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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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로에 선 위기의 유로존 [2011.06.28. 제867호]
[이슈추적2] 그리스·아일랜드·포르투갈의 연쇄 구제금융 신청… 유로존 재정위기 타개할 거시 불균형, 경쟁력 격차 해소 방안 마련해야
» 벨기에 브뤼셀의 유럽연합(EU) 본부 앞에서 6월22일 한 남성이 "유로가 무너진다"고 적힌 팻말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 AFP

지난해 5월 국제통화기금(IMF)과 유럽연합(EU)의 구제금융 지원으로 봉합될 듯 보였던 그리스의 재정위기는 유로존을 넘어 이제는 전세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악재로 작용하고 있다. 그리스가 구제금융을 받고 나서 6개월 뒤에는 '켈틱 타이거'(Celtic Tiger)로 칭송받던 아일랜드가 구제금융을 신청했고, 지난 4월에는 장기간 저성장을 거듭한 포르투갈이 구제금융을 신청하기에 이르렀다. 스페인으로 위기가 전이될 것이라는 우려가 다소 진정세로 접어듦과 동시에, 이제는 그리스에 대한 채무 재조정설이 부각되기 시작해 유로존의 재정위기는 제2의 라운드로 접어드는 듯하다.

유로화 사용, 환율 조기경보 상실

EU의 운영 구조상 재정정책은 개별 국가의 소관이므로, 재정위기는 개별 회원국의 경제운영 미숙에 기인한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단적인 예로, 그리스는 지난 정부의 통계 조작과 함께 규모가 큰 지하경제로 인한 세수 기반 취약, 공공부문의 과도한 지출 등이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유로존이 갖고 있는 근본적 문제점이 오늘날 재정위기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사실 유로화 사용은 유럽 국가들에 국경 간 거래 비용을 감소시켰다. 역내 교역 비중이 총교역의 60%를 넘는 유럽 국가들은 전통적으로 각국 화폐 간 안정적인 환율을 선호해왔다. 유로화 도입은 안정적 무역환경을 조성하고 서로 다른 화폐라는 교역 장벽을 제거해 역내 단일시장 형성에 큰 기여를 했다. 특히 남유럽 국가들은 과거 환율 위기와 높은 인플레이션을 겪은 바 있어, 유로화가 가져온 환위험 비용의 감소와 저금리 자금 조달이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출범 뒤 10년 동안 유로화 사용은 역내 경제활동을 활성화하고 금융안정을 가져와 경제성장에 큰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유로화 사용의 문제점도 발생했는데, 환율이 갖는 조기경보 역할의 상실이 대표적이다. 개별 화폐를 사용할 경우 국가 채무, 경상수지 적자 증가와 같은 대외 불균형 확대는 통화가치 하락과 금리 상승을 동반하게 되며, 경제주체들의 행동에 반영돼 대외 불균형이 자동적으로 교정된다. 그러나 유로화를 사용함으로써 환율이 갖는 조기경보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게 돼, 경제정책의 거버넌스가 취약한 남유럽 국가들이 지속적으로 경상수지 적자를 갖는 문제점이 발생했다. 유로화 도입 이후 독일·네덜란드·오스트리아는 지속적인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하는 반면, 스페인·그리스·포르투갈은 GDP의 10%에 가까운 경상수지 적자를 지속적으로 기록해왔다. 여기에는 2003년 이후 지속된 유로화의 강세와 이로 인한 수출경쟁력의 악화에도 원인이 있으나, 지난 10년간 각국의 생산성 격차가 오히려 증가해 일부 국가들의 실질실효환율이 증가한 점에 기인한다. 남유럽 국가들은 만성적 경상수지 적자로 부족한 재원을 해외 차입을 통해 충당하는 방식으로 운영할 수밖에 없어, 정부 부채와 민간 부채가 증가하는 현상이 반복된 것이다.


또 남유럽 국가들은 유로화 사용 이후 독일과 같은 안정적 경제에 편승해 낮은 인플레이션과 함께, 자국의 기초 여건을 넘어서는 저금리 자금 조달이 가능해졌다. 저금리 자금이 제조업 등 생산성 향상이 기대되는 산업에 투자될 경우, 경제성장과 경제의 선진화에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저금리 자금은 부동산 부문으로 흘러 들어가 거품경제의 원인이 됐는데, 특히 스페인과 아일랜드에서 이런 현상이 심했다. 결국 유로화 사용은 많은 혜택 이면에 지속적인 무역수지 적자와 저금리로 인한 과대 채무 현상을 유발하는 원인을 제공한 것이다.

EU 차원의 재정 감독 강화 노력

» 자료 : <슈피겔>
현재로서는 그리스에 대한 추가 지원과 채무 재조정 논의에 모든 관심이 집중돼 있으나, 장기적으로 유로화 체제가 살아남으려면 각국 간 거시 불균형, 특히 경쟁력 격차를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유로존 개혁은 두 가지 방향으로 이뤄질 전망이다. 첫째는 재정 및 경상수지 적자 등 거시적 불균형에 대한 감독을 강화하려는 노력이다. 현재 진행 중인 '유럽 학기'(European Semester)의 도입은 EU 차원의 재정 감독을 강화하려는 대표적인 조처다. EU는 1997년 이후 성장·안정협약(SGP)을 통해 회원국에 재정 적자와 국가 채무 수준을 GDP 대비 각각 3%와 60% 이내로 유지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SGP는 회원국 공공재정에 대한 사후적 감독에 그쳐 실효성이 없는 탓에 현재의 재정위기를 방지하는 데 불충분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올해 초부터 도입된 유럽 학기는 회원국 정부의 예산을 사전에 상호 평가함으로써 재정 감독의 실효성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또 EU가 '과대불균형절차'라는 제도를 신설해 회원국 간에 나타나는 거시적 불균형과 경쟁력 격차를 방지할 것임을 밝히는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통화 통합의 잠재적 위험요소인 회원국 간 대외 불균형 격차 문제가 공식적으로 언급되면서, 이에 대한 교정 방안이 공론화된 것은 향후 경제 거버넌스의 큰 변화를 시사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민간 부문에서 발생하는 대외 불균형의 교정 방안, 교정 가능성, 제재 방안의 집행 가능성과 실효성 등은 아직 의문으로 남아 있다. 특히 단일통화 사용으로 각 회원국은 생산성 증가나 임금 삭감 등 생산비 절감을 통해서만 대외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구조조정의 피해를 국내 경제주체가 다 떠안을 수밖에 없는데, 이 문제는 유로존의 장기 존립에 의문을 제기하는 지속적인 요인이 될 것이다.

둘째는 재정위기 대응 체제를 강화하는 것이다. 대표적 예가 재정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기금의 규모를 증설하는 것이다. 각국의 출자금 증액을 전제함으로써 재정 통합을 강화하는 것과 같은 선상에 있다. 이런 논의 또한 공동의 통화기관을 통해 회원국의 재정정책을 지원한다는 점에서 재정 통합의 주장과 같은 범주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재정 규율이 없다면 재정 통합은 있을 수 없다"는 독일의 태도에서 알 수 있듯이, 재정 통합에는 독일 정치권이 유보적 견해를 표명하고 비유로 회원국인 영국이 맞서고 있어 앞으로 회원국 사이에 첨예한 이견 조정 절차가 있을 것이다.

컵 작아 물 넘치는 주기적 현상

지금까지 유럽 통합의 역사를 살펴보면, 10~15년 주기로 통합과 관련된 위기가 찾아왔음을 알 수 있다. 유럽 통합의 제도적 틀을 '컵'으로 보고 실제적 통합의 결과물을 '물'이라고 본다면, 컵이 작아서 물이 넘치는 현상이 주기적으로 발생해온 것이다. 이런 위기 때마다 유럽 국가들은 작은 컵을 큰 컵으로 교체하는, 다시 말해 통합을 한층 심화하는 정책을 펼쳐왔다. 1970년대 유럽통화제도의 탄생과 1980년대 유럽 단일시장의 추진, 1990년대 유로화 도입, 2000년대 중·동구 유럽으로의 확대가 대표적인 예다. '이번에는 다르다'는 표현이 회자되듯이, 이번 유로존의 재정위기는 지금까지의 위기와는 양상이 사뭇 다르게 보인다. 앞으로 통합이 더 가속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할지, 축소되는 역진 현상이 발생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그러나 지금까지 추진해온 통화 통합을 점검하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강유덕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유럽팀 부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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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을 물들인 이슬람포비아 [2011.08.01. 제872호]
김순배
[세계] 브레이비크의 테러로 확인된 유럽에 만연한 이슬람 혐오 의식…
실업 불만에 정체성 위기감 겹쳐 급속도로 저변 확대
» 노르웨이 테러범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
서울은 강남과 강북으로 나뉜다.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는 동쪽과 서쪽으로 나뉜다. 서쪽은 잘살고 안전하다. 동쪽은 가난하고 치안이 불안하다. 서쪽에는 백인이 주로 산다. 동쪽은 이민자, 대부분 무슬림이 산다. '평화의 나라' 노르웨이조차 실상은 이렇게 쪼개져 있다. 지난 7월22일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의 테러로 그 곪은 상처가 터졌을 뿐이다. 오슬로의 지하철 동쪽 끝 푸루세트에는 1970~80년대에 온 파키스탄 출신 이민자들이 노르웨이 출신보다 훨씬 많다. 이슬람 사원도 자리잡고 있다. 이곳의 한 교사는 영국 경제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와의 7월25일치 인터뷰에서 "학생 40명 가운데 2명이 노르웨이 출신이고, 나머지는 노르웨이어를 몰라서 학습 수준을 낮춰야 한다"고 말했다. 노르웨이는 전체 인구 490만 명 가운데 약 11%인 55만 명이 이민자다. 1980년대 이후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이민자가 크게 늘어났다. 특히 오슬로는 인구의 약 28%가 외국인이다. 절반은 폴란드와 스웨덴 등에서 온 유럽계 백인이지만, 나머지 절반은 무슬림 인구가 절대다수다. 노르웨이 전체 인구의 약 3%가 파키스탄·이라크·소말리아 등에서 온 무슬림으로 추정된다.

9·11 이후 반이슬람 정서 확산된 유럽

노르웨이에서 테러가 벌어진 뒤 유럽 언론에는 자성이 잇따랐다. 반무슬림 극우주의자 문제가 노르웨이뿐 아니라 유럽 전체의 문제라는 인식 때문이다. 특히 2001년 9·11 테러 이후 '이슬람포비아'(이슬람혐오) 현상이 확산돼 무슬림 이민자와 갈등이 깊어져왔다.

2004년 191명이 숨진 스페인 마드리드와 2005년 56명이 목숨을 잃은 영국 런던 테러, 2006년 덴마크의 이슬람 창시자 무함마드(마호메트) 비하 만평 사건 등이 유럽에서 무슬림 이민자와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프랑스에서는 2005년 이민자들이 모여사는 파리 교외에서 폭동이 벌어졌고, 2004년 히잡에 이어 지난 4월 온몸을 가리는 이슬람 여성 전통의상 부르카 착용이 유럽 국가 최초로 금지돼 차별 논란을 일으켰다. 벨기에에서도 지난 7월23일 부르카 착용 금지법이 시행됐고, 스페인과 네덜란드도 비슷한 법률을 준비하고 있다. 스위스에서는 2009년 11월 국민투표로 이슬람 사원의 첨탑 건설을 금지했다. 노르웨이에서도 덴마크에서 논란이 된 무함마드 만평이 게재돼 파문이 일었다.

지금은 꺼리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재건에 나선 유럽은 이슬람 이민자를 환영했다. 경제성장으로 일손이 필요해지면서 이민자들의 가족 초청 및 망명 등이 허용됐다. 유럽연합(EU)의 2009년 이민 전략 보고서는, 비유럽인 1850만 명이 등록돼 있고 불법이민자 800만 명이 EU에 살고 있다고 밝혔다. 특히 1995~2010년 무슬림이 유럽 전역에서 3배 가까이 늘어났다. 미국외교협회(CFR)는 전체 5억 명의 EU 거주자 가운데 약 4%인 2천만 명이 무슬림이라고 분석했다. 무슬림의 유럽 이민은 올해 아랍 민주화 시위 사태를 겪으며 더욱 늘어나 이탈리아로 피신한 튀니지인만 2만6천 명에 이르렀다. 노르웨이 정부는 올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에리트레아, 소말리아 등에서 이민자 1만5천여 명을 받아들일 계획이다.


이처럼 늘어나는 무슬림 인구는 문화적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기독교 단일문화권인 유럽인에게 '유럽의 이슬람화'로 서구 문명이 위기에 처했다는 불안감으로 나타났다. 일부는 무슬림이 유럽을 정치적으로 통제하려 한다는 음모론에 빠져들었다. 무슬림의 출산율이 높고 서유럽인의 출산율이 낮다는 설명 등이 위기감을 부추겼다. 극단적인 외국인 혐오와 종교적 편견이 맞물리며, 이슬람이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는 주장에까지 이르렀다. 무슬림 여성이 경우에 따라 검은색 베일로 온몸을 가리는 것에서 드러나는 현실적인 문화적 차이, 9·11 테러 이후 이슬람권에 대한 악마화와 과장된 공포, 경제적 격차에 따른 멸시 등이 맞물린 결과였다. 이런 갈등은 결국 이민국의 언어와 문화에 동화하지 못하는 무슬림 게토의 확장과 이민국 시민들과의 분리와 대립으로 드러났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지난해와 올해 잇따라 다문화주의 실패를 선언했다.

유럽 극우, 반유대주의에서 친이스라엘로

과거 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는 극우 인종주의자들의 극단주의였다. 하지만 최근 10여 년간 뚜렷해진 것은 반무슬림 극단주의라고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분석했다. 반무슬림 극우주의자들은 반유대인 등 인종적 편견에 사로잡힌 네오 나치와 달리 친이스라엘 성향을 띠며 반이슬람으로 뭉쳤다. 독일 주간지 <슈피겔>은 이들이 친서방·친미·친이스라엘 성향이지만 반무슬림 성향으로 자유주의적·좌파적·다문화적·국제적인 것에 적대적이라고 분석했다. 다양한 극우주의자 그룹이 존재하지만, '이슬람은 적이다'는 인식을 공유한다. 이들은 무슬림이 인종적으로 열등하다는 주장이 발을 붙일 수 없게 되자, 대신 문화적으로 공존하기 어렵다는 주장을 펴고 나선 것이다. 과거에 인종주의적 민족주의 성향을 보이던 극우주의자들이 이제 급변하는 세계에 맞닥뜨려 민족의 문화와 역사, 민주주의와 자유, 세속주의 수호를 외치는 것이다. 여기서 반무슬림 극단주의자들이 외치는 '문화적 충돌'과 '국가 정체성 위기'라는 구호가 나왔다. 이들은 세계화와 유럽 통합, 다문화 캠페인 등을 결과적으로 무슬림 인구 증가를 낳은 원인으로 지목하며 반대하고 있다. 테러범 브레이비크는 "우리 세계에 가장 만연한 광기의 증후는 다문화주의다"라고 주장했다. 인종적·종교적·문화적 정체성이 위협받는다고 느끼는 반무슬림 극우주의자들은 기존 정당들이 무슬림 이민자 문제 등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고 비난하고, 테러 같은 급진적이고 과감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노르웨이는 1990년대 발칸반도 이민자를 받아들인 데 이어 이라크 난민 등을 수용하면서 반이민 정서가 깊어졌다. 브레이비크 역시 이민과 다문화, 이슬람과 무슬림 공동체의 성장에 대한 우려를 드러냈다. 그는 '2083: 유럽 독립선언'에서 이슬람에 맞선 십자군 전쟁을 촉구했다.

» 유럽 극우정당 총선 득표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반무슬림 극우 조직들은 기존 정당들과 달리 자주 해체와 결성을 거듭하며 변신한다. 또 교육을 못 받고 직장을 얻을 기회가 없는 낙오자들로 주로 구성된다. 이런 유럽 극우가 테러를 저지른 것은 처음이 아니다. 1980년 이탈리아 볼로냐 기차역에서 우익의 백색테러로 85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해 독일에서는 아돌프 히틀러를 추종한 27살의 군돌프 쾰러라는 청년이 뮌헨에서 열린 옥토버페스트에서 폭탄을 터뜨려 13명이 숨졌다. 1990년대는 독일 네오나치들이 터키 가족이 머무는 이민자 호스텔을 자주 공격해, 1993년에는 터키인 여성 2명과 아이 3명이 숨졌다. 2008년에는 네오나치 단체 '스웨덴 저항운동'을 경찰이 급습해 다이너마이트와 무기 등을 압수했다. 독일 정부는 극우 극단주의자 2만5천 명이 활동하고 있으며, 옛 동독 지역에서 40% 가까이 범죄가 늘었다고 밝혔다. 영국의 반무슬림 극우조직 '영국수호동맹'(EDL)은 영국 사회의 이슬람화에 반대하는 시위를 2006년부터 해왔고, 매번 시위에 2천~3천 명씩 참가하고 있다. 이 단체의 페이스북 가입자는 9만 명에 이른다. 프랑스 극우단체 '정체성 연합'(Le Bloc Identitaire)은 이슬람 사원 밖에서 돼지고기를 먹으며 술파티를 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번 노르웨이 테러를 계기로 반무슬림 극단주의자들의 위협이 알카에다 등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세력 못지않게 위협적이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스칸디나비아 국가 등에서 극우세력 등에 대한 우려가 제기됐지만 조직적으로 이끌 지도자가 없다는 등의 이유로 간과됐던 것이다. 극단주의 전문가인 매슈 굿윈 영국 노팅엄대학 교수는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 기고에서 "폭력적 극단주의와 과격화를 막기 위한 우리의 노력이 너무 오랫동안 무슬림 공동체에만 집중됐다"며 "이제는 새로운 극우정치 현실에 좀더 효과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가운데 한스 피터 프리드리히 독일 내무장관은 유럽 치안 당국이 우익 극단주의 세력을 포함해 잠재적 위협에 맞서 조기경고 시스템을 구축할 것을 제안했다. 이와 관련해 유럽 공동경찰기구 유로폴은 스칸디나비아 국가에서 비이슬람 세력의 위협을 조사하기 위해 50명으로 이뤄진 전담반 구성에 들어갔다. 이 기관은 "우파 조직은 점차 전문적·공격적으로 자신들의 지지자를 끌어모으고 있다"고 밝혔다. 토레 보르고 노르웨이 경찰대학 교수는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극단주의자들은 결집력이 떨어지고 온라인을 통해서만 움직이는 경우가 많아 과격화를 차단하기가 힘들다"고 지적했다.

극우 약진에 정체성 문제 작용

유럽 극우 정당들의 득세는 반무슬림 정서가 일부 극단주의자들만의 문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이민 문제는 1980년대 유럽에서 등장한 뒤 우익이 정치적으로 이용했고, 90년대 난민 증가와 맞물려 커져왔다. 지난 4월 총선에서 '진정한 핀란드인'(TF)은 2007년 총선 때보다 5배 가까이 많은 19%를 득표해 200석 가운데 39석으로 3당에 올랐다. 스웨덴 민주당(SD)은 2010년 9월 선거에서 5.7%를 득표해 사상 처음으로 의회에 진출했다. 네덜란드 자유당은 2010년 총선에서 15.5% 득표하고 24석을 차지한 제3당이다. 자유당 당수 헤이르트 빌더르스는 이슬람 성전 꾸란(코란)을 히틀러의 자서전 <나의 투쟁>(Mein Kampf)에 비교하기도 했다. 노르웨이 진보당(FrP)은 2009년 9월 총선에서 노동당과 보수당의 의석을 빼앗으며 22.9%를 득표해 제2당에 올랐다. 덴마크 국민당(DVP)은 의회 179석 가운데 25석을 차지하고 있다. 2009년 독일 작센 주선거에서는 인종주의·반유대주의 극우정당인 국가민주당(NPD)이 5%를 득표하기도 했다. 헝가리는 요비크가 3당으로 지난 선거에서 의석을 2배로 늘렸다. 프랑스 국민전선은 지난 3월 치러진 지방의회 선거 1차 투표에서 15%를 차지했고, 국민전선을 이끄는 마린 르펜은 여론조사에서 유력한 대선 주자로 떠오른 상태다. 미국 뉴스 채널 〈CNN〉은 "수세대 동안 유럽에서 정치는 계급적 측면에서 정의돼, 좌파 대 우파, 사회주의자 대 보수주의자 또는 기독교 민주주의자로 나뉘었다. 여전히 이런 구분이 지배적이지만 최근 선거에서 극우파의 확산은 정체성 문제가 개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현실적 해법 마련 쉽지 않을 듯

극우 정당들은 다소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무슬림 등에 대한 강력한 이민 규제를 외치고 있다. 덴마크는 극우 국민당의 주장으로 지난 5월 일방적으로 국경 통제를 재개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들은 이민자 증가를 부른 EU 확대 및 유럽 통합 강화에도 반대한다. 이런 분위기는 경제위기에 빠진 그리스나 포르투갈에 대한 금융지원 반대로 나타나고 있다. 극우파들은 테러범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했지만 일부 발언은 이들의 의식을 보여준다. 이탈리아 북부동맹의 중진 의원 프란체스코 스페로니는 7월27일 라디오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유럽이 '유라비아'(유럽+아라비아)가 돼가는 상황에서 서구 기독교 문명을 지켜야 한다는 게 브레이비크의 생각이라면 나도 동의한다"고 말했다. 극단주의 전문가인 매슈 굿윈 교수는 "지난 20년간 유럽에서 극우정당 지지가 높아졌다"며 "정부와 정책 입안자들이 어떻게 저변에 깔린 폭넓은 지지층의 우려에 대처할지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영국 공영방송 〈BBC〉는 "유럽 전역에서 무슬림 이민자에 대한 우려가 점점 더 커지는 것은 실업에 대한 불만 탓도 있지만 정체성 위기감 탓이기도 하다. 피해망상을 부추기며 오늘날 유럽에서 가장 민감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만큼, 감출 게 아니라 공개적이고 투명하게 이민과 다문화주의에 대한 토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옌스 스톨텐베르그 노르웨이 총리는 7월24일 연설에서 "이번 사건이 충격스럽지만 우리의 가치를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며 "우리는 더 민주적이고 더 개방적이고 더 인간적으로 대응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7월25일 오슬로에서는 지금까지 추모 행사의 최대 인원인 15만 명이 참여해 희생자를 추모하는 행진이 열렸다. 노르웨이 하콘 왕세자는 7월26일 이슬람 사원을 방문하는 등 화합 행보에 나섰다. 영국의 <가디언>은 "이것을 노르웨이와 스칸디나비아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커지는 불관용과 인종주의, 증오에 맞서 싸울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상처는 아물어도 흉터는 남는다. 무서운 것은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을 뿐 반무슬림 증오심에 공감하는 상당수가 저변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선거 때마다 우파의 반이민 정서 자극은 되풀이될 게 뻔하고, 경제위기 속에서 '무슬림이 일자리를 빼앗고 정부 재정을 축낸다'는 반감은 깊어질 것이다. 그간 유럽 각국의 행보를 보면, 노르웨이가 보여준 톨레랑스를 유럽 전체가 앞으로 보여줄지는 회의적이다. 현실적 해법은 '관용'과 '공존'이라는 이상처럼 쉬워 보이지 않는다. 이제 막 터져나오는 한국의 다문화 사회 갈등에서 확인되듯이.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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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기사돌려보기]한반도에 비가 그치고 햇볕이 비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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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 비가 그치고 햇볕이 비칠까? [2011.08.01. 제872호]
[초점]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 방미로 대화 국면 들어간 북-미 관계
국무부 정무차관으로 돌아온 웬디 셔먼은 공화당 벽 넘고 MB 정부 견제 뚫을까
»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이 7월28일(현지시각) 북-미 회담 장소인 미국 뉴욕의 유엔 주재 미국대표부로 이동하며 손을 흔들고 있다.
지루할 만큼 '흐리다 비'의 연속이었다. 날씨 얘기가 아니다. 한반도 정세 말이다. 이제 해가 날 때도 되었다. 미국이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을 초청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 들어 북-미 양국의 두 번째 고위급 만남이다. 2009년 12월 스티븐 보즈워스 특별대표의 북한 방문이 첫 번째 기회였다. 그때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2010년 초 오바마 행정부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그만 천안함 사건이 터졌다. 미국은 한국의 대북 강경정책에 편승했고, 북-미 관계도 멀어져갔다. 이번에는 다를까? 이명박 집권 3년6개월, 오바마 집권 2년6개월 만에 처음으로 협상 국면이 조성될 수 있을까?

북한과 미국의 탐색적 대화

경색 국면에서 대화 국면으로 전환한 것은 사실이다. 7월22일 아세안지역포럼(ARF)이 계기였다. 그동안 6자회담 재개를 위해 이른바 '3단계 접근법'이 추진되었다. 남북대화→북-미 회담→6자회담의 수순이다. 남북대화는 지난 5월 정상회담을 위한 비밀접촉을 북한이 폭로해 파국을 맞았다. 미국은 그동안 한국의 처지를 고려해 기다려주었다. 그러나 남북 모두 한반도 정세를 전환할 수 있는 의지가 없음이 확인되었다. 결국 ARF에서의 형식적인 남북 만남을 명분으로 미국은 다음 단계인 북-미 회담으로 넘어갔다.

북-미 회담이 6자회담 재개로 이어질까? 6자회담이 장기 표류하는 사이 한반도 질서가 많이 변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선적으로 북한은 꾸준히 핵 능력을 강화했다. 북-중 경제협력 확대라는 경제적 안전판도 확보했다. 자신감을 갖고 협상에 임하는 것이다. 북한이 경제가 어려워서 나온 것도 아니고, 식량을 얻으려고 나온 것도 아니다. 미국이 검토하고 있는 인도적 식량 지원은 현재의 북-미 대화 국면이 지속되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사안이다. 전통적으로 미국은 인도적 지원을 외교적 협상과 연계하지 않는다는 공개적 원칙이 있다. 북한의 태도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식량 지원은 상징 효과가 크지만, 목맬 정도의 경제적 대가는 아니다. 북한이 원하는 것은 환경의 변화다. 경제제재 완화 같은 이른바 '적대 정책'의 변경을 요구한다.


미국은 어떤가? 오바마 행정부의 협상 의지는 여전히 소극적이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직접 '탐색적 대화'라고 성격을 규정했다. 국무부 대변인은 '예비회담'이라는 표현도 썼다. 당장 어떻게 할지 결정하지 않고, 북한의 의중을 살펴보겠다는 뜻이다. 피차일반이다. 북한 역시 미국과 직접 만나 미국의 협상 의지를 판단할 것이다. 그래서 '열린 회담'이다.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면서 상대의 태도를 살피고, 이를 바탕으로 추후에 행동을 선택할 것이다.

북한의 주장은 무엇인가? 북한은 강화된 핵 능력을 공세적으로 활용할 것이다. 자체적으로 소형 경수로를 지을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며, 이에 필요한 저농축 우라늄 생산의 정당성을 주장할 것이다.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권리라는 국제법적 명분을 강조하며, 미국에 적대 정책의 중단과 평화체제의 필요성을 주장할 것이다.

이에 반해 미국은 당연히 우라늄 농축을 9·19 공동성명의 위반으로 규정할 것이다. 그리고 6자회담 재개를 위해 우선적으로 북한이 우라늄 농축 활동을 중단할 것을 요구할 것이고, 가능하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도 요구할 것이다.

양쪽의 견해 차이는 크다. 그렇지만 비관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이번 만남은 미국의 협상 관계자들이 북한이라는 상대를 이해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오해에서 이해로 이동하는 데 접촉은 필수다. 과거 내 경험에서 보면, 미국 관료들은 북한과의 초기 협상에서 많이 놀란다. 접촉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북한이라는 상대를 이념적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교조적이고, 협상 권한이 없고, 무데뽀일 것이라는 선입관 말이다. 그러나 막상 만나보면, 차이를 줄일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북한의 협상 전략 주기를 보면, 지금은 진전의 시기다. 북한은 자신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으면 벼랑 끝 전술을 종종 쓴다. 그렇게 핵이나 미사일 능력을 향상시키면 그것을 협상 수단화해서, 다시 말해 유리한 위치를 차지해서 협상을 한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 웬디 셔먼(59·사진)

오랜 동면만큼 뜨거운 협상을

6자회담을 전망할 때, 북한의 협상 패턴은 상수다. 협상이 이루어지면 그들은 핵 능력을 동결하거나 축소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핵 보유의 길로 달려간다. 결국 북한의 핵 포기 환경을 미국과 관련 당사국들이 제시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오바마 행정부는 협상 의지가 있는가? 이번에 시작되는 대화 국면은 금방 종료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낙관적이지도 않다. 우선적으로 미국 내 사정이 복잡하다. 오바마 행정부는 여전히 북핵 문제 해결에 자신감이 부족하다. 개입해서 해결하지 못할 바에야, 지켜보며 상황을 관리하겠다는 태도를 유지해왔다. 그것이 이른바 '전략적 인내'다. 물론 현재 시점에서 그러한 전략은 실패했다. 성 김 주한미국대사 인준 청문회에서 존 케리 상원 외교위원장은 경고했다. "외교적 교착이 지속되면, 더 위험한 상황이 온다"고. 방관의 시효는 지났다. 이제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위기 관리를 위한 소극적 개입과 적극적 개입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 악화되고 있는 미국 국내 정치 상황도 변수다. 재정위기 사태를 극복하려면 공화당의 협조가 필요하다. '북한 문제'를 둘러싸고 공화당을 자극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이 오바마 행정부의 신중함이요, 소극성의 이유다.

그러나 이제 선택해야 한다. 내년 대선에서 '북핵 협상'이 외교적 성과가 될 수 있을지를 판단해야 한다. 미국이 탐색하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오바마 행정부에서 '선수'가 등장했다는 점이다. 바로 웬디 셔먼이다. 1998년 '페리 프로세스'의 실무자였으며, 2000년 10월 북-미 공동 코뮈니케 초안 작성 및 협상 책임자였고, 2000년 11월 쿠알라룸푸르에서의 마지막 북-미 미사일 회담의 대표이기도 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을 비롯해 과거 클린턴 행정부 사람들은 부시 행정부가 미사일 협상 결과를 승계하지 않은 것을 가장 중요한 외교적 실책으로 거론한다. 바로 그 웬디 셔먼이 국무부 정무차관으로 임명돼 인준 청문회를 기다리고 있다. 빌 번스 부장관이 중동전문가라는 점에서, 향후 웬디 셔먼이 동북아 외교를 총괄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오바마 외교팀의 우유부단함은 전략 부재 때문이기도 하지만, 협상을 지휘할 사령탑이 없었다는 이유도 한몫했다. 경험 많은 보즈워스는 실권이 없었고, 실권이 있는 사람들은 경험이 없었다. 북한에 대한 이해보다 오해가 주도했으며, 이명박 정부에 끌려다녔다. 물론 8월 초 인준 청문회에서 셔먼은 홍역을 치를 것이다. 공화당은 그녀를 '유화파'로 낙인찍고 있다. 임명되더라도 미국 국내 정치 상황 때문에 조심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북한을 알고 협상 경험이 있는 그녀의 등장은 오바마 행정부의 동북아 외교를 점차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자신감의 크기는 아는 만큼이다.

최근 내가 오바마 행정부의 관료들을 만나 왜 협상하지 않는가라고 비판했을 때,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동안 많은 것을 준비해왔다고. 대화가 시작되는 것은 쉽지 않지만, 막상 시작되면 진정성이 있을 것이라고. 그러기를 바란다. 내년 대선 정국으로 넘어가기 전에 남아 있는 하반기의 몇 개월을, 동면의 기간에 축적해온 협상의 열기를 불태우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그래서 내년 대선 과정에서 북핵 협상이 외교적 성과가 되고, 그래서 핵 없는 세계에 대한 오바마의 비전이 빈말이 아니었음을, 그리고 선불로 받은 노벨평화상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줬으면 한다.

다시 '통미봉남'이라는 말이 거론되고 있다. 북-미 대화가 이루어지면, 한국이 왕따가 될 것이라는 우려다. 그러나 통미봉남은 왜곡된 개념이다. 김영삼 정부 시기에 일시적으로 나타난 현상에 불과하다. 남북관계 없는 북-미 관계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한반도 정세가 불안하면, 6자회담의 성과도 보장되기 어렵다. 북한은 핵을 억지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긴장 국면이 지속되면, 그 억지력을 포기하겠는가? 결국 남북, 북-미, 한-미 관계가 선순환해야 한반도 정세도 안정되고 북핵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스스로 '통미봉남' 조성하는 한국 정부

하지만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 전환 가능성이 높지 않은 것이 변수다. 말이 달라지고 있지만, 이제 말로 국면을 전환할 시기는 지났다. 8·15 경축사를 기대하는 의견도 있지만, 아직도 남아 있는 말이 있을까? 조건 없는 금강산 관광 재개 같은 전향적 행동이라면 모를까. 말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통일부 장관 교체를 비롯해 인사가 정책 전환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전망도 기대하기 어렵다. 청와대를 포함해서 온통 뉴라이트 천지인데, 그중 한두 명 바꾼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스스로 통미봉남을 선택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물론 남북관계는 어려워도 최소한 6자회담이 재개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더 이상 북핵 능력이 확대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남북대화에 대한 정리된 방침도 없으면서, 북-미 대화를 막기 위한 3단계 접근법의 시효는 끝났다. 북-미 대화가 시작되는 현 시점에서 이명박 정부가 또다시 악역으로 나서지 않기를 바란다. 바로 6자회담 재개를 위한 북한의 선 조처 요구다. 북핵 문제는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이라는 원칙이 기본이다. 협상 결과를 협상의 전제조건으로 요구한다면, 마차를 말 앞에 두려고 한다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6자회담 재개 국면에서 능동적으로 참여할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고립될 것인가? 그것은 전적으로 이명박 정부의 선택에 달렸다.

김연철 인제대 교수·통일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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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기사돌려보기]“총선 전념하면 상황 정리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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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전념하면 상황 정리될지도…" [2011.08.02. 제872호]
김보협
[특집] '희망 2013·승리 2012 원탁회의'로 존재감 드러난 문재인 인터뷰…
"범야권 통합 가장 어려워 보이지만 실효성 있는 방안"
»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한겨레21>은 올 들어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세 번째 만났다. 시사주간지 특성상 흔치 않은 경우다. 지난 4월 김해 보궐 선거를 둘러싸고 '노무현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증폭됐을 때, 그리고 5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2주기 때다. 이번 인터뷰의 주인공은 오롯이 문재인이었다. 문 이사장은 범야권 통합운동에 전념할 계획이라며 "전국적으로 통합이 성사되지 않더라도 내년 총선의 승부를 좌우할 부산과 경남에서 의미 있는 약진을 위해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힘을 보태겠다"고 말했다. 인터뷰는 지난 7월29일 서울 서교동 노무현재단에서 진행됐다.

-<문재인의 운명> 출간, 북콘서트, '희망 2013·승리 2012 원탁회의' 참여 등 일련의 움직임을, 노무현재단 이사장 문재인이 아니라 대선주자 문재인의 행보로 해석하는 분위기다.

=정치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 시점에 책이 나오고 원탁회의에 참여하니 정치적 행보로 볼 수도 있겠다. 과도한 해석이다. 공교롭게도 시기가 겹쳤을 뿐이다.

-시민사회 원로들과 중견 활동가들이 원탁에 둘러앉기까지 역할이 적지 않았다고 들었다.

=내가 주관하거나 주도하는 것도 아닌데 너무 부각되다 보니 그분들께 누가 되는 것 같아 민망하다. 시민사회의 원로와 시민정치운동 대표, 중견 활동가들의 모임에 나도 일원으로 참여하고 있을 뿐이다. 2013년 이후 국가 비전을 만들고 이를 토대로 2012년 (총선·대선) 승리 방안을 논의하고 모색하는 회의다. 정권 교체를 하면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국민에게 미리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원탁회의에서 통합의 대의에는 공감하되 경로와 방법에 대한 이견이 적지 않다. 의견 차이를 넘어 단일한 경로와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보나.

=범야권 통합이 가장 어려워 보이지만, 난 실효성 있는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통합에 회의적이거나 심지어 통합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분도 있었다. 논의 결과를 낙관할 상황은 아니다. 그렇다고 다수가 소수를 밀어붙여서 될 일도 아니다. 원탁회의가 통합운동의 구심체가 되길 기대하는데, 안 될 경우엔 통합운동을 벌이는 시민정치 운동단체들과 함께 통합을 호소하는 대국민 캠페인을 하고 각 정당의 지도부를 만나 설득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진보정당들의 통합은 범야권 통합에 도움이 되나.

=진보정당들만의 소통합보다는 대통합이 바람직하고 이왕이면 국민참여당까지 포함된다면 더 대중적인 진보정당이 되지 않을까 싶다. 구도가 단순해지면 통합을 도모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진보 통합 과정에서 국민참여당의 참여 문제가 걸림돌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참여정부의 오류와 한계에 대한 성찰 문제다. 범야권 통합이 난망하지만 혹시 된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참여정부 인사들에게 강도 높은 성찰을 요구하지 않겠나.

=국민참여당의 경우, 더 대중적인 진보정당을 제안하면서 진보정당을 하겠다는 거다. 그렇다면 그 정체성에 맞게 과거에 대해 사과하고 반성할 수 있다. 대통합은 다르다. 민주당이 진보정당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기존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연합정당을 만들자는 것인 만큼, 누가 누구에게 사과와 성찰을 요구할 일은 아니다. 연합정당은 가치와 정책의 연대이다.

-<문재인의 운명> 후반부에서 범야권, 시민사회 진영, 노동운동 진영, 진보개혁 진영 전체가 함께하는 '참여정부 5년에 대한 복기'를 강조했다. 행간에서 진보진영에 대한 서운함도 읽히던데.

=진보개혁 진영이 힘을 합쳐 만든 것이 참여정부였다. 그런데 참여정부는 진보개혁 정부를 이어가는 데 실패했다. 민심도 잃었다. 당연히 집권에 참여했던 세력이 성찰해야 한다. 그런데 겪어보니 개혁이라는 것이 정치를 담당했던 세력의 힘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더라. 진보개혁의 역량이 다 모이더라도 제대로 하기 힘들었는데 진보개혁 세력이 분열하고 실패했다. 함께 성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2012년 집권을 위해서도, 또 집권을 해서 성공하려면 그런 작업이 필요하다. 어느 한쪽에 성찰을 일방적으로 요구할 사안은 아니다.

-통합과 연립정부를 주장하는데 참여정부 시절에도 검토만 하다가 접은 것 아닌가. 진보정당과 엇나간 데는 누구 책임이 더 크다고 보나.

=정치 연합의 경험이 없었던 탓이다. DJ-JP 연합,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정도의 경험이지 연립정부를 구성해본 경험이 전혀 없었다. 그런 시도는 공작, 야합으로 비판받는 분위기였다. 지금은 달라졌다. 지난해 (6·2) 지방선거와 지난 (4·27) 재·보궐 선거를 통해 야권 정당들이 다양한 경험을 하고 성과를 쌓았다. 국정 운영 차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일종의 정치 연합 경험이 축적되는 중이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당이 함께하지 못할 만큼 엄청난 차이가 있는 정당이라면 어떻게 단일화가 가능했겠나. 국민의 눈높이에서 보면 한나라당과 야당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으나, 그에 비해 야당들의 차이는 결정적 차이가 아니다. 국정운영 연합도 가능하다. 이미 서구 민주주의 국가에서 연정은 통상적인 모습이다.

-열린우리당이 단독으로 국회 과반을 확보하면서 진보정당과 협력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은 아닌가.

=서로 그런 측면이 있다. 열린우리당이 과반이 된 것이 한편으로 독이 된 측면이 있듯이 민주노동당도 크게 약진하면서 그런 측면이 있다. 또 민주정부가 10년간 이어지면서 내부에서 헤게모니 경쟁 분위기로 흘러갔다. 강고한 보수세력을 등 뒤에 두고 내부에서 서로 싸웠다.

-민주당이 야권 단일정당을 제안했지만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국민참여당 모두 부정적이다.

=내년 총선에서 이겨야 대선에서도 이길 수 있다. 총선에서 지면 한나라당 대세론이 그대로 굳어질 가능성이 크다. 통합운동도 타이밍이 중요하다. 통합된 힘으로 총선을 치러야 한다. 총선 전 통합정당을 만들어야 한다.

-총선까지는 현재의 틀이 그대로 유지될 가능성이 더 크다.

=부산·경남은 전체 총선의 승부를 좌우하는 지역이다. 전국적으로 통합이 성사되지 않더라도 내년 총선의 승부를 좌우할 부산과 경남에서 의미 있는 약진을 위해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힘을 보태겠다. 영남의 지역주의가 무너져야 대선에서 역동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최대한 힘을 보탠다는 말은 직접 출마까지 염두에 둔 표현인가.

=(출마 문제는) 내 삶이 걸려 있는 중대한 문제다. 정당에 속해 있는 사람도 아니어서 출마니 선대본부장이니 하는 얘기는 너무 앞질러간 것이다.

-대선 출마 여부도 마찬가지인가.

=내가 대안으로 이야기되고 대선후보 지지도 조사에 포함되는 이유는 이대로 가다가는 대선에서 이기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서 그런 것 아닌가. 기성 정치에 대한 불신도 작용한 것 같고.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내가 대안이 되고 기대를 받을 만한 역량이 있는지. 그런 만큼 너무 앞질러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통합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 이 시기에는 통합에 전념하려 한다. 총선 때는 총선에 전념하고. 그러다 보면 상황이 저절로 정리될지 모른다. 기대를 걸어봤더니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정리되든가. (웃음)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와 '결정된 바 없다'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면 어느 쪽인가.

=중간쯤 되겠다. 아직은 생각하지 않고 있다. 통합을 하자면서 직접 선수로 나설 맘을 먹는 건 옳지 않다. 통합이라는 대의를 위해서라도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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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기사돌려보기]문재인, 정치의 복판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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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치의 복판에 서다 [2011.08.02. 제872호]
김보협
[특집] '문재인 신드롬' 속 이전과 구별되는 행보 보이는 문재인…
야권 통합 위해 매진한 뒤 단계별 전략에 따라 그다음 모색할 듯

지난 7월26일 국회가 술렁였다. 본회의장 옆 귀빈식당에서 열린 회의를 취재하려고 기자들이 이른 아침부터 진을 쳤다. 회의장 안에 국회의원은 단 1명도 없었다. 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름을 대면 알 만한 무게감 있는 시민사회와 진보 진영의 주요 인사들이었다.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김상근 목사(6·15 남측위 상임대표), 함세웅 신부(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박재승 전 대한변협회장, 이해찬 시민주권 공동대표(전 국무총리), 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상임고문, 문성근 '백만송이 국민의 명령' 대표, 백승헌 '희망과 대안' 공동운영위원장, 남윤인순 '내가 꿈꾸는 나라' 공동준비위원장 등 시민사회와 종교계의 원로 및 각계 대표들, 그리고 시민정치운동단체의 대표와 중견 활동가 21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희망 2013·승리 2012 원탁회의'였다.

» 7월27일 국회 귀빈식당에서 '희망 2013·승리 2012 원탁회의'를 마치고 나온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에게 기자들의 질문 공세가 펼쳐졌다. 문 이사장은 대선 출마 여부를 묻자 "그냥 갈게요"라고 말하곤 자리를 떴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곳곳에서 감지되는 '문재인 신드롬'

2시간에 걸친 회의의 결론은 "2013년 이후 새로운 민주공화국의 비전과 가치, 정책과 그 실현을 위한 2012년 승리 방안에 대해 국민과 함께 민주진보 세력이 논의하고 모색하며 준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정치권과도 희망의 공유를 위한 소통을 추진할 것이며 필요하다면 정치인들과 한자리에 모여 지혜를 나누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겠다고 했다.


중요한 내용이었지만 기자들과 카메라의 관심은 인쇄돼 배포된 발표문에 있지 않았다. 한 방향에 집중됐다.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이었다. 공개석상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문 이사장이 자리를 뜨자 기자들이 둘러싸고 질문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원탁회의 참가자 21명 중 한 명인, 국회 방문객 출입구에서 신분증을 맡기고 들어온 '시민' 문재인에게 과도한 관심이 쏠렸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민주당의 백원우 의원과 김현 부대변인은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줄 알겠다"며 흐뭇해했다. 문재인 이사장의 정치적 위상이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문재인 신드롬'은 다른 곳에서도 감지된다. 7월29~30일 서울 이화여고 백주년기념관에서 열린 <문재인의 운명> 북콘서트 '우리들의 운명'에는 400여 석의 좌석이 모자랐다. 열기도 뜨거웠다. 인터넷에 문 이사장의 팬카페도 여럿 생겨났다. '문재인 변호사님을 사랑하는 모임', '젠틀재인', 최근 생긴 '문재인 대통령을 기다리는 사람들' 등 팬카페 5개의 회원 수는 7천여 명에 육박한다. 자유게시판이나 토론방에는 그의 출사표를 기다린다는 노골적인 글들이 올라온다.

» 7월29일 서울 이화여고 백주년기념관에서 열린 <문재인의 운명> 북콘서트 '우리들의 운명'.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지난 5월 <문재인의 운명> 출간, 이후 잦아진 언론 인터뷰, 북콘서트, 원탁회의 참여 등은 그 이전의 문재인과 뚜렷이 구별된다. 정치권에서 통용되는 '문법'으로 보면 시민 문재인이나 문재인 변호사보다는 정치인 문재인 혹은 대선주자 문재인으로 봐도 무리가 없는 행보다. 그는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과도한 해석"이라며 "공교롭게도 시기가 겹쳤을 뿐"이라고 답했다.

문 이사장은 <…운명> 출간 이후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직업 자체를 정치로 바꾸는 것까지는 생각해본 바 없다"(6월15일)거나 내년 총선 출마 여부를 묻자 "아직 출마까지 생각하고 있진 않다"(<중앙일보> 7월22일)고 답하며, 뿔뿔이 흩어진 야권의 통합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정도로 자신의 활동 범위에 울타리를 치고 있다. 하지만 그 높이가 이전에 비해 낮아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운명>의 마지막 문장("당신(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다")까지 연결지어보면 변화의 정도가 또렷해진다.

야권 단일후보 적합도에서 손학규와 경합

언론과 유권자들도 미묘한 변화를 감지했다. 문 이사장이 차기 대선주자 지지율 조사에 포함되기 시작했고, 응답자들은 '장외 우량주'가 정치 시장에 등록되자마자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지난 5월 7일 <한겨레21>-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의 첫 조사(861호 '친노 오디션 국민투표 결과는요')에서 1.6%였던 문 이사장의 지지율은 7월23일 <한겨레>-KSOI 정기여론조사에서 6.0%로 상승했다(표 참조).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독주와 손학규 민주당 대표의 정체 속에 문 이사장의 지지율은 상승세를 타고 있다. 이런 흐름은 다른 조사에서도 확인된다. 문 이사장은 6~10%의 지지율로 손 대표에 이어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와 2위를 다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야권 단일후보의 적합도를 묻는 조사에서는 1위인 손 대표와 경합을 벌이고 있다. 문 이사장의 '잠재력'에 대한 여론의 기대가 크다는 뜻이다.

그의 생각에 변화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를 대하는 시선이 달라진 것일까.

대개 정치인에 대한 평가는 가까이서 지켜본 기자들과 대중의 그것이 놀라울 정도로 일치할 때가 많다. 문재인 이사장은 속마음과 겉으로 드러나는 표현이 다르지 않은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런 점에 비춰보면 그에게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 그를 바라보는 시선만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올 초에 벌어졌던 몇몇 에피소드만 봐도 그렇다.

» 차기 대선주자 지지율 흐름

올 초 노무현재단의 광주지역위원회 결성 즈음 뒤풀이 자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지역 인사들의 질문은 문재인 이사장의 '전업' 문제에 집중됐다. 다른 주제를 얘기하다가도 "아, 그건 알겠고, 그래서 이사장님은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라는 질문이 도돌이표처럼 계속됐다. 문 이사장이 "이런 식이라면 지역 방문을 하고 싶지 않다"며 언짢아할 정도였다. 올 초 노무현재단의 첫 소식지 <사람 사는 세상>을 발간할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가 문 이사장을 인터뷰했다. 원치 않았으면서도 노무현 정부 첫 민정수석, 마지막 비서실장을 맡게 된 이유에 대해 문 이사장이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답하면, 김어준씨는 "그럼 앞으로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오면 출마하실 수도 있겠네요?"라고 여러 차례 되물었다. 질문을 빙자한 집요한 설득이었다. 문제의 인터뷰는 다른 기사로 대체됐다. 비슷한 시기 청와대에서 같이 근무했던 비서관들과의 술자리에서 대선 출마 얘기가 나오자 문 이사장은 "당신들까지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고 한다.

변화의 조짐이 인 것이 <…운명> 출간 직후부터인 만큼 자서전의 기획부터 출간까지 실무를 도왔던 양정철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의 얘기를 들어봤다.

"달라진 것은 없다. (문 이사장의 출마 여부에 대한 답변이) 완곡한 표현으로 바뀐 정도다. 상황이 어렵고 절박하기 때문에 야권의 지지자들이 여러 가능성, 여러 희망 중 하나로 문 이사장님을 생각하는 것 아닌가. 이들에게 '뭔가 해볼 수 있겠구나' 하는 꿈마저 꾸지 말라고 할 권리가 우리에겐 없다."

'박근혜 대세론'에 대한 절박감이 배경

양 전 비서관의 말처럼 문재인 신드롬의 배경에는 야권과 야권 성향 시민들의 절박감이 있다. 지난해 6·2 지방선거와 10·4 재·보궐 선거에서 야권 연대의 승리로 최악의 상황은 벗어났지만, 현재 구도대로라면 내년 총선과 대선의 전망이 밝지는 않다. 뿔뿔이 흩어진 야당들의 통합과 연대 논의는 지지부진하고, 야권의 대선주자들은 박근혜 전 대표와의 지지율 격차를 줄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대로 가면 '박근혜 대세론'은 현실이 된다는 절박감이다. '이회창 대세론'을 꺾었던 노무현처럼 박근혜를 꺾을 누군가를 기대하고 꿈꾸는데, 문 이사장이 직접 선수로 뛸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하는 단정적인 표현을 쓰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 양 전 비서관의 설명이다.

이런 태도는 '전략적 모호성'으로 읽힐 수도 있다. 전략적 모호성이란 민감한 사안에 대해 뚜렷하지 않은 태도로 이익을 취한다는 국제정치학 용어다. 2007년 대선을 포함해 역대 대선에서 대망론의 주인공들이 전략적 고려 속에 일정 시점까지 출마 여부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취할 때 언론들은 이 개념을 빌려 해석하곤 했다.

이호철 노무현재단 부산지역위원장(전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양 전 비서관, 박선원 한국미래발전연구원 부원장(전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 등 '문재인 사람들'은 "뭔가 큰 구상을 가지고 단계를 밟아나가는 것처럼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전혀 아니다"라고 말했다. 속 깊은 얘기를 더 들어봤다.

"우리도 절박한 상황에서 이사장님이 뭔가 역할을 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오랜 인연이 있고 문 이사장님을 잘 아는 사람들의 생각은 대체로 비슷하다. (출마 여부와 관련해) 시대적 소명을 감당할지 피해갈지 본인 스스로가 정치적 결단을 내릴 문제이지, 누가 강요하고 설득할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자유인으로 살고 싶어하는 마음을 이해하고 가급적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만, 한계에 봉착해 돌파구가 보이지 않을 때는 결국 문재인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시대적 흐름에 따라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이호철 전 실장의 말이다.

내년 4월 총선, 문재인의 선택 풍향계

따라서 '한계에 봉착해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시점'이 되기 전까지는 문재인 이사장의 굳게 닫힌 입은 열리지 않을 것 같다. 그의 고민은 오히려 다른 데에 가 있다. <…운명>에서도 드러나듯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세력의 문제다. 내년 대선에서 현재 거론되는 야권의 대선주자 가운데 누가 후보가 되더라도, 민주당의 힘만으로 혹은 진보정당과 시민사회의 힘만으로는 집권이 불가능하다. 전체 진보개혁 진영의 힘을 하나로 모으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데도 여전히 특정 개인의 문제에서 답을 찾으려는 현실에 답답함을 느낀다. 근본의 문제와 현상의 문제, 구조적 문제와 지엽적 문제를 풀어가는 순서가 뒤바뀌었다는 게 문재인의 생각이다. 그의 이런 생각은, 2013년 이후 어떤 나라와 사회를 만들 것인가를 먼저 고민하고 그것을 위해 2012년 양대 선거에서 무엇을 할지 해법을 찾아보자는 '희망 2013·승리 2012 원탁회의'의 지향점과 맞닿아 있다.

문재인 이사장과 그의 주변 인사들의 말을 종합하면 잡히는 게 있긴 하다. 하지만 구상이나 전략이라고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단순하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범야권 통합에 전념한다. 전국 단위에서 통합이 성사되지 않을 경우에는 내년 4월 총선 때 부산·경남 지역에서라도 한나라당 후보들과 일대일 대결 구도를 만든다. 사실상 통합 후보의 당선을 위해 전력을 다한다. 그 이후의 일은 그때까지의 성과를 보고 판단한다.' 오디션 프로그램처럼 하나의 단계를 넘고 또 다음 단계를 넘어서야 비로소 길이 열린다는 얘기다. 성과를 가지고 야권 지지자들의 신뢰를 쌓은 뒤에 그 다음을 도모한다는, 전략치고는 참 단순하고 정직한 전략이다. 하지만 손학규 민주당 대표가 어려운 조건에서 경기 분당에서 당선된 뒤 제1야당의 대표이자 야권의 선두주자로 인정받았듯 성과와 단순함은 힘이 세다. 게다가 경제난과 동남권 신공항 부지 선정 문제, 부산저축은행 사태 등으로 부산의 민심이 요동치고 있어 불가능한 목표는 아니라는 게 문 이사장 쪽 설명이다.

"권력의지가 없다는 것을 문재인 이사장의 최대 약점으로 꼽는 데 이견이 있다. 권력의지란 양면성이 있다. 사람들은 의지를 갖고 뭔가 하겠다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현실 정치와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문재인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 아닌가. 카리스마가 강한가, 권력의지가 강한가는 낡은 버전이다. 앞으로 국가 지도자에게 필요한 덕목은 통합과 조정의 리더십이라고 본다. 게다가 야권의 통합이 성공하고 한나라당과의 일대일 경쟁을 거쳐 집권에 성공한다면 연립정부의 대통령이 될 것이다. 그런 대통령에게는 권력에 대한 강한 의지보다는 분점과 상생, 배려의 리더십이 필요할 것이다. 개인의 권력의지가 아니라 통합의 과정에서 얼마나 조정의 리더십을 보여주는지가 더 중요하다." 김경수 봉하재단 사무국장(전 청와대 연설기획비서관)의 말이다.

문재인 이사장은 범야권 통합과 총선 승리라는 관문을 앞두고 있다. 여러 관문을 통과하며 정치력과 리더십을 검증받을 전망이다. 권력의지와 무관하게, 그는 이미 정치의 한복판에 서 있다.

통합의 여러 갈림길

논의만 무성한 문재인식 '범야권 통합'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주장하는 '범야권 통합'은 통합의 여러 단계 중에서도 가장 높은 수준의 통합이다.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한나라당과 일대일 경쟁 구도를 만들자는 것이다. 여러 정당으로 쪼개진 야당들이 하나의 정당으로 모이되, 각자의 정체성은 정당 내 정파로 활동하며 유지하자는 것이다. 민주당에서는 야권통합특위 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인영 최고위원, 그리고 시민사회 영역에서는 야권단일정당운동을 펼치고 있는 문성근 '백만송이 국민의 명령' 대표나 미국식 민주당 모델의 '빅텐트론'을 내건 김기식 '내가 꿈꾸는 나라' 공동준비위원장의 주장과 유사하다.

문 이사장과 이 최고위원 모두 '국민의 눈높이'를 강조한다. 문 이사장은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 민주당이나 국민참여당이 갈라져 있는 것을 보면 그만한 사정과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국민이 그 차이를 알까. 한나라당과 범야권 통합 대상이 되는 야당들의 차이에 비하면 야당 간의 차이는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내년 4월 총선 공천 문제를 고려해도 하나의 정당으로 통합하는 것이 진보정당 쪽에도 유리하다"고 말했다. 이인영 최고위원도 지난 5월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중요한 건 대중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다. 그들 눈에도 민주당과 진보정당이 그렇게 차이가 큰 정당일까? 이념의 잣대로 보더라도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온건한 사회민주주의 정당이다. 그들에게 국유화나 사회주의 이행 노선 같은 급진 강령이 있는 건 아니잖은가. 반면에 민주당은 과거의 중도 자유주의 정당에서 진보적 자유주의, 사회적 자유주의로 이동하고 있다. 온건 사민주의와 사회적 자유주의 사이의 간극은 크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냉정하게 평가하면 범야권 통합을 위해 움직이는 정치세력은 없다. 논의만 무성하다. 민주당은 지난 7월10일 야권의 단일연합정당을 건설하자며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국민참여당에 '야 4당 통합특위 연석회의' 구성을 공식 제안했다. 진보 통합을 추진하는 야 3당의 반응이 싸늘해 성사 가능성은 낮다. 우위영 민주노동당 대변인은 "야권 연대도 못하면서 통합하자는 것은 초등학생이 대학시험을 치르겠다는 격"이라고, 강상구 진보신당 대변인은 "국민참여당에 대해서도 (과거 정책 노선에 대한) 조직적 성찰을 요구하는데, 민주당과 (통합이) 가능하겠느냐"고 되물었다.

2007년 대선 이후 분당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합치는 진보 소통합, 여기에 국민참여당까지 포함시키자는 진보 대통합에 관한 논의와 움직임이 활발할 뿐이다. 대통합과 소통합은 국민참여당에 대한 견해 차이에서 비롯된다.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는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가 참여정부의 오류와 한계에 대해 성찰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심상정 전 진보신당 대표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불신을 몇 마디 말로 상쇄하기는 어렵다"는 태도다. 소통합이든, 대통합이든 모두 반대하며 진보의 가치를 우선하는 독자파들도 있다.

진보 소통합과 진보 대통합을 주장하는 쪽에 민주당은 통합이 아닌 연대의 대상일 뿐이다. 내년 4월 총선 때도 지난 4·26 재·보궐 선거처럼 야권 연대를 통해 조정하면 된다는 것이다.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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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04

[사설] 기초노령연금 대상자 섣부른 축소 안 된다

정부가 65살 이상 노인 가운데 '소득 하위 70%'로 돼 있는 기초노령연금 수령 대상자를 축소하는 방안을 추진중이다. 보건복지부는 그제 국회 연금제도개선특위에 이런 방침을 보고하고 '최저생계비 150% 이하 노인'을 유력한 대안으로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현재 70% 수준인 수령 대상자가 2030년엔 51% 정도로 줄 것으로 예측돼, 노인층의 대량 빈곤이 심화할 가능성이 크다.

정부는 현행 기초노령연금이 저소득층 노인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하고, 앞으로 국민연금 수령자가 늘어날 것이라는 점 등을 제도 개편이 필요한 이유로 꼽는다. 기초노령연금액은 국민연금 가입자 월평균 소득액의 5%로 산정하는데, 올해의 경우 1인 가구가 9만1200원으로 1인당 최저생계비 53만원의 17% 수준에 불과하다. 이 정도론 노인층의 경제적 어려움 해소에 도움이 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2028년까지 국민연금 평균소득액의 10%로 높일 예정이라지만, 더 일찍 지원 규모를 현실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도 복지부는 기초노령연금 수령 대상자를 줄인다는 방침만 밝혔을 뿐, 지원액을 늘릴지 여부에 대해선 보고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국민연금의 경우 2007년 국민연금법이 개정돼 당시 60%(중간소득자 기준)였던 소득대체율이 해마다 낮아져 2028년엔 40%로 떨어지게 돼 있다. 노후빈곤 예방 기능에 상당한 구멍이 뚫려 있는 셈이다.

기초노령연금은 한국 사회의 오늘을 일궈낸 60~70대들이 빈곤에 신음하지 않도록 2007년 도입됐다. '세대간 부의 재분배'라는 철학이 상당히 배어 있는 제도다. 이들은 죽어라 일했지만 스스로 노후를 준비하지 못했고, 그렇다고 자식들의 부양을 기대하기도 어려운 처지다. 2000년대 중반 우리나라 노년층의 상대적 빈곤율(중위가구소득 절반 미만의 소득자 비율)은 45%로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평균인 13.3%보다 월등히 높다. 지난해 536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11%였던 노인 인구는 2030년엔 1181만명으로 늘어나 전체 인구의 4분의 1가량을 차지하게 된다.

재정 부담 등의 문제가 있지만 기초노령연금 대상자를 줄이는 게 능사는 아니다. 정부는 노인층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지원 대상과 규모를 늘리는 방안을 고민하는 것이 옳다.

2011-08-03

진보진영이 보는 ‘강남좌파’ 진보의 확대냐 중도의 다른 이름이냐

우석훈 소장자기 생활·지역 기반삼아스스로 '좌파' 선언 첫 세력
이택광 교수서구식 '정상국가' 열망해체제 확립 요구…보수주의
신진욱 교수중간계급의 정치적 주체화이를 수용할 보편적 이름 필요
강준만 교수발언권·참여욕구 강해과잉대표될 가능성 높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쓴 책 가 지난달 말 출간된 뒤 '강남좌파' 논란이 진보진영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강 교수는 2006년 강남좌파를 "생각은 좌파적이지만 생활수준은 강남 사람 못지않은 이들"이라고 규정하면서 본격적인 논의의 물꼬를 튼 바 있다.

2006년과 2011년, 논란의 외관은 다소 차이를 보인다. 강 교수는 최근 와 한 전자우편 인터뷰에서 "노무현 정권 아래에서 강남좌파는 주로 정치 엘리트를 겨냥한 딱지로 부정적 의미가 강했던 반면, 이명박 정권 들어서는 강남에 사는 진보파를 중심으로 한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긍정적인 의미의 딱지로 바뀐 게 아닌가 한다"며 "이는 젊은 전문직 종사자가 늘어나고 있는 인구사회학적 변화와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강남좌파 논쟁은 보수세력이건 진보세력이건 '기득권 세력이 과연 좌파·진보가 될 수 있냐'와 같이 엘리트에 대한 비판과 언행일치 검증 등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런데 최근 '강남 사람이라도 좌파적 가치를 지지할 수 있다', '그렇게 따지면 나도 강남좌파다'는 등 강남좌파를 적극 인정하거나 스스로를 강남좌파로 부르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진보세력을 중심으로 이들을 일정한 경향성을 갖는 사회 세력으로 보려는 움직임이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 강남좌파, 새로운 정치적 주체? 10월께 강남좌파를 본격 분석하는 책을 낼 계획인 우석훈 2.1연구소장은 "강남좌파는 우리 사회에서 공개적으로 스스로 '좌파'라고 선언한 첫 세력"이라며 "자기 생활과 지역을 기반으로 삼는 새로운 좌파 세력의 출현"이라고 봤다. 강남좌파에서 '강남'은 사회 부유층이라는 규정에 국한되어 있지 않으며, '문화적으로 세련되고 부드럽다'는 지역과 생활공간의 특성과 이미지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 역시 "강남좌파는 현재 '생활정치'를 바탕으로 삼아 두드러진 활동을 벌이고, 실제로도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거의 유일한 세력"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 모두 긍정적으로 주목하는 것은 강남좌파의 새로운 정치적 주체로서의 의미다. 기존 정당체제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독서모임'이나 '커피모임' 등을 조직해 지속적인 활동을 펼치는 등 기존 정치세력들과 다른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배경에는 기존 정당 및 기성 정치체제에 대한 혐오와 2008년 촛불집회의 경험이 있다고 본다. 촛불집회 때 전통적 지지층이 아닌 새로운 당원들을 많이 받아들인 진보신당은 실제 강남 쪽 당원 수가 크게 늘어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새로운 의미 부여가 아니더라도, 강남좌파는 기본적으로 '진보의 외연 확대'라는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다. 민주노동당 관계자는 "강남좌파라 하면 지식인층이나 중산층에 속한 이들이 한국 사회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그것을 반정부적 형태로 표현하는 것 아니겠냐"며 "진보진영이 풍부하게 확장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 진보의 외연 확대냐, 왜곡된 대표 효과냐 반면 새로운 정치 세력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인정하더라도, 이를 '강남좌파'라고 불러야 하는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시각도 있다. 강남좌파의 정체성을 두고 교육받은 중간계층, 미국식 자유주의, 유럽식 중도파로 설명하는 이들이 많다. 이택광 교수도 "강남좌파가 요구하는 내용들을 보면, 대체로 민주주의·복지국가 등 서구식 '정상국가'에 대한 열망"이라며 "체제를 넘어선 변화가 아니라 체제의 정상적인 확립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보수주의'"라고 본다.

신진욱 중앙대 교수는 "결국 '폭넓은 중간계급'이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정치적 주체로 새로 등장한 현상인데, '강남좌파'라는 말은 이 현상을 폭넓게 수용하기엔 너무 협소하다"고 비판했다. 또 강남좌파란 말 자체가 "진보적인 정치성향과 사상을 이념적·문화적 성향으로만 고정시켜, 먹고살기 힘든 중산층과 서민들의 삶으로부터 떼어놓기 위한" 의도로 보수세력이 구사하는 부정적인 표현이란 점도 지적했다. 때문에 새로운 정치 세력에는 '강남좌파'처럼 주류에서 멀어질 수 있는 급진적인 이름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누구나 받아들이기 쉬운 새 이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김진석 인하대 교수는 '보수 아니면 진보'라는 단순한 이분법 때문에, 강남좌파의 모호하고 분열적인 성격을 제대로 파헤치지 못한 채 '외연 확대'라며 진보를 부풀리거나 혹은 '가짜 좌파'라며 진보를 협소하게 만드는 현상을 비판한다. 이렇게 왜곡된 대표 효과를 해소하려면 '중도세력'의 재발견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강준만 교수는 "강남좌파를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중들의 정치혐오, 정치저주를 제대로 읽어야 한다는 취지로 책을 냈다"며 "진보를 이야기하면서도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는 '매력 있는 진보'는, 집권만이 살길이라는 식의 '적에 대한 증오'보다 소통을 중심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또 리무진 좌파의 발언권이 세서 '좌클릭'이 어려운 미국 민주당의 사례를 들어, "사회적 지위에 따른 발언권이 강하고 참여욕구가 강한 강남좌파가 과잉대표될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도 덧붙였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정동칼럼]한나라당의 ‘반복지’ 전쟁

경향신문 :
[정동칼럼]한나라당의 '반복지' 전쟁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8032106215&code=990308

[야! 한국사회] 오세훈과 106조원 / 선대인

오세훈 서울시장이 전면 의무급식의 찬반을 묻는 주민투표를 발의했다. 2011년 서울시 예산의 약 0.35%에 불과한 의무급식 예산 700억원이 '망국적 복지 포퓰리즘'이어서 반대한다면 그는 서울시 다른 예산도 알뜰히 쓰고 있음을 입증해야 한다. 오세훈 시장이 임기 5년 동안 쓴 예산은 약 106조원에 이른다.

그런데 오 시장은 이 돈의 상당 부분을 서울시 외관 치장 사업에 썼다. 오 시장이 당선 직후부터 추진해온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사업이 대표적이다. 완공 시기를 앞당긴다는 명목으로 설계비를 거푸 올려줘 애초 79억원 정도로 잡혔던 설계비는 155억원을 넘겼다. 이런 식으로 애초 2274억원으로 잡혔던 사업비는 두 배가량인 4200억원까지 늘었다. 이 건물 홍보관을 짓는 데만 30억원을 쓰고 있다. 하지만 정작 디자인 인력과 관련 프로그램에 대한 지원은 쥐꼬리만해 디자인 인력들은 일자리를 찾기 어렵고 동대문 의류상가들은 시들어가고 있다.

이뿐 아니다. 그는 한강르네상스 사업에는 5400억원, 남산르네상스 사업에는 1800억원, 디자인서울거리 조성 사업에 870억원, 서울 디자인올림픽에 834억원을 쓰고 있다. 이들 사업의 진행 과정에서도 낭비 요소가 적지 않았다. 한강르네상스 사업의 핵심사업인 서해뱃길 사업의 사업성이 부풀려졌다고 감사원은 지적했다. 민간사업자의 예측으로도 사업성이 없어 국제선 운항으로 매년 25억원의 적자가 난다고 한다. 이런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여객터미널을 만든다는 핑계로 수백억원을 들여 양화대교를 ㄷ자 형태로 만들고 있다. 이런 예산 낭비에 비하면 애물단지로 전락한 수상택시는 차라리 애교스럽다.

오 시장은 홍보에도 필사적이어서 2010년 홍보 예산은 500억원에 육박했다. 이런 혈세를 그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데 물 쓰듯 쓰고 있다. 4억원을 들여 '벌거벗은 아이'까지 등장시키며 의무급식 비판 광고를 일간지에 게재하고, 광고예산 집행을 미끼로 거의 전 언론과 돌아가며 인터뷰를 하는 게 그 예다.

또 겉으로는 '클린 시장'을 내세우지만 건설 부패와 그로 인한 예산 낭비 근절에 충분한 노력을 기울인 것도 아니다. 재벌 건설업체들이 가격을 짬짜미(담합)해서 공사비를 부풀리는 턴키사업이 서울시에서 매년 1조원 넘게 발주되고 있다. 필자가 2008년 서울시 재직 때 건설업체간 짬짜미를 분쇄해 지하철 9호선 2단계 사업에서 1000억원 가까이 아낀 사실을 오 시장에게 보고했기에 그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서울시는 그 뒤 과거로 회귀했다. 매년 아낄 수도 있는 예산 수천억원을 낭비하고 있는 셈이다.

반면 그는 정작 돈이 필요한 곳에는 자린고비처럼 아꼈다. 서울시가 억지 변명을 하지만 서울시 수해방지 예산은 서울환경연합의 주장대로 5년 만에 10분의 1 수준으로 격감했다. 또한 올해 소방공무원 개인보호장비 보강 및 유지관리 예산은 지난해에 비해 반 토막 났다.

이처럼 잠시만 훑어봐도 오 시장이 치적 과시를 위해 106조원을 엉뚱하게 쓴 흔적은 역력하다. 자신은 시민의 요구와 무관하게 막대한 세금을 입맛대로 쓰고 현 정부가 400조원의 공공부채를 쌓아올린 눈앞의 사실은 외면하면서도 의무급식 예산 700억원 때문에 나라가 거덜날 것처럼 혹세무민하는 시장은 반드시 시민들이 책임을 물어야 한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자신의 정치적 사욕을 위해 제도를 악용해 관제 주민투표를 밀어붙이는 오 시장의 세금 흥청망청쇼에 대한 심판이다. 필자가 대표로 있는 세금혁명당은 106조원을 어떻게 썼는지 대중적으로 검증하고, 오 시장 주민소환운동도 불사할 계획이다.

트위터 @kennedian3



[곽병찬 칼럼] 나랏돈으로 개인 정치 하지 말라

일본 자민당 의원 3명이 김포공항에 도착해 농성하던 시간, 서울시는 무상급식 주민투표 발의를 공표했다. 신도 요시타카 외 2명(이하 신도 외 2인)이 울릉도를 방문하겠다며 소란을 떨 때부터 겹쳤던 게 이들과 오세훈 서울시장이었지만, 우연치고는 너무 공교로웠다.

겹쳐 보인 이유는 하는 짓이 정치적 쇼라는 점 말고도, 두 나라의 외눈박이 우익들이 열렬히 환영하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양쪽 모두 흑안(혹은 철면피)이었다. 신도 외 2인은 서울이 100년 빈도의 폭우로 재난을 당한 상황에서, 9시간이나 농성하며, 우리 국민을 농락했다. 적어도 후쿠오카 사태 때 한국민이 보낸 우정을 생각했다면, 자제할 일이었다. 오 시장 역시 재난으로 난리 북새통인데도 오로지 대권을 향한 제 정치일정 관리에 전념했다.

사실 울릉도 방문 쇼는 얼치기였다. 관객도 별로 없었다. 문제는 한국 정부였다. 신도 외 2인의 서투른 혹은 일과성의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는 것을 이명박 대통령과 이재오 특임장관이 나서서 초강경 발언을 쏟아내는 바람에 판이 국제적으로 커졌다. 얼치기 쇼는 흥행 대박의 쇼가 되어버렸다.

이들이 애국심에 불타 그런 실수를 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지나치게 촌스럽고 돌출적이어서 그 배경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재오 장관의 경우 의혹은 금방 해소됐다. 그가 독도에서 초병 복장을 한 채 찍은 사진을 전국으로 날리면서 '나 꼼수!'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했다. 이 대통령의 경우는 아리송하긴 하다. 다만 일본과의 독도 문제에 대해 그렇게 유화적이었던 그가 그렇게 완강한 태도로 돌변한 것 자체가 미심쩍었다.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2008년 후쿠다 총리와의 한-일 정상회담에서 사실상 일본의 영유권을 인정했다는 일본 보도를 기억한다. 그래서 이런 인식을 불식하려던 터에 이번에 한 방 날렸다고 보는 이도 있다. 그게 맞다면 꼼수 쓰려다 호구에 머리를 디민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 독도 꼼수는 주민투표 꼼수에 비하면 약과다. 오 시장은 무상급식 주민투표는 밥 한 끼의 문제가 아니라 복지 포퓰리즘과의 전쟁이라고 호언한다. 그러면 정부 여당이 추진해온 무상보육은 무엇인가. 거기에 대해선 왜 침묵하는 걸까. 재벌·족벌언론의 찬사 속에 기고만장하는 모습도 가관이다. 한나라당이 거듭 말렸지만 그의 돌진을 막지 못했다. 홍준표 대표가 중앙당 차원의 공식 지원 결의를 이끌어내긴 했지만, 그 역시 뒤로는 야당과 타협을 거듭 재촉했다.

밑져봐야 본전이란 계산이 작용했을 것이다. 신도 외 2인이 판을 벌이는 데는 비행기 삯이라도 들었다. 그러나 오 시장은 나랏돈 182억원으로 독상을 차렸다. 그는 이미 박근혜 독점 무대인 보수세력 안에서 대항마 가능성을 보여줬다. 그러니 신도 외 2인이 공짜 비빔밥 먹고, 김까지 사들고 거들먹거리며 귀국한 것처럼, 그 역시 '포퓰리즘이 나라 망친다'고 옹알이하듯이 떠벌리기만 하면 된다. 땅 짚고 헤엄치기다. 지난 2007년, 예산 20조원인 서울시가 애들 급식 지원비가 없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호언했다는 오 시장이다. 그도 잘 알겠지만, 무상복지의 테이프를 끊은 건 바로 한나라당과 이명박 대통령이다. 2007년 대선 때 이 후보는 무상보육 공약을 제시했고, 한나라당은 반값 등록금 공약을 내세웠다. 지난 1월14일 이 대통령은 '우리나라 보육은 이미 무상보육에 가까이 왔다'고 선언했다.

사실 무상급식 재원은 무상보육의 절반도 안 된다. 0~5살 소득 하위 70%에게만 한다 해도 최소 4조원이 필요한 데 반해, 무상급식은 고교생까지 확대해도 2조원을 밑돈다. 그걸 두고 그 주변에선 무상급식에 수십조원이 든다느니 나라 망친다느니 떠든다. 풍차는 공동체를 위협하는 거인이고, 양떼는 교전중인 적들이라며 좌충우돌하고, 포도주 통과 격투를 벌이는 돈키호테가 떠오르는 건 이 때문이다.

그러나 돈키호테는 자신의 꿈과 이상을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겼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꿈도 이상도 뭉개버리는 그런 인간과는 다르다. 그의 묘비명은 꼼수 신동 오 시장에게 좋은 약이 될 것 같다. "여기 광인으로 살다가 제정신으로 죽은 이여." 오 시장에겐 아직 살아갈 날이 많다. 논설위원 chankb@hani.co.kr

[편집국에서] 우리 안의 ‘다케시마’ / 백기철

일본 야당 의원들의 한국행으로 촉발된 '독도 파동'은 대체로 진부한 모양으로 흘러가고 있다. 몇몇 정치인의 돌출행동, 이를 둘러싼 한-일 대립, 언론의 확대재생산, 그리고 또다른 강경대응이라는 종전의 악순환 구조를 되풀이하고 있다. 이번에는 일본 의원들이 '적진'인 한국으로 뛰어든 점이 색다를 뿐이다.

일본의 영토문제 이슈화는 민주당 정권 들어서도 그 기세가 꺾이질 않고 있다. 틈만 나면 '독도 해코지'에 열중하는 모양새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중국에 역전당하고 한국이 쫓아오는 탓일까. 지도자다운 지도자, 큰 리더십을 찾기 어려운 초라한 일본의 현실을 보는 듯해 안타깝다.

이번 소동은 사실 한국 정치권이 자초한 측면이 있다. 이들의 방한은 지난 5월 한국 의원 3명이 일본과 영토분쟁 중인 러시아령 쿠릴열도를 찾아 러시아 손을 들어준 데 대한 일종의 '보복'이었다. 야당 의원들이 러시아 땅까지 찾아가 대한인의 기개를 높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분 한번 낸 것치고는 '후과'가 크다.

이재오 특임장관의 경우는 할 말을 잃게 한다. 일본 의원들의 방한을 대대적으로 선전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도록 한 일등공신이 바로 그다. 독도에서 초병 근무를 하는 퍼포먼스는 선거용으론 압권이었다. 일본인들이 이를 보고 우리 정치 수준을 어떻게 생각했을지 낯이 다 뜨겁다. 품격과 절제를 보여야 할 일국의 장관으로는 낙제점이다.

언젠가 집에서 아이와 함께 일본과 다른 나라가 맞붙은 운동경기를 본 적이 있다. 어디를 응원하느냐고 묻자 아이는 주저없이 일본이 졌으면 좋겠다, 일본은 싫다고 했다. 뚜렷한 이유도 없었다. 내심 놀랐다. 우리 학교와 사회가 순진한 아이들에게까지 반일감정을 체계적으로 주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인들이 독도 문제 등에 비합리적으로 몰두하듯, 우리도 일본에 대해 어딘가 아집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닐까.

강제병합 이후 100년 세월이 흘렀지만, 일제가 우리에게 저지른 민족 말살의 죄과는 씻을 길이 없다. 한-일 악순환의 뿌리는 일본 우익의 고질적인 침략주의 근성이다. 신도 요시타카 의원이 김포공항으로 향하던 날 아침 "울릉도 오징어가 맛있다고 들었다"고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걸 보고는 어이가 없었다. 독도가 일본 땅이듯, 울릉도 오징어도 자기네들 것이란 말로 들렸다.

가해자가 정신 못 차리고 있는데 피해자의 관용이나 합리적 접근을 얘기하는 것이 섣부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극일의 길은 우리가 더 넓어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끝모를 피해의식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과거의 한국이 이젠 아니지 않은가. 베트남이 나라를 온통 짓밟은 미국과 한국에 아무런 배상을 요구하지 않고 끌어안는 것을 보며 대단한 나라라고 생각했다. 중국과의 국경분쟁 때는 일전을 불사해 사실상 중국을 무릎 꿇렸다. 관용이든 분노든 중심이 제대로 잡혀 있어야 한다. 국제외교에선 때로 강수가 필요하지만, 강수가 하수인 경우도 많다. 보초를 서고 독도에서 회의를 하는 것은 외견상 그럴듯할 뿐 제대로 된 강수도 아니다.

민족주의가 진보적이던 시대는 이제 지나가고 있다. 민족해방운동의 전통 속에서 반일은 진보요 친일은 보수이던 시대가 있었다. 요즘은 뒤죽박죽이어서 무엇이 진보인지조차 헷갈릴 때가 있다. 이웃나라 일본은 숙명적인 라이벌일 수밖에 없다. 대결과 반목, 비난의 길은 쉽지만 일본과 함께 손잡고 서로 역지사지하며 나아가는 길은 훨씬 어렵고 험난하다.

kcbaek@hani.co.kr


[아침 햇발] 야권통합,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 김이택

야권통합 논의가 지지부진하다. 논의 테이블은 많으나 가닥이 잡히는 건 없다. 야당판에 세 부류의 목소리가 있다. 대통합을 하지 않으면 총선·대선에서 진다는 쪽, 굳이 합칠 필요 없이 '연대'만 하면 된다는 쪽, 통합이고 연대고 아무 관심 없는 쪽이다.

'진보통합' 협상중인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연대'에 무게를 싣는다. 두 당 모두 대체로 내년 총선에서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해 보수-자유주의-진보 정당의 3자 구도를 형성하는 게 1차 목표다. 이를 위해 두 당이 합치자는 게 대세지만 국민참여당 참가 여부 등 몇 가지 쟁점이 여전히 걸림돌로 남아 있다.

민주당은 일단 '대통합'을 주장한다. 그러나 두 당이 거들떠보지도 않자 국민참여당 등과의 선도통합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어쨌든 선거에서 '연대'는 이뤄지지 않겠느냐는 낙관론이 대세다. 하지만 "굳이 연대 안 해도 문제없다"는 무관심파도 상당히 숨어 있다.

민노당과 진보신당의 통합 논의는 시한을 코앞에 두고도 아직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국민 앞에 공개약속한 진보통합도 해내지 못하면 "역시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비아냥 속에 양쪽 모두 내홍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극심한 양극화로 대중의 불만이 최고조로 치닫는 지금이 '노동자·농민 등 일하는 사람이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진보정당에는 대약진의 호기다. 이런 때일수록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과감하게 '대중성'을 강화하겠다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괜찮은 인사들이 민주당보다 진보정당을 먼저 찾도록 '진보진영 대표자 연석회의 합의문'에 동의하는 누구든 받아들이겠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만일 제대로 된 '비민주 온건진보당'이라도 뜨면 어려워질 수 있다. 이를 위해 '정치'와 '운동' 논리를 갈라내는 결단의 리더십이 필요하다. 한 가지 덧붙이면 정책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과거 전매특허였던 무상복지를, 민주당 거쳐 이제 한나라당에서까지 들고나오기 시작했다. 불판을 다시 갈 때가 됐다.

민주당 한쪽에서 "단일화로 대폭 양보하는 것보다 안 하고 각 당이 따로 뛰는 게 우리한텐 더 남는 장사"라는 얘기가 나온다고 한다. 착각도 유분수다. 민주당 그리 매력적인 당 아니다. 1년여 전만 해도 지지도가 한나라당에 더블스코어 차로 지던 탓에, 조금만 올라도 엄청 좋아한다. 하지만 당 지지도고 대선 후보 지지도고 한 번도 한나라당에 제대로 이겨보지 못했다. 정부의 실정에 대한 분노가 하늘을 찌르는 호조건에서도 그 정도밖에 지지를 얻지 못했으면 내부에 문제가 있는 거다.

한나라당에서 박근혜가 나서면 총선도 녹록지 않다. 당내에서 유력 대선 후보 하나 키우지 못했고, 면면을 보면 한나라당에 더 어울리는 의원들이 수두룩하다. 물갈이도 한나라당보다 더 해야 한다. 혹시 시민사회 중심으로 '문재인당'이라도 띄운다면 훅 갈 수 있다. 이인영 혼자 외치는 '대통합' 주장이 진정성을 가지려면 당내에서부터 진지하고 활발한 논의가 있어야 한다.

원탁회의에도 당부하고 싶다. 우선 백낙청 교수가 제안한 '2013년 체제'를 위한 정책을 다듬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총선·대선용이지만 장기적으로 진보진영 싱크탱크의 모태가 될 수도 있다. 또 하나, 대통합이 불발되면 시민세력이 민주당에 합류할 것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그것보다는 진보통합 성공을 전제로 진보정당 쪽에 힘을 실어주는 건 어떨지. 힘이 한쪽으로 기울면 대통합도 연대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의 민주당에도 그게 더 자극이 될 수 있다. 나는 "민주당의 선거환경이 너무 좋기 때문에 총선 야권연대는 훨씬 어려울 것"이라는 유시민의 예측이 맞다고 본다. rikim@hani.co.kr



[세상 읽기] 성공의 재해석 / 윤정숙

며칠 전 안철수 교수가 출연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높은 시청률은 화제였다. 청소년의 최고 멘토, 대학생 롤모델 부동의 1위인 그의 '어록'은 블로그를 통해 회자된다. 강의 요청만 한해 2000건이 훨씬 넘는 인기 절정의 강사이다. '안철수 현상'이다.

그가 성취한 탁월한 경력과 성공은 남다른 것이니, 성공 비결에 대한 관심과 선망은 누구에게나 당연하다. 그것뿐일까. 어쩜, 사람들은 그의 성공보다 성공에 대한 해석에 더 주목한 건 아닐까. "성공을 100% 개인화하는 것은 문제이다. 성공의 절반은 개인의 노력이고, 절반은 사회가 준 기회와 여건이다. 사회 자산을 나누는 과정에서 그가 성공한 것이다"라고. 성공에 관한 다른 상식, 성공한 이에게 '함께 사는 길'로 걸어가라고 독려하는 모습에 사람들은 박수를 친다. 절반은 사회의 덕이라는 '성공의 재해석'은 개인 능력과 노력에만 주목했던 낡고 오래된 성공신화의 정설을 바꾸라 재촉한다. 따지고 보면 혼자 힘으로 재산을 모은다는 '자수성가'라는 말도 그리 딱 맞는 말은 아닌 듯하다.

지난해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은 억만장자들에게 재산의 절반 기부를 권유하며 '기부약속운동'(기빙 플레지)을 시작했다. 일년간 70여명이 약속한 기부액은 우리 정부 예산의 절반을 훨씬 넘는다. 그러나 놀랄 것은 따로 있다. 공개된 개인 서약서에서 밝힌 그들의 성공관이다. 읽힐 것을 예상한 글이라 쳐도 신선했다. 부는 축복이자 선물이며, 사회에 돌려주는 건 기쁜 의무요 특권이라 한다. 빌 게이츠는 복을 받았으니 이를 잘 써야 할 책임감을 느낀다고 했다.

이베이 벤처사업을 떠나 사회적 기업가를 지원하는 재단을 세운 제프 스콜은 좋은 교육과 선택이 가능한 나라에서 성장한 것을 성공의 큰 이유로 꼽는다. 페이스북을 공동창업한 마크 저커버그와 더스틴 모스코비츠도 절반 기부를 약속했다. 27살 '어린 부자' 모스코비츠의 "나는 상상도 못할 큰돈을 벌었다. 이런 보상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롭게 하는 '도구'일 뿐"이라는 대목은 가장 극적인 선언이었다.

30대에 동료들과 아이티 기업을 창립해 성공한 권혁일씨. "내가 가진 자산을 의미있게 쓰고 싶다"며 청소년의 경제자립 사업에 큰 기부를 했다. 스펙 쌓기는 고사하고 학교와 집 주변을 맴돌아야 했던 여섯명의 아이들은 몇달 전 마포의 작은 도시락가게의 공동사장이 되었다. 그들 스스로 '소풍가는 고양이'라는 가게 이름도 지었고, 앞치마 두르고 만든 '청년활력도시락'을 배달한다. 그는 이 과정을 주의깊게 관찰하며 경험과 열의로 아이들과 함께한다. 곧 또다른 청소년 창업 그룹이 생긴다. 정답도 선례도 없지만, 시행착오 속에서도 이 실험은 조용히 진화해 간다.

새로운 자선의 세대가 등장하고 있다. 전문지식과 혁신적 기업운영으로 일찍 부자가 된 그들은 부의 대물림을 미덕으로 삼던 부모세대와 다르다. 성공의 사회적 책임에 당연 공감하며, 노년기 유산 기부보다 생전 기부에 더 관심을 둔다. 청년시절 사회의 격변을 지켜본 그들에게 '함께 사는' 것의 가치는 낯설지 않다. 여전히 더 큰 성취를 향해 왕성하게 일하지만, 한편 세상에 의미있는 일도 구상한다. 관심은 시혜복지를 넘어 사회적 기업, 이주자, 청년고용과 풀뿌리 단체로 넓혀진다. 아직은 극소수이고, 시작이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들은 새로운 변화를 촉진할 공익투자자로 주목받게 될 것이다. '벤처기부' 1세대가 될 그들의 존재감과 영향력이 커질 때 기부문화의 생태계도 바뀔 것이다. 어디 그뿐일까. 성공이 재해석될 때 우리에게 다가올 변화는 참 많다.



2011-08-01

[야! 한국사회] 두어 가지 함정 / 김규항

'어떻게 하면 아이와 잘 소통할 수 있는가?' 부모들(이라고 적지만 엄마들. 한국의 아빠들은 교육의 실제에 거의 참여하지 않는다)을 대상으로 한 교육 강연을 하면 꼭 나오는 질문이다. 내 교육 강연이라는 게 '성적 올리기 비법' 따위와는 동떨어진, 아이를 사람이 아니라 상품으로 키우는 교육 현실을 넘어서는 일과 관련한 이야기들이라 청중들도 교육 문제에 대해 시류를 거스르는 고민을 하는 부모들이 많다. 질문은 대개 내 글에 적힌 아이와의 소통 이야기를 근거로 한다. 물론 사실을 가감 없이 적은 것이지만 나 역시 아이와의 소통에서 실수할 때가 있고 '망설이지 않고 사과하기'를 나름의 보완책으로 삼는 처지다. 어쨌거나 그간의 내 체험과 이런저런 사례들을 보며 느낀 걸 적어본다. 이른바 '민주적인 부모가 아이와 소통에서 빠지기 쉬운 두어 가지 함정'.

첫째 함정은 이른바 민주주의의 절차와 내용의 괴리다. 민주적인 부모들은 당연히 아이와 소통도 민주적으로 하려 애쓰는 편이다. 문제는 이 민주적인 소통이 절차만 민주적인 경우다. 부모가 '아이를 위해 바람직한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는 그 결론으로 대화를 몰고 가는 것이다. 소통의 권위와 논리적 능력에서 부모는 아이를 압도하기 때문에 전혀 어려운 일도 아니다. 아니, 부러 제어하지 않으면 십중팔구 그렇게 가게 되어 있다고 하는 게 좀더 정확할 것이다. 민주화 이후의 우리 사회, 즉 민주주의의 절차는 회복했으되 여전히 정직하게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빼앗기고 억압받는 현실은 달라지지 않은 것과 닮은 데가 있다.

둘째 함정은 아이가 판단하고 선택할 만한 정보나 식견이 없는 상태에서 아이의 의견을 무작정 존중하는 것이다. 이것은 실은 아이를 존중하는 게 아니라 부모가 제 교양이나 사회의식을 아이에게 대상화하는 자기애적 행동인데 생각보다 해악이 크다. 이를테면 내 친구 녀석은 교육 현실에 관한 신문 칼럼에 엄청 감흥을 받은 어느 날 밤 제 초등학교 오학년 아들을 앉혀놓고는 '피시방 가는 시간 자율적으로 할 수 있지?'라고 물었다. 초등학교 5학년 여자아이라면 또 모를까 남자아이가 '할 수 있다'고 하지 '하기 어렵다' 하겠는가. '아이가 이상해졌어!' 석 달 후 녀석의 집에선 소란이 벌어졌다. 석 달 동안 피시방에서 살다시피 하며 센 게임만 해댄 아이가 결국 사고와 인지 능력의 위기를 맞았던 것.

두 함정은 언뜻 서로 모순되어 보인다. 첫째를 피하려면 둘째로 빠질 것 같고 둘째를 피하자니 첫째로 흐를 것 같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지향하거나 시도하되 정작 민주주의의 주인이 빠져 있다는 점에서 결국 둘은 하나다. 민주적인 부모 노릇은 권위적인 부모 노릇보다 훨씬 어렵다. 권위적인 부모를 둔 아이들은 (어버이연합 수준의 패악 질을 일삼는 경우만 아니라면) 자연스레 부모와의 차이에 적응하게 되지만, 민주적인 부모를 둔 아이들은 워낙 가르치고 설파한 게 있어놔서 '남들 앞에선 훌륭한 체하면서 실제론' 하며 크게 상처받기 십상이다. 상처는 진보적인 어른들 일반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져 아이의 사회의식 형성에 장애를 일으킨다.

두 번의 민주정권이 기대와는 달리 인민들을 배제하는 정치로 일관하여 결국 인민들로 하여금 이명박 정권을 불러들이게 만든 상황은 민주적인 부모들이 아이들 앞에 직면한 상황이기도 한 셈이다. 결론은 단순하다. 사회적 소통이든 아이와의 소통이든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존경이 살아 숨쉬려면 민주주의의 주인이 누구인가가 늘 되새겨져야 한다. 다짐의 마음으로 모질게 말하자면, 주인이 빠진 민주주의는 좀더 교활한 방식의 독재일 뿐이다. 지금 여기, 민주주의의 주인은 누구인가.



[한겨레 프리즘] 힉스 사냥의 풍경화, 세밀화 / 오철우

우리는 그것을 '신의 입자'라는 멋진 별명으로 불러주었다. 질량을 지닌 우주 만물의 입자들, 그러니까 쿼크·전자·중성미자 같은 것들에 질량이란 걸 부여하는 신묘한 입자이니, 그런 이름을 얻을 자격이 있었다. 엄청난 고에너지가 지배하던 우주 태초에 어떻게 질량의 탄생이 일어났는지 설명하는 데에도 등장하는 '힉스' 입자다. 힉스가 지구촌 뉴스의 관심사에 들어온 건 아마도 대형 가속기 덕분이었다. 스위스 국경 지대의 27㎞ 길이 지하터널에 건설돼 지상 최대의 기계로도 불리는 거대 강입자 가속기(LHC)에서 힉스를 발견하려는 국제 공동실험이 궤도에 올랐기 때문이다.

힉스를 잠깐 더 소개하자. 힉스는 아직 실체가 확인된 입자는 아니다. 질량도 모른다. 그래도 지위는 대단하다. 우주 만물의 원리를 가장 정교하게 설명하는 지금 과학이 물리학의 표준모형인데, 표준모형 전체를 매끄럽게 다듬는 데 힉스는 꼭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게 없다면 표준모형은 삐거덕거릴 수밖에 없다. 1960년대 힉스 가설이 제시된 이래, 이제 반세기 만에 초대형 가속기에 수천명 연구자가 몰려 그 실체를 찾는 중이다.

최근 힉스 검출 실험의 중간 결과를 취재하며 조금 인상적인 경험을 했다. 지난해 시작된 힉스 실험 전에 힉스는 그저 '신의 입자' '우주 수수께끼를 풀 단서' 정도로 불렸는데 실험이 진행되는 지금, 연구 현장의 얘기를 듣다 보니 그건 너무도 복잡한 실체가 됐다.

'발견'도 그렇다. 힉스는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단박에 포착되는 입자가 아니었다. 어떤 크기의 고에너지 물리량으로, 에너지 스펙트럼에 나타날 어떤 신호로 발견된다. 힉스 개념은 또 어떤가? 여러 도움말을 얻다 보니, 고에너지에서 찰나에 존재하다 붕괴하는 힉스는 양자역학의 이론 상자에 꽁꽁 숨어 있었다. 만물의 대칭성과 자발적 대칭성 깨짐, 그걸 설명하는 게이지 이론, 게다가 힉스장…, 이론의 언어를 알지 못하는 이들한테는 그 실체를 좀체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하니, 발견은 천재 과학자 개인이 아니라 수천명 집단지성에 의해 이뤄진다. 한국인 80명이 참여한 이 실험(CMS)엔 6000명 안팎의 세계 연구자들이 몰렸다. 양성자 무리를 거의 빛 속도로 충돌시킬 때 쪼개져 튀어나오는 갖가지 소립자와 복잡한 에너지 신호를 잡아내고 가려내고 계산하고 분석하고 해석하는 일이 거듭된다. 오류 확률을 0에 가깝게 줄이려면 데이터의 양을 엄청 축적해야 한다. 연구협력 네트워크도 중요하다.

멀리서 보이는 힉스 사냥의 풍경화는 단정하고 낙관적이다. 그러나 세밀화를 그리는 현장 연구는 역동적이고 복잡하다. 실험에 참여중인 손동철 교수는 "지금 데이터로는 어떤 결론도 내릴 수 없다"고 말했다. 박인규 교수는 "지금은 야구 경기의 2회 말이라 3 대 0으로 이기고 있다 해도 우승했다고 말할 수 없으니 더 많은 데이터가 모이는 9회 말의 내년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말한다.

스마트폰의 디자인은 간결하지만 부품 원리는 사실 더 복잡해졌다. 현대 과학은 난해한 이론과 과정이지만 대중은 과학을 간편하게 소비한다. 대중이 난해한 과학을 다 알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과학 지식이 오해돼선 안 된다. 과학 기사를 쓸 때마다 느끼는 딜레마이지만 힉스 때문에 다시 잡념은 꼬리를 문다. 어디 힉스뿐이랴. 사태의 안과 밖엔 들리는, 들리지 않았을 목소리들이 있다. 그래도 마감을 위해 어느 순간 잡념의 꼬리를 끊고 '과감하고 무모하게' 글을 쓴다. 풍경화와 세밀화가 무척 다름이 글 어딘가에 드러나고, 또 두 그림이 될수록 화평하길 바라며. cheolwoo@hani.co.kr

“무상급식 주민투표 오세훈 스스로 무덤 판 꼴”

경향신문 :
"무상급식 주민투표 오세훈 스스로 무덤 판 꼴"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8011706031&code=910100

[경향의 눈]무상급식 주민투표의 함정

경향신문 :
[경향의 눈]무상급식 주민투표의 함정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8012034305&code=990503

[우석훈의 시민운동 몇 어찌](22) 경찰국가, 이제는 그만하자

경향신문 :
[우석훈의 시민운동 몇 어찌](22) 경찰국가, 이제는 그만하자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8011959382&code=990000

미국 디폴트 사태 빠지면 공무원·군인 급여 끊기고 금리 상승

미국을 디폴트(채무 불이행) 상태에 빠뜨리지 말라는 여론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민주·공화당의 '치킨게임'이 파국 직전까지 왔다. 가 30일 기사 제목으로 "미국인들은 워싱턴이 미쳤다고 한다"고까지 한 것은 부채 한도 증액 협상을 바라보는 마음이 얼마나 다급하고 절망적인지 웅변해주고 있다.

미국이 경험해본 적 없는 디폴트는 다방면에서 부작용을 수반할 것이 확실하다. 우선 상당 부분을 차입금으로 해결하던 공무원·군인 급여, 사회보장 급여 등이 끊기거나 축소될 수 있다. 정부 사업 중단이야 미국인들에게 직접적 고통을 주지는 않겠지만 월급이 끊긴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미국 채권이 최고 신용도를 뜻하는 트리플 에이(AAA) 등급에서 강등을 당한다면 현재 10년 만기 채권 기준으로 2%대인 국채 수익률은 올라갈 게 뻔하다. 이는 더 많은 이자를 지급해야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는 말로, 차입 의존도가 높은 미국의 나라 살림은 더 팍팍해진다. 미국 정부는 연간 이자만 2500억달러(약 263조원)를 치르고 있다. 또 국채 수익률이 상승하면 주택 담보대출, 자동차 할부, 학자금 대출 등 다른 쪽 금리에도 상승 압박을 주게 된다.

세계 경제에서의 미국의 위상도 도전받게 된다. 신용도 면에서 철옹성 같던 미국 국채의 '신화'가 깨진다는 것은 미국 국채나 달러의 매력을 떨어뜨릴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미국 국채의 절반가량은 외국이 보유하고 있지만 안전성이 떨어지는 자산에 예전처럼 투자자가 몰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달러 가치는 더 떨어지고 '달러 패권'의 추락에 가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이런 크고 작은 문제들을 떠나 경제 전문가들이 가장 걱정하는 대목은 신용경색의 재발 가능성이다. 불안해진 경제 주체들이 채권 회수에 열을 올리고 대출을 조이는 현상이 도미노처럼 이어지면 2008년 리먼브러더스 파산 때와 같은 신용경색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의 12개 금융회사 최고경영자들이 지난주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공동 서한을 보내 "심각한 우려"를 전달한 것도 이런 기억 때문이다.

미국 중심으로 돌아가던 세계 금융시장에도 자연스럽게 먹구름이 드리워질 것으로 보인다. 미국 정부가 채권의 원금이나 이자를 제때 지급하지 못하면 신용등급을 '선택적 디폴트'로 강등하겠다고 경고한 신용평가회사 에스앤피(S&P)는 "일단 '선택적 디폴트' 상황에 빠지면 각국 중앙은행들이 금융 시스템을 계속 기능하게 만들더라도 세계 금융시장은 전반적으로 큰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신용경색은 곧 수요 감소와 기업 활동 위축으로 이어져 실물경제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게 상당수 전문가들의 예상이다. 2차 세계대전 후 140차례나 채무 한도를 늘린 미국 의회가 이번에는 이전투구로 날을 새우는 것에 미국뿐 아니라 세계가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본영 기자 ebon@hani.co.kr

국가신용 최상위 등급 ‘트리플A 국가’ 없어진다?

최고의 국가신용등급 '트리플A'(Aaa) 국가가 모두 사라진다? 한번쯤 생각해 볼 만한 일이다. 현재 21~24개 국가신용등급 중 가장 높은 등급인 트리플A 국가는 모두 16개국. 미국과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호주) 3개국 외에 영국,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스위스, 스웨덴, 노르웨이, 네덜란드, 덴마크, 룩셈부르크, 핀란드 등 유럽 11개국과 홍콩, 싱가포르 등 아시아 2개국이다. 3대 국제신용평가회사가 평가한 우리나라의 국가신용등급은 무디스와 피치가 다섯번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에스앤피)의 경우 여섯번째 등급이다.( 참조)

국가신용등급(장기외화채권에 대한 소버린 크레디트 레이팅)은 한 나라가 채무를 이행할 '능력과 의사'가 얼마나 있는지를 등급으로 표시한 것으로 엄밀하게 말하면 그 정부의 미래 채무상환능력을 평가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의 채무상환능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실로 다양한 변수들이 고려되어 등급이 결정된다. 재정건전성과 경제적 성과뿐만 아니라, 정치적 안정 여부 및 채무상환 의지 등 계량화가 어려운 지표들도 고려 대상에 포함된다. 계량화가 가능한 지표들일지라도 지표들의 상대적인 가중치를 신용평가회사들이 공개하지 않고 있는데다, 미래의 채무상환능력을 평가하는 것이므로 신용등급의 결정에 주관성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외부에서 국가신용등급의 적정성을 평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외환위기 이후 국가신용등급 결정의 주요 경제변수들이 악화되면서 투자부적격 수준까지 떨어졌으나, 무디스는 지난해 4월 외환위기 이전 수준인 다섯번째(A1) 등급으로 올렸다. 무디스의 등급은 12년 만에 복귀했지만 에스앤피의 경우는 외환위기 이전보다 여전히 2등급 낮은 단계로 평가하고 있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로 촉발된 세계 금융위기는 세계 국가신용등급의 판도에 큰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가장 핵심적인 변화는 선진국과 신흥개도국의 국가신용등급 격차가 좁혀지고 있다는 점이다. 금융위기의 진원지인 미국과 충격의 여파가 직접적으로 나타난 유럽과 일본 등 선진국의 국가신용등급이 급격히 하향조정되는 반면 일부 아시아와 중남미 신흥개도국의 등급은 상향조정 추세에 있기 때문이다.

지난 2분기 중 세계 국가신용등급 변동을 살펴보면 의외로 상향조정 건수가 하향조정 건수보다 많았다. 그러나 선진국과 개도국 간에 쏠림현상이 뚜렷했다. 상향조정된 18개 국가는 필리핀, 인도네시아, 브라질 등 양호한 재정건전성을 바탕으로 금융위기의 충격을 벗어난 아시아 및 중남미 신흥개도국들이었다. 반면에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그리스, 포르투갈, 아일랜드, 키프로스 등 10개 선진국의 신용등급이 하향조정되었다. 미국, 일본, 이탈리아 등 주요 선진국은 아직 등급이 조정되지는 않았지만 '부정적 관찰대상(Watch)'이 부여되었다. 선진경제의 3대 축인 미국-일본-유럽이 국가신용등급 하락 가능성이 높은 불안한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유럽의 경우 그리스, 포르투갈, 아일랜드, 키프로스 신용등급이 크게 하향조정된 가운데 이탈리아, 스페인 등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 일본도 재정악화와 성장률 저하뿐 아니라 애초 예상을 뛰어넘는 지진과 원전 피해 등으로 지난 2분기 3대 신용평가사 모두 신용전망을 하향조정했다. 미국은 최근 논의되고 있는 부채한도 증액 합의에 성공하더라도 장기적 재정적자 감축 계획이 마련되지 못할 경우 중기적으로 국가신용등급이 트리플A 국가에서 제외될 위험에 처해 있다.

미국이 트리플A 국가에서 제외된다는 것은 현시점에서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의 국제경제사적 의미를 가질 것이다. 미국은 세계 최대의 경제규모와 기축통화국이라는 누구도 넘볼 수 없었던 이점을 바탕으로 수십년간 세계 국가신용등급의 표준으로 군림해 왔다. 이런 미국의 위상이 허물어지는 것을 국가신용등급의 하락이 웅변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세계 국가신용등급의 표준인 미국의 등급 하락은 현재 트리플A 국가들의 연쇄 등급 하락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기축통화국인 미국보다 채무상환능력이 우월한 국가가 존재하기 어려운 구조이기 때문이다.

국가신용등급은 '해당 경제 내에서 외화표시 채권 발행에 대해 어떤 경제주체가 받을 수 있는 최상의 신용등급'을 의미한다. 개별 기업이나 금융기관의 신용평가도 해당 국가의 신용등급을 토대로 이뤄지기 때문에 국가신용등급이 하락하면 우량기업도 결국엔 좋은 신용평가를 받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신용등급의 하락은 국가의 신인도 하락뿐 아니라 민간의 국외 차입비용 증가와 투자여건 악화로 이어진다.

세계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몰락과 중국의 부상을 이야기해 왔던 일부 전문가들의 전망이 현실화할 시점이 멀지 않다고 볼 수 있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소규모 개방경제 국가인 우리나라도 다방면의 대비가 필요한 시점이다.

송태정/우리금융지주 수석연구위원

단식 16일째 노·심 “한진중, 대통령이 나서야”

"어제 새벽 폭우에 천막이 무너졌는데, 더 강하고 튼튼하게 다시 쳤다."

노회찬·심상정 진보신당 상임고문은 한진중공업 문제에 대한 해결 의지를 이렇게 다졌다. 28일로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 단식농성 16일째다. 부쩍 수척해 보였다.

두 사람은 이날 국회에서 연 기자간담회에서, 한진중 문제는 개별 노사 갈등이 아닌 '전 사회적·국가적 사안'이라며 이명박 대통령이 직접 나서라고 요구했다. 야4당의 노동특위 구성도 제안했다.

노회찬 상임고문은 전날 "김진숙을 크레인에서 끌어내려야 한다"고 한 김무성 한나라당 의원의 발언을 '망언'이라고 비판하며, 1979년 '와이에이치(YH) 사건'을 언급했다. 회사 쪽의 부당한 폐업공고에 반대해 당시 야당인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이던 가발제조업체 와이에이치무역 여성노동자들을 강제진압하는 과정에서 한 여성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던 사건이다. 노 상임고문은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올라가 있는 85호 크레인에 공권력을 투입해 강제진압한다면, 와이에이치를 강제진압하면서 정권의 몰락을 자초했던 유신정권의 말로를 이 정부도 겪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잘못된 정리해고를 철회해야 사태가 해결된다"며 "청와대가 나서면 24시간 이내에 해결될 것이고, 이를 촉구하기 위한 단식을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심상정 상임고문도 "김무성 의원의 발언은 섬뜩하기까지 하다"며 "김진숙과 희망버스에 대해 강제진압 시도를 한다면, 전 국민이 청와대를 향한 '절망버스'에 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민주당을 향해서도 한진중 문제에 대한 당론을 정하고 더 적극 나서라고 요구했다. 심상정 상임고문은 특히 손학규 민주당 대표의 '균형 있는 투쟁론'에 대해 "소극적이고,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비판했다. 심 상임고문은 "85호 크레인은 극도의 불균형 상태에서 벼랑 끝에 내몰린 사회적 약자를 웅변하고 있고, 이를 균형 있게 만들려면 사회적 약자에게 확실한 정치적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

2011-07-31

[고종석 칼럼] 전향(轉向)

지난달 초 한나라당 전당대회를 얼마 앞둔 시점에 한 보수논객은 김문수 경기지사에게 대권보다는 차라리 당권을 노리라고 조언하며, 그에게는 전향(轉向)의 이미지를 씻을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지도위원과 민중당 노동위원장 등을 지낸 김 지사의 이력을 두고 한 말이리라.

'전향'의 글자 그대로의 뜻은 '방향을 바꿈'이다. 그러나 실제 언어생활에서 이 한국어 단어가 그렇게 넓은 뜻으로 쓰이진 않는다. 예컨대 한겨레신문사에서 효창공원 쪽으로 산책을 하다가 방향을 바꾸어 공덕동 쪽으로 내려가는 것은 '전향'이 아니다. 취미를 꽃꽂이에서 소목(小木) 일로 바꾸는 것도 '전향'이 아니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젊은 시절 펼쳤던 '말의 그림(寫像)론'을 만년에 폐기하고 이와 상반된 '말의 쓰임(用)론'을 주장했지만,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이 '전향'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또 개신교도 아무개가 제 종교를 버리고 이슬람교를 받아들인다거나 무신론자 아무개가 깊은 성찰 끝에 가톨릭신자가 됐다고 해서 그가 '전향'했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이 경우에 우리는 '개종'(改宗)이나 '회심'(回心)이라는 말을 쓴다.

한국어 '전향'은 오로지 정치와 관련해서만 쓰인다. 이것은 영어 conversion이 종교를 비롯한 거의 모든 맥락의 '방향 바꿈'을 뜻하는 것과도 다르고, 한국어 '전향'의 원판임이 분명한 일본어 '덴코'(轉向)가 더러 정치 영역 바깥에서 쓰이는 것과도 다르다. 한국어 '전향'은 오직 정치사상을 바꿀 경우에만 쓰고, 일본어 '덴코'와 마찬가지로 좌익 사상을 버렸을 때 쓴다. 논리적으로는 우익에서 좌익으로 전향하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실제 쓰임에서 '전향'은 대개 좌익에서 우익으로 변심하는 것을 가리킨다.

좌익 테두리 안에서의 변심에 대해서는 어떨까? 예컨대 혁명적 사회주의자가 의회주의 좌파가 됐을 때, '전향'이라는 말을 쓸까? 일반적으로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지금 한국 진보정당들의 연령적 상층부에는 한때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포함돼 있지만, 우리는 이들이 '전향'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한국어 '전향'은 모든 부류 좌익 사상과의 완전한 결별을 뜻하는 것 같다. 그렇게 된 사정은 '전향'이라는 말의 원판인 일본어 '덴코'가 신문지면에 흩날렸던 천황제 파시즘 시기나, 이 말을 특정한 맥락 속에 가두었던 해방 뒤 반공독재체제에 그 연원이 있을 것이다. 1980년대의 소위 '주사파' 일부가 새 세기 들어 '뉴라이트'라는 반동적 흐름을 만들었을 때, 이것은 분명히 '전향'이었다. 비록 김일성의 '주체사상'이 과연 좌익 이념인지는 미심쩍지만. 김문수씨의 전향도, 그가 한때 혁명적 사회주의자였고 지금은 좌익 사상을 완전히 버렸다는 점에서, 한국어 '전향'에 딱 들어맞는다.

한국어 '전향'에 해당하는 집단적 흐름을 외국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대뜸 떠오르는 것이 학창 시절의 극좌 노선을 버리고 '마르크스의 죽음'을 선언하며 우경화한 프랑스 '신철학자들'(Nouveaux philosophes)이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일부가 사회당 지지자로 남았다는 점에서, 이 극적 장면이 한국어 '전향'에 꼭 들어맞지는 않는다.

한국어 '전향'을 곧이곧대로 실천한 사람은 앙드레 말로다. 그는 젊은 시절 지녔던 좌익적 신념을 1939년 독소(獨蘇)불가침조약 이후 말끔히 씻어내고 드골주의자가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신철학자들을 한국의 뉴라이트와 포갤 수 없듯, 앙드레 말로 역시 김문수씨와 포갤 수 없다. 그것은 박정희와 드골을 포갤 수 없기 때문이다. 드골은 권위주의적 인물이었지만, 민주주의의 파괴자는 결코 아니었다. 그리고 그야말로 우익답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 운동을 이끌었다.

'김문수의 전향'이라는 말에서 박정희를 떠올린 것은 최근 김 지사의 낯뜨거운 박정희 찬양 탓이다. 좌익 사상을 버리면 우익 독재의 지지자가 될 수밖에 없는가? 좌익에서 민주주의적 우익으로의 전향은 불가능한가? 천황제 파시즘에서 공산주의로, 공산주의에서 종속 파시즘으로 옮아갔다는 점에서 박정희야말로 전향 인생이었다. '전향'이라는 말이 씁쓸함을 남기는 이유다.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