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2-11

이상화의 ‘빼앗긴 들’과 후쿠시마

방사능 피해는 미래의 몇 세대에 걸쳐 건강과 생활에 계속 결정적인 손상을 입힐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도 식민지 지배로 인한 손상이 조선민족 전체의 생활에 결정적인 영향을 계속 끼치고 있는 사실과 공통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진작가 정주하씨한테서 연락이 와 신주쿠에서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그는 후쿠시마 지역을 돌아다니며 촬영을 한 뒤 도쿄에 왔다. 다음날 서울로 간단다.

"이 시계, 아직 움직이고 있어요. 전지가 다 닳지 않은 건지, 아니면 누군가가 태엽을 감아 놓은 건지…."

그러면서 그는 사진 한 장(사진)을 보여 주었다. 후쿠시마현 미나미소마시의 노인홈(실버타운) 벽에 걸려 있는 시계가 찍혀 있었다. 지상 1.5m 정도의 벽 위에 선이 그어져 있고 그 선 아래는 검게 변색돼 있다. 지진해일(쓰나미)이 덮친 흔적이다.

나는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 3개월 뒤인 지난해 6월 처음으로 그곳을 찾았다. 그 장면은 방송의 '마음의 시대'라는 프로에서 방영됐다. 사고 발생 뒤 10개월, 내가 처음 방문한 뒤 7개월. 많은 목숨들을 빼앗긴 그곳은 그때의 폐허 그대로였고 벽의 시계는 변함없이 계속 시각을 재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해 9월 한홍구 교수한테서 후쿠시마 원전사고 재난지역을 답사하고 싶으니 도와달라는 요청이 왔고, 동행하고 싶다던 정주하씨를 소개받았다. 지난해 11월, 나는 그들 일행을 안내하며 다시 현지를 걸었다. 처음 찾아갔던 6월은 신록이 싱그러운 초여름이었고, 두 번째인 11월은 단풍이 한창이었다. 도호쿠지방 자연은 고혹적일 정도로 풍성했다. 정주하씨는 다시 한겨울의 도호쿠지방을 찍고 싶다며 이번에도 거기에 갔던 것이다. 그가 찍은 작품은 3월 서울 평화박물관에 전시되고 사진집으로도 간행될 예정이다.

이 사진전의 주제를 무엇으로 할까. 9월에 만났을 때 한홍구 교수는 아이디어를 하나 제시했다. 이상화 시인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였다. 원전사고 그 자체의 현장사진보다 오히려 그 주변 지역의 자연을 촬영하자는 것이다. 내가 그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했으리라 생각한다. 센세이셔널한 일과적 현장사진보다 오히려 사고의 의미에 대한 깊은 성찰로 이끄는 작품이 좋다고 나도 생각했다. 한데 한편으로 나는 의문을 느꼈다.

이상화는 저항시인이다. 1922년 일본에 간 그는 다음해 9월 간토(관동)대지진 때 자행된 조선인 학살을 목격하고 귀국했다. 이것이 그를 저항시인 쪽으로 강력하게 이끌었으리라는 얘기도 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1926년 작이다. 당시 조선에서는 일제의 '산미증식계획'에 따른 수탈로 많은 농민들이 뿌리뽑힌 채 유랑자가 됐다. 내 조부가 일본에 건너간 것은 1928년이다. 그 3세대 뒤 사람으로 나는 일본에서 태어났다. 재일 조선인들 다수가 그렇게 해서 일본에서 살게 됐다. 이상화의 시는 식민지배하의 조선인들 마음을 노래한 명시이자 바로 재일 조선인의 마음을 노래한 시다.

일찍이 조선사람의 땅을 빼앗은 것은 일본 제국주의였다. 그것과 지금 자국 정부와 기업한테 땅을 빼앗긴 후쿠시마를 같은 차원에서 얘기해도 괜찮을까? 식민지 지배와 원전 재난을 동일 평면상에 놓음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식민지 지배 책임에 대한 자각이 없는 일본 국민들에게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는 건 아닐까?

나는 이런 의문을 품고 다시 한번 그 시를 읽어 보았다.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첫 행. 그 뒤에 이어지는 것은 봄기운 완연한 전원을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한 듯 걸어다니는 시인의 심상 풍경이다. 마지막 행은 이렇게 맺는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첫 행과 마지막 행이 없으면 그 사이의 내용은 한 편의 잘 쓴 전원시일 뿐이다. 바로 그래서 더욱 절실하게, 더 깊게, 땅을 빼앗기고 뿌리까지 뽑히게 된 사람들의 상실감, 허무감, 비애, 분노를 느낄 수 있다.

이 시로 후쿠시마를 표상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는 거기에 적극적인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봄은 오는가"라는 물음은 "봄은 반드시 온다"는 근거 없는 미래지향적인 표어가 아니다. 계절로서의 봄이 돌아와 꽃들이 피더라도 뭔가 결정적으로 손상당했다는 것, "봄조차 빼앗기겠네"라는 것이 이 시의 중요한 포인트다.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의 설명조차 원자로 폐기까지 40년이라는 세월이 걸린다고 한다. 그때까지 방사능은 계속 확산될 것이다. 한편, 오염 제거는 기술적으로 곤란하고 막대한 비용이 든다. 오히려 오염된 땅을 포기하고 이주를 추진해야 한다는 전문가 지적도 있다. 방사능 피해는 눈에 보이지 않고 냄새도 없다. 하지만 그것은 미래의 몇 세대에 걸쳐 건강과 생활에 계속 결정적인 손상을 입힐 것이다. 건강 피해를 확인할 수 있으려면 지금부터 몇 년이나 더 지나야 한다. 그것이 원전 피해의 본질이다. 그렇다면 '병탄'당한 지 100년이 더 지난 현재도 식민지 지배로 인한 손상이 조선민족 전체의 생활에 결정적인 영향을 계속 끼치고 있는 사실과 공통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후쿠시마와 이상화 시를 연결짓는 것은 조선사람들이 후쿠시마의 고뇌에 대한 상상력을 발동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그것이 일본 국민이 조선사람들에게 준 식민지 지배의 상처가 얼마나 깊고 그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지 상상력을 발동할 기회를 제공한다면 이상화의 시를 콘셉트로 삼는 건 문제가 없다. 일본 정부는 지금 산업계의 뜻을 수용해 원전 재가동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 원자력 마피아의 반격은 이제부터 본격화할 것이다. 일본 국민은 지금 땅을 빼앗고 봄조차 빼앗으려는 자국 권력과 싸워야 할 때를 맞이하고 있다. 이상화의 시가 그들에게 그러한 자각을 촉발한다면 거기서 일본 국민과 조선사람의 연대에 새로운 국면이 전개될지도 모른다. 이것이 지금의 내 생각이다. 논의하진 않았지만 한홍구 교수도 찬성해 주지 않을까.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번역 한승동 논설위원 sdhan@hani.co.kr

사진 정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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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수가 '119 전화'로 챙기려던 노동운동가 결국 별세

김문수가 '119 전화'로 챙기려던 노동운동가 결국 별세

ohmynews.com | Nov 30th -0001

[수원=김인유 기자] 남양주 소방서에 119 전화를 하면서까지 김문수 경기지사가 챙겼던 환자가 지난 8일 숨졌다.

이 환자는 국내 제1세대 노동운동가이자 김 지사와 노동운동을 통해 인연을 맺은 최한배(62ㆍ대주전자재료 부회장)씨.

김 지사의 한 측근은 최씨가 췌장암으로 1년 이상 투병해오다 지난 8일 경기도 성남시 보바스기념병원에서 별세했다고 10일 밝혔다.

최씨는 우리나라 제1세대 노동운동가로 노동자를 위해 헌신해온 인물.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고인은 지난 1978년 삼미전자 조립공으로 노동현장에 뛰어들고 나서 경인전자, 대한제지를 거쳐 1984년 대우어패럴에 취업, 노동조합 설립을 이끌었다.

이어 1985년 서울구로ㆍ영등포 지역 노조들이 연대해 노동조건개선 등을 요구한 '구로동맹파업', 1986년 노동자 정치운동 조직인 서울노동운동연합 탄압사건으로 두 차례 옥고를 치렀다.

1993년 노동현장을 떠난 고인은 이후 전문경영인의 길을 택해 대주전자의 중국법인 총경리, 본사 대표이사 등을 지내며 중국 시장을 개척했다.

1980년대 노동운동을 하며 김 지사와 만난 인연을 이어가던 고인은 지난 2007년 7월 경기도 국제통상보좌관으로 임명됐고, 이어 제3대 경기지방공사(현 경기도시공사) 상임감사로 임명되기도 했다.

노동운동 동지였던 고인에게 각별한 애정을 쏟아오던 김 지사는 지난해 12월 19일 남양주시의 요양원에 병문안 갔다가 '119 장난전화'사태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고인의 아내가 치료를 받으려고 서울대병원에 직접 차를 몰고 간다는 말을 듣고 소방서 중형구급차를 이용할 수 있는지 남양주소방서에 직접 전화를 건 것이 화근이었다.

최씨는 지난달 14일 김 지사가 챙겨주려던 소방서 구급차를 타고 서울 삼성병원으로 후송되기도 했다.

남편의 간병기를 써 온 고인의 아내는 블로그에 "14일 한밤중 남편에게 40도가 넘는 고열이 찾아왔습니다. 그 말 많고 탈 많았던 남양주소방서 119구급차에 실려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와 전쟁 같은 1박2일을 보낸 뒤 '임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고인이 투병 중 노동운동과 기업경영 15년의 삶을 정리한 자서전 '길'을 펴내자 김 지사는 "대학 1년 후배이기도 한 최한배의 삶은 나의 삶이요, 그의 젊은 날은 바로 나의 자화상'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 지사의 한 측근은 "지난 8일 최한배씨 사망소식을 듣고 김 지사가 영안실에 찾아가 통곡을 하며 슬퍼했다"면서 "11일 발인에도 참석해 고인의 마지막 떠나는 길을 배웅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Original Page: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95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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