 위법사항이다. 그런데 이 사건의 파문이 갈수록 커지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이번 사건의 실체가 민간인 사찰→사건 은폐 및 증거인멸→수사축소→회유 및 재판조율로 이어지는 이른바 '4단 콤보'의 권력형 국가범죄행위라는 것이고 둘째는 청와대와 검찰이 개입했다는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건의 전모는 총리실의 가장 말단에서 상부의 지시로 하드디스크를 직접 파기(디가우징)한 장진수 전 주무관이 재판과정에서 양심선언을 함으로써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장진수씨의 증언과 밝혀진 사실을 바탕으로 각 단계별 핵심사항을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일부 내용에 대해서는 관계자들의 의견다툼이 있다).

[1단계] 민간인 사찰

이 사건의 일차적인 핵심은 대체 누가 민간인 사찰을 기획하고 지시했나, 하는 점이다. 이른바 윗선 혹은 몸통이 누구인지 확인하는 한 가지 방법은 총리실에서 모은 사찰자료가 어떤 라인으로 보고되었는지를 추적하는 것이다.

지난 20일 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은 기자회견을 열어 민간인 사찰 사건은 청와대나 민정수석실과는 무관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공직윤리지원관실의 공식적인 상부지휘라인은 민정수석실이다. 따라서 지원관실이 민정수석실 몰래 단독으로 불법적인 민간인 사찰을 자행했는지 혹은 그것을 민정수석실이 알고 있었는지가 관건이다.

이에 대해 <서울신문>은 지난해 1월 10일 보도('민간인사찰' 민정수석실 보고 확인)에서 "9일 서울신문이 단독 입수한 '정무위(국회) 제기 민간인 내사 의혹 해명' 문건에 따르면 지원관실은 김 전 대표(김종익) 사찰 결과를 동향보고 형식의 문서로 작성해 2008년 9월 민정수석실에 보고했다. A4 용지 13장 분량으로 된 이 문건은 ▲착수 배경 ▲사건 개요 ▲진행 경과 ▲쟁점사안 등 4개 항목으로 돼 있다"라고 밝혔다. 그러니까 적어도 민정수석실(당시 수석비서관은 정동기 현 법무법인 바른 고문)은 총리실의 민간인 사찰사실을 (지휘여부는 불분명하지만) 인지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물론 이 자체도 위법한 행위다.

<서울신문>은 같은 기사에서 "또 권재진 민정수석(현 법무장관) 때는 검찰이 김 전 대표의 사법처리와 관련해 민정수석실을 통해 지원관실의 의견을 구했고, 지원관실은 민정수석실을 통해 검찰에 기소 의견을 제시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보도했는데 이로 미루어 민정수석실이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민간인 사찰에 개입했다고 짐작할 수 있다.

[2단계] 사건의 은폐 및 증거인멸

장진수 전 주무관의 폭로와 이영호 비서관이 기자회견 때 한 자백 등을 종합하면, 적어도 이영호(혹은 그 윗선)가 고용노사비서관실 행정관인 최종석을 통해 장진수로 하여금 하드디스크를 영구파기하도록 했으며 이 과정에서 이영호의 대포폰이 최종석을 통해 장진수에게 전달되었다.

이와 함께 장진수의 증거인멸은 "검찰에서 문제 안 삼기로 민정수석실에서 얘기된" 상태였다. 그리고 이때에 즈음하여 진경락 전 공직윤리지원관실 기획총괄과장이 작성한 김종익 비리혐의 문건이 최종석을 통해 당시 한나라당 조전혁 의원에게 전달되었고, 조전혁 의원은 이를 국회에서 폭로하여 여론반전을 꾀했다.

[3단계] 수사축소



장진수 전 주무관에 따르면 최종석 행정관은 검찰의 총리실 압수수색 날짜를 미리 알고 있었고 검찰은 서류나 특히 이영호 관련 자료도 챙기지 않았다. 텅 빈 압수물 박스는 신문지로 채우기도 했다고 한다. <서울신문>이 입수해서 보도한 지원관실의 문건은 검찰이 이미 확보한 문건으로써, 사찰의 윗선을 밝히지 못한 검찰의 수사는 의도적으로 축소된 것이라는 의혹을 갖게 한다.

그리고 '2단계'에서 이미 밝힌 대로 검찰은 처음부터 하드디스크 파기를 문제 삼지 않기로 민정수석과 얘기가 돼 있었다는 것이다. 그 때문인지 검찰은 대포폰의 존재는 물론 통화내역도 알고 있었고 최종석의 존재도 알고 있었으나, 장진수 전 주무관에 의하면 자신을 수사한 검사는 대포폰 관련 신문조서를 법원에 제출하지도 않았다(그러나 약속과 달리 장진수 전 주무관에게는 증거인멸의 책임이 지워졌다).

검찰의 수사는 총리실의 민간인 사찰 동기, 사찰 및 증거인멸의 윗선 등 이 사건의 핵심쟁점에 대해서는 아무런 결론을 내지 못한 채 총리실 직원 일곱 명을 구속 불구속 기소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4단계] 회유 및 재판조율

장진수 전 주무관에 따르면 민정수석실에서 이번 사건으로 재판받고 있는 7명을 특별관리 했다. 법무법인 바른(사찰 당시의 민정수석이 이곳 고문)의 변호사들은 이들을 조직적으로 관리했고 장진수에게 진실 은폐를 종용하였다. 청와대는 재판 과정 전체를 모니터링(주심판사와 배석판사의 의견 차이까지 인지) 하고 있었으며 형량에 대한 조율(벌금형이 가능하다는 식으로)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청와대는 장진수 전 주무관의 소송비용까지 대 주었다. 최종석 행정관은 "평생 먹여 살리겠다", "캐시로 당겨 주겠다"는 식의 회유를 장진수 전 주무관에게 끊임없이 시도했다. 실제로 2011년 4월 청와대 장석명 공직기강 비서관이 총리실 류충렬 국장을 통해 장진수 전 주무관에게 5천만 원이, 8월에는 이영호 쪽에서 2천만 원이 전달되었다.

이 밖에도 장진수 전 주무관의 아내 일자리 알선(총리실 류충렬 국장, 진경락 전 과장의 후임자), 장진수 전 주무관 본인의 일자리 알선(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 장석명→청와대 인사행정관→가스안전공사 사장→가스안전공사 안전관리이사 채충근→경동나비엔 사장→경동나비엔 인사팀장 : 2012년 2월)도 있었다.

요컨대 형량조절, 소송비용 조달, 재판 모니터링, 금품제공, 직장 알선, 그 외 회유 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청와대가 장진수를 '케어'했음을 알 수 있다.

민간인사찰, 대한민국 자체를 공격한 반국가적 범죄



위의 '4단 콤보' 범죄과정을 들여다보면 적어도 청와대의 민정수석실과 사회정책수석실이 민간인 사찰과 증거인멸 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여기에 구속자들에게 금일봉을 건넨 임태희 대통령실장까지 보태면 청와대의 핵심라인은 대통령을 보좌하는 기구가 아니라 조직적인 범죄행위를 저지른 '범죄조직'을 구성한 셈이다. 이제는 그다지 놀랍지도 않으나, 이 범죄조직의 '행동대장'은 바로 범죄를 소탕할 책임을 맡은 검찰이었다. 현 정권과 관련된 큰 소송을 도맡아 온 법률법인 바른은 역시나 이번에도 법정에서 충실한 방패막이 역할을 수행했다.

청와대와 검찰을 아우르는 '권력형 국가범죄조직'이 구성되어 국민을 핍박하고 증거를 인멸했으며 이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주요 국가기능이 무력화되었다는 점에서 이번 민간인 사찰 사건은 MB 정권 하의 다른 어느 사안과도 구별되는, 대단히 중대하고 심각한 범죄행위가 아닐 수 없다.

예컨대 대통령 일가의 내곡동 사건이 권력을 이용해 개인의 이익을 탐했던 범죄에 '불과'하다면, 민간인 사찰 사건은 주요 국가기관을 졸지에 범죄조직으로 둔갑시켜 주권자를 공격하고 증거를 인멸한, 말하자면 대한민국 자체를 공격한 반국가적 범죄사건이다(집권당이 선거관리위원회를 테러한 이른바 10·26 부정선거 의혹사건도 성격상 이와 비슷하나, 아직 그 사건의 전말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공교롭게도 이 사건 역시 검찰은 윗선을 밝히지 못했다). 특히 그 범죄행위가 4단계에 걸쳐 대단히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할 길이 없다.

무릇 모든 범죄조직에는 그 수괴가 있는 법이다. 민간인 사찰이라는 권력형 국가범죄조직 사건의 수괴는 누구일까? 일단 검찰의 재수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니 그 결과를 지켜봐야겠지만, 이미 살펴보았듯이 검찰은 이 범죄조직의 행동대장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실제로 사건의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던 권재진 전 민정수석이 지금 검찰을 지휘하는 법무장관의 자리에 있으니, 재수사에서 새로운 성과가 나오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명박 대통령, 몰랐더라도 사과해야 한다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만 놓고 보더라도 복수의 수석비서관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수괴의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적어도 수석비서관 이상의 선에 진짜 몸통이 있을 수밖에 없다. 물론 본인들은 부정하고 있지만, 항간에는 박영준 '왕 차관'과 그 뒤의 이상득 의원의 이름도 오르내리고 있다.

그러나 청와대 핵심라인이 망라된 점을 생각해 보면 이명박 대통령이 이번 사건을 전혀 몰랐다고 보기 어렵다. 실제로 장진수 전 주무관은 자신과 관련된 문제가 'VIP'에게 보고되었다고 들었다는 진술을 한 바 있다. 아직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이는 지극히 상식에 부합한다. 대통령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개입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사후에 소극적으로 추인하는 형식 정도는 거치지 않았겠느냐는 의혹을 떨칠 수가 없다. 그렇지 않고서 그 막강한 권력라인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고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만약에 대통령이 몰랐다면 그 또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적어도 둘 이상의 수석비서실이 연루되어 검찰까지 끼고 그렇게 활개를 치고 다녔는데도 대통령이 몰랐다면, 이는 환관들이 황제의 눈과 귀를 막고 국정을 농락하다가 곧 멸망해 버린 고대 중국 어느 나라의 꼴과 다르지 않다. 나는 적어도 대한민국이 그 정도의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의혹은 눈덩이처럼 커지는데 청와대는 여전히 침묵으로 혹은 단답형 오리발로 일관하고 있으니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답답하기 그지없다. 다른 모든 것을 떠나, 국가의 핵심권력기관에 의해 인생을 망친 한 국민에게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진심으로 사과하고 재발방지 약속 정도는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명백하게 사실로 밝혀진 총리실의 민간인 사찰과 그에 따른 피해사례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사과 한 마디 하지 않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일까? 이명박 대통령이 떳떳하고 청와대가 한 점 부끄럼이 없다면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대국민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은 물론,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사항을 명명백백하게 밝히고 국민들에게 적극적으로 해명을 해야 한다. 대통령이 정말로 '국민의 머슴'이라면 이것은 상식에 속하는 문제다. 청와대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국민들 사이에서는 '혹시 대통령이 정말로 이 범죄조직의 수괴인 것은 아닐까?' 하는 불순한 의혹만 커져갈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에 진심으로 바란다. 검찰의 공정한 재수사를 위해 최소한 권재진 현 법무장관은 해임해야 한다. 그것이 사건해결을 위한 최소한의 성의다. 그와 함께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국민들에게 재발방지를 약속하라. 그리고 자신이 이번 사건과 관련해서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솔직하게 공개하라.

박근혜는 왜 이번 사건에 대응하지 않는가

사찰 대상에는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도 포함돼 있었다는데, 박 위원장이 별 다른 대응을 하지 않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평소 법과 원칙을 강조해온 그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박근혜 위원장과 집권여당인 새누리당은 이번 사건에 대해서 소극적인 대응으로 일관해 왔다. 행여 이번 사건이 'MB 심판론'과 연결돼서 총선에 불리하게 작용하지나 않을까 하는 선거공학적인 계산을 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불안한 마음을 감추기 어렵다.

민간인 사찰과 증거인멸은 그가 그토록 사랑하는 대한민국의 국기를 뒤흔든 사건이다. 박근혜 위원장이 이 문제의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의 법과 정의보다 박근혜 위원장 자신의 개인적인 권력을 위한 치밀한 이해타산이 앞섰기 때문이라는 비판을 과연 피할 수 있을까?

장진수 전 주무관은 지금 어려운 싸움을 혼자 벌이고 있다. 추한 권력의 거악에 맞선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녹음파일과 기억의 조각들, 그리고 정의와 진실을 갈망하는 국민에 대한 믿음뿐이다. 지금 이 사회 곳곳에 잠재해 있을 공익제보자들은 이번 사건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장진수 전 주무관은 결국 어떻게 될 것인지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 사건을 끝까지 추적해서 범죄자들을 발본색원하고 합당한 처벌을 가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의와 진실이 결국은 이긴다는 사례를 만들지 못한다면 다시는 장진수 전 주무관 같은 공익제보자가 나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번만큼은 그렇게 넘겨서는 안 된다. 항상은 아니지만 어쩌다 가끔 한 번은 정의가 이길 때가 있다면, 지금이 그 '어쩌다 한 번', 가끔은 정의가 승리하는 그 '어쩌다 한 번'이 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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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이종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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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명이 추천한 파워클래식] "신문 사회면 샅샅이 읽은 도스토옙스키… 구원의 화두는 거기서 나왔다"

"소설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의 주된 소재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돈, 치정, 그리고 살인. 도스토옙스키 소설엔 원래 돈 얘기가 많이 나와요. 작가가 젊었을 때 늘 돈에 쪼들렸고, 그러다 보니 팔리는 소설을 써야 했어요.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게 돈이죠. 그다음이 치정. 사랑 얘기 안 들어가면 안 되고, 또 살인 사건만큼 재밌는 게 없잖아요."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옙스키가 서울 도심 한복판에 왔다. 30일 오후 서울 종각 부근의 북콘서트 전문카페 엠스퀘어. 조선일보와 출판사 '열린책들'이 도스토옙스키의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을 주제로 마련한 북콘서트에서 석영중 고려대 노문과 교수가 미니 강연을 이어갔다. "당대 러시아 사회를 알기 위해서 도스토옙스키는 신문 사회면을 샅샅이 읽었어요. 사건을 찾아 읽고, 소설에 집어넣은 것이죠. 그러면 그의 소설이 대중 소설이냐? 그건 아니죠. 그는 이 팔리는 소재를 통해 '구원'이라는 거대한 화두를 전합니다. 도스토옙스키가 위대한 것은 가장 대중적인 소재로 가장 형이상학적 주제를 다뤘다는 데 있습니다."

이날 콘서트는 명사 101명이 추천한 고전(古典)을 매주 한 권씩 소개하는 '조선일보 101 파워클래식'이 지면의 울타리를 넘어 독자들과 직접 만난 첫 자리. 신간을 펴낸 저자들이 북콘서트나 낭독회를 여는 것은 흔하지만, '고전'이 주인공인 북콘서트는 유례가 드물다.

"신청자 중에 인상적인 분들이 많습니다. 군대에서 휴가 나왔는데 내일 귀대를 앞두고 마지막 밤을 이 콘서트에서 불태우고 싶다고 하신 분, 오셨나요?" 맨 앞쪽에 앉아있던 김종서(26)씨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는 "군대에서 읽은 책 중 가장 두꺼운 책이 바로 이 소설이었는데 이해가 잘 안 됐다"며 "앞으로 러시아 문학을 좀 더 접하고 싶은 마음에 용기 내서 신청했다"고 했다. 전업 작가가 꿈인 중학교 3학년 아들과 함께 온 주부, 초등학교 때 처음 읽다 반쯤 포기했던 책을 10년이 지나 다시 읽고 도스토옙스키의 팬이 됐다는 청년, 올해 목표를 '매월 고전 한 편 이상 읽기'로 잡았다는 회사원…. 연령도 직업도 다양한 독자 50여명이 '도스토옙스키'라는 묵직한 주제 아래 둘러앉았다. "이 소설의 핵심은 '구원'입니다. 주인공 드미트리가 아버지를 죽이지도 않았는데 왜 유죄 선고를 받았는가. '만인은 만인에게 죄인이다.' 이 문장에 답이 있어요. 작가가 말하는 구원이란 사적이고 사소한 것에서 출발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바로 구원이라는 것이죠."

2부에선 러시아에서 유학한 연극배우 이상구씨가 무대에 올랐다. "그는 알료샤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친구, 친구여, 나는 굴욕에, 지금 굴욕에 빠져 있단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참고 지내야 할 것이 엄청나게 많아, 엄청나게 많은 불행이 그 앞에 놓여 있는 거야!'…" 그가 마치 연극을 하듯 소설 속 한 대목을 낭독하자 분위기는 한층 달아올랐다. 관객들의 질문도 쏟아졌다. 주부 주기숙(인천)씨가 "소설에 등장하는 '나'는 작가 자신이냐"고 묻자 석 교수는 "작가 자신으로 보기엔 좀 무리가 있다. 소설이라는 허구의 화자, 저자를 아주 많이 반영하는 화자로 보면 좋겠다"고 답했다. 예정된 두 시간을 훌쩍 넘겨 행사가 끝난 후 석 교수는 "고전이야말로 세대를 아우르는 소통과 공감의 텍스트"라고 했고, 독자 정유진(53)씨는 "인생의 지혜를 배우고 삶의 나침반이 되어주는 고전을 다시 읽으니 눈이 맑게 뜨이는 느낌"이라고 했다. '101 파워클래식'이 독자와 함께 읽을 다음 책은 공자의 논어(4월 2일자 문화면). 4월 7일 서울 교보문고 강남점에서 강연회가 열린다.

허윤희 기자 ostinat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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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28

[펌] 영어쓰기로 미국 명문고 뚫었다

(::필립스엑시터재학 정진아양::)

 

영어쓰기로 미국 명문고 뚫었다 = 정진아(19)양은 지난 1996

 

교수인 아버지를 따라 미국 메릴랜드주에서 1년간 체류했다.

 

국에 가기 전 잠시 영어학원에 다녔던 것이 정양의 첫 영어공부

 

였다. 미국에서 영어 실력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찾아간 곳

 

은 집 근처 도서관. 이곳 직원의 도움을 받아 정양은 현지 초등

 

학교 3~4년생들이 보는 책들을 베끼기 시작했다. 매일 학교수업을

 

마치면 도서관에서 책을 베끼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보냈다.

 

달을 되풀이하던 어느 날엔가부터 일상 대화의 말문이 트이기 시

 

작했다.

 

1년 후 아버지를 따라 귀국해야 했지만 정양은 영어의 끈을 놓지

 

않았다. 미국에서 사귄 친구들과 꾸준히 e메일을 주고 받으면서

 

단순한 안부인사를 넘어 자신의 하루 일과를 영어로 작문해 보

 

냈고 친구들은 틀린 곳이 있으면 바로잡아주었다. 정양은 일기

 

도 영어로 매일 썼으며 나중에는 영어로 시나 소설 그리고 독후

 

감을 쓸 수 있을 만큼의 실력이 되었다글쓰기뿐만 아니라

 

·고등학생 추천도서인 동서양 고전을 미국 친구들에게 부탁해

 

영어원문으로 구해 계속 읽었던 것이 영어작문에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같다고 말했다. 정양의 영어실력은 미국 명문사립고

 

인 필립스엑시터 고등학교의 문을 두드릴 때 에세이와 재정보조

 

금 신청서류 등 수십가지 서류를 혼자서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부

 

쩍 늘었다.

 

200412월 정양은 한국을 방문한 이 학교 면접관과 마주앉았다

 

. 글쓰기와 독해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말하기에 자신이 없었던

 

정양은 주눅이 들었다. 몇차례 질문이 오가고 난 뒤 면접관이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정양은 영어로 읽

 

었던 책을 줄줄이 소개하며 면접관과 책에 관해 토론했다. 그리

 

고 미국에서 돌아온 뒤 자신이 영문으로 지은 시와 소설이 빼곡히

 

담긴 노트 두권을 내밀었다.

 

“I hope to meet you again at Exeter”라며 면접을 마친 면접

 

관은 며칠 뒤 “Congratulations”라는 축하메일을 보내왔다.

 

양은 현재 필립스엑시터고에서 마지막 학기를 보내며 아이비리그

 

에 도전할 준비를 하고 있다.

2012-03-26

경기동부와 친박계는 어떻게 다른가 기성정당과 진보정당 '정치블록'의 같은 점과 다른 점

경기동부와 친박계는 어떻게 다른가

기성정당과 진보정당 '정치블록'의 같은 점과 다른 점


정치권에는 정파 혹은 계파라는 이름의 정치블록이 존재한다. 정치활동이라는 것이 완전히 개인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닌 만큼 정치행동을 같이하는 블록이 형성되기 마련이다. 정치권의 흐름을 설명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이 정치블록이다. 특히 기성정치권의 ‘합종연횡’을 설명하는 데서 빠지지 않는 것이 ‘계파’다. 

진보정당에도 ‘정파’가 존재하며 최근 통합진보당의 약진이 두드러지자 자연스레 당 내부의 계파에 대한 관심이 이어지고 있다. 포털 사이트의 실시간 인기 검색어로 까지 떠오른 이른바 ‘경기동부’라는 명칭의 세력도 통합진보당의 정파 중 하나다. 

그렇다면 진보정당과 기성정치권의 계파는 어떻게 유사하고 어떻게 다른가.

진보정당과 기성정치권의 정치블록 공히 인적 네트워크가 기본이다. 보통 회원을 갖는 조직형태를 띠고 있지는 않되, 어떤 블록의 입장을 갖는 인적 네트워크를 이루게 된다. 정당의 정치적 입장을 결정할 때나 간부, 혹은 후보자를 선출할 때 힘을 발휘하는 게 정치블록이다. 민주주의의 기본적 의사결정 방식이 다수결인 만큼 정치블록 간 대결은 표대결로 외화된다.

예컨대, 구 한나라당에서 친박계와 친이계의 대결은 신문을 장식하는 주된 테마였다. 이는 민주당에서도 비슷했다. 진보정당에서도 대표단 등 간부 선출과정이나 대의원대회에서 입장을 정할 때 정파별 입장이 드러나고 각 정파의 역학관계에 따라 진보정당의 입장이 결정되고 간부가 선출된다.

그렇다고 진보정당의 정파와 기성정치권의 계파가 똑같지는 않다. 일단 정치블록의 ‘이름’이 다르다. 새누리당내 계파로 ‘친이계’와 ‘친박계’가 꼽히고 민주통합당은 ‘손학규계’ ‘DY(정동영)계’ 등의 계파 이름이 등장한다. 반면 통합진보당에는 이른바 ‘경기동부’ ‘인천’ ‘광주전남’ ‘부산울산’ 등의 지역기반의 명칭과 ‘참여계’ ‘다함께’ 등의 조직기반의 명칭이 있다.

기성정당의 ‘계파’는 보스정치의 산물이다. 유력정치인에 줄을 대는 방식으로 정치블록이 형성된다. 인적네트워크는 당연히 보스와 얼마나 가까운가로 결정된다. ‘친박계 좌장’ ‘친이계 대표’라는 수식어는 이 때문에 나온다. ‘계파’는 보스의 정치적 성공을 목표로 하게 되고 보스간 대결에서 승리한 계파가 당권을 쥐게 된다. 이명박 정권 초기 한나라당은 ‘친이계’가 주도했고, 정권 후기 새누리당의 ‘비대위’가 만들어지면서 ‘친박계’가 힘을 얻었다고 평가된다.

진보정당은 탄생부터 활동까지 사회운동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어 정치블록의 인적네트워크도 사회운동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 구체적으로는 노동운동, 학생운동, 지역운동, 혹은 정치단체에서 정치적 입장을 같이 하는 이들이 모여 그룹을 형성하게 된다.

진보진영의 세력 간 분포를 설명하는데 가장 손쉽게 쓰이는 블록은 ‘NL’과 ‘PD’다. 진보운동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80년대 중후반 진보진영 내에서 벌어졌던 논쟁을 통해 블록이 형성됐고, 당시 형성된 인적네트워크가 현재까지 영향을 주고 있으며, 내용상에서도 경향성을 유지하고 있다. 여기에 자유주의적 성향을 갖는 구 국민참여당이 합류하면서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기도 하다.

진보는 크게 NL과 PD로 구분되지만 세부적으로도 정치블록이 존재한다. 

이 중 NL진영은 노동운동이나 농민운동 등 계급운동과 지역기반의 정치활동으로 성장했는데, 사업을 벌이는 과정에서 같은 지역의 활동가들이 교류하고 공동사업을 벌이면서 자연스럽게 정치블록화 됐다. 특히 90년대 초반 진보운동은 ‘포스트 전민련’을 주창하며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이라는 전국적 전선조직을 탄생시켰는데, 전국연합은 지역과 부문으로 조직이 구성돼 있었다. 민주노총이나 전국농민회총연맹 등 부문 조직에는 여러 정파가 섞여 있는데다 한 세력이 강한 주도력을 갖고 있지 못했던 반면 지역에서는 정파가 섞여 있다 하더라도 한 세력이 주도력을 뚜렷하게 갖게 되면서 정파명에 ‘지역’이 등장하게 됐다. 정파명에 지역이 등장하긴 하지만, 대부분 전국적으로 세력이 분포돼 있는 것도 이런 연유다.

PD진영은 성장과정에서 지역운동에 큰 비중을 두지 않고 노동운동과 의제별 운동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때문에 이들은 노동운동 내의 활동가조직을 중심으로 정파블록을 형성했으며, 노동운동 외부를 포괄하는 사회단체를 만들면서 세력을 넓혔다. 통합진보당 내의 ‘다함께’가 있으며 진보신당 내의 최대파로 여겨졌던 구 ‘전진’이 대표적인 정파로 꼽힌다.

기성정당과 진보정당의 정치블록은 형성과정이 다른 만큼 움직이는 양상도 다르다. 기성정당의 계파가 보스의 입장이나 오더에 따라 움직이는 반면, 진보정당의 계파는 정치방침에 따라 움직인다. 진보정당의 정파 형성과정이 정치활동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어서 ‘누구’의 오더라는 것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정치적 방향과 활동과정에서 형성된 경험에 따라 정치 입장, 혹은 방침을 결정하게 된다. 때문에 정파별로 비슷한 입장을 보일 때도 있으며 때로는 같은 NL 혹은 PD 진영 내에서 세부적으로 다른 입장을 보이기도 한다. 해서 진보운동 내부에서는 정파를 ‘의견그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 정파의 유력정치인이 등장하거나 실제 정파 내에서 주도력을 발휘하는 인물이 있어도 진보진영 내부에서는 그를 ‘수장’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2012-03-25

백혜련의 정치도전, 민주통합당이 좌초시켰다

백혜련의 정치도전, 민주통합당이 좌초시켰다

ohmynews.com | Nov 30th -0001

검사에서 변호사로, 다시 정치인으로 변신을 꾀했던 안산 단원갑 백혜련 민주통합당 예비후보의 노력은 40일 만에 끝났다. 야권단일후보 경선 과정 문제로 관악을 이정희 통합민주당 후보가 사퇴하면서 재경선을 요구했던 단원갑 백혜련 후보도 사퇴했다.

하지만 단원갑의 경우 근본적 논란은 민주통합당 지역조직이 자초한 면이 크다는 평가가 나온다. 지역 기득권의 벽은 두꺼웠고, 지역 조직의 비협조와 저항에 정치신인의 입지는 좁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지역 조직의 반발에 중앙의 지도력 또한 제 역할을 못하면서, 전략 공천됐던 후보자에게만 상처를 안긴 셈이다.

엄밀히 말해 백혜련 후보가 민주통합당 후보로 인정받았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경선 패배가 발표된 직후 3~4일에 불과했다. 그동안은 무늬만 민주통합당 후보였을 뿐 실무 조직의 뒷받침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도움은커녕 거센 반발에 허우적대야 했다.

지역조직 돕지 않았던, '무늬만 민주통합당 후보'

지난달 13일 후보 신청을 마치고 28일 전략공천을 받을 때부터 민주당 지역조직의 반발은 매서웠다. 당원들은 4000명이 넘게 반대 서명운동 통해 낙하산 후보의 공천을 거부했다. 시도의원들을 중심으로 비상대책위까지 꾸려질 정도였다. 지역조직의 이 같은 태도는 도의원을 사퇴하고 출마한 고영인 후보가 공천받지 못한 데 대한 반발이었다.

낙하산 후보라는 공격은 백혜련 후보에게 향했고 자리를 잡기도 전에 시련에 봉착해야 했다. 공천이 확정된 이후 고영인 후보는 백혜련 후보에 대한 전략공천을 비난하며 불복 의사를 내비쳤다. 무소속 출마 가능성을 거론하며 장고에 들어갔다. 천정배 의원이 4선을 하며 16년간 다져 놓은 탄탄한 민주통합당 조직은 백혜련 후보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17~18일 야권단일후보 경선이 치러질 때도 마찬가지였다. 통합진보당은 조직을 최대한 동원하며 여론조사경선을 준비했지만 백 후보가 달리 준비할 방법은 없었다. 시도의원들이 합류해 준비를 도왔으나 조직적으로 움직였던 것은 아니라고 민주통합당 관계자는 전했다. 지역 기반이 약한 전략공천 후보에게는 녹록지 않은 현실이었다.

불안한 분위기를 느낀 당대표 등이 경선을 앞두고 지원유세를 펼쳤지만 지역 당원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도리어 반발하는 분위기까지 생겨났다. 전략공천에 대한 불만이었다. 한 민주통합당 지지자는 "고영인 후보야 천정배 의원 보좌관 하면서 지역에서 많이 봤지만 백혜련은 처음 들어보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단원갑 민주통합당 관계자는 경선 패배에 대해 "고영인 후보의 결심이 빨랐으면 결과가 다르게 나타났을 것인데 많이 아쉽다"고 말했다.

"오랜 시간 함께해 온 동지가 기다려달라는데 우리가 백혜련 후보를 무조건 지원할 수 있는 것 아니지 않나. 다들 전략공천 때문에 속상한 면도 있어 수수방관했던 게 사실이다. 천정배 의원도 아무런 이야기를 안 하시니 적극적으로 도와야 하는 건지에 대한 판단이 안 섰다.

고영인 후보가 보름이 지나서야 경선 승복을 결정했는데, 이때는 시기적으로 많이 늦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설마 (야권단일후보) 경선에서 지겠나 생각했었다. 17~18일 경선이 치러질 때 다들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했다."

정치신인 공천만 해놓고 방치한 지도부도 책임

19일 여론조사 경선 과정에서 백혜련 후보가 3표 차로 패배한 결과가 나오면서 민주통합당 조직은 뒤늦게 허둥댔다. 민주통합당 쪽 인사들은 "충격이었다"고 말했다.

"지역에 도의원 1명에 시의원이 3명이다. 천정배 의원이 16년간 닦아온 텃밭인데 민주통합당 후보가 야권후보경선에서 지지율도 미약한 통합진보당 후보에게 졌다는 게 말이 되나. 무소속으로 나와도 조직만 가동되면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지역이다. 너무 놀라서 다들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관악을 지역의 문자 논란에 이어 일부 전화가 지역구를 벗어났다는 표본 오류 논란이 생기면서 민주당 쪽은 재경선을 갈망했다. 도무지 패배를 인정하기 힘들다는 분위기였다. 지역조직이 전략공천 후보를 지원하지 않고 태업해 결국 후보 자리를 놓친 것에 대한 부담도 커보였다.

이와 관련 이정희 대표는 22일 <오마이뉴스> 팟캐스트 <이슈 털어주는 남자>에 출연해 "사실, 문제의 핵심은 안산 단원갑"이라며 "민주통합당과 우리가 협상대표 간의 공식 라인에서 확인해보면, '안산 단원갑의 양보를 받아내는 것'이 민주당의 주요 요구사항"이라고 말했다.

지역 분위기도 비슷했다. 후미진 곳에 있던 선거사무소는 고영인 예비후보와 조성찬 예비후보가 있던 지역구 내 중심부 건물로 옮겨졌다. 시도의원들을 비롯한 민주당 인사들의 발길도 분주해졌다.

야권단일후보, 민주통합당 조직이 제대로 지원할까?

민주통합당 관계자는 21일 저녁 "중앙당에서 공천장을 주겠다는 언질을 받았다며 재경선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공천장이 수여되자 경선불복에 대한 비난 여론이 일었고 23일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가 서울 관악을 후보직을 사퇴하면서 백혜련 후보도 출마를 포기했다.

지역 당원들은 전략공천으로 지역을 무시한 낙하산 공천을 한 것에서 빚어진 일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지역 기반이 약한 정치신인을 공천만 해놓고 방치한 지도부의 책임이 크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백혜련 후보의 좌절은 결국 민주통합당 스스로가 초래한 셈이다.

이 때문에 통합진보당 조성찬 후보가 야권단일후보가 됐다고 해도 어려운 승부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민주통합당 후보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민주통합당 조직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는 시선이다. 국민참여당이 야권단일후보로 나섰다 패한 지난해 경남 김해을 재선거 때처럼 민주당의 적극적 도움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실제로 민주통합당 쪽 인사들은 유시민 대표의 측근이기도 한 조성찬 후보에 대한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다. 백혜련 후보는 출마를 포기하며 야권단일후보 지지를 선언했지만 지역에서 영향력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민주당 조직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선거 결과가 좌우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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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눈물 "야권연대 살렸다"... 숨막힌 '3박4일'

이정희 눈물 "야권연대 살렸다"... 숨막힌 '3박4일'

ohmynews.com | Nov 30th -0001

19대 총선 후보등록 마감일인 23일 그는 광주 망월동 묘지 참배에 이어 오후 2시 공식적으로 후보등록을 할 예정이었다. 일각에선 이 공동대표 본인이 직접 후보등록에 나선다는 소문도 돌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진보의 도덕성'을 이유로 나흘 내내 이 공동대표의 후보사퇴 여론이 높았지만, 그의 선택엔 아무런 변함이 없다는 것이 이날 오전까지의 상황이었다. 통합진보당 관계자들은 "우리의 입장엔 변화가 없다"는 말로 이 상황을 일축했다.

실제 통합진보당은 이날 오전 4시까지 대표단 회의를 열고, 야권연대의 복원을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통합진보당의 핵심 관계자는 "이정희 대표의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대표단의 잠정적 결론이었다"고 전했다. 이 회의는 정확한 결론을 내지 못한 채 새벽녘 산회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전날 이 공동대표의 후보사퇴 문제에 대해 강경모드로 발언했던 유시민 공동대표는 이날 오전 CBS 라디오에 출연해서 "이정희 대표의 문제에 대해서 국민들의 비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당 안에서도 지금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길인지에 대해서 여러 가지 논의를 하고 있다"며 "하지만 이정희 대표가 출마를 결심하면, 막을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유 공동대표는 또 "이정희 대표가 사퇴를 안 하는 이유는 '내가 꼭 국회의원이 되어야 되겠다'는 것보다는 사퇴하면 야권연대의 심리적 기초가 무너져 우리는 물론 민주당에도 안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인 것"이라며 "여러 가지 의견을 전하고 있지만, (이정희 대표가) 어떻게 할지는 불확실하다"고 밝혔다. 그는 "내가 당사자라면 좀 다르게 할 것"이라는 말로, 현 사태의 어려움을 우회적으로 성토하기도 했다. 유 공동대표는 "이번에는 민주통합당이 좀 봐주면 안 되겠느냐"는 읍소도 했다.

문재인과 이정희의 진솔한 대화 속 '제3후보론'도

전날인 22일에는 문재인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정강정책방송연설 때문에 상경했다. 기왕 서울에 온 김에 문 고문이 직접 이 공동대표를 만나는 것이 좋겠다는 주변의 권유에 따라, 문 고문과 이 공동대표는 단둘이 만났다. 아무런 배석자 없이 진행된 양자회동에선 상당히 허심탄회한 대화가 오간 것으로 전해진다. 진솔한 얘기를 나눈 두 사람은 이번 총선의 중대성과 야권연대 승리에 대한 의견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문재인 상임고문이 이정희 공동대표에게 이른바 '제3후보론'을 제기하고, 후보사퇴를 설득했다는 설이 돌았지만, 문 고문 측에서는 관련된 내용을 일절 확인해주지 않았다. 다만, 문재인 고문 측의 핵심 관계자는 "어제(22일) 서울에서 마지막 비행기를 타고 부산으로 올 계획이었는데 결국 탑승하지 못했다"며 "덕분에 부산 선거운동의 오전 일정이 모두 날아가 버렸다"고 말했다. 수도권과 달리 부산민심은 초반이 매우 중요한데 서울에서 자꾸 일이 터지는 바람에 문 고문이 선거운동에 집중하기 어렵다는 한숨도 터졌다.

민주통합당의 핵심 관계자는 "문 고문이 이 대표를 만났는데 아무도 결과에 대해 말을 못한다는 것은 결국 중재안이 실패했다는 방증 아니겠냐"며 "이 대표가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 오후까지 지켜보자"고 말했다.

이 가운데, 민주통합당 내부에는 '서울 관악을 사태를 푸는 3가지 방법'이 흘러다녔다. 첫째 이정희 공동대표는 스스로 결단해야 한다. 그에 관하여 민주통합당이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다. 민주통합당이 개입하면 문제는 더 커질 수 있다. 둘째 서울 관악을 지역은 애당초 민주통합당이 야권연대 지역으로 무공천 한 곳이기 때문에 그 원칙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 이 원칙을 버리면 이번 총선의 야권연대는 정말 루비콘강을 건너게 된다.

셋째 이 공동대표가 사퇴로 가닥이 잡히면 안산 단원갑의 백혜련 후보도 사퇴해야 한다. 애당초 백 후보의 민주통합당 공천은 '당내 여론을 설득하기 위한 카드'였기 때문에 이 대표의 문제가 해결되면 동시타결 방법으로 사퇴로 가닥을 잡는다.

서울 관악을 사태를 풀 수 있는 3가지 열쇳말

이 같은 여론이 이정희 공동대표를 짓누른 탓일까. 통합진보당 쪽에서는 이 공동대표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22일에 이어 23일에도 문 상임고문을 만나고 있다는 정보가 흘러다녔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전해졌다. 이 공동대표는 오전 내내 자택에 머물며 생각을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국회 출입 기자들은 이날 내내 '오후 2시'를 주목했다. 이 공동대표가 후보등록을 하겠다고 밝힌 이 시각에 'FM대로' 간다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가는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만일 이 공동대표가 후보등록을 하고, 이번 선거를 뛴다 한들 본선에서 얼마나 경쟁력이 있을까 회의하는 기자들의 시각도 적지 않았다. 이번 사태를 초반에 잘 풀었다면, 이 공동대표는 그야말로 '거물급 정치인'으로 격상되지만, 여기서 무리수를 둔다면 '이정희의 정치생명'은 여기서 끝이라는 진단마저 나돌았다.

그런데 이날 오후 1시 59분 기자들에게 문자메시지가 긴급 타전됐다. "이정희 대표 사퇴 기자회견 곧 정론관서 할 예정". 곧이어 오후 3시에는 이 공동대표가 직접 정론관에서 자신의 심경을 밝히는 기자회견문을 낭독할 예정이라는 소식까지 알려졌다.

이 소식이 긴급 타전되자, 정론관엔 침묵이 흘렀다. 모두 '오후 3시'를 향한 시계걸음에 눈을 맞추고, 이 공동대표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이 공동대표는 이날 오후 3시에 정확히 정론관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많은 분들이 긴 시간 애써 만들어온 통합과 연대의 길이 저로 인해 혼란에 빠졌다"며 "야권단일후보들이 이길 수 있다면 기꺼이 어떤 일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직접 회견문을 읽기 전 미리 마이크를 손보던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이내 입이 열리고, "부끄럽고 죄송하다"는 첫 문장을 읽을 때, 그의 눈가가 흐려지고 울먹이는 목소리가 포착됐다. 가슴으로 울고 있다는 심정이 전달된 게다. 이 공동대표가 이 같은 내용의 회견문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국회 정론관 복도에서는 우위영 대변인이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기자들은 우 대변인을 위로했다.

이 공동대표는 이날 회견문에서 "진보의 도덕성을 땅에 떨어뜨린 책임도 당연히 저의 것"이라며 "몸을 부수어서라도 책임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이어 이 공동대표는 "경선과정에서 가장 큰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저"라며 "(자신의 사퇴로) 야권단일후보에 대한 갈등이 모두 털어지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또한, 이 공동대표는 "정권교체가 아니면 민주주의도 경제정의도 평화도 그 어느 것도 기대할 수 없기에, 야권단일후보를 당선시켜 주십시오"라며 "야권연대를 만들어냈다는 잠시의 영광보다 야권연대의 가치와 긍정성을 훼손한 잘못이 훨씬 큰 사람으로서, 부족함을 채우고 차이를 좁히며 갈등을 없애는데 헌신해 전국에서 야권단일후보를 당선시키겠다"고 다짐했다.

백혜련도 한명숙과 손잡고 기자회견...

이정희 공동대표의 회견 직후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는 백혜련 안산 단원갑 예비후보의 손을 잡고 국회 당대표실에 나타났다. 백 후보의 사퇴를 위한 수순이었다. 백 후보는 이날 기자들에게 "오늘 저는 안산 단원갑 후보직을 내려놓는다"며 "비록 후보직을 내려놓지만, 미약하나마 힘을 보태려 한다, 야권단일화의 밀알이 돼 정권교체와 총선승리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한 대표는 "통합진보당의 이정희 대표가 상상도 못하는 고통 속에서 큰 결단 해주신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며 "민주통합당의 백혜련 후보도 야권연대를 위해 자신의 희생과 결단을 내린 점 참으로 고맙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이어 한 대표는 "이정희 대표와 제가 야권연대를 이룬 감동이 채 가시기도 전에 국민 여러분께 실망을 드려 너무나 송구스럽다"며 "야권연대에 엉킨 실타래를 풀기 위해 양당은 부단한 노력을 해왔고 지금까지 양당은 모두 고통스럽고 힘든 시간이었다"고 밝혔다.

무엇보다 한 대표는 "이제 야권연대가 완성됐다"며 "비 온 뒤에 땅이 단단해지듯,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은 더욱 굳게 손을 잡고 단결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제 우리가 함께 승리하는 길만 남았다"며 "우리 모두 함께 손잡고 국민 여러분께 승리로 보답하겠다"고 말했다. 한명숙 대표는 이날 기자들과의 일문일답을 통해 "서울 관악을 지역은 이정희 대표의 불출마 선언에 이어 새로운 후보가 교체되면, 새로운 후보를 야권단일후보로 민주통합당이 인정할 것"이라며 "당연히 관악을 지역은 민주당의 무공천"이라고 밝혔다.

경선에서 불복한 김희철 의원의 탈당 후 무소속 출마에 대해서는 "저희는 야권연대의 정신을 갖고 김 의원의 탈당을 만류했다"며 "그러나 각 후보는 탈당할 권리가 있고 그분이 탈당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한 대표는 "김 후보는 이미 탈당했기 때문에 민주통합당의 후보가 아니다"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양당 대표는 25일 오전 11시 국회 귀빈식당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4·11 총선승리'에 대한 입장을 밝힐 예정이다.

야권연대 드라마의 극적 반전... 터닝 포인트 핵심은 '이정희 결단'

이처럼 파국으로 치닫던 야권연대는 이정희 공동대표의 결단과 백혜련 후보의 사퇴로 일단락됐다. 벼랑 끝의 위기에서 터닝 포인트를 잡게 된 것이다. 여론은 만 하루사이 급반전했다. 이 공동대표의 용단을 촉구하며 '부도덕한 진보의 오명'을 운운하던 여론은 급랭했고, 이 공동대표의 결단을 환영하는 응원 메시지가 줄을 이었다. 트위터에는 이 공동대표의 용단이 결국 야권연대 전체를 살렸다는 평가가 줄줄이 사탕으로 매달렸다.

이 공동대표가 이번 사퇴를 계기로 '더 큰 정치인'으로 성장하게 됐고, 국민은 이번에 결단한 이 공동대표를 잊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계속 달렸다.

무엇보다 야권연대의 막전막후에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 상당한 공을 들인 황창화 민주통합당 선거대책위원회 대변인은 이날 기자들과 만나 "야권연대는 안 깨졌다"며 "야권연대를 합의했지만 진행되다가 암초에 부딪혔고, 이걸 어떻게 풀 것인가에 대해서는 지난하게 협의하고 의논했다"고 저간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황 대변인은 "문재인 고문도 역할을 했고 한 대표도 여러 면에서 결단을 했지만 무엇보다 이정희 대표 스스로의 결단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며 "야권연대는 총선 전략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고, 또 그래야 정권심판 이슈파이팅이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공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백혜련 후보를 설득하던 중에 이정희 대표의 사퇴 소식을 속보로 알게 됐다"며 "이미 서울 관악을에 대한 민주통합당의 무공천 의사와 안산 단원갑 문제에서 우리가 (사퇴)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는 미리 그쪽(통합진보당)에 전달된 상황이었다"고 전했다.

황 대변인은 "4·11 총선까지 또 어떤 고비가 우리에게 남았는지 모르지만 현단계에서 이 문제를 주말까지 풀지 못하면 상황이 매우 어려워진다고 판단했다"며 "주말을 넘기지 않고 이 문제를 풀 수 있게 돼 너무나 다행"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무엇보다 그는 "야권연대의 반전 드라마는 이제 본격화된다"며 "민간인 사찰 문제와 이명박 정권의 심장부를 강타할 야권연대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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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FTA? 4대강?…내세울 게 없는 MB ‘잠 못이루는 밤’

경제? FTA? 4대강?…내세울 게 없는 MB '잠 못이루는 밤'

hani.co.kr 임기를 1년 남긴 대통령에겐 '말년 증후군'이란 게 있다. 해는 뉘엿뉘엿한데 갈 길은 멀다 보니, 밤잠을 설치는 게 주요 '증상'이다. 최근 이명박 대통령도 밤에 잠을 잘 이루지 못한다는 말이 청와대 주변에서 흘러나온다. 대통령 재임중 이뤄낸 대표상품으로 내세울 만한 업적이 딱히 없는 상황에서 자칫 역사책에 '4대강 대통령'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큰데 이게 청와대로서도 그다지 마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2007년 대선 때부터 자신의 목표를 '경제 대통령'으로 못박았다. 국민적 기대감도 많았다.

하지만, 현재 이 대통령의 경제 성적표에 대해선 의문부호가 붙는다. 이 대통령 자신도 22일 기자회견에서 "투자가 줄고 젊은이의 일자리가 걱정되고, 내수가 위축돼 서민 생활이 더 어려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다"며 경제 상황이 녹록지 않음을 인정했다.

여당조차 '엠비표 경제정책'과의 철저한 차별화를 꾀하고 있다. 이 대통령 경제정책의 기조인 '감세' 거부와, 정강·정책에 경제민주화 조항을 삽입한 게 대표적이다. 이 대통령이 '경제 대통령'으로 기록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게 새누리당 분위기다.

경제 이외의 분야에 대한 평가는 더욱 박하다는 게 청와대의 고민이다. 다른 데서 만회할 점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선, 남북관계에 대해선 절대다수가 '낙제점'을 주는 게 현실이다. 이 대통령의 지지기반인 보수층은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피격에 대한 부실한 대응으로 '안보무능정권'이란 낙인이 찍혀 있다. 동시에 진보 쪽에선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진전시킨 남북교류와 화해·협력 부분에선 바퀴를 뒤로 돌렸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보수와 진보 양쪽의 공격에 노출된 채, 어느 쪽으로부터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다.

외교 분야에서도 내세울 만한 공이 별로 없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요란한 한-중 관계가 대표적이다. 한-미 관계에서는 자유무역협정(FTA) 발효를 이끌어 냈다고 내세운다. 그러나 이 부분은 찬반 평가가 확연히 엇갈린다. 지불한 대가도 크다. 협정 체결 과정에서 촛불집회로 정권이 뿌리째 흔들렸고 자유무역협정 자체는 사회적 갈등의 주요 소재로 굳어졌다. 이 대통령이 강조했던 자원외교도, 박영준 전 지경부 차관과 외교부 간부들이 줄줄이 연루됐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카메룬 다이아몬드 의혹' 등으로 빛이 바랬다.

이 대통령은 무상급식 등 주요 복지이슈를 '복지 포퓰리즘'이라고 공격해 오히려 '반복지 대통령'으로 기록될 가능성마저 있다. 새누리당이 뒤늦게 복지 강화 흐름에 동참하자, 이 대통령은 최근 포퓰리즘이라는 표현을 자제하면서 '0~5살 전면 보육'으로 돌아섰지만 이미 큰 점수를 잃은 뒤였다.

'민주주의 후퇴'라는 딱지가 붙은 것도 이 대통령으로선 곤혹스러운 대목이다. 언론분야에선 <와이티엔(YTN)> 해직기자 사태, <문화방송(MBC)> 노조 파업, 종편특혜 등으로 숱한 논란에 휩싸였고, 검찰은 정권 쪽을 편들어 무리하게 기소한 사건이 줄줄이 무죄판결을 받아 스타일을 구겼으며, 경찰은 용산참사로 국민의 원성을 샀다.

청와대 관계자는 "'청계천 서울시장'에 이어 '4대강 대통령'이라는 말을 들을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도 지난 22일 취임 4주년 특별기자회견에서 4대강에 대한 질문엔 답변조차 피하는 등 썩 내켜하지 않는 심경을 비쳤다. 안창현 기자 blu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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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Personal Note as Obama Speaks on Death of Boy

A Personal Note as Obama Speaks on Death of Boy

by JACKIE CALMES, nytimes.com
March 23rd 2012

WASHINGTON — President Obama did not mention race even as he addressed it on Friday, instead letting his person and his words say it all: "If I had a son, he'd look like Trayv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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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ighing in for the first time on the death of Trayvon Martin, the unarmed black teenager shot and killed a month ago in Florida by a neighborhood watch volunteer, Mr. Obama in powerfully personal terms deplored the "tragedy" and, as a parent, expressed sympathy for the boy's mother and father.

"I can only imagine what these parents are going through. And when I think about this boy, I think about my own kids," Mr. Obama said. "Every parent in America," he added, "should be able to understand why it is absolutely imperative that we investigate every aspect of this and that everybody pulls together — federal, state and local — to figure out exactly how this tragedy happened."

While speaking movingly from his perspective as the father of two girls, one a teenager, Mr. Obama notably made no reference to the racial context that has made the killing of Trayvon and the gunman's claim of self-defense a rallying point for African-Americans. Since Mr. Obama first began campaigning to be "president of all the people," as his advisers would put it when pressed on racial issues, he has been generally reluctant to talk about race. And after his historic election as the first black president, Mr. Obama learned the hard way about the pitfalls of the chief executive opining on law enforcement matters involving civil rights.

His remark at a news conference in the summer of 2009 that a white police officer in Cambridge, Mass., had acted "stupidly" in arresting a black Harvard professor, Henry Louis Gates Jr., at his home led to a national controversy that ended with Mr. Obama holding a peacemaking "beer summit" with the two men at the White House.

Until Friday, Mr. Obama had refrained from commenting on the death of Trayvon, 17, a high school student who was killed on the night of Feb. 26 in Sanford, Fla., near Orlando. George Zimmerman, 28, the neighborhood watch volunteer, said he fired at Trayvon in self-defense, although there is no apparent evidence that the teenager, who held only a bag of Skittles candy and an iced tea, was doing anything wrong.

But when a reporter asked about the case at a White House event introducing Jim Yong Kim as his choice to be president of the World Bank, Mr. Obama, who typically leaves such events ignoring the shouted questions of reporters, seemed prepared.

"It was inevitable given the high-profile nature of this story that he would be asked about it," his press secretary, Jay Carney, said later. He added that Mr. Obama "had thought about it and was prepared to answer that question when he got it."

Mr. Carney himself had refused for days to speak for Mr. Obama about Trayvon's death, and other advisers on Friday likewise declined to weigh in on the thinking at the White House about the case and its repercussions. Mr. Obama's mostly white male inner circle has long been reluctant to talk for their boss when the subject is race, given how personal it is for him. One aide, speaking only on the grounds of anonymity, said that there was no internal debate about how to respond to Trayvon's death, but that Mr. Obama wanted to await the Justice Department's initial review of the case and the announcement this week by his attorney general, Eric H. Holder Jr., that the civil rights division would investigate.

In his remarks, Mr. Obama endorsed the Justice Department investigation as well as efforts by local and state agencies in Florida to examine the circumstances of the shooting. Trayvon's parents "are right to expect that all of us as Americans are going to take this with the seriousness it deserves, and that we're going to get to the bottom of exactly what happened," Mr. Obama said.

Richard A. Oppel Jr. contributed reporting from West Monroe and Shreveport, La.

Original Page: http://t.co/wDuize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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