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삼성특검은 용두사미로 끝났다. 2007년 10월30일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 이후 여론이 들끓자 2008년 1월10일 특검이 출범했지만 특검활동 105일동안 삼성의 비자금 조성과 정관계 불법로비 의혹은 제대로 살피지도 못했다. 삼성의 불법 경영권 승계 과정에 이건희 회장의 지시가 있었다는 것만 일부 확인됐을 뿐이다. 이유는 "증거 불충분."
특검은 왜 증거를 찾지 못했을까. 여기에는 삼성의 조직적인 증거 은폐가 크게 한몫했다. 특검이 출범하기까지 오래 걸렸고 삼성 본사 압수수색을 하기까지도 시일이 너무 오래 걸렸다. 2007년 11월 30일 검찰 특별감찰·수사본부(특본)의 삼성증권 압수수색 이후 45일이나 지난 시점에 특검은 삼성 본사를 압수수색했다. 그 사이 삼성은 수 많은 증거 서류들을 폐기할 수 있었다.
2008년 1월 삼성의 '보안지침'이 한 차례 언론을 통해 공개된 바 있다. 이 보안지침에는 △2001년 이전 작성 문서 △시민단체·관청·구조조정본부·자회사·관계사 관련 자료 △구조본이 실시한 경영진단 문서 등을 모두 폐기하라고 돼 있다. 지침에는 '개인 통장은 회사에 두지 말고, 공무원한테서 받은 명함은 즉시 폐기하라', '임원은 부장을, 부장은 차·과장을 점검해 실행 여부를 보고하라'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는 지난 달 25일 증거 폐기 작업에 동원된 한 삼성의 한 직원으로부터 삼성이 당시 어떻게 증거서류들을 폐기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정황을 들을 수 있었다. 삼성 특검 당시 "삼성이 증거서류들을 폐기하고 있다"는 삼성 직원의 증언이 간접적으로 언론에 전해진 적은 있지만 직접 언론사와 인터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삼성이 얼마나 광범위한 증거 은폐에 나섰는지 살펴볼 수 있는 증언이라고 판단해 이 직원과의 인터뷰 내용을 소개한다. 이 직원은 문서 폐기에 동참하고 특검 압수수색 현장을 가까이서 목격했다. 이 직원은 "애초부터 증거불충분 결과가 나올 수 밖에 없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삼성에 노조가 없기 때문에 이런 증거 은폐가 가능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쓰레기 차로 3대나 됐어요. 전 직원이 동원돼 쓸 데 없는 것까지 정말 다 버렸어요."
이 직원은 삼성이 증거인멸을 위해 폐기한 자료의 양을 '쓰레기 차 3대'라고 표현했다. 그는 "특검의 삼성 본사 압수수색 일주일 전부터 매일 엄청난 양의 서류를 버렸다. 워낙 양이 많아서 타 부서에까지 투입돼 서류를 폐기했고 쓰레기차로 3대 분량을 폐기했다"고 말했다.
다음은 이 직원과 나눈 일문일답. 인터뷰에 응한 이 직원은 현재도 근무하고 있어 그의 이름과 직책 등은 밝히지 않는다.
-당시 증거 인멸을 위해 버린 서류가 얼마나 되었나?
"쓰레기차로 3대가 나갔다. 특검이 본사 압수수색 하러 온 날 아침 쓰레기차 3대가 나가는 것을 직접 봤다. 정말 왜 이렇게 많이 버리나 했는데 전 직원이 참여해 버린 거였다. "
-주로 어떤 것들을 버렸나?
"직원들마다 버린 서류들이 다 다르고 나도 구체적인 건 잘 모른다. 주식 관련 서류들을 많이 버린 것은 확실하다. 이건 말 하면 안되는 건데 (한참 고민하다가) 도청 의뢰 받았던 서류들도 버렸다."
-서류 폐기를 하루 종일 했나?
"본사 압수수색 일주일전부터 매일 엄청난 양의 서류를 버렸다. 정말 사소한 서류까지 다 버렸다. 워낙 양이 많아서 내가 근무하지도 않은 타 부서에까지 투입돼 서류를 폐기했다. 그걸 모두 처리하느라 매일 밤 11시에서 12시 사이에 퇴근해야 했다. 그 서류들을 폐기할 때 종이 자료의 클립과 스테이플러 등을 빼느라 내 손이 멀쩡한 날이 없었다. 서류들은 모두 파쇄기에 넣어 분쇄했다."
-특검이 압수수색하러 올 거라고 미리 통보를 받았나?
"몇일 전부터 사내 인터넷망에 '며칠부터 며칠까지 사내 보안이 강화될 거다'는 공지를 받았다. 직접적인 일정을 공지한 것은 아니지만 직원들은 압수수색과 관련 있는 공지로 해석했다. 2008년 1월15일 특검이 본사 압수수색 들어온 날. 늘 나보다 늦게 출근하는 임원이 유난히 일찍 출근해 있더라. 분위기가 이상했다. 아침 회의 때는 한 간부가 '검찰이 올라오고 있으니까 아직 치우지 못한 것들 마저 치우고 평범하게 일하던 척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나."
-특검이 압수수색 하러 왔을 때 현장에 있었나?
"그렇다."
-어땠나?
"파란 종이 박스를 들고 오더라. 직원들이 다 비웃었다. '저 안에는 쓰레기만 들어갈거야. 진짜 거는 다 나갔어. 바보야. 다 짜놓고 왜들 그래.' 우리끼리 뒤에서 그렇게 말했다.
-따로 위장한 건 없었나?
"그날 바닥 공사하는 것처럼 일부러 연출을 했다. 문서들을 많이 버렸는데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보이면 안되지 않나. 그래서 사무실의 바닥재를 걷어 내고 책상들 다 빼서 깨끗하게 해놓고 그랬다."
(실제 특검은 비밀금고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던 삼성화재 본사 22층 끝 방에서 삼성이 없던 벽을 새로 만든 흔적을 발견하기도 했다.)
-특검 수사관들이 뭐라던가?
"그날 우리가 '안녕하세요' 인사하니까 웃고 말더라. 그냥 웃으면서 우리가 내어놓는 것들만 조용히 하나하나 담더라. 근데 모두 쓰레기들뿐이었다. 압수수색 들어왔던 날은 정말 아무 것도 없는 상태였다. 애초부터 특검수사 결과는 증거 불충분으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삼성이 앞으로 어떻게 되었으면 하나.
"'돈 많이 줄테니까 대신 조용히 있어.' 이런 요구는 정말 바뀌어야 한다. 이건 등 뒤에 칼을 들이댄 채로 '이건 칼이 아니라 금이야'라고 하는 경우다."
-삼성이 바뀔까.
"글쎄…. 희망이 잘 안보여서 회사를 그만 둬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양심에 찔려서 더 이상 회사를 못다니겠다. 언론이 중요하다. 정말 객관적으로 삼성 문제를 다루는 언론이 필요하다."
삼성그룹은 이 직원의 증언에 대해 "보존 기한이 다 된 서류는 주기적으로 폐기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인터뷰 에 응한 삼성 직원은 "보존 기한이 지난 서류를 폐기하라는 업무지시는 받은 적이 없다. 거짓 해명이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또 삼성그룹은 "특검이 미리 압수수색 일정을 알려준 적 없다"고 해명했다.
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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