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9-02

[아침 햇발] ‘장자연 사건’ 끝나지 않았다 / 정재권

별다른 파장을 낳지 못했지만, 눈길을 끄는 기사가 지난 7월호 에 실렸다. 제목은 '고 장자연 사건 수사 비화'. 지난 3월 (SBS)가 해프닝으로 일단락된 장씨의 '자필 편지'를 보도하면서 다시 불거진 장씨의 술접대 및 성 상납 강요 의혹 수사에 대한 취재 기록이다. '비화'라는 표현에 걸맞게 이 기사엔 의혹의 본령을 치고 들어가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팩트'(사실)가 있다. 기사의 요지는 이렇다.

"장씨가 숨지기 전 여러 사람한테서 금전적 도움을 받은 사실이 경찰 수사에서 드러났다. 장씨 그리고 가까운 주변사람 계좌에 정체불명의 100만원 이상 고액권 수표가 입금됐다. 이 수표들은 장씨가 숨지기 4~5개월 전인 2008년 10~11월까지 계좌에 들어오고 나갔다. 경찰은 고액권 수표의 주인 20~30명을 상대로 경위 조사를 벌였다. 구체적인 명단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기업체 대표나 임원이 많았다. 이들은 경찰 조사에서 '우연히 알게 됐는데 불쌍해서 돈을 줬다' '고마워서 차비로 줬다' '골프장에서 우연히 안 뒤 생활이 어려워 그냥 줬다' 등의 해명을 했다. 경찰은 수표거래 과정에서 범죄 혐의 관련 증거가 나오지 않아 이들을 처벌 대상에 올릴 수 없었다고 한다."

흠칫했다. 장씨 사건이 터진 2009년 3월 이후 언론 취재와 경찰 발표 등에서 고액 수표 얘기는 나온 적이 없었다. 고액 수표가 사실이라면, 장씨 사건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는 핵심 고리다. '힘없는' 여성 연예인이 강요를 받고 '힘 있는' 남성들의 접대 수단이 된 비정상적 권력관계가 사건의 본질이고, 고액 수표는 이를 입증할 중요한 단서이기 때문이다.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경찰 관계자 등을 직간접으로 접촉했다. 예상했던 대로 대개 "골치 아프게 다 지난 일을 들쑤시느냐"며 언급을 피했다. 그러곤 "제발 묻지 말라"고 하소연했다. 하지만 한 관계자의 입에서 결정적인 말이 나왔다. "사실이다. 수표가 나와 다 추적했다. 하지만 수표 주인들이 한결같이 접대 관련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도리가 없었다." 고액 수표는 실제로 있었던 것이다.

거짓을 말하기 힘든 법정에서 수사 당사자를 캐물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무산됐다. 지난 29일 서울중앙지법에선 이종걸 민주당 의원의 명예훼손 소송 재판이 열렸다. 이 의원은 2009년 국회 대정부질문 등을 통해 '장자연 리스트'를 인용하며 장씨가 고위층을 접대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가 기소된 상태다. 이날 재판에는 조선일보 고위층을 수사한 당시 경기지방경찰청 간부가 검찰 쪽 증인으로 나올 예정이었으나 출석하지 않았다. 변호인 등이 고액 수표에 대해 추궁할 자리가 사라진 것은 아쉬운 일이다.

고액 수표는 얼마나 나왔을까? 주인은 누구일까? 왜 경찰은 수표 주인을 수사하고 발표하지 않았을까? 상식의 눈높이에서 궁금증이 꼬리를 문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경찰의 말대로 수표가 건네진 이유를 확인하기가 어려웠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수표의 존재 자체를 숨긴 경찰의 태도는 아무래도 미심쩍다. 혹시 경찰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도 애써 모른체하거나 스스로 뚜껑을 닫은 것이라면 그것은 명백한 직무유기다.

그래서 19일부터 시작되는 국회 국정감사가 기다려진다. 경찰청 국감에서 조현오 청장을 상대로 수표의 진실을 캐물어야 한다. '피해자는 있되 가해자는 없는 사건'의 가해자를 찾아야 한다. 마침 조 청장은 당시 경기경찰청장으로 수사 상황을 보고받은 당사자다. 장자연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jj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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