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8-27

['오세훈 후폭풍'의 실체는?] 강준만의 <강남 좌파>- '강남 시장'은 있어도 '강남 대통령'은 없다! 그 이유는… 박성민, 강양구// 프레시안, 2011-08-26

'강남 시장'은 있어도 '강남 대통령'은 없다! 그 이유는…

['오세훈 후폭풍'의 실체는?] 강준만의 <강남 좌파>

기사입력 2011-08-26 오후 6:2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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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투표에 시장 자리를 걸었던 오세훈 서울시장이 26일 결국 사퇴했다. 이로써 서울 시민은 오는 10월 26일 1년여 만에 서울 시장을 다시 뽑게 됐다. 정치권의 움직임도 급박하다. 민주당 천정배 의원이 이미 출사표를 던졌고 한나라당 나경원, 원희룡 의원, 민주당 박영선, 이인영 의원 등도 후보 물망에 오른다.

선거 때마다 일상이 된 외부 인사 영입도 거론된다.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안철수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조국 서울대학교 교수,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 정운찬 전 총리 등이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영입 대상 인사로 꼽힌다. 지금 분위기대로라면 앞으로 2개월간 대한민국은 서울 시장 보선을 놓고 예비 대선을 치를 태세다.

이런 상황에서 눈에 띈는 책이 있다. 1995년 <김대중 죽이기>(개마고원 펴냄)를 펴낸 이래, 국면마다 한국 사회를 도발하는 의제를 제기해온 강준만 전북대학교 교수가 최근에 펴낸 <강남 좌파>(인물과사상사 펴냄). 이 책에서 강 교수는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강조한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여야와 각 진영의 열성 지지자들은 대선의 향방에 따라 이 나라가 흥하거나 망할 것처럼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면서 혈투를 벌일 임전태세(臨戰態勢)를 다지고 있다. 누가 대통령이 (…) 되건 '정치의 이권화' '엘리트의 지대(地代) 추구' '승자 독식주의'를 없애거나 완화하지 않는 한 대선은 '밥그릇 싸움 도박판' 이상의 의미가 없다." (12쪽)

ⓒ연합뉴스
<강남 좌파>는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를 달고서, 민주화 이후 2000년대 한국 정치를 사실상 좌지우지하는 엘리트의 실체를 점검한 책이다. 강 교수는 지금 대중이 열광하는 정치 엘리트를 '강남 좌파'로 규정하고, 문국현, 조국, 박근혜, 손학규, 유시민, 문재인, 오세훈 등의 정치인을 실명 비판을 통해서 그것의 정체를 규명한다.

<강남 좌파>는 2012년 총선, 대선의 중요한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한국 사회가 어떤 지도자를 선택할지를 놓고 심사숙고할 수 있는 한 가지 잣대를 제시한다. 이 책은 동시에 한국의 민주주의가 기득권을 가진 엘리트만 경쟁하는 장으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논의의 단초를 제공한다.

원조 '강남 우파' 오세훈 시장은 과연 몰락하는가? 그가 몰락한다면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대중이 '강남 좌파' 조국, 안철수 등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은 대중이 원하는 지도자가 될 수 있을까? 결정적인 순간에 '강남 ○파'의 발목을 잡는 그것의 실체는 무엇인가? '강남 ○파' 없는 한국 정치는 가능한가?

이렇게 '프레시안 books'는 정치 컨설턴트 박성민 '정치 컨설팅 민' 대표와 함께 <강남 좌파>를 읽고서 책 안팎을 넘나들며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답했다. '프레시안 books'는 앞으로도 '정치의 계절'을 앞두고 쏟아지는 책들을 놓고 한국 정치와 한국 사회를 읽는 대화를 계속 지상 중계할 예정이다.


8·24 주민 투표, 노선이 아니라 IQ가 문제!

프레시안 : 24일 무상 급식 지원 범위를 놓고 진행한 주민 투표 최종 투표율이 25.7퍼센트로 나왔습니다. 유효 투표율 33.3퍼센트를 채우지 못해서 투표함을 열지도 못했는데요. 결국 주민 투표에 시장을 걸었던 오세훈 시장은 26일 자진 사퇴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세훈 시장은 '강남 좌파'에 빗댄 '강남 우파'를 상징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의 이런 몰락의 의미를 한 번쯤 짚을 필요가 있어요. 우선 오세훈 시장 얘기를 하기 전에 이번 주민 투표의 의미부터 한 번 짚어보죠. 당장 오는 10월 26일 있을 서울 시장 보선에 정치권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만.

박성민 : 좀 있다 얘기하겠지만, 저는 아직 '오세훈의 몰락'을 얘기하기에는 이르다고 생각해요. 그 얘기는 다시 하기로 하고요.

이번 주민 투표는 일단 긍정적, 부정적 의미가 다 있어요. 긍정적인 부분부터 살펴봅시다. 무상 급식이라는 구체적인 복지 정책을 놓고 논쟁이 있었고, 그 최종 결정을 주민에게 직접 물었잖아요. 야당이 주민 투표 '반대'를 들고 나온 건 좀 옹색하긴 했지만, '불참'이 곧 '반대'와 등가가 되는 효과가 있었으니 주민 투표의 의의는 충분했습니다.

다만 부정적인 부분도 없지는 않아요. 우선 이것이 주민 투표를 할 만한 사안이었는지, 더 나아가 오세훈 시장이 시장을 걸고, 여당이 "망국적 포퓰리즘"이라고 핏대를 세울 만한 것이었는지 한 번쯤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전히 지나친 이념 대립의 프레임에 갇혀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지요. 충분히 생산적인 절충안을 마련할 수 있었는데 진영 논리에 휩쓸린 측면이 있어요.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한 거 같습니다.

사실 서울시 교육청 안도 2012년 중학교 1학년, 2013년 2학년, 2014년 3학년 등 사실상 단계적인 안이거든요. 곽노현 교육감이 당선되고 나서 현실을 감안해 일정을 다소 늦춘 거죠. 오세훈 시장도 선거 때는 하위 30퍼센트까지만 하자고 했다가 선거에 나타난 민심과 의회현실을 감안해 50퍼센트로 올린 겁니다.

그렇다면 오세훈 시장과 여당이 "망국적" 운운하면서 날을 세울 필요가 전혀 없었던 사안이에요. 오히려 재정 상황을 지적하면서 2016년 정도까지 단계적으로 완성하는 전면 무상 급식을 역으로 제안했더라면 훨씬 더 시민의 공감을 살 수 있었을 거예요.

사실 오세훈 시장 안이 채택되었다면 또 다른 문제가 생겼을 거예요. 상위 소득과 하위 소득 50퍼센트를 공정하게 나눌 방법이 현실적으로 있나요? 결국 월급쟁이는 내고 돈을 더 버는 자영업자는 안내는 일이 벌어졌을 거예요. 그런 점에서도 정치적으로 타협하는 것이 모두를 위해서 좋았을 겁니다.

프레시안 : 노무현 정부 때 노인 복지를 놓고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이 대립했던 모습을 떠올려 보면 이런 대립이 우스워 보입니다.

박성민 : 맞아요. 2006년이던가요? 한나라당이 60세 이상의 노인 모두에게 2028년이 되면 월 30만 원을 지급하는 내용의 안을 내놓았잖아요. 이게 지금 무상 급식과 뭐가 다릅니까? 반면에 당시 노무현 정부, 열린우리당은 65세 이상 노인 중 중·하위 45퍼센트에게만 매월 일정액을 지급하는 안을 내놓았습니다. 결국 65세 이상, 하위 70퍼센트로 타협이 되었는데요. 이번 사안도 그 정도로 접근했으면 타협이 가능했던 거죠. 정치력만 있었으면….

프레시안 :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이었던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가 한나라당 안을 결사반대했어요. 많은 보건복지 전문가는 유 대표 때문에 결국 기초 노령 연금이 '용돈 연금'이 되었다고 한탄합니다.

박성민 : 네, 그게 불과 몇 년 전 일이거든요. 그 때의 주역들이 지금도 한나라당, 민주당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는데, 이렇게 대립하는 걸 보면 이건 노선의 문제가 아니라 지능 지수(IQ)의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웃음)

오세훈의 몰락, 아직은 아니다

프레시안 : 본격적으로 책 얘기로 넘어가기 전에 주민 투표 얘기를 더 해보죠. 아까 아직은 '오세훈의 몰락'을 얘기하기는 이르다, 이렇게 얘기했어요.

박성민 : 그렇습니다. 일단 투표율 '25.7퍼센트'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이 숫자가 참 애매합니다. 한편으로는 조·중·동, 거기다 <매일경제><문화일보>와 일부 방송 등 보수 언론의 여론 주도 능력이 얼마나 약화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방증입니다. 한국 사회의 역학 관계가 '보수>진보'에서 '보수≒진보'가 되어 가고 있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진보 진영이 희희낙락할 정도의 숫자는 아닙니다. 막판에 어차피 유효 투표율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고 투표를 포기한 이들까지 염두에 두면, 이번 투표율은 여전히 보수 언론이 한 30퍼센트 정도는 움직일 수 있다는 걸 명확히 보여줍니다. 만약에 투표 의제가 달라진다면, 보수가 방어하는 게 아니라 공격하는 위치가 된다면 어떨까요?

예를 들자면, 10월 26일 서울시장 보선에서 야당 후보가 한나라당 후보를 이길 수 있을까요? 저는 누구를 내세운다 한들 결과를 낙관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아직 '오세훈의 몰락'을 얘기하기 어려운 겁니다. 사실 주민 투표 결과를 보면서, 카를 마르크스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했던 말("헤겔은 어디선가, 세계사의 큰 사건과 인물은 두 번 등장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헤겔은 첫 번째 인물은 비극으로, 두 번째 인물은 희극으로 등장한다고 덧붙이는 걸 잊었다")이 생각났어요.

2004년에 오세훈 시장이 한나라당 개혁을 위해서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것이 '비장'하게 보였다면, 눈물을 보이고 무릎을 꿇고 시장 자리를 던진 이번의 대선 불출마 선언은 마치 '개그'처럼 보일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투표율을 보면서 꼭 그렇게만 볼 수는 없겠구나, 하고 생각했지요.

이번 일을 계기로 오세훈 시장이 '보수의 아이콘'으로 등장할 여지도 충분히 있다는 겁니다. 다만, 한편으로는 오 시장이 자신이 '보수의 아이콘'이 되는 걸 과연 원할까, 이런 의문도 들고요. 아마 오 시장도 지금 생각이 많을 거예요. '어찌하여 여기까지 왔는가?' 본인의 의도인지, 떠밀려 왔는지…. 오 시장의 행보를 보는 또 다른 관전 포인트입니다.

오세훈이 '강남성'을 잃었더니…

프레시안 : 주민 투표 얘기를 하느라 서론이 길었네요. (웃음) 하지만 앞에서 주민 투표와 오세훈 시장 얘기를 한 것은, 이번 일이 <강남 좌파>를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방금 오세훈 시장이 '보수의 아이콘'으로 떠오를 수도 있다고 언급했는데, 주민 투표를 계기로 오세훈 시장은 '강남 우파'에서 '강북 우파'로 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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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남 좌파>(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펴냄). ⓒ인물과사상사
박성민 :
 맞아요. 먼저 여기서 말하는 '강남', '강북'은 지역적인 강남, 강북이 아닙니다. '강남 좌파', '강남 우파'라고 할 때, 그 '강남'이라는 상징에 들어 있는 것들은 '합리적 주장', '상대에 대한 배려', '다양성의 인정', '닮고 싶은 매력', '촌스럽지 않음', '글로벌 경쟁력' 등이에요. 이런 것들을 뭉뚱그려서 '강남性'이라고 할까요?

프레시안 : 네, 오세훈 시장은 이번 주민 투표를 계기로 그런 강남성을 잃어버렸어요. 강북 우파가 한국을 지배해온 전통적인 보수들 (상대편에서는 흔히 '수구 꼴통'이라고 부르죠) 즉 '안보 보수' '시장 보수'라면 오세훈 시장으로 상징되는 강남 우파는 그런 가치에 의문을 제기하는 합리적인 보수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왔는데, 본인이 그런 이미지를 버린 겁니다.

오세훈 시장이 (실제로 시정을 어떻게 해왔는지 무관하게) 세련된 외모와 화려한 달변으로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또 가진 자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강조할 때,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여성, 젊은 시민들이 열광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주민 투표를 계기로 그걸 잃어버린 것이지요.

박성민 : 그래서 <강남 좌파>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열쇳말은 '좌파'가 아니라 '강남'입니다. 바로 강남성이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왜 대중을 유혹하느냐, 그걸 파악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건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겠어요. 우선 '공급' 측면에서 살펴볼까요? 강남 좌파나 강남 우파나 공통적으로 전통적인 좌파, 우파 정치인의 대체로 등장했어요.

강남 좌파를 상징하는 조국 서울대학교 교수나 강남 우파를 상징하는 오세훈 시장이나 공통점이 있습니다. 일단 화려한 스펙(specification)을 자랑합니다. 당연히 그에 부합하는 경제적 여유가 있어요. 잘 생긴 외모와 세련된 화법도 필수고요. 거기다 '강북 우파'의 졸부 이미지와는 다르게 문화적 취향도 남달라 보입니다.

여기에 더해서 강남 좌파는 심지어 '진보적'이기까지 해요. 즉, 사회의 약자와 연대한다는 마음가짐 더 나아가 실천을 하기도 합니다. 강남 우파도 '대립이 능사인가', '돈이 최고인가' 이렇게 기존의 '안보 보수', '경제 보수'가 고집했던 가치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소통 지향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좌파만 놓고 얘기를 해보면, 강남 좌파의 이런 모습을 이른바 강북 좌파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김근태, 노회찬, 심상정 전 의원 같은 이들은 절대로 따라갈 수 없어요. 노회찬 전 의원이 자신의 책 표지에 첼로를 켜는 모습을 등장시키면서 이런 강남성을 획득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실패했습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이미지의 원형이 다르니까요.

조국, 안철수, 박경철, 김제동 씨 같은 분이 강남 좌파의 대명사라면 강남 우파는 오세훈, 홍정욱, 조윤선 의원 같은 이들이겠지요. 전통적인 정치인들이 이들을 아무리 질시하더라도 흉내를 내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들에게 강남성은 고유한 정치적 자산인 거죠.

노원은 왜 노회찬 아닌 홍정욱을 택했나?

프레시안 : 또 대중은 이들에게 열광하고요. (웃음)

박성민 : 그게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 대중은 이렇게 좌파, 우파를 막론하고 강남성을 가진 엘리트에게 열광하느냐, 이것부터 살펴봅시다. 우선 시대가 변했어요. 지금 이 시대의 시민의 정체성은 '소비자'로 규정됩니다. 이들은 세상사를 다른 무엇보다도 소비자로서의 정체성으로 살핍니다. 전에는 '국민'이나 '시민'으로 규정했었거든요.

한 가지 예를 들어볼게요. 지금 강남 좌파로 언급되는 이들 중에는 아까도 언급했듯이 일반 시민의 상상할 초월할 정도로 돈을 많이 벌고, 고가의 강남 고급 주택에 살고, 자기 아이들은 외국어고등학교나 유학을 보냅니다. 만약 1980~1990년대라면 이것만으로도 이들이 좌파 행세를 하기가 어려웠을 거예요.

하지만 지금의 대중은 '능력 있어서 돈을 벌어서, 세금도 제대로 내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냐' 이런 식으로 '쿨'하게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대표적인 좌파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진중권 씨가 취미로 고가의 경비행기를 운전한다고 할 때도 그것은 오히려 그의 매력을 높이는 요소가 된다는 겁니다.

프레시안 : 닮고 싶다, 이런 욕망이 있는 거죠. 기성세대의 경우에는 나는 몰라도 우리 애들은 '강남' 좌파, '강남' 우파로 키우고 싶다는 겁니다.

박성민 : 2008년 노원구(병)에서 노회찬과 홍정욱의 대결은 바로 그걸 명확히 보여준 사례죠. 당시 노원구에는 계층적 위치나, 역사적 경험이나, 이념적 성향이나 강북 좌파인 노회찬 전 의원에 가까운 시민들이 꽤 많았을 거예요. 그런데 그들이 노회찬 대신 홍정욱 을 선택합니다. 마음 한 구석에 미안한 마음을 가지면서요.

그들의 마음이 딱 '강남성'에 대한 동경이었을 거예요. '나는 비록 늦었지만 우리 아이는 (좌파든 우파든 상관이 없으니) 홍정욱과 같은 강남성을 가진 사람으로 키우고 싶어.' 바로 이런 '강남(성)에 대한 동경'이야말로, 강남 좌파/강남 우파에 대한 열광의 실체입니다. 정치권이 자꾸 그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도 바로 이런 대중의 욕망을 알기 때문입니다.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 왜 문제인가?

프레시안 : 그런 논의에서 빠진 대목이 있어요. 그런 대중의 욕망을 염두에 두더라도, 왜 이런 강남 엘리트들이 현실 정치에서 급속히 등장할 수 있었는지, 이런 부분에 대한 설명은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 <강남 좌파>도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의 문제점을 따져본다고 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이 부분은 파고들지 않아요.

박성민 : 동감입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한국의 정당 정치가 무너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당이 '무릎팍 도사'만큼의 영향력도 없으니, 당연히 정당 외부에서 이른바 '뜬' 스타들을 정치인으로 충원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안철수, 박경철, 한비야 씨의 한마디가 기성 정치인의 말보다 영향력이 훨씬 크니까요.

그간 한국은 현실 정치로 비교적 양질의 훈련된 정치 엘리트를 충원하는 메커니즘이 있었어요. 1970~80년대에는 육군사관학교가 정치 엘리트를 충원하는 역할을 했어요. 당시만 하더라도 육군사관학교 출신들은 체계적으로 리더십 교육을 받은 당대 최고의 엘리트들이었습니다.

1990년대에는 이른바 학생 운동을 했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비교적 일찌감치 정치에 눈을 떴던 이들은 육군사관학교 출신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훈련된 정치 엘리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2000년대가 되면서 이런 정치 엘리트를 충원하는 메커니즘이 망가진 거예요. 그러다 보니, 교수·변호사·의사와 같은 금력 있는 이른바 전문직들이 대거 정치권으로 유입했지요.

프레시안 : 연예인도 있고요. (웃음) 그렇게 정치인으로서 훈련이 전혀 안 된 이들이 정치권에 유입되는 현상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까요?

박성민 : 그렇습니다. 언젠가 "인턴 헌법 기관"이라는 칼럼을 쓴 적이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국회의원을 자주 안 바꿔요. 5선 의원이 부지기수입니다. 이들은 10~20년 동안 특정 분야에 대한 노하우를 갖고 있어요. 국민의 대표인 의회가 행정부를 견제할 수 있는 힘이 이런 노하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한국은 어떤가요? 정치 안 하겠다는 사람을 억지로 설득하고 또 설득해서 '모신' 이들까지 포함해서 교수·변호사·의사 혹은 연예인을 하던 이들이 국정에 대해서 뭘 알겠어요. 그러니 20~30년 동안 자기 분야에 전문성이 있는 관료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마디로 관료 손에 농락당하는 거지요. 감히 말하건대, 부처의 일개 과 하나도 상대 못할 거예요.

그렇게 인턴 국회의원을 하다 보면 4년이 훌쩍 갑니다. 거기서 또 물갈이 대상이 되어서 공천에 탈락하거나, 선거에서 패배하면 또 다른 인턴 국회의원한테 바통이 넘어가는 거예요. 이런 상황에서 대중이 열광한다고 강남성을 가진 엘리트를 정당이 선호하기 시작하면, 이런 문제는 더욱더 커지겠지요.

인턴들이 지배하는 나라

프레시안 : 정당이 자체 내에서 차세대 정치인을 키우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그런 악순환이 계속 될 게 뻔합니다. 최근에 노르웨이 테러를 봐도, 총기 난사가 일어난 우퇴위야 섬에서 집권당인 노동당이 청년 당원을 상대로 여름 캠프를 열었어요. 바로 그런 과정을 통해서 정치인들이 발굴이 되어야 합니다.

박성민 : 미국, 유럽에서 정당이 바로 그렇게 차세대 정치인을 발굴하고, 교육하고, 훈련하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정당도, 대학도, 사회도 정치인을 키우는 역할을 하지 않아요. 자, 한 번 생각을 해보세요. 군인은 사관학교가 있어요. 의사는 의과 대학이 있습니다. 법조인도 사법연수원에서 교육을 받아요. 그리고 20대 후반부터는 사회에서 경력을 쌓습니다. 그런데 정치는 키우는 기관도 없고, 또 너무 늦게 시작해요.

버락 오마마 미국 대통령이나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가 40대에 대통령, 총리가 될 수 있는 것도 그들이 이미 10대 때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정치에 입문했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나이는 40대지만 한국의 정치인의 '정치 연령'과 비교해보면 한 60대 이상이 된 이들입니다. 한국에서는 다른 일을 하다가 40~50대에나 정치에 입문하니까요.

이건 심각한 문제입니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훈련된 정치인이 필요한 나라가 어디인가요?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강대국에 섬처럼 낀 분단국가 대한민국입니다. 그런데 정작 한국의 정치인이 가장 미숙해요. 이러니 어렸을 때부터 체계적으로 리더로서의 교육을 받은 미국, 중국 더 나아가 북한의 정치인을 어찌 상대하겠어요.

프레시안 : 사실 그렇게 정당 정치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일은 정당 스스로 자초했어요. <한겨레>와 같은 진보 언론도 그걸 도왔고요. 예를 들어서, 노무현 정부 때 열린우리당이 했던 이른바 '정치 개혁'이 대표적인 헛발질입니다. 정치자금법 개정, 지구당 폐지, 국민 참여 경선제, 당 외부인이 주도하는 공천심사위원회 같은 것들이요.

박성민 : 맞습니다. 어리석은 짓이었어요. 그것의 문제점을 다루려면 별도의 자리가 필요할 테지만, 일단 지금이라도 다시 여야가 의논해서 다 되돌려야 합니다. 당장 정치자금법부터 개정해서 쌓아둔 돈이 없더라도 정치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아야 지금처럼 돈 좀 있는 사람만 국회의원 선거에 나갈 수 있는 현실을 바꿀 수 있어요.

지구당도 살려야 합니다. 일상의 정치가 민주주의의 근간이잖아요. 정치인이 골목골목마다 시민을 만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고리가 되는 지구당을 폐지하는 건 말도 안 되는 거지요. 선거 운동을 옥죄는 각종 규제도 다 풀어줘야 합니다. 어디서든 정치인이 시민과 일상 속에서 만날 수 있도록 해야 해요.

그래서 20대부터 선거에 나와야 합니다. 또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경력을 쌓아야지요. 그런 게 가능할 때 한국의 정치의 질이 획기적으로 나아질 수 있어요.

자꾸 '고비용 정치'라고 하는데, 민주주의를 위해서 그 정도의 비용은 당연히 감수해야죠. 시민을 대표하는 정치인이 양질이 되면, 관료들이 세금으로 장난하는 일을 막을 수 있으니 결과적으로는 시민에게 이익입니다. 정당 외부의 스타에 열광하며 현실 정치인을 조롱할 때, 정작 뒤에서 웃고 있는 건 관료, 판·검사 같은 비선출 권력이라는 진실을 알아야죠.

프레시안 : <강남 좌파>에서 강준만 교수가 정작 그런 문제는 외면해서 실망스러웠어요.

박성민 : 손학규(7장), 유시민(8장), 문재인(9장) 등의 부분은 사실 <강남 좌파>의 전체 흐름을 염두에 두면 튑니다. 다른 부분과 유기적으로 연결이 안 됩니다. 그러니 그런 부분을 빼고 차라리 이런 얘기를 더 깊이 다뤘더라면 애초의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라는 이 책의 주제에 더 부합했을 텐데요.

'강남 좌파' 대통령은 가능한가?

프레시안 : 얘기를 쭉 하다 보니, 지금 한국의 정치 현실에서는 강남성을 가진 엘리트, 즉 강남 좌파, 강남 우파의 득세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강남성을 획득할 수 없는 정치인의 성공은 기대할 수 없는 건가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어떤가요? 박근혜 전 대표는 강남 우파라고 하기에는….

박성민 : 강남에 살기는 하지요. (웃음) 지도자, 리더의 조건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어요. 이미지, 업적, 비전이 그것입니다. 이 중에서 이미지가 제일 중요하고, 그 다음이 업적이고, 비전이 영향력이 제일 작아요. 박근혜 전 대표는 지도자, 리더로서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대통령 박근혜' 하면 사람에 따라서 거부감은 있을지언정 낯설지는 안잖아요.

김대중, 김영삼 두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랫동안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두 사람의 경력은 지도자, 리더로서의 이미지를 강하게 대중에 각인시켰어요. 역시 둘 중에 누구라도 앞에 대통령이 붙는 게 이상하지 않아요. 이명박 대통령은 좀 느낌이 다릅니다. 지도자로서의 이미지보다는 현대건설 CEO, 서울시장으로서의 업적으로 대통령의 자리까지 올랐으니까요.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 대통령이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비전을 제시해서 최고 지도자가 된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처럼 이미지, 업적, 비전이야말로 대중이 지도자로서 승인하는 필수 조건들이에요. 그렇다면 강남 좌파, 강남 우파들이 이런 지도자의 조건을 획득할 수 있을까요?

프레시안 : 강남성은 방금 언급한 지도자의 조건과는 약간 거리가 있어 보이긴 합니다만….

박성민 : 맞아요. 강남 좌파, 강남 우파들이 국회의원을 하는 데는 별 무리가 없을지 몰라요. 하지만 그들이 지도자, 리더가 되려면 '강남성' 외의 다른 조건들이 더 필요하다는 겁니다. 평생 민주주의를 위해서 헌신한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이나 원칙을 위해서 패배가 뻔한 지역에 출마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 같은 비장한 모습이요.

그런데 강남성은 그런 헌신성, 비장미와 어울리지 않아요. 개인의 자유를 누구보다 중요하게 생각하잖아요. "소신과는 어긋나지만 아이를 위해서 외국어 고등학교에 보냈어요", "클래식 좀 좋아하면 어때요", "나는 나고 가족은 가족이죠." 이런 식의 입장으로는 폭넓은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는 있어도 지도자가 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겁니다.

프레시안 : 여기서 또 딜레마가 발생하네요. 만약에 그런 것을 버리는 순간, 그건 세련되지 못한 촌스러운 모습이 되니까요. 즉, 자신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었던 강남성을 잃어버리는….

박성민 : 맞아요. 오세훈 시장의 예가 대표적이에요. 오 시장이 안보 보수, 경제 보수와 거리를 두지 않고 보수의 아이콘이 되려는(되는) 순간, 바로 강남 우파로서 가졌던 강남성이 사라져버렸잖아요. 제명이 된 거죠. 그 순간 그는 자신이 가졌던 가장 중요한 매력 요인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건 아직 장외에 있는 혹은 큰 꿈을 꾸는 강남성을 가진 엘리트들에게 반면교사가 될 것 같습니다. 조국, 안철수, 박경철, 김제동 씨 등은 바로 강남성 때문에 대중의 열광을 받고, 정치권으로부터 러브 콜을 받아요. 그런데 그들이 현실 정치로 들어와서, 각각의 진영에서 요구하는 역할을 맡는 순간 그 강남성은 사라지게 될 테니까요.

중요한 호남 변수, 몰락한 호남 정치

프레시안 : 마지막으로 <강남 좌파>에 투영된 강준만 교수의 욕망, 이런 것도 한 번 읽어볼까요? (웃음) 강 교수가 2006년에 <인물과 사상>에 강남 좌파를 언급할 때만 해도, 입장은 강남 좌파의 '옹호'에 기울어 있었어요. 그런데 이 책은 대체로 강남 좌파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집니다.

그냥 책을 읽으면서 이런 입장 변화가, 이른바 강남 좌파로 거론되는 이들 중에서 호남 정치인이 없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웃음) 아까도 얘기했지만 책의 주제와 다소 동떨어진 유시민 대표,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에 대한 비판적인 논평도 그런 인상을 부추기고요.

박성민 : 글쎄요. 강준만 교수가 <김대중 죽이기> 이후에 여러 차례 자신의 '친(親) 김대중(DJ)' '친 호남' 성향에 대한 바뀐 생각을 많이 얘기 했어요. 그러니 책에 명확히 나오지 않은 그런 강 교수의 의도를 지레 짐작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다만, 독자 입장에서 그런 분위기가 감지되는 건 사실입니다.

사실 많은 정치 평론가는 침묵하고 있지만, 앞으로 2012년 대선에도 호남 변수는 중요합니다. 예전에는 호남이 상수였는데, 지금은 변수가 되었으니 더욱더 중요해졌지요. 그럼에도 현실 정치에서 호남의 위상은 낮아졌어요. 차세대 지도자로 꼽힐 만한 정치인도 부각하지 않고, 영향력도 떨어졌어요.

그간의 대선 경험도 한몫 했어요. 1997년에 DJ가 JP(김종필)에게 내각의 절반을 내주고 연합을 했고, 상대방의 표를 갉아먹는 이인제 후보가 있었고, 심지어 구제 금융을 요청한 직후였는데도 고작 이회창 후보와의 득표율은 1.5퍼센트 차이였어요. 반면에 2002년에는 '권영길 변수'가 있었음에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회창 후보를 2.3퍼센트 차이로 눌렀어요.

또 2007년에는 손학규 의원 대신 호남 출신의 정동영 의원이 나섰지만 고작 26.1퍼센트밖에 얻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영남 후보가 야권 후보로서 경쟁력이 있다, 이런 판단이 정치권에서 암묵적으로 있는 게 사실입니다. 거기다 장내, 장외의 영남 출신 정치인 혹은 엘리트들이 많이 거론되고 있고요.

프레시안 : 그런 분위기에 대한 반감이 책에서 읽힌다면 무리한 독해입니까? (웃음)

박성민 : 그거야 강준만 교수 본인만 확인해줄 수 있는 질문이라서…. (웃음)

프레시안 : 다음에는 또 흥미로운 책들로 조만간 또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박성민 '정치 컨설팅 민' 대표,강양구 기자(정리)

[최장집칼럼]장위동 봉제공장의 얼굴 없는 생산자들- 경향, 2011-08-22 22:32:35

[최장집칼럼]장위동 봉제공장의 얼굴 없는 생산자들

얼마 전 한 대학 연구소의 ‘중소영세업작업장실태조사’팀 조사원들과 함께 봉제공장들이 밀집해있는 성북구 장위동에 갔다. 줄지어 있는 허름한 건물들에는 2000여개의 작은 봉제공장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건물마다 ‘미싱사, 재단사, 시다 구함’ 같은 구인광고가 붙어있다. 감자탕, 오리탕, 치킨, 호프, 목욕탕, 장위곱창, 김밥나라, 부동산, 미장원, 퀵서비스 같은 어지러운 간판들이 이곳의 풍경을 더 스산하게 한다. 한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대개 6~7명에서 10명 정도라고 할 때, 약 1만5000명 정도가 이 근방에서 일하고 있다. 현재 영세 봉제업 부문에 종사하는 이들 경제활동 집단은, 서울에서만 어림잡아 25만에서 50만명으로 추정되는데 서대문구, 용산구, 성동구, 동대문구, 성북구 등 주로 강북 지역에 산재해 있다. 봉제업은 값싼 노동력 공급을 필수 조건으로 하는 기업의 성격 때문에, 임대료와 전세가 상대적으로 싼 주거지역에 위치하고 그 변화를 따라 이동한다. 따라서 이들 영세 봉제 공장 지역들은 서울의 도심 재개발 내지 뉴타운프로젝트가 미친 공간적 파장을 거의 수학에 가까울 정도로 정확히 보여준다. 마치 파도가 번져 나가듯, 중심부에 가까운 지역에서 변두리 지역으로 이들 기업은 밀려났다. 이곳 장위동도 곧 재개발 계획이 시행되기 때문에 공장들은 포천, 의정부같이 더 바깥쪽으로 옮겨가게 될 것이다.

이들 봉제 공장 노동자 구성은 1960~70년대 초기 산업화로부터 지식기반의 첨단산업이 중심이 된 21세기 후기 산업화 시기에 이르는 기간에도 변화하지 않은 한국 노동시장 구조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 그것은 흡사 저임금 생산직 노동시장 구조의 박물관과 같았다. 이들 봉제업 부문의 노동자들은 전태일의 분신을 통해 오래토록 형상화된 청계천 일대 영세 봉제 공장 노동자와 같은, 1970년대 그 시절의 노동자들이다. 지난 30년 사이 결혼하고 자식을 모두 키운 이후 노동시장에 재진입한 노동자들이다. 이제는 4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에 이르는 중년의 여성 노동자들이 되었는데, 이들이 봉제업 노동력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나머지 노동력은 대개 불법 노동자 신분인 외국인 노동자들이다. 가족노동의 성격이 강한 기업을 운영하면서 노동일을 같이 하는 노동자-고용주들도 많은데, 이들은 주로 남성들이다. 

이번 인터뷰에 응했던 여러 고용주-노동자, 재단사들은 봉제업이 영세 사양사업이기 때문에 비용 압박을 많이 받고 또 노동력 부족으로 불법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세금 문제와 불법 노동자 문제는 그들이 당장 직면하고 있는 공통적인 어려움이고 관심사였다. 그들이 사업자로 등록하지 않고 있는 것은 상당히 의외였다. 사업자 등록을 할 경우 고용, 산재, 건강, 국민연금과 같은 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있겠지만, 그보다 그들은 법의 단속과 공권력을 두려워한다. 이들이 스스로 기꺼이 불법적이기를 선택하는 데는 외국인 노동자 문제도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들에 대한 단속은 경찰 외사과 소관인데, 투망식으로 잡아가기 때문에 일제 단속이 시작된다는 정보가 전달되면 일하던 노동자들은 어디론가 순식간에 사라진다고 한다. 불법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체포돼도 이들 고용주들은 이를 막을 아무 대책이 없다. 

봉제 산업이 적지 않은 고용을 흡수하고 도시 서민가구의 소득에 크게 기여하고 있음에도, 이 부문의 기업주-노동자들은 정부의 공식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세금도 없고, 보험도 없이 공적 제도 밖에 존재하는 얼굴 없는 사회경제적인 집단이다. 그동안 정부의 산업정책 측면에서 봉제 산업은 버려진 산업이 아닐 수 없다. 한편에는 정부가 모든 가용한 정책 지원을 아끼지 않는 성장동력 부문이 존재한다. 다른 한편에는 전체 생산직 노동자의 하층인, 저임금 노동집약적 영세기업 노동자들의 경제활동 영역이 존재한다. 이들은 보이지 않는 노동시장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산업부문에 대해 정부가 방치로 일관하는 동안, 정책 결정자들이 의도한 것이든 혹은 태만에 의한 것이든 이들을 합법적 경제영역 밖으로 방출하는 정책을 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 분야는 한국경제 발전의 어두운 뒷면을 대표하고 있다고 하겠다. 정부의 이러한 배제적 정책에도 봉제 산업이 그동안 존속해 온 것이 이상할 정도이다. 여러 봉제 공장 인터뷰에서 공통적이었던 것은, 그들이 중앙정부이든 지방자치단체이든 정부와 관, 그리고 정치인들에 대해 뿌리 깊은 불신과 냉소적 태도를 가졌다는 점이었다. 이들이 정부에 대해 나타내는 태도랄까 하는 것은 그들의 요구와 의사를 대변해 주고 그들의 이익을 보호해 주는 공적 기관이 아니라, 영세 소기업으로서 약자인 자신들에게 피해를 주는 권력기관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다. 국가권력에 대한 강한 피해 의식은 이들의 마음속 밑바닥을 흐르는 강력한 정조이다. 봉제 공장의 노동자들이 갖는 정부에 대한 이미지는 민주화 이후에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오늘날 봉제 산업의 실태는 그동안 한국 민주주의가 이루어 낸 성과를 가늠하는 하나의 사례로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정당이나 정치인에 대한 태도 역시 그 내용은 다르지만 부정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그저 단순히 자신들과 정치인들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무관한 어떤 존재일 뿐이다.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해 주고 자신들을 위해 유익한 정책을 만들고 실현해 주는 정치, 정치인, 정당 같은 것은 기대하지도 상상하지도 않는 눈치이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그들은 스스로 그들의 이익을 보호하고 정책적 요구를 대변할 자율적 결사체 같은 것이라도 만들어 열악한 상황에 대응하려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사체를 만들어 그들의 문제에 공동으로 대응하거나, 해결하기 위해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고 또 그것을 원하지도 않는다. 

민주주의라면 적어도 이상적 기준에서는 정치 참여의 평등이라는 원리에 힘입어 모든 사회적 이익과 요구들이 표출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이 대표되고 조직됨으로써 그들의 이익들이 정치과정을 통해 부분적으로라도 실현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봉제 공장의 고용주-노동자들은 자율적 결사체의 효능을 경험해 본 적이 없고, 그것을 상상할 수 없고, 그것을 시도할 필요를 느낄 수도 없다. 그것은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 정치과정이 곧 경제력의 크기 내지 시장의 불평등한 효과를 그대로 반영해 온 것의 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거대 이익 내지 큰 사회경제적 힘들이 일방적으로 대표되고 그들이 압도한 결과, 우리 사회의 약한 이익 내지 약한 사회경제적 힘들이 정책에 거는 기대가 만들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민주주의에도 불구하고 영세 봉제 산업의 고용주-노동자들은 공식 제도 바깥에서 생존하기를 선택하는 얼굴 없는 사회경제적 생산자 집단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소리를 내지 않는 집단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다. 

봉제 공장이 밀집한 이 지역에서 정당은 보이지 않는다. 인터뷰에서도 그들은 선거철을 제외하고는 평상시에 정치인들이 공장을 방문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정당과 정치인들도 이들과 의사소통이나 접촉을 시도하지 않는다. 전국적인 정당 차원에서는 물론이고 지역구의 정치인 차원에서도 지역구 내에 있는 이들 사회경제적 인구 집단들의 실태를 조사하고 자기 소리를 내지 못하는 약자들의 소리를 대변하는 역할은, 정치인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업이다. 정당이 사회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것, 정당의 사회적 기반 없이 민주정치는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선거 관련 법률들과 충돌하기 쉽다. 지역 유권자 대중과 항상적인 접촉을 못하게 하는 것이 현 선거 관련 법률의 기본 정신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법과 제도들이 정치 개혁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실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장위동 봉제 공장은 한국 민주주의의 결핍된 조건 나아가 한국 정치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를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살아 있는 현장이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한다.

<최장집 | 고려대 명예교수>


입력 : 2011-08-22 20:00:03수정 : 2011-08-22 22:32:35

노회찬·심상정 “이정희, 진정성 가져라”- 천관율// 시사인 205호,


노회찬·심상정 “이정희, 진정성 가져라”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30일 동안 단식농성을 벌인 노회찬·심상정 진보신당 상임고문을 만났다. 체력이 바닥난 상태에서도 두 사람은 현실 정치와 진보 진영의 미래에 대해 작심한 듯 말을 쏟아냈다.

2011.08.24  08:58:16 
천관율 기자  yul@sisain.co.kr
단식 30일째를 하루 앞둔 8월10일,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만난 노회찬·심상정 진보신당 상임고문은 첫눈에도 몸이 축난 것이 확연했다. 두 사람은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7월13일부터 단식을 이어가고 있다. <시사IN>은 단식 종료를 하루 앞두고 두 사람을 만났다.

노회찬 고문은 간단한 인사말을 건네는 것도 힘겨워했다. 얼굴 근육이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것 같았다. 심상정 고문은 8월 폭염에 길바닥 농성을 이어가면서도 팔 토시를 했다. 몸은 더운데 관절마다 뼈가 시려서 이중으로 고역이라고 했다. 악수하는 손에 힘이 없었다.


  
ⓒ시사IN 윤무영
심상정(왼쪽)·노회찬(오른쪽) 진보신당 고문이 서울 덕수궁앞에서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를 촉구하며 단식농성을 벌였다. 두 사람은 8월11일 각계 요청에 따라 단식을 끝내고 병원에 입원했다.


배가 고프면 몸도 힘들지만 머리도 뜻대로 돌지 않는다. 한 끼 굶어도 그런데, 한 달 단식이다. 질문을 던지면 답이 돌아오기까지 10초쯤 시간이 떴다. 목소리는 너무 작아 녹음이 제대로 될까 싶었다. 뭐가 제일 힘드냐고 물었다. 손꼽히는 달변가 노회찬 고문이 얼굴 근육을 억지로 움직여 한참 만에 대답한다. “말하는 게 제일 힘들다.” 한 시간을 넘기면 안 되겠다 싶었다. 하지만 궁금한 것이 두 가지였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그리고 진보 통합. 마음이 바빴다.


단식이 30일까지 길어지리라 예상했나?

심상정(심)
 :문제가 다 해결될 때까지, 조금 시간은 걸릴 거라고 생각했다.

역대 정치인 단식 사례를 봐도, 일정 시점이 넘어가면 정부에서 반응이 나오기 마련인데?

노회찬(노)
 :정부가 사람을 보내기는 했다. 천막 철거하는 용역 직원하고 경찰을 보내서 문제지. 오히려 우리가 단식 중에 노동부 장관을 만나러 갔다. 장관의 태도가 전경련 용역 같더라.

서울 집중호우 때도 농성장에 있었나?

 :그때도 계속 농성했다. 비에 천막이 무너지더라. 그래서 일단 옆에 있던 민주노총 천막으로 옮겼다. 그리고 우리 천막을 더 튼튼하게 다시 쳤더니, 그 다음엔 그걸 또 철거를 해가더라. 수재민·이재민·철거민을 한 번에 경험했다.

조남호 회장이 8월10일 기자회견을 했다.

:참 실망스럽더라. 문제의 핵심인 부당한 정리해고에 대해 책임을 자인하지 않은 것은 국민 우롱이다. 한진중공업은 내가 금속노조 하면서 교섭 책임자를 해봤기 때문에 잘 안다. 노동현장 전체에서는 삼성이 ‘악질 자본’ 1위였다면, 금속산업에서는 한진이 단연 1위였다. 임금은 동종 업계의 60~70% 수준이고, 노사 합의 안 지키기로 유명했고, 노조 위원장이 두 명이나 죽었다. 제 버릇 어디 못 주고 필리핀에 가서 그 나라 노동자를 죽이고 있지 않나.

진보 진영이 정리해고를 무작정 반대만 하는 것이 옳으냐는 반론도 나오는데?

:IMF 구제금융 당시 정리해고제가 처음 도입된 것은 고통을 분담하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이후 이 제도는 노동자에게 고통을 전담시키는 구실을 했다. 한진중공업만 봐도 정리해고와 배당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이게 무슨 고통 분담인가. IMF 때 기업을 살려야 한다는 국민 공감대가 있었다면, 지금은 고용을 늘려야 한다는 게 시대정신이고 공감대다.

:정리해고 요건인 ‘긴박한 경영상 사유’가 한진중공업에 어디 있었나. 흑자 기업이 돈을 더 벌기 위한 조처로 정리해고를 인정해주는 잘못된 관행을 행정부와 사법부가 그간 방치했다. 사실 정리해고라는 게 회사의 책임을 사회에 전가하는 거다. 지금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는 사람이 94명밖에 안 되는데, 한진중공업이 그 사람들 월급이 부담돼서 이 난리를 하는 게 아니다.

:이게 정리해고의 상징처럼 되어버려서, 지금은 전경련과의 싸움처럼 됐다.

 조남호 회장 청문회에서 밝혀야 할 핵심은?


:첫째는 정리해고의 부당성 문제. 다음은 필리핀 수빅에 조선소를 만든 자금 관련 의혹과 조세 포탈 문제. 이게 핵심이다. 한나라당이 자꾸 김진숙 지도위원이 청문회에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게 조남호 회장 때문에 벌어진 일이지 김 지도위원 때문은 아니지 않나. 3·1 운동이 일제 때문에 일어났지 유관순 때문에 일어났나.

안희정 충남지사는 “정치인은 희망버스를 타선 안 된다”라고 했는데.


:정치와 희망버스를 이분법으로 보는 시각은 문제가 있다. 특히 한진중공업 문제를 개별 노사 문제로 보는 건 안희정 도지사가 노동 문제에 제한된 인식을 드러낸 것 같아 아쉽다. 법과 제도의 잘못에서 비롯된 부당한 정리해고 문제를 정치 문제로 만들어낸 게 시민이고, 당연히 정치가 받아 안아야 하는 문제다.


30분이 지났을까. 두 사람의 목소리에 오히려 힘이 붙기 시작했다. 발음도 정확해지고 반응도 빨라졌다. 기자의 질문 없이도 주거니받거니 계속되기도 했다. 두 사람의 에너지에 도리어 기자가 빨려들어서, 어느새 인터뷰가 치열해졌다.

두 번째 화두. 헛바퀴 도는 진보 통합 논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을까. 두 사람, 여기서 밥 굶고 있어도 정말 괜찮은 걸까. 진보신당이 진보 통합을 대의원대회에서 의결할 수 있다고 보는 관찰자는 많지 않다. 당 통합은 대의원 3분의 2가 동의해야 하는데, 어떤 설득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경 독자파가 3분의 1은 넘는다는 분석이다. 두 사람을 포함한 통합파에게 불리한 국면이다. 진보신당은 8월 당대회에서 이 문제를 다룬다.

8월 당대회에서 통합안이 통과될 수 있을까?

:회의적 시각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특히나 이 중요한 시기에 국민참여당 문제로 두 달을 허비해서 더 그렇다. 지금이라도 민주노동당에서 책임 있고 진정성 있는 태도를 보인다면 충분히 통합이 가능하다.

참여당 유시민 대표는 진보 통합 연석회의의 5·31 합의문을 받아들이겠다고 공언하는데?

:5·31 합의는 계속 같이 하다가 잠시 떨어진 사람들이 다시 함께하는 데 필요한 걸 정리한 합의다. 한 번도 함께해보지 않고, 때로 대립하던 사람이 같이 하자고 끼는 건 다른 얘기다. 예를 들어 강정마을 해군기지 투쟁을 두고 우리는 민노당과 할 얘기가 없다. 그냥 같이 싸우면 되지. 그러나 참여당은 자신들이 집권할 때 만든 문제니까, 먼저 서로 얘기를 해봐야 한다. 이런 게 한두 개가 아니다. 참여당과 함께하는 문제는 진보 정당의 외연 확장 차원에서 다룰 수는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는 역사를 공유하는 통합 진보 정당을 만들고 난 후에, 그 통합 정당 안에서 논의할 일이다. 처음부터 대통합하자고 두 단계를 섞으면 죽도 밥도 안 된다.

:원래 진보대통합은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통합을 토대로 해서 최대한 진보 정치력을 모아내자는 기획이었다. 그러므로 다른 세력의 참여 역시 양자의 논의를 바탕으로 판단할 문제다. 그런데 갑자기 이정희 대표가 혼자 나서서 참여당 문제를 전면화하는 게 옳은가. 이는 패권적 태도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 참여당이 통합 대상인지 연대 대상인지는 통합 진보 정당 내에서 따질 일이지, 이정희 대표의 판단이 그렇다고 해서 강요하는 건 진보 대통합으로 가는 길에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유시민 대표는 진보 정당을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도 그가 진보가 아니라고 규정하는 것은, 진보라는 이름을 독점하려는 태도는 아닌가?

:정치라는 게 말이 아니라 실천과 결과로 책임지는 것 아닌가. 말은 국민이 신뢰하지 않는다. 권력을 가졌을 때 실망을 준 것을 말로 상쇄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정치에 대해서 진지하지 않은 것 같다. 물론 생각이 바뀔 수 있다. 존중한다. 그러니까 공동 실천도 해 보고 과거를 상쇄하고 신뢰를 쌓을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나가자는 것이다.

:이를테면 지금은 정동영 의원이 오히려 진보 정치인이다. 늘 최전선에 있다.

그렇다면 예를 들어, 정동영 의원이 진보 정당에 함께하겠다고 한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

:정 의원은 부담을 감수해가면서 몇 년째 몸으로 실천해 보이잖는가. 그런 차이다. 검증은 우리가 하는 게 아니고, 진보 정치인을 지지하는 대중의 판단이 중요한 거 아닌가. 그런 분들이 유시민 대표에 대해서 얘기할 때도 “정동영을 봐라”라는 이야기 많이 한다.

민노당 이정희 대표가 통합 논의에 임하는 태도는 어떻게 평가하나.

:진보 통합은 한 개인의 성향·취향·선호도 때문에 바뀔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주어진 과제다. 이정희 대표가 개인의 판단보다 이 논의의 역사적 맥락을 고려해줬으면 한다.

:이 대표가 진보 대통합에 대해서 좀 더 정성껏 임해야 한다. 유시민 대표와 출판기념회를 열면서 사적 행보라고 해명하는데, 당 대표의 출판기념회는 가장 고도의 정치행위다. 진보 대통합이 역사성을 통합하는 과정이라는 깊이 있는 성찰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 역사성이 공유가 안 되는 것 같아 아쉽다.

안희정, 정동영, 유시민, 이정희…. 인물평이 거침없다. 30일 단식을 정리하는 인터뷰여서 작심을 했던 걸까. 두 사람은 2012년 대선을 두고도, ‘반드시 독자 완주를 하겠다’는 태도 대신 ‘1대1 구도를 만들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심 고문은 장기적으로 양당제로 가야 한다는 취지의 말도 했다. 하나같이 진보 진영에 미묘한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 발언이다.

민노당 얘기를 들어보면, 진보신당이 8월 당대회에서 통합을 의결하지 못하면 어쩔 수 없이 참여당과 통합 논의를 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8월 의결이 그만큼 중요하니까, 지금처럼 일을 어렵게 만드는 행보를 하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지금처럼 참여당 문제를 진보신당과 병렬적으로 하면 통합은 더 어려워진다.

8월에 통합안이 부결되면, 어떤 선택을 할 건가.

:우리는 통과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경우의 수를 따져 거취를 미리 정하지 않는다.

야 4당이 통합 논의와 연대 논의를 병행하고 있다. 2012년 총선에서, 개혁·진보 진영이 몇 개 정당으로 나서야 한다고 보나?

:여론조사에서 절반 이상이 야권 연대를 지지하지만 정당을 뒤섞는 건 반대한다. 당장 한나라당을 꺾어야 하지만, 또한 한국 정치가 장기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의지를 동시에 표한 것이다. 정치 혁신의 중심이 될 진보 정치를 함몰시키는 것은 국민의 요구가 아니다.

:우리나라가 대통령 중심제 소선거구제인데, 이건 양당제가 나오기 쉬운 구조다. 하지만 20년째 다당제를 하고 있다. 정책이 아닌 지역 중심으로 형성된 두 당의 한계 때문에 빈자리가 생긴 거고, 그래서 다당제가 국민이 선택한 한국의 정치 현실이라고 본다. 다만 이명박 정부를 겪으면서, 한나라당을 꺾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1대1 구도를 만들어 와라, 방법은 너희가 알아서 해라, 이게 국민의 뜻이라고 본다.

:나는 한국 정치가 궁극적으로 삼정립(보수·자유주의·진보 3당 체제)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진보 대 보수 대결구도로 전환해가는 교두보로서, 과도적으로 삼정립을 얘기하는 것이다.

‘어떻게든 1대1 구도’라는 국민의 요구는 대선도 마찬가지라고 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충분히 국민의 뜻을 이해하고 있다.

진보 통합에 대한 질문을 할 때는 도저히 한 달을 굶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두 사람의 건강을 고려해 인터뷰 시간을 조절해야 한다는 생각은 둘의 에너지에 떠밀려 떠올릴 겨를이 없었다. 녹음기를 끄자, 두 사람은 그제야 힘든 티를 냈다. 노 고문은 심 고문에 대해 “생각보다 너무 건강하다”라고 앓는 소리를 했고, 심 고문은 노 고문을 “너무 부지런해서 같이 싸우기 피곤하다”라고 구박했다. 이튿날인 8월11일, 두 사람은 단식을 중단하고 병원으로 갔다.

미국 경제, 도대체 얼마나 위기일까?- 이종태// 시사인 205호, 2011-08-22, 08:41:51


미국 경제, 도대체 얼마나 위기일까?
미국 경제의 지휘부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마저 두 손을 들었다. 기껏 내놓은 정책이 금융 엘리트들의 배만 불리는 통화정책을 그대로 추진하는 것이다.
[205호] 2011년 08월 22일 08:41:51이종태 기자  peeker@sisain.co.kr
8월 둘째 주 미국 주식시장은 세계 금융위기가 본격화하던 2008년 11월의 데자뷔다. 정상적 시장이라면 있을 수 없는 폭등과 폭락이 하루 간격으로 되풀이되고 있다.

국제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미국 신용등급을 한 계단 내린(8월5일) 뒤 첫 개장일인 8월8일, 미국 다우존스는 634.76포인트나 떨어졌다. 그러나 8월9일에는 429.29포인트 올랐고, 다음 날엔 519.83포인트 내렸다. 8월10일의 폭등 규모는 423.37포인트다. 다우지수에서 400포인트 이상 규모의 등락이 번갈아가며 3일 이상 잇따른 것은 2008년 11월 이후 처음이다. S&P500이나 나스닥 등 다른 주요 지수도 동일한 궤도를 나타내고 있다. 주가 변동이 이처럼 심하다는 것 자체가 (오르고 내림에 상관없이) 주식시장의 리스크가 그만큼 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주식시장의 폭·등락과 함께 미국 국채(재무부 채권) 가격은 8월 둘째 주 들어 일관되게 오르고 있다. 10년 만기 국채의 경우, 8월9일 한때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런데 일반 주식과 달리 미국 국채 가격의 지속적 상승은 글로벌 금융시장이 매우 불안할 때 발생하는 사건이다. 미국채는 초강대국인 미국 정부가 발행하는 채권인 만큼 적어도 원금과 이자가 보장되는 ‘무위험(risk-free) 증권’으로 간주된다(<시사IN> 제204호 참조). 그래서 투자자가 미국채로 몰리는 것은 다른 증권(다른 나라 국채·주식·회사채·파생상품 등)이 그만큼 불안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미국채는 일종의 ‘최후 보루’인 것이다.


미국 국채가 ‘위험 자산’ 되면 재앙


최근 미국 국채 상승의 원인 중 하나는 프랑스의 국가 신용등급이 최우량(AAA)에서 한 계단 낮춰진다는 소문이다. 미국 투자은행 모건스탠리의 채권 부문 애널리스트인 조너선 메리모어는 금융 전문지 <마켓워치> 인터뷰에서 “유럽 재정위기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투자자들이 자산 가치를 보전할 피난처를 찾으면서 미국 국채 수요가 크게 늘어나리라 보인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미국 국채가 안전자산으로 믿어지는 한 세계 금융질서의 틀은 그럭저럭 유지될 수 있다. 한국·중국·일본 등 동북아 국가들은 외환보유고 중 2조 달러 이상을 미국 국채로 가지고 있다. 미국 국채가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신뢰를 유지한다면, 그래서 지금처럼 금융 변동성이 큰 시기에 오히려 가격이 오른다면 동북아 국가들의 ‘재산’ 가치는 보존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최후 보루’마저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8월5일 S&P의 미국 신용등급 강등이 그것이다. 무디스는 미국의 최우량 등급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그러나 ‘부정적 전망’은 철회하지 않았다. 재정 적자가 획기적으로 감축되지 않고 이를 둘러싼 미국 정치권의 내홍이 진정되지 않을 경우, 향후 1~2년 내에 미국 신용등급을 내릴 수 있다는 이야기다.


  
ⓒAP Photo
국제 신용평가사 S&P가 신용등급을 강등한 이후 미국 증시는 급등과 급락을 반복하고 있다. 이는 주식시장의 리스크가 커졌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불황기의 정부 지출 삭감은 결코 쉽지 않다. 재정 삭감을 둘러싼 민주당·공화당 간 갈등도 수그러들지 않으리라 점쳐진다(22~24쪽 딸린 기사 참조). 이런 사태가 중첩되면서 무디스나 피치가 미국 신용등급을 내리고, 이에 따라 시장이 점점 더 미국 국채를 더 이상 ‘무위험 자산’이 아니라고 믿게 되는 것이 정말 두려운 사태다. 지금까지 글로벌 금융 질서의 심판 혹은 ‘규칙 그 자체’였던 미국 국채가 일반적인 ‘위험 자산’으로 여겨지게 되는 그날, ‘금융 아마겟돈’은 발발할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 정치권이 재정 적자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결단을 내리면 어떨까. 시민들과 정치권·신용평가사들이 모두 기뻐하고, 미국 신용등급 회복으로 금융시장이 정상화되는 행복한 시나리오가 실현될 수 있을까.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재정 적자 감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로 인해 복지 서비스는 물론 경기 촉진 수단까지 제거되고 국민경제의 침체와 사회불안으로 이어져 신용등급이 하락하는 경로도 가능하다. 더욱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 상황을 보면 재정 적자 정책의 포기가 미국 경제에 어떤 타격을 줄 것인지 명확해진다.


팽창적 통화정책이 실패한 이유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미국(과 다른 나라 정부들)은 공황을 막기 위해 두 가지 무기를 사용했다. 하나는 ‘팽창적 통화정책’이다. 한마디로 돈의 가격(이자)을 낮춘다는 이야기로, 금융기관이 싼 비용으로 많은 돈을 빌려 시중에 많이 풀게 하는 것이 기본 의도다. 이를 위해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연준)는 기준금리인 연방기금 금리를 2008년 12월부터 0~0.25% 수준으로 낮췄다.


  


이에 더해 ‘돈 그 자체의 규모’도 크게 늘렸다. 지금까지 두 차례에 걸친 ‘양적 완화’(Quantitative Easing)가 그것이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연준이 2조 이상의 달러화를 찍어 미국 재무부를 통해 시중에 뿌렸다고 이해하면 된다. 자동차가 석유로 움직인다면, 금융시장은 돈으로 움직인다. 돈의 물리적 규모를 늘리고, 금융기관이 낮은 금리로 싸게 이용할 수 있게 한 것이 팽창적 통화정책의 핵심이다. 그런데 이런 통화정책은 일단 실패한 것으로 평가된다. 풀린 돈이 금융기관으로 전달되었을 뿐 실물경제로 흘러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불황에 대처하기 위한 또 한 가지 수단은 재정 적자다. 통화정책에서는 정부가 돈을 풀 수는 있으나 그 돈의 사용처에까지 개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재정정책은 조금 더 직접적이다. 오바마 행정부의 경우, 빚을 내서 청정에너지 등 신산업과 인프라에 투자하고 실업·교육 등 복지 서비스도 확장하려 했다. 이렇게 해야 돈이 실물경제에 전달된다. 통화정책이 무용한 상황에서 적자 재정을 포기하는 것은 그나마 미국의 실물경제를 버텨온 유효한 정책 수단을 폐기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오바마 정부는 부채 한도 협상에서 2조4000억 달러 규모의 재정 적자 감축에 합의한 상태다.

그렇다면 팽창적 통화정책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일까. 시중에 풀린 많은 돈이 실물경제로 전달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역설적으로 0%에 가까운 기준금리 때문이었다. 은행 처지에서 기준금리가 0%라는 것은 사실상 ‘공짜’로 돈을 빌릴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 돈을 굳이 위험한 ‘대출 영업’에 사용할 이유가 없었다. 훨씬 안전한 사업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미국 국채에 대한 투자다.


  
ⓒReuter=Newsis
미국의 재정 적자 축소는 일자리 환경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다. 위는 로스앤젤레스의 취업박람회장을 찾은 구직자들.


미국채는 금리가 매우 낮은 편이다. 10년 이상의 장기 국채는 3%, 단기는 2% 정도. 그러나 많은 돈을 공짜로 빌려 국채에 투자하면 큰 수익을 올릴 수 있다. 박리다매(薄利多賣). 혹은 사실상 0%인 기준금리로 자금을 조달해 미국채를 사고, 이 미국채를 다시 담보로 돈을 빌려 주식이나 파생상품에 투자하는 기법도 동원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상업은행의 준비금(Reserve Holdings:예금 등 부채 지급을 위해 은행 내부에 유보하는 현금성 자산)도 엄청나게 늘었다.

미국 상업은행들의 준비금은 2007년에 200억 달러 정도였는데 2011년에는 1조4000억 달러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팽창적 통화정책으로 풀린 돈은 미국 금융권 내에서 순환하며 주가를 올리고 금융 엘리트들의 배만 불린 것이다.


연준은 미국 경제 포기했나

이와 대조적으로 시중에는 돈이 말랐다. 연준의 자금흐름 계정(Flow of Funds Accounts)에 따르면, 미국의 ‘비법인 업체(Non Cor–porate Business)’가 은행에서 대출한 돈이 2007년에는 5260억 달러였다. 그런데 2009년에는 대출은커녕 3460억 달러를 상환한 것으로 나타난다. 2011년 8월 현재도 수백억 달러를 상환만 하고 있다. ‘비법인 업체’는 주식회사나 유한회사가 아니라 주로 서민경제에 관련된 작은 기업이나 자영업체다. 이 부문의 경제 주체들은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기는커녕 상환 독촉에 시달렸던 것이다. 이러니 일자리가 늘어날 수 없고 서민 생활이 개선될 리 없었다.

이런 실패는 연준도 인정한다. 그동안 연준은 애써 미국 경제에 대한 긍정적 시각을 유지해왔다. 지난 5월부터 경기가 다시 침체되기 시작했으나 이 또한 ‘경기 회복으로 가는 도정에서 나타나는 일시적 둔화’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8월9일 열린 연방공개시장위원회에서 연준은 태도를 완전히 바꿨다. 성명서에서 연준은 “올해 들어 지금까지의 경제성장은 위원회가 기대했던 것보다 낮았다”라고 토로했다. “경제지표들은 최근 몇 달 동안 전체 노동시장 환경이 악화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실업률은 증가했다. 가계지출은 침체되었고, 사업용 구조물에 대한 투자도 여전히 약하다. 주택 부문도 침체되어 있는 상태다.” 이후 전망도 밝지 않다. “미국 경제는 (위원회가) 이전에 예측했던 것보다 더 늦게 회복될 것으로 본다. 실업률도 (예측보다) 서서히 개선될 것이다.” 연준은 자신의 소관 업무인 통화정책이 사실상 실패했다고 자백한 것이다.


  
ⓒAP Photo
의회 청문회에 출석한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위원회 위원장.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향후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연준은 “적어도 오는 2013년 중반까지는 0~0.25%의 금리를 유지하겠다”라고 약속했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은행들이 공짜로 돈을 빌릴 수 있도록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구체적 시기까지 특정해서 어느 날 갑자기 새로운 비용(기준금리 인상으로 인한 은행의 이자 부담)이 발생할 리스크로부터 월스트리트를 해방시켰다. 이에 더해 세 번째 양적 완화까지 슬며시 암시했다. 돈도 주고 이자도 현재의 0% 수준 그대로 유지할 터이니 마음 놓고 장사하라는 뜻이다.


불황이 심화될 수 있는 시기, 연준은 시장에 뭔가 충격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시장도 연준만 애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이미 기준금리가 0%에 가깝기에 이자율을 더 내릴 수는 없다. 양적 완화도 두 번이나 실시했지만, 그 효과는 마약처럼 시한부로만 시장의 활력을 유지시킬 뿐이었다. 그래서 기껏 ‘새로운’ 조처로 내놓은 것이 ‘2013년 중반’이라는 시한이다. 물론 이것만으로도 효과는 있었다. 8월9일 미국 증시는 폭등했다. 그러나 연준은 이렇게 풀린 돈이 실물경제와 서민에게 흘러갈 수 있는 방안은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 일자리 문제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 사실상 스스로도 실패했다고 인정한 정책을 계속 수행한다며 금융자본의 이익만은 보장하기로 한 것이다.

오펜하이머 펀드의 제리 위브먼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마켓워치> 인터뷰에서 “경제 주체들이 돈에 대한 문제를 느낀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돈은 지금도 엄청나게 공급되고 있으며 싸게 빌릴 수 있다”라며 연준을 비판했다. 연준이 8월9일 실제로 한 일은 사실상 ‘경제 상황이 앞으로도 좋지 않을 것’이며 지금까지 해온 것 이외에는 ‘어떤 시도도 자제하겠다’는 고백에 불과하다. 물론 연준 의장이 공식 석상에서 슬쩍 이런저런 말을 흘려 시장을 움직이려는 신비주의 전략은 계속되겠지만 이 정도로 미국 경제의 하강을 멈출 수는 없을 것이다.


미국의 위기에서 전 세계의 위기로


현재까지 나타난 상황으로 미루어보면, 적어도 단기적으로 미국 경제의 침체는 명약관화하다. 정부 주도 사업이 축소되고 이 부문 노동자들이 거리로 쫓겨날 것이다. 더욱이 실업보험 등 사회안전 프로그램이 축소된다. 소비지수는 더욱 낮아질 것이다. 이에 더해 오바마 행정부가 야심만만하게 추진해온 신산업 투자도 순조롭지 않을 것이다.

통화 팽창은 계속되겠지만 그 혜택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미국 금융 엘리트에게만 집중될 것이다. 그리고 금융자본에 유리한 저금리 환경과 세 번째 양적 완화는 대외적으로 달러화 가치를 더욱 내려 기축통화 지위를 타격할 것이다. 달러 가치 절하는 미국 수출 대기업에게는 매우 유리한 영업 환경을 제공하겠지만, 이는 국제무역 경쟁을 격화시켜 수출 주도 시스템인 동아시아를 압박할 것이다. 경쟁적 통화가치 절하가 전 지구적으로 성행할 수도 있다. 미국 국채 신뢰가 더욱 떨어져 ‘금융 아마겟돈’으로 몰아갈 수도 있다. 최근 미국 증시의 불안한 행보는 이런 염려를 반영한 것이다.

재정 적자 정책 더 이상 힘 못 쓴다- 이종태// 시사인 205호, [205호] 2011.08.22 08:58:27


재정 적자 정책 더 이상 힘 못 쓴다
[205호] 2011.08.22  08:58:27
이종태 기자  peeker@sisain.co.kr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세계경제가 지금까지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각국의 재정 적자 정책이다. 불황기에는 기업 이윤이 줄고 실업자도 많아지기 때문에 세수(정부 수입)를 축소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부가 사용해야 할 돈(실업보험 등 복지급여, 경제 활성화를 위한 투자 등)은 오히려 늘어난다. 그래서 국채 발행 등으로 빚을 내 민간 부문에 투입하면서 재정 적자를 발생시키게 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경제가 살아나면 세수가 늘어 불황기에 진 정부 부채를 갚을 수 있다.

그러나 부채를 통한 정부 지출은 경기를 부양할 수 없다는 것이, 세계 경제학계의 주류인 신고전학파의 주장이다. 대표 논객으로는 하버드 대학 로버트 배로 교수가 있다. 그에 따르면 정부가 빚을 내는 경우, 가계와 기업은 미래의 세금 부담(정부 부채를 상환할)이 커질 것으로 예상한다. 그리고 세금 부담이 늘어나는 만큼 현재의 소비(가계)와 투자(기업)를 줄인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정부가 재정 적자 정책으로 돈을 뿌려봤자, 민간이 그만큼 지출을 줄이기 때문에 실질적인 경기부양 효과는 사라져버린다. 쓸데없이 개인들의 자립심만 해치고 정부의 빚만 늘릴 뿐이다. 재정 적자 정책이야말로 그냥 놔두면 알아서 잘 돌아갈 시장을 망치는 포퓰리즘인 것이다.


  
신고전학파의 대표 논객인 로버트 배로 하버드 대학 교수.
그런데 현실 세계의 가계와 기업이 배로 교수의 주장처럼 움직이는지는 미지수다. 실업급여를 받았을 때 ‘이 돈은 정부가 부채로 마련한 것이고 3년 뒤의 소득세가 100만원 상당 늘어날 것이므로 그만큼 소비를 줄이자’고 결심하는 노동자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이론이 각국의 복지 및 각종 경기부양 정책을 공격하는 보수주의의 위력적 무기가 된 것은 사실이다. 예컨대 올해 들어 ‘재정 적자 폐기’(재정 긴축)는 거의 모든 산업국가에서 가장 핵심적인 정치 의제로 떠올랐다. 심지어 미국 공화당의 매파들은 이번 정부 부채 상한 협상에서 디폴트 위기를 무릅쓰면서까지 큰 폭의 재정 긴축과 증세 반대를 고집했다. 민주당도 재정 긴축이라는 ‘시대정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래서 이 협상에서 공공사업이나 복지급여 확대 등 재정 적자와 관련된 제안들은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에서도 거의 터부시되었다.

그러나 미국보다 앞서 불황기의 재정 긴축을 강행한 영국·이스라엘 등은 경제실적이 크게 개선되지 못했다. 심지어 대규모 시위나 폭동까지 일어나는 상황이다. 미국 역시 앞으로 정부 지출을 줄일 수밖에 없는데 이로 인한 대규모 실업, 소비지출 하락, 복지 혜택 축소, 사회 갈등의 심화 따위 문제가 불거질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