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2-02

[곽병찬 칼럼] ABR의 귀결이 ABL이라니!

오동잎 떨어지면 가을이 가는 줄 알아야 한다고 했지만, 오동잎도 떨어지기 전에 눈보라 몰아칠 줄이야. 6인회다 친이다 서슬이 시퍼렇던 가지며 이파리들이 모조리 떨어져 나가고 뼈대만 홀로 앙상하다. 나무라면 수행자의 인고를 떠올리겠지만, 허장성세에 기고만장이었던 터였으니 그 초라함에 쓴웃음이 앞선다.

엊그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가 발표한 새 정강·정책의 큰 방향은 '이명박 지우기'(ABL·이명박의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든)였다. 4년 전 이맘때 나타났던 노무현 지우기(ABR)에서 알파벳 하나만 바뀌었다. 귀결이 처량하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전임자 빌 클린턴의 정책을 무조건 부정하다(ABC)가 쪽박을 찼는데, 이 대통령은 그를 따라 하다가 임기를 1년이나 남긴 터에 호적(한나라당)에서 지워졌다.

정당이 그의 흔적을 말소해 그림자 인간 취급하는 것이야 잇속을 우선하는 정치권에서 흔한 일이니, 놀랄 일은 아니다. 심각한 것은 그를 향한 대다수 국민의 시선이다. 목덜미가 서늘할 정도로 살벌하니, 앞으로 그가 이 땅에 발을 붙일 수 있을는지 가늠하기 힘들다. 손녀의 몽클레어 패딩점퍼 시비는 상징적이다. 설 전날 손녀를 통인시장에 데리고 가 과자를 사주던 모습은 이웃집 할아버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퇴임 후 손녀 서현이를 자전거에 태우고 시골길을 달리던 모습을 연상시켜 께름칙하긴 했지만 그건 모든 할아버지의 꿈이다. 한데 노 전 대통령의 경우는 지금도 가슴 아린 수채화로 그려져 있지만, 이 대통령의 경우는 순도 100%의 가식으로만 비쳐졌다. 불쌍한 엠비!

물론 원인 제공은 그가 했다. 하필 왜 또 재래시장인가. 궁지에 몰리기만 하면 '서민' 두 자를 입에 달고 다니던 그였다. 강남북 국밥집에서 그랬고, 여기저기 재래시장을 다니며 그랬다. 서민의 몫을 긁어모아 부자에게 몰아주면서, 노점상 할머니에게 건넨 목도리 하나로 환심을 편취하려 했다. 이동관 전 특보 같은 이는 그런 이를 '뼛속까지 서민'이라고 주장해 장삼이사의 속을 뒤집었다. 더 치명적인 것은 이런 이율배반과 위선을 그야말로 자유자재 구사했다는 점이다. 그에게 서민이란 바보 혹은 그림자 인간일 뿐이었다.

프랑스 국립사회과학연구소의 미셸 팽송과 모니크 팽송 부부는 2010년 가을 펴낸 에서 이들이 지키는 십계명을 제시했다. 1. 재벌 오너들과 친구로 지낸다. 2.감세로 부자들을 보호한다. 3. 누가 뭐래도 측근은 챙긴다. 4. 공과 사를 구분하지 않는다. 5. 편법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6. 검찰을 권력의 하수인으로 만든다. 7. 언론을 장악한다. 8. 토목공사로 승부를 건다. 9. 부자 동네에 투자한다. 10. 이념이나 가치는 관계없다, 정권만 지키면 된다. 프랑스에서도 지우기가 한창인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의 생활철학을 정리한 것인데, 웬걸 우리에게 더 놀랍다. 어쩌면 이 대통령을 이렇게 잘 설명했지? 이 베를루스코니-사르코지주의의 강령은 엠비에게서 절정의 꽃을 피웠다.

굳이 거증할 필요도 없다. 친재벌 강부자 정권, 고소영 인사, 부자 감세, 거짓 눈물과 거짓말, 검찰의 시녀화, 방송 장악과 조중동 특혜, 4대강 토목사업, 게다가 내곡동 사저 터 등. 선거 끝난 뒤 꺼내도 늦지 않을 캐치프레이즈가 선거 11개월 전 일찌감치 내걸린 것은 그런 까닭이었다. 구제불능이라는 판단 없이는, 선거에서 관권 의존도가 절대적인 여당이 그런 식으로 현직 대통령을 내치긴 힘들다.

새 정강·정책에 대해 이 정부의 키를 쥐고 있었던 일간지 C, J, D가 잔뜩 볼이 부어오른 것은 당연했다. 대놓고 비난하지는 않았지만, '현재도 놓치고, 미래도 놓칠', '시장의 활력을 죽이고 기업의 자율성 짓밟을', '야당의 프레임에 갇혀 목표를 잃게 될' 가능성을 우려했다. 이번에 말소된 효율성, 경쟁, 수월성, 작은 정부, 큰 시장, 북 체제 변화 따위는 이들이 내세운 이데올로기였다.

2007년 후보 경선에 나섰던 박근혜 위원장은 기억에 생생할 것이다. CJD(인간광우병이 아니다)의 행태 말이다. 뿌리를 제대로 파야 한다. 안 그러면 그나마 위험한 ABL은 다시 ABP로 귀결될 수 있다.

곽병찬 논설위원 chankb@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