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1-01

[편집국에서] 오세훈이 가져다준 교훈 / 백기철

한마디로 상전벽해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발의한 게 8월1일이니 8·24 주민투표, 10·26 재보선까지 석달 동안 숨가쁘게 달려왔다. 모든 게 급변했다. 오 전 시장의 돌출행동이라는 '우연'을 통해 한국 정치의 다이내믹이 관철시킨 '필연'은 무엇일까?

첫째, '복지 전쟁'에서 진보가 완승했다. 수도 서울은 이제 보편적 복지의 전진기지가 됐다. 교육 자치에 이어 시정에서도 새로운 실험을 할 수 있게 됐다. 이명박 대통령이 시장 시절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한다고 한 이래 10여년 만의 극적인 변화다. 서울에서 진행될 복지 실험의 성패는 곧바로 내년 총선, 대선과도 직결될 수 있다. 이른바 '복지입국' 시대를 열어젖힐 수 있을지, 없을지를 가늠할 시험대가 될 것이다.

내년 총선, 대선에서 보수 진영이 다시 복지 전쟁을 하려 들지도 모르겠다. 그럴 만큼 무모한 보수가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그 경우 보수는 더욱 크게 패퇴할 것이다. 보편적 복지는 시대의 요구이고, '닥치고 좌회전' 하라는 것은 국민의 명령이다. 지난 3개월을 거치며 문제는 보편적 복지가 아니라, 이를 어떻게 제대로, 생산적으로 할 수 있느냐라는 게 분명해졌다. 오세훈의 돈키호테식 역주행은 도도한 민심의 흐름이 어디 있는가를 역설적으로 드러내 보였다.

둘째, 2040 세대의 '봉기'를 통해 기존 정치권의 무기력함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20대, 30대, 40대의 아픔과 분노 하나하나가 한표, 한표 올올이 쌓여 몰표가 나왔다. 복지 전쟁을 이끈 주력부대가 이들이다. 4대강과 디자인 서울로 대표되는 '빛 좋은 개살구 식' 토건주의가 철퇴를 맞았다. 트위터,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무장한 2040 세대들은 한국 정치의 변화를 이끌 무적함대다.

청와대의 대통령실장이 선거 직후 '사퇴 쇼'를 하다 슬그머니 들어가고, 한나라당이 에스엔에스 전문가를 영입한다며 허둥대는 것은 한마디로 별다른 대책이 없기 때문이다. 민주당이 선거 이후 쥐 죽은 듯 조용한 것은 내상이 너무 깊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를 비롯한 여권 전체의 정치 일정은 모두 '꽝'이 났다. 이 대통령은 물론 박 전 대표조차도 분노한 민심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꼴이다.

셋째, 석달간의 산고 끝에 시대정신을 담을 새 그릇들이 출현했다. 안철수란 이름은 이제 고유명사가 아니라 2040 세대의 분노와 아픔을 대변하는 보통명사가 됐다. 안철수 교수가 대선에 출마할지 안 할지는 알 수 없다. 아마 본인도 아직 모를 것이다. 하든 안 하든 그건 자유다. 저 밑바닥에 꿈틀거리는 민심은 제2, 제3의 안철수를 또 밀어올릴 것이다. 특정 인물이 아니라, 소통하고 대변하고 정책으로 구체화하는 정치행위를 누가, 어느 집단이 제대로 하느냐의 문제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당선은 새 그릇을 만드는 좋은 본보기다. 박 시장이 야권통합 경선이라는 새 장을 만들어 야권 단일후보로 선출되는 순간 절반쯤은 서울시장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선거 구도가 그랬다. 안철수 교수의 최근 언행은 매우 정교한 아웃복싱이라고 할 수 있다. 역대 대선 레이스를 보면, 장외에서 아웃복싱만 하며 감이 떨어지길 기다리다 제풀에 꺾인 이들이 여럿 있다. 정치적 맷집, 정치적 근육은 아웃복싱만으로 단련되지 않는다. 박근혜 대세론이 흔들리듯, 안철수 바람도 이제 거품 빠질 일만 남았는지도 모른다. 안철수든 누구든 민심의 바다로 과감히 뛰어들어야 한다. 민심을 믿고 호랑이굴로 뛰어들어야 한다.

kcbaek@hani.co.kr



[유레카] 정교분리 / 곽병찬

1992년 미국 대통령선거 때, 뉴욕의 대니얼 리틀 목사는 등에 반(反)클린턴 광고를 냈다. '하나님 나라의 법률에 반역했는데 그래도 찍을 것인가'라는 내용이었다. 광고 문안에는, 이런 광고를 하게 되면 교회가 세금을 내야 하는데, 납세에 필요한 헌금을 부탁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실제 국세청은 즉각 이 목사가 담임하던 교회의 면세 혜택을 박탈했다.

미국에선 교회 등 종교시설이 직접 정치에 참여해선 안 된다. 특정 정치인을 반대하거나 지지해도 안 된다. 이를 위반할 경우, 교회는 일체의 면세 혜택을 박탈당한다. 담임목사가 그래도 마찬가지다. 미국 최고의 부흥사 팻 로버트슨 목사는 1988년 공화당 대통령선거 후보 지명전에 참여한 뒤 교회 담임을 맡지 못했다. 미국 사회의 이런 엄격한 정교분리 원칙은 권력으로부터 종교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것이면서 동시에 종교가 국가 운영에 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미국에 첫발을 디딘 청교도들은 영국 국교의 탄압을 피해 이민 온 이들이어서, 건국과 함께 정교분리를 헌법에 반영했다. 가톨릭이 세속 권력을 좌지우지하던 프랑스에서도 대혁명 후 정교분리 법을 제정했다. 종교시설에 대한 면세는 과세권이 억압 수단이 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정부는 세금을 걷지 않을 테니, 교회는 국가 운영에 간섭하지 말라는 타협이기도 했다. 성직자들은 일반 시민과 똑같이 납세한다. 이 때문에 현안에 대해 자유롭게 의사를 표명할 수 있지만, 교회를 대표할 경우엔 불이익을 당한다.

우리는 성직자에게도 면세 혜택을 주는 세계 유일의 국가다. 그러나 일부 목사들은 기분 나쁘면 대통령 소환운동 운운하고, 정치인 찬반 의견 표명은 물론 정당 창당까지 추진한다. 그래도 국가는 제재하지 못한다. 이젠 과세 논의가 필요하다. 곽병찬 논설위원 chankb@hani.co.kr

2011-10-31

[고종석 칼럼] 불편한 진실

변화를 읽지 못하는 완고함이 게으름의 한 형태라면, 아무 데서나 변화를 읽어내는 과민함도 게으름의 한 형태다. 둘 다, 현실의 무게를 감당하기 버거워 속 편한 환상으로 도피한다. 지금 한국 정치를 규정하는 가장 큰 힘은 지역주의다. 10년 전, 20년 전에 그랬듯. 최근 부산 경남(PK)의 지역주의 해체를 운위하는 이들도 있으나, 망상이다. 영남 지역주의에서 피케이 소지역주의로의 이행이라면 또 모르겠다.

이 지역주의에 패기 있게 맞서 그것을 허물려 한 정치인이 노무현이다. 그의 시도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한국인들의 고향 애착이 워낙 검질겨 그랬겠지만, 거기엔 노무현 자신의 조급하고 볼품없는 정치공학도 한몫했다. 노무현에게 호의를 보였다가 지지를 거둬들인 이들은 흔히 그의 '계급 배반'을 입에 올린다. 그러나 그의 대통령직 수행에서 더 두드러진 것은 '지역 배반'이었다. 물론 한국에서 계급모순과 지역모순은 맞물려 있다. 영남을 향한 노무현의 헛된 구애는 예컨대 그가 삼성 재벌에 끊임없이 보낸 추파와 살며시 겹쳤다.

참여정부 아래서 호남이 영남에 견줘 '물리적으로' 차별받은 바는 없다. 그러나 노무현은 덜 여문 언행으로 호남 유권자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냈다. 그는 대통령이 된 뒤 "호남 사람들은 내가 좋아서 나를 찍은 것이 아니라 이회창씨가 싫어서 나를 찍은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은 자신의 가장 진지한 지지자들에 대해 예의를 저버린 짓이었다. 설령 호남 유권자들의 심리에 그런 요소가 설핏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이회창씨'가 싫어서라기보다 '한나라당 후보'가 싫어서, 한나라당이 집권할까 두려워, 노무현에게 몰표를 주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노무현이 "호남 사람들은 내가 좋아서 나를 찍은 것이 아니라 내가 민주당 후보여서 나를 찍었다"고 말했다면 한결 나았을 것이다. 노무현이 원래 말하고자 했던 바가 이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호남 유권자들은, 노무현의 사람됨이 이회창씨의 사람됨보다 훨씬 낫다는 판단도 했겠지만(나도 그리 판단한 전라도 사람이다), 일차적으로 그가 민주당 후보여서 그를 지지했을 것이다. 그가 민주당 후보가 아니었다면, 호남 유권자 열 사람 가운데 아홉 이상이 왜 그에게 표를 주었겠는가? 한나라당 지지자들로부터 '지역주의자'라는 조롱을 받아가면서까지 말이다. 그러니까 민주당이 '호남당'이라는 세간의 평가는 옳다. 민주당, 호남당 맞다. 더 넓혀도 대한민국 서부 지역에 뿌리내린 '서부당', 맞다. 그리고 그것은 민주당원들이나 민주당 지지자들이 조금도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 아니다. 그 호남당 후보로 대통령이 된 이가 주변의 야심가들과 함께 그 당을 깬 것도 모자라 한나라당과 연정을 꾀했을 때, 호남 사람들의 마음이 어땠겠는가?

내년 대선에서 정권 교체를 꾀하고 있는 세력들은 호남 유권자들을 제 호주머니 속의 유리알로 여기고, 피케이 유권자들과 이른바 시민사회에만 눈독을 들이는 것 같다. 위태로운 전략이다. 물론 민주당과 호남(출신) 유권자들만으로는 정권을 되찾을 수 없다. 그러나 그 호남 없이는 정권 교체 꿈도 못 꾼다. 지금 추세가 이어진다면, 내년 대선에선 한나라당 후보와 피케이 출신 후보 누군가가 맞설 듯하다. 그런데 '노무현의 배신'을 기억하고 있는 호남 유권자들이, 비록 한나라당 후보에게 투표하지는 않을지라도 대거 기권한다면, 정권 교체는 물건너간다.

그 피케이 출신의 잠재적 대선 후보 가운데 한 사람인 문재인씨는 노무현 못지않게 매력적인 이다. 그러나 그는 지난 정권 시절 "노무현 정권은 '부산 정권'"이라고 말해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부산에서의 따돌림이 오죽 서운하고 갑갑했으면 그랬을까 이해되는 바도 있지만, 그것은 정권 창출의 주춧돌이었던 호남 유권자들의 마음을 도려내는 말이었다. 호남 유권자들의 긍지는 '개혁적 정권'을 다시 만들었다는 데 있었지, '부산 정권'을 만들었다는 데 있지 않았다. 문재인씨든 또 다른 피케이 출신 정치인이든, 호남(출신) 유권자들(그들 대다수는 민주당 지지자일 테다)의 '지역주의적' 몰표 없이는 청와대에 입주할 수 없다. 정권 바꾸고 싶으면, 신실한 지지자들을 신실하게 대하라.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