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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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허 전쟁'은 혁신 기술 낳을까 [2011.08.30. 제876호]
이정훈
[이슈추적] 특허 싸움은 애플에 삼성이 위협적인 존재라는 방증… 화해 어려울 것이란 전망 뒤 '혁신 제품'의 중요성 부상
8월15일 광복절에도 삼성전자 수원공장의 스마트폰 연구소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최신 스마트폰을 개발하려고 휴일임에도 연구원들이 출근한 것이다. 이에 앞선 13일과 14일에도 상당수 연구원들이 출근했다. 3일 연휴에도 많은 사람들이 쉬지 않고 일했다. 이런 모습 때문에 삼성전자가 '재빠른 추격자'(Fast-follwer)의 위상을 세울 수 있었다.

9개국 12개 법원에서 19건 소송 진행중

하지만 추격자는 우선 선두주자의 모진 공격을 막아내야 하는 처지다. 삼성전자는 최근 애플의 특허침해 소송에 맞소송을 제기하며 응전하고 있다. 그동안 삼성전자는 메모리, 액정디스플레이(LCD) 등 주요 부품의 최대 고객인 애플이 '카피캣'(Copycat·모방꾼)이라고 비난해도 대응을 자제해왔다. 하지만 지난 4월 애플이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갤럭시S' 등이 특허를 침해했다며 소송을 제기하자 적극 대응으로 태도를 바꿨다. 애플이 소송을 제기한 지 며칠 안 돼 삼성전자는 애플이 특허를 침해했다며 한국·일본·독일 등의 법원에 맞소송으로 대응했다.

» 삼성전자와 애플이 스마트폰 시장을 두고 특허를 앞세워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다. 애플을 추격 중인 삼성전자가 지난해 6월 서울 서초동 사옥에서 구글의 안드로이드 운영 체제(OS)를 탑재한 스마트폰 '갤럭시S'를 선보이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4월에 시작한 특허 싸움은 '전쟁'으로 치닫고 있다. 두 회사가 정확한 정보를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8월21일 현재 9개국 12개 법원에서 19건의 소송이 이뤄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쟁을 방불케 하는 치열한 싸움은 삼성전자의 현재 위치를 말해준다. 애플은 2000년대 들어 아이팟을 시작으로 아이폰, 아이패드 등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어 해마다 고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그런 애플이 삼성전자를 특허를 무기로 견제하는 건 삼성전자가 위협적인 존재임을 사실상 인정하는 것이라는 견해가 나온다. 애플의 전 수석부사장인 제이 엘리엇도 저서 <아이리더십>에서 "저는 개인적으로 삼성이 있어 기쁘다. 애플의 가장 큰 경쟁사이자 애플을 위협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유일한 곳"이라고 평가했다.

삼성전자가 세계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과거에는 일본 회사들을 뒤쫓는 신세였다. 하지만 2006년 3분기 삼성전자가 소니를 LCD TV 부문에서 제친 이후 계속 우위를 점하는 등 점점 세계 1위 품목이 늘어나고 있다. 2010년 말 현재 TV를 비롯해 반도체, LCD 등 11개 부문에서 세계시장 점유율 1위를 달리고 있다. 삼성전자의 모델이던 소니와 파나소닉 등 일본 회사와는 해가 갈수록 격차가 커지고 있다. 소니의 요시오카 히로시 부사장이 지난해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가전전시회(CES)에서 "지난해에는 환율의 영향으로 LG에 밀렸는데 올해는 LG를 따라잡고 2위가 되겠다"고 다짐한 것은 역설적으로 삼성전자의 위상을 드러낸다. 반면 이건희 삼성 회장은 같은 가전쇼에서 "기초에서, 디자인에서 우리가 (일본 회사보다) 앞섰으니까. 한번 앞선 것은 뒤쫓아오려면 참 힘들다"며 자신감을 숨기지 않았다.

이처럼 삼성전자가 '퀀텀점프'(대약진)를 할 수 있는 비결로 전문가들은 디지털 제조 방식과 정확한 품질, 현지화 등을 꼽는다. 일본이 아날로그 제조 방식인 아이디어에서부터 시작해 설계, 도면, 부품 발주, 조립까지 순차적으로 진행했다면, 삼성전자는 이를 뛰어넘어 약간의 시차만을 두고 동시에 진행하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 삼성전자 상무 출신인 요시카와 료죠는 이를 순차적으로 진행하는 '꼬치구이 방식'에서 좋은 것을 우선 골라먹을 수 있는 '사시미 방식'으로 바뀐 것이라고 비유했다. 여기에 일본이 원재료·부품·성능 등 소비자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부분까지 고품질을 유지하는 과잉 품질을 고집한 것과 달리, 삼성전자는 현지화 전략에 따라 지역별로 적합한 기능을 추가하며 품질에 큰 차이가 나지 않는 부분은 과감하게 허용하는 방식을 썼다. 그 결과 삼성전자는 해마다 고성장을 거듭하며 다른 회사와 격차를 벌려나갔다.

애플은 디자인, 삼성은 기술로 공격

» 자료: 블로그 fosspatents.blogspot.com
휴대전화 시장에서도 삼성전자의 1위 등극은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2009년 삼성전자는 2억2700만 개의 휴대전화를 팔아치우며 시장점유율 20%를 넘어섰다. 당시 삼성전자 임원들은 "이제 노키아의 등이 보일 정도로 따라잡았다"며 자신감을 내보였다. 하지만 자신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6개월 앞을 내다보기 힘든 정보기술(IT) 시장에서 삼성전자는 애플이라는 새로운 강적을 만난 것이다.

애플은 기존 휴대전화 시장에 파천황적 변화를 불러왔다. 애플은 아이폰 출시와 함께 아이튠즈, 앱스토어 등을 통해 수많은 콘텐츠와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할 수 있는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었다. 또 생태계에 개발자와 사용자 모두 참여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삼성이 주도하는 생태계를 구축하지는 못했다. 아이폰에 맞서 '옴니아'를 시작으로 '갤럭시' 시리즈 등을 내놓았지만, 여전히 생태계는 구글의 '안드로이드'에 의존하고 있다. 그럼에도 기존의 실력을 발휘해 다른 휴대전화 제조업체보다 훨씬 더 발빠르게 애플을 뒤쫓고 있다. 지난 2분기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을 살펴보면, 애플은 18.5%로 전년 같은 기간보다 5% 성장하며 1위를 유지했다. 반면 2위인 삼성전자는 5%에서 17.5%로 뛰어올라 1위와의 격차를 크게 줄였다. 스마트폰 시장은 급성장 중이어서 그 중요성은 점점 커지고 있다. 지난해 휴대전화는 전세계적으로 약 13억6천만 대가 팔렸는데 그중 스마트폰이 3억 대로 22%를 차지한다. 금액 기준으로는 1830억달러 중 절반을 넘어선 990억달러(54%)가 스마트폰이었다. 올해는 스마트폰으로의 시장 집중 현상이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런 상황에서 애플이 칼을 빼들었다. 삼성전자를 상대로 특허 침해를 이유로 소송을 거푸 제기하고 있다. 애플은 기술 특허는 물론 디자인, 외장 등의 문제까지 걸고넘어졌다. 삼성전자의 맞소송으로 특허 전쟁은 갈수록 확전 중이다. IT 업체들이 소송을 벌이다 대개 합의로 끝낸 과거와 달리, 애플은 꾸준하게 소송을 제기하고 있다. 애플과 삼성이 타협할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의견이 많은 까닭이다. 대한변리사회 정동준 공보이사는 "애플은 디자인을, 삼성전자는 기술을 가지고 소송에 임하는 모양새"라며 "소송이 곳곳에서 진행되는 것을 보면 끝을 보려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 "삼성은 애플이 주요 고객이라 대항하지 않았는데 최근 응전하는 모습을 보면 두 회사 간 화해가 쉽지 않을 듯하다"고 덧붙였다.

이런 상황에서 소송의 결과가 하나둘 나오고 있다. 알려진 19건의 소송 가운데 일단 애플이 삼성전자 제품의 판매와 마케팅을 막아달라며 낸 가처분소송 결과가 최근 나왔다.

'소송 전쟁'은 이제 시작일뿐

네덜란드 법원은 8월24일 애플이 삼성전자의 태블릿PC '갤럭시탭'과 스마트폰 '갤럭시S' 등에 제기한 특허 침해 소송 10건 가운데 1건만 인정했다. 이 판결로 삼성전자는 네덜란드에서 10월14일 이후 갤럭시S를 출시할 수 없게 됐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오히려 '승리'라고 해석했다. 판결에서 애플의 권리로 유일하게 인정된 것은 사진을 손으로 밀어넘기는 '포토플리킹'(Photo Flicking)이며, 이는 관련 소프트웨어의 업데이트로 큰 어려움 없이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애플이 강조한 디자인과 관련한 권한은 인정받지 못해 삼성이 유리한 위치에 섰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하지만 다음날 독일 법원에서는 다른 결과가 나왔다. 갤럭시탭의 저작권 침해 여부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독일 법원 판사는 "애플의 유럽연합(EU) 안 디자인 권리가 광범위하지는 않더라도 중간 범위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애플의 디자인 권한이 인정받을 가능성이 높아진 셈이다.

국내에서는 많은 해석이 나온다. 예를 들어 독일 법원이 지난 8월9일 갤럭시탭의 유럽 전체 판매 금지 처분을 내렸다가, 8월16일 다시 독일의 주권이 미치는 영역만으로 한정한 것을 두고 삼성전자가 우위를 점했다고 해석했다. 그 이유로 국내 일각에선 애플이 법원에 제출한 자료에서 갤럭시탭 자료가 '조작'된 사실이 들통나 판매 제한이 풀렸다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특허 전문 블로그 '포스페이턴트'(FOSS Patents)는 "독일 법원이 유럽 전체 지역에 판매·마케팅 금지를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어 독일로만 제한한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삼성전자는 이런 엇갈리는 다양한 해석 가운데 어느 쪽이 사실에 부합하는지에 대해 아무런 공식 견해를 밝히지 않고 있다. IT 업계 관계자는 "한국 사람으로서 삼성전자가 승소하기를 바란다"면서도 "사실을 왜곡하는 경우는 삼성전자에도 도움이 안 된다"고 말했다.

진실이 어느 쪽이든 네덜란드·독일 법원의 판단은 가처분소송 단계에 불과해 그 결과에 큰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다는 견해도 상당하다. 서울지식재산센터 송정부 변리사는 "기승전결로 따지면 아직 '기'도 시작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어찌됐든 애플과 삼성의 소송 전쟁은 삼성 등 국내 업체들이 디자인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 계기는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변리사 겸 변호사는 "애플과의 싸움은 사용자의 편의성을 늘리는 사용자환경(UI), 외관 등 디자인이 중요한 권리가 되고 이 때문에 큰 이득 혹은 손해를 볼 수 있음을 알려주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아울러 '혁신 제품'(Game-changer)의 중요성도 새삼 부각됐다. 삼성전자는 최근 스마트폰 시장에서는 애플을 따라잡고, 태블릿PC 판매량은 지난해보다 5배 늘려 '재빠른 추격자'에서 '시장 선도자'(First-mover)가 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현재 기술력만 강조하는 분위기에서는 쉽지 않다는 지적이 많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삼성이 어려워지는 것은 소프트웨어 파워를 키우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하드웨어 위주로 성장한 대기업들이 부메랑을 맞고 있다"고 꼬집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혁신제품과 생태계 이끌 역량 갖춰야

삼성전자도 소프트파워를 키우려고 노력에 나섰다. 이건희 회장은 최근 "소프트웨어 인력을 대거 확충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대해 한 IT 업계 전문가는 "삼성전자는 부품을 비롯해 완제품까지 갖추고 있어 규모의 경제를 이뤄 급성장할 수 있었다"면서도 "하지만 애플처럼 판도를 뒤바꿔놓는 혁신적인 제품을 내놓지 못한 한계가 있었고, 이번 소송은 디자인과 함께 혁신 제품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해준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은퇴해 삼성전자 등 국내 기업에 기회가 될 것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그보다는 기술력과 함께 생태계를 이끌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것이 우선"이라고 조언했다.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참고 문헌
<아이리더십>(윌리엄 사이먼·제이 엘리엇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위기의 경영 삼성을 공부하다>(하타무라 요타로 지음, 스펙트럼북스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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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기사돌려보기]서울시장 보선에서 누가 불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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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장 보선에서 누가 불리할까 [2011.08.30. 제876호]
김보협
[표지이야기] 갑자기 떠오른 대선 전초전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선거 3연패에 갈짓자 복지정책 한나라당이 통합·연대 시험대 오른 야권보다 불리해
» 오세훈 서울시장은 무상급식 주민투표 이틀 만인 8월26일 사퇴했다. 주민투표 강행이나 시장 사퇴로 인한 혼란에 대한 사과는 없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무상급식은 과잉 복지, 복지 확대는 선심성 공약"이라고 주장했다. 한겨레21 박승화

오세훈 서울시장이 결국 시장직에서 물러났다.

오 시장은 8월26일 기자회견을 통해 "주민투표 결과에 책임을 지고 오늘 시장직에서 물러난다"며 "대한민국 복지 방향에 대한 서울시민의 뜻이 어디 있는지 결국 확인하지 못하고 아쉽게 투표함을 닫게 된 점, 매우 송구스럽고 죄송한 마음"이라고 말했다. 서울시 무상급식 주민투표의 투표율이 개표 조건인 33.3%에 미달하는 결과(25.7%)가 나온 지 이틀, 투표 결과에 시장직을 걸겠다고 밝힌 지 일주일 만이다. 이로써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 힘겹게 재선에 성공한 오 시장은 이번 투표율만큼의 임기만을 채우고 불명예 퇴진하게 됐다.

선거하고 싶지 않았던 홍준표

당초 청와대와 한나라당 지도부는 오 시장의 시장직 연계를 만류했고, 8월24일 투표 결과가 나온 뒤에도 "사실상 승리했다"고 자평하며 오 시장의 사퇴를 말렸다. 8월24일 최종 투표율이 나온 직후 오 시장과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 청와대의 임태희 대통령실장, 김효재 정무수석 등이 모인 자리에서였다. 10월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 시장으로서는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일부 언론에는 "당장에라도 그만두고 싶다"는 그의 솔직한 심경이 보도됐다. 투표일 다음날도 한나라당 지도부에 더 이상 어쩔 수 없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오 시장은 부모의 소득과 관계없이 초등학생들에게 무상으로 급식을 하는 데 반대했고, 이를 막는 것을 '구국의 결단'으로 여겼다. 시장직을 걸면 투표율이 올라갈 것으로 믿었는데 오판이었다. "밥 안 준다고 우는 아이는 봤어도 밥 안 주겠다고 우는 어른은 처음 봤다"는 비아냥까지 들은 마당에, 서울시장 보궐선거의 유불리를 따져 자신의 약속마저 가벼이 여기는 정치인이라는 평가가 보태진다면 재기 불능 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고 그는 판단한 것 같다. 오 시장은 사퇴 기자회견에서도 "갈등과 분열의 정치문화를 건강한 담론의 정치문화로 바꿔나가는 것이 앞으로 제게 주어진 또 하나의 책무라는 것도 통감했다"고 말했다. 사퇴 회견임에도 출마 선언 같은 느낌을 주는 대목이었다. 오 시장의 사퇴 기자회견에 앞서 열린 한나라당 서울시 당협위원장 회의 공개석상에서 홍준표 대표는 "국익이나 당보다도 개인의 명예를 중시하는 것은 당인의 자세가, 조직인의 자세가 아니다"라며 오 시장을 비판했다. 회의 직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오늘로 오세훈은 끝났다"고 쐐기를 박았다.


여권 지도부의 만류가 오 시장의 '소신'을 꺾을 수 없었던 데는 또 다른 사정이 있다. 국회의원은 사직할 때 본회의 의결이나 국회의장의 허가 등 엄격한 절차가 필요하지만, 지방자치단체장은 지방의회 의장에게 사임통지서만 보내면 그만이다. 시장이 되기는 어렵지만 그만두는 것은 쉽다.

» 오세훈 시장의 사퇴로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추가돼 10·26 재·보궐 선거가 내년 총선과 대선의 전초전 성격을 띠게 됐다. 한나라당의 나경원 최고위원. 사진공동취재단

오 시장의 사퇴로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둔 정치 일정에 커다란 돌발 변수가 생겨 여야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당초 10월26일로 예정된 재보선은 서울 양천구청장, 부산 동구청장을 포함한 기초단체장 8곳, 광역의원 7곳, 기초의원 12곳 등 중앙 정치 무대에서는 큰 관심을 끌지 못할 규모의 선거였다. 그런데 서울시장 보선이 추가돼 판이 커졌다. 지난 4·27 재보선이 선거일에 임박해 강원도지사가 추가되고, 경기 분당을에 손학규 민주당 대표가 출마하며 정치적 비중이 커진 것과 유사한 흐름이다. 2002년과 2007년 두 차례의 대선의 경우 대선 1년 전부터 대략의 선거 구도가 짜이고 주요 정당의 후보들이 일찍 부각돼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던 데 비하면, 올해는 주요 정당과 대선주자들의 움직임의 폭과 속도가 덜했다. 그런데 오는 10월 서울시장 보선이 내년 총선과 대선의 전초전 성격을 띠게 돼 뜨뜻미지근했던 대선 열기도 달아오를 전망이다. 여야 모두 준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뜻하지 않은 큰 선거를 치르게 된 셈이다.

전체적인 구도 면에서 보면 여야 가운데 누가 유리한지 분명치 않다. 그런데 비슷한 질문임에도 "누가 불리한가"라고 물음을 바꾸면 상대적으로 명료해진다. 한나라당이다.

'선거의 여왕'을 시험에 들게 하고

우선, 안정적인 구도에 변화가 생기게 된다. 집권 4년차에 접어들어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에 대한 민심 이반이 가속화되고 있지만, 여전히 각종 여론조사에서 한나라당의 지지율은 제1야당인 민주당보다 10%포인트가량 높은 30%를 유지하고 있다. 유력한 대선주자인 박근혜 전 대표의 지지율은 더 높은 40% 안팎으로 여야 통틀어 경쟁 상대가 없는 부동의 1위를 유지해왔다. 이 지지율이 내년 총선과 대선까지 아무 일 없이 그대로 이어지리라 기대하지는 않았겠지만, 박 전 대표 처지에서는 달갑지 않은 '모의고사'를 치르게 됐다. 박 전 대표는 서울시 무상급식 주민투표에 대해 "지자체마다 사정이 다르고 주민들이 결정하지 않겠느냐"며 거리를 뒀다. 하지만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사정이 다르다. 내년 총선과 대선까지 적지 않은 파장이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선거처럼 뛰었는데도 결과가 좋지 않다면 '선거의 여왕'이라는 박 전 대표의 경쟁력에도 물음표가 찍힐 수 있다.

» 오세훈 시장의 사퇴로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추가돼 10·26 재·보궐 선거가 내년 총선과 대선의 전초전 성격을 띠게 됐다. 민주당의 천정배 최고위원도 자천타천으로 거론되는 후보군에 속한다. 한겨레 김명진

한나라당이 불리한 둘째 근거는 지난해 6·2 지방선거부터 올 4·27 재보선, 그리고 이번 무상급식 주민투표까지 굵직한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3연패를 당했다는 사실이다.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그 연장선 위에서 치러진다. 복지라는 주요 이슈도 맥을 이어갈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복지 의제와 관련해 한나라당의 발은 엉켜 있는 상태다. 내년부터 단계적으로 무상보육을 추진하겠다며 그보다 예산이 적게 드는 서울의 무상급식은 반대했다. 또 경기도를 포함해 자신들이 집권한 영남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이미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보편적인 전면 무상급식을 실시하고 있는데도, 서울만은 '복지 포퓰리즘'이라고 반대하며 대안으로 소득수준에 따른 선별적 무상급식안을 내놓았다.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도 무상급식을 포함한 복지 의제가 주요 쟁점으로 부상할 텐데, 한나라당은 두 달여 만에 복잡하게 얽힌 매듭을 풀 수 있을까. 무상급식 주민투표 당시의 태도를 고수해도, 견해를 뒤집어도 각각의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셋째 근거는, 전임 오세훈 시장에 대한 평가에 더해 주민투표에 보궐선거까지 잦은 선거를 치르게 된 이유를 물을 유권자에게 할 말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무상급식 주민투표에 대략 200억원을 썼고, 이어 열리는 보궐선거에 300억원을 쓰게 된다. 서울시의 무상급식 지원비용 700억원의 예산을 아끼려고 하다가 결과적으로 두 번의 선거에 500억원을 쓰게 된 셈이다. 주민투표에 참여한 유권자 25.7%가 대부분 오 시장을 지지하고 보편적인 무상급식에 반대했다고 가정하더라도, 상식 수준의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무상급식 정책이 주민투표를 할 만한 사안이었는지, 오 시장이 시장직을 연계할 만한 사안이었는지, 그리고 보궐선거의 원인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등에 관해 말이다. 청와대와 홍준표 대표를 비롯한 한나라당 지도부가 오 시장의 조기 사퇴를 만류하며 내년 4월에 총선과 동시에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치르는 방안을 선호했음에도, 서울에 지역구를 둔 국회의원과 지역협의회장(옛 지구당위원장) 상당수가 '10월 보선'으로 기운 이유는 '오세훈 효과'를 미리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한나라당이 불리해 보이는 마지막 근거는 '필승 카드'가 마땅치 않다는 점이다. 후보군으로는 지난해 6·2 지방선거를 앞두고 오 시장과 경쟁했던 나경원·원희룡 최고위원이 있다. 원 최고위원은 지난 7월 전당대회 출마 당시 '차기 총선 불출마' 약속이 오해를 빚자 "서울시장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사정 변경'을 이유로 거둬들이기 힘든 상태다. 나경원 최고위원은 서울시장 후보 경선 당시 원 최고위원과의 단일화에서 이겼고 지난 두 차례의 전당대회에서 상위권으로 최고위원에 당선되며 대중적 인기가 높은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당내에서도 내세울 '업적'이 별로 없다는 평이 많다. 오세훈 시장도 국회 경력은 짧았다. 초선에 불과했지만 정치 개혁과 정당 개혁을 위해 꾸준히 제 목소리를 내온 경력이 있었고, 2004년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정치 일선에서 사라지며 대중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었다. 나·원 최고위원 외에 3선의 권영세 의원과 서울시 부시장을 지낸 정두언 의원(여의도연구소장)도 거론되지만 당내에서 비중 있는 대안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는 아니다. 그래서 국무총리 출신인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 유인촌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 외부 인사의 영입 가능성이 나온다.

야권연대도 크나큰 시험에 들어

한나라당이 10월 재보선을 얼마나 비관적으로 전망하는지는 의원들의 발언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서울의 한 중진 의원은 '스윙효과'를 언급했다. 그네처럼 한쪽으로 쏠리면 다음 선거에서는 반대편으로 쏠린다는 것인데, 10월 보선에서 지면 한나라당 지지층이 결집하며 4월 총선에서 유리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일부 소장파 의원 사이에서는 초선인 홍정욱 의원의 이름이 오르내린다. 어차피 불리한 선거인 만큼 지더라도 출마자나 당에 큰 손해가 없는 후보가 낫다는 논리다. 이는 지난 4월 경기 분당을 국회의원 보궐선거 당시 거물급인 손학규 민주당 대표가 후보로 나서자 초선 비례대표 여성의원으로 맞불을 놓자던 홍준표 대표의 주장과 비슷하다.

전반적으로 한나라당이 불리한 요소가 많은 만큼 뒤집으면 야권이 유리할 것 같은데 꼭 그렇지만도 않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을 포함한 야권의 최대 화두는 통합과 연대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새로운 진보적 대중정당을 만들려고 진통을 거듭하며 협상 중이며, 민주당과는 후보 단일화 혹은 지분 협상을 통한 연대를 계획 중이다. 진보정당까지 포괄하는 민주진보 세력의 통합정당 건설을 목표로 9월6일 출범하는 시민정치운동단체인 '혁신과 통합'은 한나라당과의 1대1 대결 구도를 염두에 두고 통합정당을 주장하고 있다. 통합이든 연대든 이견을 좁히고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를 풀어갈 정치 일정표를 가지고 있던 야권에도, 오는 10월 보선은 달갑지 않은 돌발 변수다. 통합 혹은 연대의 대상이 되는 정치세력들이 모두 동의할 만한 야권의 단일후보가 있으면 모르지만, 야당들이 갈등하고 각 정당 내부에서 후보가 난립해 경쟁하면 구심력보다 원심력이 커질 수밖에 없다. 야권의 통합·연대 흐름과 역행하는 방향이다.

민주당에서는 8월25일 일찌감치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한 천정배 최고위원을 비롯해 김한길 고문, 추미애·박영선 의원, 2006년과 2010년 두 차례 도전장을 내밀었던 이계안 전 의원 등 10여 명의 이름이 자천타천으로 거론된다. 진보정당에서는 최규엽 새세상연구소장(민주노동당)과 노회찬 전 대표(진보신당)가 후보군에 속한다. 한명숙 전 총리의 경우 민주당 바깥 범야권의 지지를 끌어내는 데 상대적으로 강점이 있다는 평이지만, 지난해 6·2 지방선거에서 오세훈 시장에게 0.6%포인트 차이로 패한 바 있고 그 무렵부터 검찰의 무리한 기소로 시작된 불법 정치자금 관련 재판이 마무리되지 않은 점이 부담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국회 환경노동위원장 출신인 추미애 의원과 활발한 의정활동으로 대중적 인지도를 높인 박영선 정책위원장도 민주당 내에서 유력한 후보로 꼽히지만, 야권의 어느 후보도 '필승 카드'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점에서 한나라당과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다.

그나마 야권에는 지난해 지방선거 당시 인천과 경남 등에서 정책협약을 통한 공동지방정부를 구성한 경험이 있고,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방식에는 이견이 있지만 한나라당과의 1대1 대결 구도를 만들어야 희망이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민주당 야권통합특별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인영 의원은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서로 간에 부족한 신뢰를 쌓고 통합의 기운을 확산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복지논쟁 촉발한 오세훈 효과

어쨌든 '전직' 서울시장 오세훈에 의해 주사위는 던져졌다. 홍준표 대표의 '뒷담화'를 종합하면, 무상급식 주민투표 제안부터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이르기까지 오세훈의, 오세훈에 의한 원맨쇼였다는 것인데 오세훈을 위한 것까지는 되지 않을 것 같다. 지난한 과정에서 국민의 세금 수백억원을 허투루 썼다는 점,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 구도를 전면적 복지와 단계적 복지로 바꿔 논쟁 구도를 왜곡했다는 점을 빼면 그의 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의 미래와 시민의 삶을 위한 복지 의제를 둘러싼 대논쟁을 촉발했다는 점이다. 논쟁을 건강하게만 한다면 복지, 재정, 세금, 부의 재분배 등을 의제로 여러 정치세력이 논쟁하는, 최소한 출신 지역을 놓고 볼썽사납게 다투는 것보다는 격조 있는 경쟁을 벌일 수도 있다. 서서히 그 문이 열리고 있다.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주민투표 참여는 한나라당 지지?
"2~3% 이상은 반대표로 보아야"

25.7%, 215만9095명.

8월24일 열린 서울시 무상급식 주민투표의 투표율, 투표한 사람의 수다. 이틀 뒤인 26일 오세훈 서울시장의 사퇴로 10·26 보궐선거로 바빠진 여야 모두 이 묘한 숫자를 해석하기에 바쁘다. 그런데 한 당에서 같은 밥을 먹는 식구들끼리도 '자뻑'과 '자학' 사이를 오간다.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의 "사실상 승리"라는 '명언'의 근거는 이번 주민투표의 투표율이, 서울 국회의원 의석 48개 가운데 한나라당이 40개를 석권한 2008년 총선 당시 한나라당의 서울 평균 득표율을 웃돈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의 다른 의원들도 25.7의 숫자에 의미를 보태며 내년 총선에서 이번 투표율이 자신의 득표율로 이어지기를 기대했다. 권영세 의원은 "이번 주민투표 총투표수 215만9095표는 지난해 오세훈 서울시장이 얻은 208만6127표를 상회하는 것이다. 한나라당 지지도가 떨어진 상황에 비춰볼 때 의미 있는 수치"라고 말했다. 반면 이를 한나라당이 얻을 수 있는 최대치를 확인한 것이라며 '보수의 한계'로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주민투표 이후 트위터에 "우리 사회에 보수가 얼마나 취약한지, 이른바 진보가 얼마나 강력한지 나타났다"고 적었다. 민주당 쪽에서도 예상치(20% 초반)를 뛰어넘는 숫자를 총선 득표율로 환산하며 긴장하는 쪽과 "한나라당의 최대치여서 이 정도면 해볼 만하다"는 쪽으로 갈려 한나라당과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그런데 25.7%에 '숨어 있는 2인치'는 없을까. 투표의 선택지가 오세훈 시장 쪽의 의도대로 왜곡된 측면이 있다 하더라도, 소득에 따른 '선별적 무상급식안'을 반대하려고, 혹은 개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보편적 무상급식안'에 찬성하려고 투표한 사람들 말이다. 투표를 통해 민주시민의 권리와 의무를 실천하겠다는 이들까지 포함하면 25.7%, 215만9천여 명을 모두 한나라당 지지자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을 수 있다. 실제 관악구에 사는 직장인 고아무개(42)씨는 "야당과 시민단체 사이에서 주민투표 대응 방안을 논의할 때부터 내년 대선까지를 고려하면 정면 대응하는 것이 낫다고 봤다"며 "투표 거부 전략이 투표 무관심층에 편하게 묻어가는 듯해 내키지 않아 내 생각과 가까운 쪽에 투표를 했는데, 투표한 사람 모두를 오세훈 시장과 한나라당 지지자인 것처럼 여기는 것 같아 불쾌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개표 최저선인 33.3%를 넘지 못해 고씨 같은 소신파가 얼마인지 알 방법이 없다.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조선일보>가 8월28일치에 보도한 긴급 여론조사의 행간에 숨어 있다. 미디어리서치에 의뢰해 8월25일 19살 이상 서울시민 500명을 전화로 조사한 결과, 투표 참가자의 85.4%가 '단계적 실시'를, 8.2%가 '전면적 실시'를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다른 기사에서는 "민주당을 지지한다고 밝힌 응답자의 10.4%가 투표에 참여했다"는 대목도 나온다. 그 조사로 추정할 때 8~10%가량은 한나라당과 다른 선택을 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한겨레>에서 "25.7% 투표율 중에 최소 2~3%포인트 이상은 한나라당을 반대하러 간 사람도 있다고 봐야 한다"며 "이 경우 한나라당 지지율은 23% 안팎이어서 내년 총선에서 한나라당에 매우 부정적인 상황"이라고 말했다. <조선일보>의 10%를 이번 주민투표의 투표율로 환산하면 2.5%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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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아이콘] 눈에 보이는 아무 증거 없어도- 씨네21, 2011-09-02


[진중권의 아이콘] 눈에 보이는 아무 증거 없어도

글:진중권 일러스트레이션:정원교 2011.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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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과 신앙


유학 시절 알고 지냈던 지인을 베를린에서 만났다. 그녀는 내게 어느 민족종교의 경전을 내민다. 안 받겠다고 한사코 사양해도, 자꾸 내밀며 “그냥 읽어보기만 하라”고 강권한다. 이미 만나자고 할 때부터 그녀의 목적은 전도에 있었던 모양이다. 2년 뒤에 세계의 종말이 온다느니, 내년에 다시 천연두가 부활할 것이라느니, 계속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기에 앞으로 다시 만나지 말자며 연을 끊어버렸다. 그 정도면 이미 정상적 소통이 불가능한 상태.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

이런 상태에 빠진 사람들과 ‘논리적’ 대화를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들은 논리를 초월한 ‘믿음’을 통해서만 특정한(물론 더 고차의)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을 ‘신앙주의’라 부른다. 물론 신앙주의가 곧 광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신앙주의는 사실 종교적 심성의 문제이고, 광신은 그 심성을 이성과 어떻게 조합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광신은 그저 신앙주의의 극단적 형태라 할 수 있다.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Credo quia absurdum) 이 말은 흔히 교부 테르툴리아누스의 것으로 여겨지나, 원래 그가 한 말은 뉘앙스가 사뭇 달랐다. “신의 아들이 죽었다. 그것은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어져야 한다.” 이는 ‘누군가에게 믿기 힘든 말을 하더라도 혹시 그것이 진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배경으로 한 발언이었다. 조심스러움을 강조하는 이 발언이 훗날 신앙주의의 모토로 줄곧 잘못 인용된 셈이다.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는 말은 어떤 면에서는 옳은 말이다. 신앙이 합리적이라면, 이미 과학이 있는 세상에 따로 종교가 필요하지 않을 거다. 때문에 이 논리는 종종 신도들을 설득하는 논리로 사용되곤 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브리서 11:1) 한마디로 믿음은 절실한 바람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따로 거기에 증거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여기서는 외려 믿음이 거꾸로 증거가 된다.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으니라.” 믿음에서 증거를 얻고, 이는 명백한 순환논법이다. 믿으려면 증거가 있어야 하나, 그 증거는 믿음을 통해서만 얻어진다? 하지만 이 순환의 고리를 돌고 돌수록 믿음은 날로 강화되게 마련이다. 대개 종교는 공동체를 이루고 있어, 그 안에서는 그 순환의 고리 속에 처음 입장하는 데에 필요한 ‘최초의 증거’에 대한 요구는 제기되지 않는다. 고리를 몇번 돌다보면 그 증거에 대한 욕망은 저절로 충족되고 만다.
문제는 외려 신앙의 공동체 밖에서 이른바 ‘불신자’를 만날 때에 일어난다. 일상적 어법에서 믿음은 증거로 뒷받침되어야 하나, 신자들은 불신자를 위에서 말한 순환의 고리 속에 집어넣을 최초의 증거를 갖고 있지 않다. 그저 ‘일단 믿으면 나중에 저절로 그 증거를 보게 될 것’이라 말할 뿐이다. 여기서 일상적 어법과 종교적 어법의 충돌이 발생한다. 이른바 ‘전도’라는 것의 본질은 불신자들을 이 증거 없는 믿음의 상태로 집어넣는 데에 있다.
거리에서 전도자를 만날 때의 불쾌감은 여기서 비롯된다. 그들은 이미 믿음을 통해 ‘고차원의 진리’를 본 사람들이기에, 내가 펼치는 ‘논리’ 따위에 절대로 설득되지 않는다. 그들에게 ‘논리’를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진리란 하찮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눈에 나는 그저 ‘아직 진리를 보지 못한 자’, ‘자기도 한때는 그랬던 자’, 더 나아가서는 ‘그분을 모르기에 불쌍한 영혼’에 불과할 뿐이다. 이러니 짜증이 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똑같은 ‘믿음’이라 해도, 과학적 신념과 종교적 신앙은 다르다. 과학에서는 증거가 있어야 믿고, 종교에서는 믿어야 증거를 본다. 여기서 이른바 ‘창조과학회’의 시도가 얼마나 가망 없는지 드러난다. 종교적 신앙에 과학적 증거를 제시하려 할 때, 그들은 이미 ‘믿음’에 관한 과학의 패러다임에 굴복한 셈이다. 현대인의 의식이 과학적 사유에 물들어 있다 보니 그들을 설득하려면 과학적 믿음의 논리에 따를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창조과학자들은 신앙에 증거를 제시하려 하나, 그런 증거란 당연히 존재할 리 없다. 그리하여 그들이 실제로 하는 일은 주로 현대과학의 불완전함을 들춰내는 것. 그들은 그로써 신앙에 증거를 제시했다고 믿을지 모르나, 그것은 명백히 논리적 오류 혹은 비약이다. 현대과학의 불완전함에서 곧바로 종교적 신앙의 올바름이 도출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굳이 과학적 불완전함을 따지자면 과학적 오류는 성서 속에 훨씬 더 많이 들어 있다.
신앙주의(fideism)가 반대하는 것이 바로 ‘증거가 있어야 믿는다’는 원칙. 하지만 창조과학의 발상은 바로 이 증거주의(evidentialism) 위에 서있다. 그런 의미에서 창조과학은 종교가 제 성안에 들인 트로이 목마라고 할 수 있다. 차라리 17세기의 철학자, 가령 파스칼이야말로 오늘날의 창조과학자들보다 더 현명하다. 파스칼은 신앙을 정당화하기 위해 외려 증거주의를 공격하기 때문이다. ‘증거 없이 믿는 게 항상 불합리한 것은 아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믿음이 증거에 앞선다’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우리가 가진 이성이라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믿음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가령 수학을 생각해보자. 수학의 명제를 증명하는 데에는 정리가 사용된다. 정리를 증명하는 데에는 공리가 사용된다. 그렇다면 공리의 올바름을 증명하는 데에는 무엇이 사용되는가? 공리는 그 정의상 더 이상 ‘증명 없이 참인 명제’다. 그것은 증명 없이 믿어야 하며, 그래야 증명이라는 것도 가능해진다.
다른 영역도 마찬가지다. 가령 법의 예를 들어보자. 명령과 조례의 올바름은 법률에 따라 판단하고, 법률의 올바름은 헌법으로 판단한다. 그렇다면 헌법의 올바름은? 그것은 논리적 증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헌법의 진리를 세우는 것은 혁명이요, 전쟁이요, 쿠데타다. 언어도 마찬가지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언어가 작동하려면 화자들이 기본적 신념들(basic convictions)을 공유해야 한다. 그래야 참/거짓을 따지는 언어놀이도 가능해진다.
수학은 전 인류가, 헌법은 국민 전체가, 그리고 언어의 기본적 신념들은 언어공동체 전체가 공유한다. 그 때문에 증명 없이 참으로 통하는 그 전제들이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이다. 종교의 경우, 한 사회 내에서 일단 신자와 불신자가 존재하고, 신자들도 여러 종교로 나뉘기에 공리가 서로 공유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의 신앙공동체 내에서는, 마치 우리가 수학의 공리를 증명 없이 믿듯이, 자신들의 교리를 증거 없이 믿을 것이다.

공리와 명제

어떤 신앙공동체 안에서 ‘공리’로 통하는 것도 밖으로 나오면 증명해야 할 ‘명제’가 된다. 가령 ‘처녀잉태’는 교회 ‘안’에서는 증명없이 참이나, ‘밖’에서는 증거를 요구 받는다. “그럼 예수의 염색체는 XX냐, XY냐?” 정상적인 종교는 ‘안’과 ‘밖’, 즉 신앙과 이성 사이에 적절한 관계를 유지한다. 반면 사이비 종교는 자신을 ‘밖’으로부터 고립시켜 ‘안’으로 자폐하는 경향을 보인다. 여기서 그들이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지 엿볼 수 있다.
‘이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얘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이른바 좌파공동체 ‘안’에서 증명없이 참으로 통하는 것이 ‘밖’에서는 증명해야 할 명제가 된다. 공리를 공유하지 않는 이들에게 자기들 공동체 내에서나 통하는 얘기를 믿으라고 강권할 때, 사실상 그들은 광신적인 전도자와 똑같은 일을 하는 셈이다. 대중과 소통하려면 밖에서는 자신의 ‘공리’를 ‘명제’의 지위로 내려놓고, 믿음(이념)과 이성(논리) 사이의 최적의 균형을 찾아야 한다.
글:진중권 일러스트레이션:정원교

[取중眞담] '곽노현 지키기 현상'이 걱정되는 이유-손병관// 오마이뉴스, 2011-08-31, 18:24

이동명 님께서 보내신 OhmyNews의 기사입니다.
[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박명기 서울교대 교수에게 2억 원의 돈을 건넸다고 시인한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이 29일 오후 서울시의회 본회의장으로 향하며 취재진의 질문공세를 받고 있다.
ⓒ 유성호
곽노현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이 작년 교육감 선거에서 후보단일화 상대였던 박명기 서울교대 교수에게 뒤늦게 수억 원을 준 사건이 연일 논란이 되고 있다.

 

박 교수의 체포 소식이 26일 밤 SBS뉴스를 통해 처음 알려지고 그 다음날 조간신문들이 '교육감 단일화' 금품거래 의혹을 제기할 때만 해도 이번 사건이 검찰의 무리수가 아니냐는 시각이 적지 않았다. 주민투표 무산과 오세훈 서울시장 사퇴로 예정에도 없는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치러야 하는 공안세력의 작품이라는 얘기도 나왔다.

 

사건의 흐름을 바꾼 계기는 28일 오후 곽 교육감(이하 '곽노현'으로 통칭한다)의 기자회견이었다.

 

"총 2억 원의 돈을 박명기 교수에게 지원했습니다. 정말 선의에 입각한 돈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드러나게 지원하면 오해가 있을 수 있기에 선거와는 전혀 무관한 저와 가장 친한 친구를 통해 전달했습니다."

 

기자회견 전까지만 해도 곽노현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오롯이 조중동과 한나라당, 보수세력의 몫이었다. 그러나 이후에는 사정이 복잡해졌다. 작년 6.2 지방선거 이후 곽노현을 지원했던 진보세력이 '곽노현 책임론'와 '곽노현 방어론'으로 쪼개진 셈이다.

 

각각의 주장을 펴는 사람들을 나눠보면 이렇다.

 

▲ 곽노현 책임론 : 곽노현이 좀 더 납득할 만한 해명을 내놓거나 그렇지 않으면 용퇴해야 한다 - 손학규 민주당 대표, 박주선·정세균·조배숙 최고위원, 이태호 참여연대 사무처장, 금태섭 변호사, 진중권 시사평론가 등.

 

▲ 곽노현 방어론 : 스스로 무죄를 주장하고 있고, 법정에서 혐의를 다퉈볼 만하다. 당분간 사태 추이를 지켜보자. (일부는 더 나아가 검찰의 언론플레이를 공격하자는 주장) - 천정배·전병헌·김진애 민주당 의원,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 심상정 진보신당 고문, 최재천 변호사 등.

 

기자는 곽 교육감의 2억 원이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문제가 된다는 입장이다. 머리로는 곽노현의 정책을 지지하면서도 가슴으로는 곽노현의 행위를 용납할 수 없는 이유를 지금부터 설명하겠다.

 

1) 곽노현의 2억 원 대가성 논란

 

곽노현 스스로 박명기에게 2억 원을 준 사실을 털어놓은 마당에 돈의 성격은 유일무이한 쟁점이 됐다.

 

일단,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갖는 의문은 곽 교수의 기부 대상이 왜 하필 박명기인가에 모아진다. 1000만 서울시민 중에 형편 어려운 사람이 박명기만은 아닐 텐데 말이다.

 

기자가 40년을 살았지만 '곽노현식 기부'를 본 적이 없다. 기부를 해도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깔끔한' 기부들이었다. 더구나 공직자가 선거운동으로 재산 날린 경쟁자, 그것도 돈 주면 선거법 위반 시비가 날 사람에게 2억 원의 뭉칫돈을 선뜻 건네는 '기가 막히는 우연'은 없었다.

 

곽노현 사례와 비교해볼 만한 사례가 있긴 하다. 2006년 5.31 지방선거에서 예비후보였던 경쟁자에게 1000만 원을 쥐어준 시의원이 있었다. 문제의 시의원은 "선거결과와 상관없이 지역화합 차원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대를 도와주려는 순수한 마음에서 지급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여지없이 당선무효형을 선고했다.

 

이런 판결과 달리 혹시 곽노현이 법정에서 승소하게 된다면 법질서의 혼란으로 이어질 것은 자명하다. 단일화로 후보를 양보한 사람에게 일정한 시점이 지난 후 온갖 형태의 보상을 베푸는 일이 공공연히 판칠 수 있기 때문이다.

 

백번 양보해서 '곽노현 미담'을 받아들이려고 해도 ▲ 돈을 주기에 앞서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 전달 방법은 투명했는지 ▲ 2억 원 이상의 돈을 더 줄 계획이 있었는지 등등 곽 후보자가 추가로 해명해야 할 게 너무도 많다.

 

검찰과 언론에 "입을 다물라"고 다그치기 전에 곽노현이 좀 더 솔직해야 할 이유다. 오죽 했으면 곽노현을 지방선거에서 음양으로 지원했던 시민·교육단체들이 어제(30일) 한꺼번에 모여 곽노현에게 "제기된 각종 의혹을 국민 앞에 소상히 밝히라"고 요구했을까. 곽노현은 이번 사건에서 자신의 우군에게조차 미더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29일 오전 마지막 증인신문이 예정된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도착하고 있다. 이 자리에 함께한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한 전 총리의 옆을 지키고 있다.
ⓒ 남소연
한명숙

2) 곽노현 사건은 한명숙 수사의 재판?

 

곽노현 사건의 새로운 현상은 트위터를 통해 '곽노현 구하기' 캠페인이 활발해졌다는 점이다.

 

곽노현 기자회견 이후 그의 용퇴론이 나오자 적잖은 사람들이 지난해 검찰의 한명숙 전 총리 수사를 떠올린 결과라고 본다. 검찰이 진보진영 유력인사를 겨냥하는 수사를 했다는 모양새로는 그런 주장이 그럴 듯하게 보이지만, 양자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한명숙 사건은 권력 대 범야권, 보수 대 진보의 전선이 그어진 가운데 '불법 정치자금 수수'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한 전 총리가 시종일관 혐의를 부인했고, 심지어 검찰 수사까지 거부했다. "존재하지도 않은 뇌물을 검찰이 억지로 만든다"는 한 전 총리의 주장에 검찰은 별다른 논거를 대지 못했다. 상식의 법정에서도 현실의 법정에서도 한명숙은 일방적으로 몰릴 필요가 없었다.

 

반면, 곽노현 사건은 처음부터 본인이 검찰에 몇 수 접고 들어갔다. 곽노현이 박명기에게 준 2억 원 때문에라도 그는 검찰의 소환 요구에 불응할 명분이 없고, 단일화 중재에 나선 시민단체들도 검찰 수사에 적극 협조하는 상황이다.

 

전자가 한명숙이 부인하는 뇌물을 검찰이 입증할 책임이 더 큰 상황이었다면, 후자는 곽노현 스스로 인정한 뭉칫돈에 대해 "그럼에도 후보매수의 대가가 아니다"는 것을 납득시킬 책임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곽노현을 지키기 위해 범야권이 힘을 모아 여론에 호소하기가 어려운 이유다.

 

3) 법원 판결 전 이미 '사퇴감'이었던 공정택... 곽노현은?

 

많은 이들이 "곽노현 본인이 2억 원에 대가성이 없다고 하니 법원 판결이 날 때까지 교육감 사퇴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형이 확정되기 전에 드러난 혐의만으로도 '사퇴' 요구에 시달린 교육감이 또 있었다. 2008년 교육감 선거 당시 부인의 차명예금을 신고하지 않은 공정택이었다. <오마이뉴스>는 그의 혐의가 드러난 후 이듬해 10월 형이 확정될 때까지 그가 교육감 자격이 없다는 논조를 유지했다. 법원 판결이 나오기 전에 여러 가지 혐의를 들어 그의 자질 문제를 제기했지만, 당시만 해도 '피의자 인권 침해'를 지적하는 목소리는 거의 없었다. 꽤 유명한 국회의원이 검찰에 불려간다는 기사가 나와도 마찬가지다.

 

기자는 독자들의 '침묵'을 "공직자 비리는 인권보다 알권리와 견제가 우선"이라는 메시지로 해석했다. 그런데 곽노현 사건에서는 '피의자 인권'의 목소리가 유독 높아지고 있다. ▲ 검찰에 대한 불신 ▲ MB정부의 진보진영 탄압에 따른 피해의식 ▲ 곽노현의 수난이 진보진영 전체로 확산돼 10월 보선을 망칠 수 있다는 우려 등이 중첩된 결과라고 이해했다.

 

  
뇌물 수수 혐의 등으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공정택 전 서울시교육감이 2010년 3월 26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부지법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도착한 뒤 부축을 받으며 청사로 걸어오고 있다.
ⓒ 권우성
공정택

그러나 공정택은 사퇴해야 하고, 곽노현은 좀 더 지켜보자고 얘기하는 순간 우리는 '이중잣대'의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반칙과 특권이 용납 안 되는 사회'를 지향하고 권력층의 위선을 질타해온 신문이 이중잣대를 휘두른다면 온전한 언론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혹자는 "왜 진보는 보수처럼 뻔뻔하지 못하냐?"고 말한다. "보수는 얼마만큼 해먹었는데 이쯤이야..."라는 얘기가 부록처럼 따라붙는데 어이가 없다. 이번 사건을 보며 내가 가장 안타까운 점은 비교적 합리적으로 비쳐졌던 진보진영 내부에도 내 식구의 허물을 덮으려는 것을 '의리'로 포장하는 이들이 적지않았다는 것이다.

 

이분들에게 시사평론가 진중권(@unheim)의 말을 답변으로 대신하련다.

 

"적하고 싸우다가 적을 닮아간다면, 굳이 적과 싸울 필요가 없지요. 그때는 이미 자기가 적이 되어 있을 테니..."

 

덧붙여) 공소시효 : 곽 교육감의 침묵 속에 그가 공직선거법의 공소시효를 착각해서 올해 들어서 돈을 준 게 아니냐는 얘기가 나온다. 기자회견문에 이런 얘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선거에서는 공정성을 위해 대가성 뒷거래를 불허해야 하지만 선거 이후는 또 다른 생활의 시작입니다. 선거에서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사람이라고 해서 그분의 곤란한 형편을 영원히 외면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곽 교육감이 선거기간 동안에는 대가성 뒷거래로 의심받을 행동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인지했지만, 일정시점이 흐른 후에는 가능하다는 법리 해석을 나름대로 내린 것은 아닐까?

 

곽 교육감을 옹호하는 전병헌 민주당 의원 같은 이도 31일 MBC라디오 인터뷰에서 "곽 교육감 입장에서는 작년 12월로 선거법과 관련된 공소시효 문제는 다 끝나버렸기 때문에 금년에 들어와서 (박 교수에게 돈을) 주지 않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태였다"고 말한다. 어떤 누리꾼이 다음 아고라에 올렸다가 삭제된 글에서도 비슷한 주장이 담겨있는데, 이는 공직선거법 조항을 편의대로 해석한 것이다.

 

2004년 3월 개정된 공직선거법 268조(공소시효)는 "이 법에 규정한 죄의 공소시효는 당해 선거일후 6월(선거일후에 행하여진 범죄는 그 행위가 있는 날부터 6월)을 경과함으로써 완성한다"고 되어있다. 선거일 이후 6개월로 따지면 작년 12월 2일로 공소시효가 끝나지만, 곽 교육감이 박 교수에게 돈을 보낸 시점은 올해 2~4월에 집중되기 때문에 이때부터 공소시효가 새로 시작되는 셈이다.

2011.08.31 18:24 ⓒ 2011 OhmyNews

‘사회책임’ 싫은 재벌들의 비밀

[곽정수의 경제 뒤집어보기] 사회책임 꺼리며 자선활동·사회공헌 선호하는 재벌 총수들… 돈 버는 과정이 정당하지 못한 부자들의 두려움의 발로인가?

현대중공업·KCC 등 범현대그룹이 8월16일 5천억원 규모의 '아산나눔재단' 설립을 발표했다. 특히 정몽준 전 한나라당 대표(현대중공업 대주주)는 2천억원을 기부하겠다는 통 큰 결정을 내렸다. 범현대가는 현대그룹 창업자인 정주영 명예회장의 10주기를 맞아 고인의 뜻을 계승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총수들의 헌납, 돈으론 산 면죄부?

마침 이보다 이틀 전인 14일에는 미국의 억만장자인 워런 버핏이 에 '부자 감싸기를 중단하라'는 기고문을 통해 재정위기 해결을 위한 부자 증세를 제안했다. 버핏 회장은 "친부자 성향의 미 의회는 그동안 너무 오랫동안 나와 내 친구들을 감싸왔는데, 이제 미 정부가 좀더 진지하게 고통 분담을 생각할 때가 됐다"고 지적했다. 그의 발언은 심각한 재정적자와 그에 따른 국가신용등급 강등으로 위기감이 높아진 미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동안 대기업과 부자들의 감세 요구만 귀가 따갑게 들어온 우리 국민에게도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다음날인 15일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시장경제의 새 모델이 요구되고 있다며 서로가 서로를 보살피는 따뜻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공생 발전'을 화두로 제시했다. 그리고 시장경제가 '탐욕경영'에서 '윤리경영'으로, '자본의 경영'에서 '자본의 책임'으로, '부익부 빈익빈'에서 '상생 번영'으로 진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점만 놓고 보면 범현대가의 5천억원 쾌척이 마치 워런 버핏이나 이 대통령에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일각에서는 정몽준 의원의 대권 행보와 연관짓기도 한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범현대가의 한 그룹 총수에게 재단 설립의 결정 시기와 경위를 물어봤다. "(정 명예회장의) 10주기를 맞아 뭔가 뜻깊은 일을 하자는 얘기는 훨씬 전부터 있었어요. 그런데 지난 7월 말 고 김영주 한국프랜지공업 명예회장(정 명예회장의 매제) 1주기 모임에서 구체적인 방안이 제시됐고, 모두들 흔쾌히 동참의 뜻을 밝혔습니다." 이 과정에서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이 회사 규모에 비해 좀 과하다고(?) 할 수 있는 150억원의 거액을 선뜻 내놓겠다며 분위기를 주도했다고 한다.

전말이 이렇다면, 범현대가로서는 외부의 의심스런 시선에 섭섭한 마음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무조건 탓하기도 어려운 것이 솔직한 우리 현실이다.

국민들은 그동안 재벌 총수들의 사재 출연이 꼭 순수한 동기로 이뤄지는 게 아님을 여러 차례 보았기 때문이다. 재벌 총수 중에서 기부액 규모로 역대 1·2위는 단연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과 현대·기아차그룹의 정몽구 회장이 꼽힌다. 이 회장은 2005년 안기부 X파일 사건(삼성의 대선자금 불법 지원 공모를 안기부가 불법 도청한 사건)과 고려대생들의 박사학위 수여 저지 사건, 삼성에버랜드 등의 주식 저가 인수를 통한 편법·불법 상속 논란이 겹치면서 이른바 '삼성 제국 논란'이 거세지자, 2006년 2월 대국민 사과와 함께 8천억원의 사회 헌납을 발표했다. 이 회장은 삼성 비자금 사건에 대한 특검의 수사 결과 발표를 앞둔 2008년 4월에도 경영쇄신안을 발표하며, 수사에서 드러난 4조5천억원의 차명재산 중에서 삼성생명 주식을 제외한 나머지는 세금 납부를 하고 난 뒤 사회를 위해 쓰겠다고 약속했다. 그 규모는 최소 1조4천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정몽구 회장은 이에 앞서 2006년 현대·기아차그룹 비자금 사건과 관련해 대국민 사과와 함께 1조원을 조건 없이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결국 국민의 눈에는 재벌 총수들의 사재 출연은 사회책임 이행이 아니라 돈으로 면죄부를 사려는 행위로 비칠 수 있다. 또 재벌 총수들의 사재 출연이 오히려 민주주의의 근간인 법치주의를 훼손하고,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잘못된 사회현상을 심화시킨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사회책임 국제기구 가입 부진한 이유

재벌 총수들이 사회환원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는 불신도 크다. 삼성 비자금 사건으로 집행유예를 받은 이건희 회장이 대통령의 특별사면을 받고, 경영에 복귀한 지 이미 1년6개월이 지났다. 하지만 차명재산의 사회헌납 약속 이행은 아직 감감무소식이다. 정몽구 회장은 2007~2009년 세 차례에 걸쳐 총 1500억원 상당의 글로비스 주식을 기부했다. 정 회장이 애초 약속한 2013년의 시한까지는 아직 2년이 남았지만, 약속한 금액 기준으로는 15%에 불과하다. 불법행위로 사법처벌을 앞둔 재벌 총수들이 재판에서 유리한 판결을 얻어내려고 국민과 사법부를 속였다는 비판이 나올 수 있다.

근본적으로 재벌 총수들의 사회 출연은 진정한 기업의 사회책임 이행과는 거리가 있다. 지난해 11월 사회책임에 관한 국제표준으로 정식 출범한 ISO 26000의 정의를 보면, 사회책임은 기업과 같은 사회조직들이 투명하고 윤리적인 행동을 통해 자신의 결정과 활동이 사회와 환경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책임지는 것을 의미한다. ISO 26000 개발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오스트리아 빈 국립대학의 마르틴 노이라이터 교수는 이를 좀더 쉽게 설명한다. "기업의 사회책임과 자선활동은 다르다. 자선활동은 기업의 이윤 중 일부로 남을 돕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책임은 이윤을 만드는 과정에서부터 7대 원칙(투명성·윤리적 행동·이해관계자 존중·법치주의 존중·인권존중 등)을 잘 지키는 것이다."

재벌들은 흔히 자선활동이나 사회공헌으로 사회책임을 대체하고자 한다. 그러면서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쓰라'는 우리 속담을 인용한다. 하지만 이는 사회책임과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사회책임을 제대로 이행하려면 돈을 버는 과정 자체가 정당해야 한다. 재벌들이 아무리 많은 매출과 이익을 올려도, 제품을 만들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과정에서 거래 중소기업의 납품단가를 후려치고(공정거래 관행 위배), 노동자 권리를 짓밟고(인권과 노동 관행 존중 위배), 영세 자영업자들의 생계까지 위협한다면(지역사회 발전 위배), 사회책임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것이다.

그동안 재벌과 총수들이 '사회책임'이라는 용어를 꺼려온 비밀도 여기에 있다. 사회책임이라는 말은 윤리·준법·투명경영·이해관계자 존중경영을 제대로 하지 않는 재벌들에게는 자신의 추한 얼굴을 보여주는 '백설공주의 거울'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국내 대기업의 사회책임 관련 국제기구 가입이 부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유엔이 인권·노동·환경·반부패에 관한 10대 기본 원칙의 이행 확산을 내걸고 전세계 기업을 대상으로 펼치고 있는 글로벌콤팩트에 가입한 국내 민간기업은 130여 개다. 전세계의 가입 회원이 7천여 개에 달하는 것에 비추어보면 매우 저조하다. 그나마 한국 경제를 대표하는 10대 그룹의 계열사는 14개에 불과하다. 올해 4월 현재 10대 그룹 전체 계열사(617개)의 2%에 그친다. 삼성, 포스코, 현대중공업, 한화는 아예 1개의 회사도 가입돼 있지 않다. 유엔글로벌콤팩트 관계자는 "회원사들은 매년 10대 원칙을 어떻게 이행하고 있는지를 밝히는 보고서를 의무적으로 제출해야 한다"고 말했다. 재벌들이 아직 기업의 사회책임의 기본조차 제대로 이행할 준비가 안 돼 있다는 얘기다.

재벌과 별 차이 없는 MB의 인식

이명박 대통령도 기본 인식에서 재벌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대통령은 공생 발전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지만 핵심 내용은 다름 아닌 기업의 사회책임이다. 지난해 하반기 이후 대통령이 강조한 공정사회, 동반성장도 모두 기업의 사회책임에 포함된다. 이미 글로벌 표준까지 제시돼 있는 사회책임이라는 용어를 굳이 피하며, 낯선 용어를 꺼내들어 국민에게 체계적이거나 구체적이지 않다는 지적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말로는 재벌의 탐욕을 나무라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재벌과 마찬가지로 사회책임이라는 말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닐까?

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

‘범생이 카리스마’ 그늘에 가린 진정성

정치인으로서 손학규 민주당 대표의 가장 큰 강점은 '진정성'이다. 그는 소탈하고 성실하다. 정치인 중에 이런 성품은 보기 드물 정도다.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손학규 대표의 '사람됨'에 대해서는 별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는 젊은 시절 학생운동이나 빈민운동을 할 때 '정말 열심히 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학교수를 할 때는 제자들을 무척 아꼈다. 지금도 많은 제자들이 그를 따른다. 보건복지부 장관, 경기지사를 할 때는 그 까다로운 공무원들로부터 '일 잘한다'고 인정을 받았다.

둘째 강점은 결정적인 순간에 발휘하는 결단력과 실행력이다. 겉보기와는 전혀 다른 면모다. 그를 오랫동안 보좌한 한 측근은 이렇게 설명했다.

"손 대표는 평소 너털웃음을 잘 터뜨린다. 그렇다고 사람이 마냥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2007년 그가 한나라당을 탈당할 때 대부분의 지인은 만류했다. 탈당하지 못할 것으로 본 사람들이 더 많았다. 하지만 손 대표는 확신이 서면 무모할 정도로 가차없이 결행하는 사람이다. 지난 4·27 재보선 과정에서 보여준 분당 출마 결심, 그리고 순천 무공천 선언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2008년 국회의원 선거 패배의 책임을 스스로 걸머지고 춘천에 칩거한 것도 쉽지 않은 처신이었다."

최근 여름휴가 이후 손학규 대표의 어투가 훨씬 단호해졌다. 원내 현안을 챙기며 의원들을 불러 무섭게 질책하는 모습도 보인다. 야권통합의 발언 강도는 점점 강해지고 있다. 그를 겪어본 '경험칙'에 따르면 뭔가 일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아져 가고 있다는 것이 주변의 관측이다.

세번째, 손 대표는 합리성을 추구하는 철저한 의회주의자다. 보수 성향 유권자들이 그에게 거부감이 적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손 대표는 영국에서 유학하며 모든 문제를 의회에서 다루고 해결하는 시스템을 목격했다. 희망버스를 타지 않고 거리의 정치에 나서기를 주저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어쩌면 그가 철저한 의회주의자이기 때문일 수 있다. 정치인은 현장에서 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문제를 실제로 해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손 대표의 소신이다.

네번째 강점은 바로 그의 '과거'다. 그는 젊은 시절 공동체와 사회 정의를 위해 몸을 던졌다. 일신의 영달을 위해 인생을 살지 않았다. 손 대표를 대학시절부터 오랫동안 지켜본 인사는 이런 말을 했다.

"정치인의 과거는 곧 그 사람의 자질이요, 인격이다. 그런 면에서 손 대표는 정치 지도자로서 훌륭한 소양을 갖췄다. 이건 뒤늦게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는 젊어서부터 불의에 맞서 싸웠다. 평범하게 살다가 정치를 하면서 갑자기 정의를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손학규 대표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


손학규 대표의 과거를 알면 알수록 그를 지지하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

합리성·조화를 추구하며 성실하고 열심이다. 장관·경기지사 때도 일 잘한다는 인정을 받았다. 의회주의자로 현장싸움도 중요하지만 문제를 실제 해결하는 게 중요하다는 소신을 갖고 있다

이런 여러가지 강점에도 불구하고 손학규 대표는 요즘 '시련의 시기'를 맞고 있다. 정치적 리더십과 카리스마가 부족하다는 비판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4·27재보선 뒤 올라갔던 개인 및 당 지지도는 다시 주저앉고 있다.

손 대표는 최근 서울시장 후보 문제를 둘러싸고 정동영·천정배 최고위원과 공개석상에서 거의 멱살잡이 수준의 논쟁을 벌였다. 누가 옳고 그르고를 떠나 손 대표도 상당히 손해를 봤다. 당 대표로서 권위에 손상을 입었고 장악력에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손 대표의 당내 리더십과 관련해 민주당 의원들은 4·27재보선 직후 터진 한-유럽(EU) 자유무역협정 (FTA)합의 번복, 지난 6월 한국방송 수신료 합의 번복, 두 가지 사건 얘기를 많이 한다. 정국의 흐름을 좌우할 수 있는 주요 사안을 당 대표가 치밀하게 챙겨보지 않았다가 '사고'가 터졌다는 것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손 대표는 그동안 당내 정치를 거의 하지 않았다. 과거 야당 총재들처럼 '자기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 '내가 대표면 됐지 다른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다 보니 최고위원이나 의원들 중에 확실한 '손학규 편'이 별로 없다. 의원들로부터 '당과 겉돈다'는 비판을 많이 받는다.

손학규 대표와 직접 부대끼며 일하는 의원들은 김진표 원내대표, 박영선 정책위의장, 박선숙 전략홍보본부장, 정장선 사무총장, 김동철 비서실장, 신학용 특보단 간사, 이용섭 대변인 등이다. 그러나 이들을 '손학규 사람'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들은 '민주당 사람들'이다.

한나라당에서 왔다는 '족보'의 문제도 여전히 그의 발목을 잡고 있다. 그가 한나라당 출신이 아니었다면 '종북진보' 발언은 별 문제가 아닐 수도 있었다. 그의 참모들은 종북진보 발언으로 지지자의 10% 정도가 순식간에 이탈한 것으로 보고 있다. 민주당 주요 당직자는 "손 대표가 중도 성향 유권자들을 향해 다가갈수록 기존 민주당 지지자들의 외면을 받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고 분석했다.

당내 리더십만이 아니다. 손 대표는 대중적 리더십도 취약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실은 대선후보로서 지지도가 높다면 당내 리더십이 다소 부족해도 별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정치인으로서 대중적 리더십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일까? 민주당과 손 대표 주변 사람들을 만나 이 부분에 대한 토론을 꽤 오랫동안 해 보았다. 손 대표의 '캐릭터'에 다소 문제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범생이(모범생) 기질 탓이다. 손 대표는 지나치게 합리성과 균형, 조화를 추구한다. 대중은 단순 명쾌하고 치고 나가는 정치인에게 희열을 느끼는데, 손 대표는 그렇지 못하다. 대중의 언어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능력도 좀 떨어진다. 말이 너무 길고 장황하다. 국민들은 손학규가 뭘 하려는 사람인지 잘 모른다."

"왜 정치를 하는 것인지 선명하지가 않다. 총론에 강하지만 각론에 약하다. 각 분야에서 현안으로 제기되는 문제를 정면으로 끌어안지 않고 자꾸 우회한다. 핑계만 있으면 직접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건 원내대표 권한이야'라거나, '내가 ○○○와 그런 것으로 다툴 필요가 있나'라고 말한다. 당 대표로서 당연히 해야 할 과제를 외면하니 국민들도 손 대표를 외면하는 것이다."

손 대표와 가까운 민주당 사람들의 진단이다. 애정이 깊은 만큼 비판도 날카롭다.

손 대표는 이처럼 매우 많은 강점과 매우 많은 약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의 미래는 그래서 불투명하다. 하지만 그의 과거는 매우 투명하다. 장면마다 수많은 증인이 있다. 그를 직접 겪은 사람들의 체험을 모아 책을 펴낸 일도 있다. 베일에 싸여 있는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와는 많이 다르다.

모든 정치인들이 그렇듯이 손 대표의 삶도 한국 현대사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그의 인생은 학생운동과 빈민운동, 뒤늦은 공부와 짧은 교수 생활, 그리고 정치인의 세 단계로 이어진다.

손 대표는 편모 슬하에 7남매의 막내로 자랐다. 경기중고 시절에는 밴드와 연극을 했다. 낭만주의자였던 것이다. 덕분에 지금도 트럼펫 연주를 잘한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부터 시국과 정치에 관심이 높았다. 서울대에 진학하면서 정치학과를 선택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가 대학에 들어간 1965년은 한일협정이 체결된 해였다. 그는 누구보다 '데모'(시위)를 열심히 했다. '경기고 출신 3인방'으로 '법대 조영래, 상대 김근태, 문리대 손학규'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손 대표는 선배들이 만든 서클에 가입하지 않고 '후진국문제연구회'(후문연)를 결성했다. 서울대 유기천 총장에 대한 배척운동을 하면서 동맹휴학 결의를 주도했고 이 때문에 무기정학을 받은 일이 있다.

이 시절 손 대표는 단식투쟁을 철저히 한 것으로 유명했다. 다른 사람들은 몰래 음식이나 주스를 먹었는데 진짜로 물만 먹고 버텼다. 뭐든지 일단 했다 하면 철저히 하는 스타일은 젊은 시절부터의 모습이다.

손 대표는 1969년에 군대에 갔다. 본래 해병대를 지원했지만 평발이라 떨어지고 육군에 입대해 35개월 동안 전방에서 근무했다. 그가 72년 제대하고 나서, 공군장교였던 형에게 한 말은 "데모는 데모고 국방은 국방이다"였다. 손 대표는 군생활을 통해 '겸손'을 배웠다고 했다. 고급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 중에도 얼마든지 능력있고 존경할 만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군대가 가르쳐 주었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 공동체와 사회정의를 위해 몸던져 학생·빈민·노동운동으로 수배와 투옥을 당했다. 그러나 정작 정치는 1993년 자신을 아껴주던 김영삼 정부의 여당인 민자당에서 시작했다

이후 구로공단에서 노동운동을 했고, 지인들의 권유로 박형규 목사가 있던 제일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박형규 목사는 이때부터 평생 동안 손 대표의 '정신적 멘토'가 된다. 손 대표는 박 목사의 권유로 1973년 기독교 빈민 선교 활동에 뛰어들었다. 손 대표와 빈민운동을 함께했던 김성재 교수(김대중도서관장)의 회고다.

"손 대표는 '수도권 특수지역 선교위원회'에 '실무자'로 참여했다. 이철용, 권호경, 김동완, 허병섭 등이 같이 활동한 것으로 기억한다. 청계천 판자촌에서 빈민들과 함께 살면서 권리를 깨우쳐 주고, 철거 저지 운동을 했다. 손 대표는 정말 열심히 일을 했다. 인상적이었다."

손 대표는 1973년 '남산부활절연합예배 사건'을 수사하던 경찰에 의해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일도 있다. 가택수색에서 나온 몇 가지 책과 자료를 경찰이 문제삼은 것이다. 1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았지만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흥미로운 것은 이때 감옥에 간 덕분에 1974년에 터진 '민청학련 사건'엔 연루되지 않았다.

손 대표는 75년 수배를 피해 이창우 제세산업 대표의 '합정동 철공소'에 1년 이상 숨어서 일을 한 적이 있다. 이때 김권이라는 가명을 썼는데, 당시 철공소에서 나이 어린 동료들이 그에게 용접을 가르쳤다. 그 뒤 20년이 지나 손 대표가 민자당 대변인이 됐고 텔레비전에 나왔다. 철공소 동료들은 "철공소에서 일하던 '권이형'하고 똑같이 생겼다"고 놀랐고, 이어 "알고 보니 '권이형'이 바로 손학규 의원이다"라고 또 한 번 놀랐다고 한다. 손 대표는 2005년 경기지사 시절 동티모르 '평화 메신저' 봉사에 동참했는데, 30년 전에 배운 용접 기술을 발휘해 놀이터에 철봉을 만들어 준 일도 있다.

1977년부터 79년까지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운동 간사를 했다. 1979년 부마항쟁 때는 진상조사를 위해 부산에 내려갔는데, 보안사에 붙잡혀 며칠 동안 '죽도록' 두들겨 맞았다. "내가 박정희와 싸우다가 이렇게 죽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0·26으로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서거하는 바람에 극적으로 풀려났다.

1980년 '서울의 봄'이 왔지만 손 대표는 더 넓은 세상을 체험하고 싶었다. 33살 늦깎이로 영국 브리스톨 대학 신학부로 유학을 갔지만, 신학공부에 만족할 수는 없었다. 손 대표는 지도교수에게 요청해 옥스퍼드로 옮겨 갔고 열심히 공부해 1987년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옥스퍼드 박사 학위는 대학교수직을 보장해 주었다. 손 대표는 인하대와 서강대에서 1993년까지 교수를 했다. 대학교수 시절 손 대표는 학생들에게 매우 개방적이었고 대화를 많이 했다. 당시 서강대 제자 중에서 지금 손 대표를 보좌하고 있는 인사는 이렇게 회고했다.

"서강대에서 처음 강의를 했을 때 토마스 쿤(미국의 과학사학자 겸 철학자)의 '패러다임 쉬프트'를 얘기했다. 무척 인상적이었다. 미리 결론을 내놓고 공부하는, 당시 학생운동권의 학습 풍토를 손학규 교수는 지적했다. 또 손 교수가 '소련 사회주의는 이미 수명이 다했다. 한국의 발전모델이 아니다'라고 말했는데, 얼마 뒤 소련이 진짜로 무너져 깜짝 놀란 일도 있다."

1993년 광명 보궐선거로 정계에 입문한 뒤의 일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비화가 있다면, 민자당 대변인 시절 김영삼 당시 대통령에게 차남 김현철씨를 해외로 내보내라고 건의했던 일이다. 당시 박관용 비서실장이 대통령에게 김현철씨 문제를 제기했다가 비서실장직에서 물러났는데, 손 대표는 지인의 만류에도 위험을 무릅썼다.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손 대표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를 내치지도 않았다. 그만큼 손 대표를 아꼈던 것이다.

손 대표는 93~98년 약 5년 동안 이명박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같이했다. 98년 이명박 대통령은 선거법 위반 재판 도중 의원직을 사퇴했고, 손 대표는 경기지사에 도전하느라 의원직을 사퇴했다. 두 사람은 99년 워싱턴에 함께 머물며 지인들과 한 달에 한 번꼴로 세미나를 할 정도로 가까이 지냈다. 그리고 2002년 나란히 한나라당 공천을 받아 서울시장과 경기지사가 됐다.

손 대표는 경기지사를 할 때 자신이 가진 역량을 모두 쏟아 부었다. 73만개의 일자리를 만들고 경기도 경제성장률 7.2%를 달성했다. '신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나 손 대표의 업적은 이명박 대통령의 '청계천'이나 '서울시 교통체계 개편'만큼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우여곡절 끝에 2007년 한나라당을 탈당했고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도전했으나 실패했다. 그리고 5년 만에 재도전의 기회를 다시 잡았다.

유약한 리더십, 박근혜에 뒤떨어지는 대중성, 자기사람 없는 당내정치라는 약점, 그리고 한나라당에서 민주당으로 입당했다는 족보가 총·대선을 앞둔 그에겐 극복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손 대표는 서너개의 산을 더 넘어야 한다. 10·26 재보선, 야권통합, 4·11 총선, 당내 후보경선, 12·19 대통령 선거 등이다. 하나라도 실패하면 정치인생을 접어야 할지 모른다. 리더십이 취약하다는 당 안팎의 비판, 박근혜 전 대표에 비해 뒤떨어지는 대중성, 결코 우호적이지 않은 정치 환경을 극복하고 손학규 대표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성한용 선임기자shy99@hani.co.kr

비판언론 옥죄기 맞선 3년3개월…‘PD수첩 무죄’ 확정

2008년 미국산 쇠고기 광우병 위험성을 보도한 (MBC) 피디수첩 제작진에 대해 대법원이 무죄 판결을 확정했다. 대법원은 정부정책에 대한 언론의 비판 보도와 관련해 "정책 결정에 관여한 공직자 개인의 명예훼손이라는 형태로 언론인을 처벌할 때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며 이번 사건이 검찰의 '무리한 기소'였음을 우회적으로 내비쳤다.

대법원 2부(주심 이상훈 대법관)는 2일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성에 대해 왜곡·과장 보도를 해 정운천 전 농림수산식품부 장관과 민동석 농림수산식품부 농업통상정책관 등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조능희 피디(PD) 등 피디수첩 제작진 5명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보도내용은 국민 먹거리와 관련된 정부정책에 대한 여론형성에 이바지할 수 있는 공공성 및 사회성을 지닌 사안"이라며 "일부 허위사실의 적시로 인정되는 보도내용이 공직자들의 명예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고 악의적인 공격으로 볼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명예훼손의 죄책을 물을 수 없다고 판단한 원심은 정당하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명예훼손 사건에서 그동안 허위 여부를 놓고 쟁점이 됐던 5가지 보도내용 가운데 3가지를 허위사실로 판단하고 2가지는 허위사실이 아니라고 본 원심 판결을 유지했다.

이와 별도로 농식품부가 피디수첩의 광우병 보도와 관련해 엠비시를 상대로 낸 정정·반론보도 청구소송에서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양창수 대법관)는 이날 원고 일부 승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농식품부는 피디수첩 보도에 대해 7가지 내용이 허위 사실이라며 정정·반론보도를 청구했다. 원심은 이 가운데 3가지가 허위 사실이라며 정정보도를 해야 한다고 판결했으나, 대법원은 '한국인이 광우병에 걸릴 가능성이 더 크다'는 부분만 허위 사실로 인정하고 나머지는 의견표명에 해당돼 정정보도의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언론보도는 사실적 주장과 의견표명이 혼재하는 형식으로 이뤄져 구별기준 자체가 일의적이라고 할 수 없다"며 "사용된 어휘의 통상적인 의미, 전체적인 흐름, 문구의 연결방법 뿐만 아니라 넓은 의미나 배경이 되는 사회적 흐름 및 시청자에게 주는 전체적인 인상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정정·반론보도에 관한 기준을 제시했다.

김정필 기자 fermata@hani.co.kr

방송 3사의 공정택·곽노현 보도, 편파 뚜렷

선거법 위반혐의와 뇌물수수 혐의 등으로 두번이나 기속돼 두번 다 최종 유죄판결이 확정된 공정택 전 서울시 교육감과 후보 단일화로 사퇴한 후보에게 2억원을 줘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곽노현 현 서울시 교육감.

언론감시 단체인 민주언론시민연합은 31일 두 사건에 대한 방송 3사의 보도량과 비중, 방법 등을 비교한 결과 모든 면에서 확연한 편파성이 드러났다고 지적했다. 특히 한국방송은 그 정도가 가장 심한 것으로 지적됐다.

민언련의 방송3사 메인뉴스 분석 결과에 따르면 공 전 교육감이 교육감에 당선된 뒤 불법선거 자금 의혹이 불거진 그해 10월5일부터 불구속 기소를 거쳐 대법원에서 최종 유죄판결을 받은 2009년 10월29일까지 평균 1년여간 방송 1개사의 보도량은 평균 13건에 그쳤다.

이에 비해 곽 교육감의 경우 첫 보도가 나온 지난달 26일부터 30일까지 닷새간 평균 11건의 보도량을 기록했다.

공 전 교육감은 2009년 1월 자신의 제자이자 서울시내 한 학원장에게 선거자금 1억900여만원을 무이자로 빌리고(정치자금법 위반) 부인 육아무개씨가 수년간 관리해온 차명예금 4억원을 재산신고에서 누락한 혐의(지방자치법 위반)로 불구속 기소돼 1심에서 당선무효형인 벌금 150만원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사퇴하지 않은 채 항소와 상고를 해 그해 10월29일 대법원에서 원심 확정판결을 받고서야 교육감직에서 물러났다.

이뿐만 아니라 교장·장학사 매관매직 사건으로 불거진 서울시 교육청 인사비리의 '몸통'으로 지목돼 2010년 구속돼 교육감 시절 인사청탁 등의 대가로 1억4000여만원의 뇌물을 받고 교장과 장학관 등의 부정승진을 지시한 혐의가 인정돼 올해 2월 대법원에서 징역 4년 벌금 1억, 추징금 1억4600만원의 확정판결을 받았다.

보도비중도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곽노현 사건은 첫 꼭지에서 5번째 꼭지 사이에서 다뤄진 경우가 방송 3사 통틀어 모두 30건으로 전체 보도 33건의 91%를 차지했다. 반면 공정택 사건은 대부분 뉴스 후반부에 다뤄졌다. 5번째 꼭지 이내의 경우는 단 한건도 없고, 21번째 꼭지 이후 보도가 22건으로 가장 많다. 11~20번째 꼭지가 19건, 6~10번째 5건 순으로 나타났다.

뉴스를 다루는 방식에서도 편파성이 지적됐다. 공정택 사건의 경우 '추정' 보도는 단 한건도 없고 대부분 사실 전달 중심이었다고 민언련은 지적했다. 민언련은 "교육감 선거제도를 다룬 한국방송의 분석보도 '제도 개선 시급'(2008년 10월22일)의 경우도 잇따라 발생하는 교육감 선거비리의 원인이 선거제도에 있다면서 오히려 공 교육감 비리의 본질을 흐리는 내용이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비해 곽노현 사건에 대해서는 사실관계가 모호하거나 확인되지 않은 '추정적' 내용이 포함된 보도가 한국방송 4건, 문화방송 5건, 에스비에스 4건이나 됐다고 민언련은 지적했다.

추정보도의 성격을 살펴보면 곽노현 교육감에게 2억원을 받은 박명기 교수와 그 측근의 주장을 근거로 의혹을 증폭시키는 내용이 많은 것으로 지적됐다. 민언련은 "이런 경향이 두드러진 방송사는 한국방송"이라고 강조했다. '돈세탁' '깨끗하지 않은 돈' '돈을 주고 공직을 샀다'는 등 검찰 쪽의 일방적 주장을 적극 보도하며 곽 교육감이 박 교수에게 준 돈이 단일화 대가라는 검찰주장에 힘을 실었다는 것이다.

민언련은 이런 모니터결과를 발표하면서 곽 교육감에 대한 두둔 효과를 우려한듯 "곽 교육감이 2억원을 박 교수에게 건내 물의를 일으킨 데 대해 야당과 시민사회단체들이 부적절한 처신이었다며 유감의 뜻을 나타내고, 또한 곽 교육감이 제기된 의혹에 대해 소상히 밝히고 검찰 수사에도 떳떳하게 임해줄 것을 요구했다"고 덧붙였다.

김도형 선임기자/트위터 @aip209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 출마 검토
30~40대가 68%…저소득 가장들 '급전 인생'
'2억 출처' 겨냥한 검찰…곽 교육감 돈? 십시일반?
'짜장면' 표준어 됐다
'도망자 전락' 카다피…딸은 사막서 출산 신세

김형오 “총선 불출마”…여 ‘물갈이’ 이어지나

김형오(사진) 전 국회의장이 31일 내년 4월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한나라당 6선 의원(부산 영도)인 그의 불출마 선언이 당내 중진 의원들의 불출마 도미노로 이어질지 주목된다.

김 전 의장은 이날 오전 부산시의회에서 기자들에게 "정치적으로 당이 힘들고 어려울 때 백의종군하는 모습이 정치권의 신뢰회복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이라며 총선 불출마 뜻을 밝혔다. 그는 "불출마 선언이 당 지도부를 흔들려고 하는 것은 아니며, 인위적인 물갈이의 선봉에 서는 것처럼 비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른 의원들에게까지 불출마를 압박하는 모양으로 비칠 것을 염두에 둔 것이다.

김 전 의장은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 "남은 임기 동안 국회의원으로서, 당협 운영위원장으로서 충실히 일할 것이며 어려울 것으로 예상하는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당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 전 의장은 지난달 부산 지역 언론에 '내년 총선에 출마한다'고 보도된 적 있다. 이와 관련해 김 전 의장의 한 측근은 "당시 기자들의 질문에 '지금은 총선 불출마를 밝힐 때가 아니다'라고 답한 것이 '사실상 출마 선언'이라고 보도됐다"며 "김 전 의장은 오래전부터 불출마를 고민해왔다"고 말했다.

김 전 의장의 불출마 선언은 한나라당 내 '물갈이'를 촉발하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특히 물갈이 대상으로 주로 거론돼온 영남권 다선 의원들이 적지않은 압박을 느낄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당의 한 재선 의원은 "17대 때 박관용 국회의장이 불출마 선언을 한 뒤에 김진재, 유흥수, 정문화 의원 등 부산 중진들이 줄줄이 불출마를 선언한 적 있다"며 "이번 일이 비슷하게 이어질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서울의 한 초선 의원도 "다른 중진 의원들도 결단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고 말했다.

중진 의원들은 말을 아끼면서 부담스러운 모습이다. 박희태 국회의장(6선) 쪽은 "박 의장도 계속 거취에 대해 고민 중"이라며 "올해 연말까지는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6선)의 측근은 "이 전 부의장의 내년 총선 출마 여부는 전혀 결정된 게 없다"고 말했다.

황준범 기자 jayb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